[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http://www.ilbe.com/1990768533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http://www.ilbe.com/2041803634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http://www.ilbe.com/2163761455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4탄. 신라판 300인 굴산성 전투와 핏골전투

http://www.ilbe.com/2177508239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5탄. 백제의 영웅왕, 구천에서 지다.

http://www.ilbe.com/218209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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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탄 마지막편. 백골산 전투, 삼한의 판도를 바꾸다.

http://www.ilbe.com/2187510797



[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2-1탄. 마지막 백제 부흥기의 서막 - 무왕의 등극과 신라의 남방진출

http://www.ilbe.com/2684290733









오래간만에 다시 연재해 본다...ㅋ;


요즘 도는 신종플루 조심해라 밀게이들아


신종플루 확진 받고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아무짓도 하지 말라길래, 시간이 나서 후딱 아막성 전투편을 마무리 지어야 되겠盧...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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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신라가 565년 대야주 설치 이후 가야 지역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現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의 운봉고원 지역까지 진출하여 소백산맥을 방벽으로 삼아 전선을 형성하였던 과정을 무왕 등극과 관련해서 아주 장황하게 서술해봤어ㅇㅇ


이번편에서는 아주 잠깐의 소강상태를 깨트리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서기 602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고 난 뒤, 전투의 발발원인에 대해서 심도있게 분석해보자ㅋ





















아막성 전투의 발발 및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장이였던 남원,운봉 지역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에 남원, 운봉 일대의 지리적 환경과 양 지역 간의 교통로에 대해 살펴보고, 6세기 후반에 국경을 접하게 된 신라와 백제 양국이 어떻게 대치양상을 벌이고 있었으며, 신라와 백제 양국에 있어서 남원, 운봉 지역의 중요성이 어떠하였는지 파악해 보는걸로 첫단추를 끼어보도록 하자ㅋ






現 행정구역상 남원시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크게 두개의 지역권으로 나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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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남원시가지를 중심으로한 해발 200~250m 내외의 서부 지역권으로, 섬진강의 대표적인 지류인 요천이 본류에 합류하는 남원시 주생면,금지면,송동면,수지면과 곡성군 일대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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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수계권



이러한 섬진강 수계권(水系圈)에는 남원시 서부지역을 비롯하여 전북 임실군, 순창군, 장수군 산서면 및 번암면, 전남 곡성군, 구례군, 경남 하동군 서부지역 등이 속하여,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어.










다른 하나는 운봉읍과 아영면을 중심으로한 동부 지역권이며, 그 중앙을 남강의 지류인 황천(荒川)이 흐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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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동부 지역은 해발 500m 내외의 전형적인 고원지대로, 운봉고원 내 아영들판과 연결되는 동쪽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험준한 능선으로 가로막혀 자연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지리산 북쪽 고리봉에서 발원하는 광천은 아영분지를 관통하는 풍천과 인월(引月)에서 합류하고 임천강으로 흘러간 뒤, 산청군 생초면에서 남강의 본류와 합류하여 진주까지 이르러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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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 낙동강 수계권



이 동부지역은 現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에 편입되어 있지만, 수계권 및 문화권은 경남 서부 지역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이는 운봉지역이 경덕왕 16년에 운봉현으로 개칭된 이후에도 천령군(天嶺郡-함양)으로 편입되어 남원보다 오히려 함양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였던 점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 대목이야.


이와같이 남원시 일대와 운봉지역은 고도,수계권 등에서 크게 분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지리적인 특징은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였던 6세기말 ~ 7세기 초의 상황에서도 엿볼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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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원 일대의 지명



당시에도 이 지역은 서부지역권을 중심으로하는 백제의 고룡군(古龍郡) 및 거사물현(居斯勿縣)과 동부지역권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의 아막성(母山城)으로 이루워져 있었지ㅇㅇ







이처럼 평야지대인 남원시 서부지역과 고원지대인 운봉고원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양 지역을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교통로는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로 형성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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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일대의 입망치,여원치,유치 등의 고개를 중심으로한 교통로를 이용한 것인데, 이들 교통로는 모두 소백산맥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험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따라서 이와 같은 운봉고원과 남원 서부지역의 지리적인 환경으로 볼때, 이미 운봉고원을 장악하고 있었던 신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에 위치하면서 고갯길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형성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이는 이 일대의 성곽 분포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남원시 및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는 운봉고원 서쪽 산줄기에는 약 9개소의 크고 작은 성곽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특히 남원-운봉 간 고갯길을 중심으로 배치되어있는 형태를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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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산성 (아막산성)



이들 성곽에 대해서는 지표조사나 시-발굴조사가 이루워지지 않아 그 구체적인 축조시기를 알 수 없지만, 現 장수군 번암면에서 운봉고원으로 짓재 정상부에 위치하는 성리산성의 경우, 이 일대의 석성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견고하게 축조되었다는 점과 현재 성리산성의 소지지의 명칭인 아영면과 아막성의 이명인 아영성이 연결된다는 점을 볼때, 신라의 아막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성에서 신라와 관련 있는 유물이 출토 , 보고 된 적이 없기 때문에, 신라가 운봉지역에 진출하여 아막성을 새롭게 축조하였는지 or 가야의 기존 성을 재사용하였는지는 판단 할 수 없어.


다만 신라가 아막성을 운봉고원의 중심 거점으로 활용하였고, 아울러 최전방의 방어기지로 사용하였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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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은 백제에 있어서 경남 서부 지역권 진입의 첫 관문이자 남강 수계권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첫 지점이기 때문에, 신라의 입장에서 이 지역은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진곳이야. 따라서 성리산성을 중심으로 운봉고원에 형성된 신라의 방어체계는 지금의 장수군 번암면 혹은 남원에서 함양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백제의 공격루트를 일차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 할 수 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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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제는 운봉고원에서 남원으로 이르는 교통로와 섬진강 수계를 방어하기 위해 요천 주변 지역에 축성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비하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이를 짐작 할수 있는 것은 요천 주변에 축조된 척문리산성, 태평리산성, 흑송리산성 등의 성곽인데, 이들 성곽은 대체로 요천을 따라 섬진강과 통하는 길목이나 수계의 교차지 및 합류지점에 분포하는 양상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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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천에서 바라본 척문리산성 전경



이 중에서도 요천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척문리산성이 주목되는데, 이 산성은 장수-남원을 잇는 육상교통로와 남원-운봉을 잇는 육상교통로가 만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성의 둘레는 570m, 골짜기를 따라 자연 능선을 감은 포곡식 산성이며, 8m 높이의 토단을 쌓고 석축을 한 형태로 성벽 안쪽으로는 토루를 쌓은 이중성이야.


성내에는 삼족배 등의 백제토기와 와편이 보인다고 하나, 성의 구체적인 축조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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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은제관식



그런데 척문리산성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척문리고분군에서 백제 은제관식 1점이 출토되어, 그 피장자가 백제의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나솔(奈率-제6품)급 이상의 인물임을 알 수 있게 되었어ㅇㅇ 


특히 척문리고분군 출토 은제관식의 편년이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어, 소백산맥을 경계로 신라와 대치했을 당시에 백제가 이 지역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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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촌리 횡열식 석실 (현재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 ;;)


이 척문리고분군 인근의 초촌리고분군에서는 211기의 백제 횡혈식 석실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섬진강 수계권의 분묘 유적 중 최대 규모의 백제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현상이지.


일반적으로 고분군과 성곽이 중요한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척문리산성 또한 이들 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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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척문리산성은 6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운봉고원에서 남원 서부지역권으로 진출하려는 신라 세력을 차단하는 역활을 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었어.


이렇듯 남원, 운봉 일대는 양국의 방어저선 및 진출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였으며,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산성의 존재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봐ㅇㅇ


그리하여 6세기 후반 신라와 백제는 각각 운봉 - 함양 간 교통로 및 남강 수계권과 남원,장수,임실,곡성 등 섬진강 수계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소백산맥을 경계로 대치 양상을 벌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좋을듯 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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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의 唐은 신경쓰지 말자...ㅎㅎ;




7세기에 들어와 신라는 그간 조성된 대내적, 대외적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도모하였어. 


여기에서 주목되는것은 그 이전의 양국간의 전장이였던 경기도 및 충청북도 일대를 벗어나 소백산맥 남부지역을 선택했다는 점이지.


이는 그 이전시기부터 고구려 혹은 신라와의 대립을 통해 백제의 방어체계가 완비된 한강 이남 지역 및 기존의 접경 지역보다는 새롭게 접경을 형성하게 된 소백산맥 남부지역을 주목한 결과가 아닐까하고 주류사학계는 대체적으로 이리 생각하고 있어ㅇㅇ




필자는 이 의견에 대체적으로 공조하나, 새롭게 형성된 전선을 주목했다는 점이 이상한데... 밀게이들도 그렇지 않盧?


아막성 전투에 관해 한국 사학계는 하나의 큰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될듯해ㅇㅇ


아마추어인 필자가 봐도 갑자기 소백산맥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격돌했다고 본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그저 접경을 형성하게 되고, 이 전선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약 7만에 달한 대병력이 충돌했다고 보기엔 좀 뭔가 부족하지 않盧?



일단 군사적 관점으로 접근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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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의 예상 진격루트




운봉고원과 그 일대의 지도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새로운 군사적 진출로의 확보는 양국의 전선을 확장시켜 백제에게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백제 내지로의 침투 시 공격루트의 다변화를 꾀할수 있어.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는 운봉지역을 활용한 군사적 진출을 통해 남원,장수,임실 등 섬진강 수계권의 긴장감을 높이는 한편, 다양한 공격루트를 확보하여 백제를 전방위적으로 압박 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고자 4개의 성을 운봉지역에 축조한것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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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을 염두하고 신라는 7세기에 들어와 對백제 최전방 방어기지이자 소백산맥 이서(以西)지역 진출의 교두보로서 운봉지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서지역 진출의 교두보로서 운봉 지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어 


이를 잘보여주는것이 바로 소타,외석,천산,옹잠의 4성 축조와 백제 영역 침공이지ㅇㅇ


일단 아막성 전투 발발원인을 보기 전에 이 4성 축조에 관해 알아보자ㅋ













당시 신라가 축조한 소타,외석,천산,옹잠 등 4성은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는 실정이야.


다만 전투 과정의 맥락으로 볼때 4성은 운봉고원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그 위치를 운봉고원 내 성리산성 인근이나 운봉고원 서족 산줄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ㅇㅇ



※ 아마추어 사학자들 or 아마추어 역덕들은 4성의 축조 지역이 운봉고원이 아닌 장수군이라고 비정하기도 하는데, 장수군에 이렇다고 할 성곽지형이 발굴되지 않았으며, 딱히 장수군을 점령하여 성곽을 축조했을 이유가 불분명하기에 필자는 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운봉고원설을 지지하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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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운봉고원 내 성리산성 인근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성리산성을 주성(主城), 소타,외석,천산,옹잠의 4성은 그 부속성(附屬城)으로 보아, 4성의 위치를 성리산성 인근에 있었다는 견해야.


그리하여 사료 상에서 보이는 천산(泉山)은 현재 운봉 고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정산(鼎山)의 유음어(類音語)로 판단하여 그 위치를 추정하거나, 해수가 매복했던 천산 서쪽의 대택(大澤)을 성리산성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저수지로 지목하고 그를 토대로 천산을 짓재토성에 비정하면서 나머지 3성 또한 아영분지 내에 있었을것으로 보기도 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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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왕의 침공 이유가 신라의 4성 축조 및 영역 침범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4성의 위치는 백제와의 접경 지역 혹은 백제의 영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곳이야 되지 않겠盧?


또한 앞선 견해대로라면 성리산성 인근에 4개의 부속성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4만이나 되는 대군이 운봉고원 내로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성(主城)을 공격하지 않고 그 인근 거리에 있었던 4성을 공격목표로 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되지 않아. (혹은 백제군이 2개로 나뉘어 4성과  아막성을 동시 공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필자는 생각함ㅇㅇ , 이는 후반부에 자세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음ㅋ)


따라서 4성이 있었을 지역은 백제 고룡군과 접경을 형성하였던 운봉고원 서쪽 산줄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아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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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신라가 축조한 4성은 노치산성, 음지산성, 장교리산성(or 고남산성), 가산리산성 등 운봉읍 서쪽 산줄기에 있는 성곽들이 아닐까 필자는 추측해본다ㅋ



이들 성곽의 크기는 모두 둘레 400m 이하의 소규모 산성이지만,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입하는 고갯길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즉 이 성곽들은 입망치(노치산성,음지산성),여원치(장교리산성,음지산성),유치(가산리산성)등의 고갯길을 관장하면서, 소백산맥 서쪽의 정황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아울러 이 고갯길을 따라 운봉고원에서 내려와 요천 동쪽 지역을 공략할 수 있는 성격 또한 가지고 있지ㅇㅇ


 따라서 백제와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면서 그를 공략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 성곽들이 당시 신라에 의해 축조된 소타, 외석,천산,옹잠 4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보고 서술해볼께ㅋ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아막성 전투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 알아보자ㅋ





당시 축조된 4성은 백제에 있어서 어떤 전략적인 성격을 가져서 4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했을까?



위에 짤을 다시 가져와 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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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지역은 기본적으로 남원 혹은 장수에서 운봉으로 향하는 백제의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백제의 고룡군-거사물현 간의 교통로를 방해,차단 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으며, 특히 성리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아영면 지역은 지금의 장수군 번암면으로 당시 백제의 거사물현 or 우평현에 속해 가깝게 맞닿아 있고, 운봉읍 지역은 그 서쪽의 여원치를 통한 길로 백제의 고룡군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에 따라 신라는 운봉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의 고룡군과 거사물현 & 우평현을 견제,압박 할 수 있었으며, 여건이 조성되면 그 지역으로의 대규모 군사 진출을 노릴 수 있었지ㅇㅇ







여기에 신라가 4성을 축조하여 운봉 고원의 서쪽 산줄기를 장악하게 되면, 이 일대의 대치상황에서 백제보다 유리한 점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남원 서부지역권에서 운봉고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통로가 많지 않다는점, 그리고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고도에 자리하면서 함한 지형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


이와 같은 운봉 고원의 지리적인 이점은 백제에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며, 역으로 신라는 이러한 점을 십분 활용하여 이 지역에서의 우위를 점하며 전투를 이끌어나갔을거야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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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지역 뿐만 아나리 이 4성의 축조는 곧, 섬진강 수계의 활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룡군이 위치했던 남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섬진강 중류지역에 해당되는 곳으로, 섬진강은 남원 일대를 관통하는 요천과 합류하여 곡성-구례-하동 방향으로 흘러ㅇㅇ


특히 신라가 운봉 고원 아래쪽의 여원치를 이용하여 진출하면 요천 일대까지 매우 빠른 시간안에 도달할 수 있는데, 요천 동쪽에 위치한 척문리산성 일대의 백제 영역은 신라군의 소규모 군사 활동에 그대로 노출되어 경작 등의 일상 생활 및 섬진강 수계 활용에 곤란을 겪었을거야.






이와같이 4성의 위치와 그 전략적 성격때문에 당시 변경 지역의 축성을 통해 백제를 견제,압박하려고한 신라의 의도는 다음의 기록에도 나타나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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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春取喙淳。仍擯出我久禮山戍。而遂有之。

近安羅處。安羅耕種。近久禮山處。新羅耕種。

各自耕之不相侵奪。


신라가 달순(現 대구)을 취하고 이어 우리(백제)의 구례산 수비병을 내쫒아 점거하였습니다.

안라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구례산에 가까운 곳은 신라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5年 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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竊聞。新羅。安羅兩國之境有大江水。要害之地也。

吾欲據此脩繕六城。謹請天皇三千兵士。每城充以五百。

幷我兵士勿使作田。而逼惱者。

久禮山之五城、庶自投兵降首。


가만히 듣건데 신라,안라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낙동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천황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 성마다 5백씩 배치하려한다.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것은 구례산의 5성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5年 11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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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 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䔉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4년(서기 579년) 봄 2월,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의 길을 막았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智王 4年 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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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개의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위의 두 사료는 530~540년 탁순,탁기탄,남가라,안라 지역을 둘러싸고 백제&가야와 신라가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을 보여주는 일본서기 기록이야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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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점령한 구례산은 現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의 산성 일대로 비정되는데, 신라에 의해 그 지역이 장악된 이후 자연스럽게 접경이 형성되었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으며, 이에 백제는 그 지역에 6성을 수리하여 신라의 농경활동을 방해하고 침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여기에서 백제의 6성 수리 및 활용 계획은 단순히 방어적인 형태가 아니라, 신라를 공격하고 영역을 침탈하는 기지로서 공격적으로 성곽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어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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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성에서 바라본 견두산성과 대청호반




한편 마지막의 삼국사기 진지왕 4년 기록은 579년 백제가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서 축성을 통해 적국의 교통로를 제어,차단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ㅇㅇ


여기에서 보이는 성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 당시 양상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워;;


다만, 당시 백제가 신라의 교통로를 제어하려는 의도 아래 웅현성(現 계족산성으로 비정)과 송술성을 쌓았으며, 이는 공격적 방어전략에 입각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


이와같은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접경지역에서의 축성은 방어시설 구축이라는 성격뿐 아니라, 적국에 대한 영역 침범,생활기반파괴,교통로차단 등의 기능을 했음을 파악할 수 있어ㅇㅇ




※ 이러한 우리나라의 복합적 산성 방어 시스템는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며, 체계가 무너져버렸고 결국 고려-조선 조에 들어서면 이러한 복합적 방어 시스템이 전무하게 되면서 외세의 침략에 무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보여ㅇㅇ. 


한 예로 조선 초-중기 방어전략이였던 진관체제&제승방략이 이 복합적 산성방어구조와 아주 유사한데(진관보다는 제승방략이 매우 유사함),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그 처참한 대처를 보노라면 1000년이 지났는데도 삼국시대 방어전략보다 더 ㅎㅌㅊ인 상황이지;;  ( '삼국시대 복합적 산성 방어전략' = '조선조 진관체제+제승방략' + 좀더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방어체계 )


주류사학자들중 일부는 이러한 삼국시대의 복합적 산성 방어 시스템이 조선 조 중반까지 꽤나 유지되고 있었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임진-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거라 주장해ㅇㅇ


그 이유는 다들 알다싶이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체계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한다면 외부세력이 전격전으로 빠르게 진격 할 수 없기 때문이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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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남원-운봉 일대의 지리적 상황과 사료 상에 보이는 접경 지역의 축성의 성격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4성 축조 및 공격은 요천 동쪽에 위치한 백제의 영역(고룡군)에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백제의 고룡군-거사물현 간의 교통로 및 섬진강 수계의 교통로 활용에 피해를 주었던 사건으로 볼 수 있어.



신라가 섬진강 수계 교통로를 장악하여 백제와 왜(倭)의 연결로를 차단하려는 속셈인가...? 하는 게이는 꽤 탁월한 식견이 있盧...ㅋ


단순히 아막성 전투의 발발원인이 신라가 백제 영역에 4성을 축조한것이라고 보기엔 뭔가 아귀가 안맞아.


적국의 영토에 성을 축조하기 위해선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되며, 또한 역대 백제-신라 간의 주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소백산맥 남부지역에 갑자기 전장이 나타났다는 점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신라가 무리하게 성을 축조했다고 봐야 되지 않겠盧?









윗짤을 유심히 본 게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신라의 진출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고룡군은 백제의 남부지역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당시 섬진강 수계를 이용하려던 백제의 對왜(倭) 교통로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였어.


관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아막성 전투 발발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4성 축조가 아닌, 아막성 전투를 발발하게 한 왜(倭) 야맛토 정권에 있었어.




갑자기 뜬금없이 왜(倭)가 튀어나오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게이들이 있을거야.


생각을 해봐ㅇㅇ 주 전장이였던 경기,충청도 라인에서 갑자기 소백산맥으로 전장이 이동했다는 점과 신라가 무리하게 백제 영토와 인접 or 안에 뜬금없이 4개의 성을 축조했다고 하기엔 인과관계가 부실하잖盧?


※왜(倭) 야맛토 정권으로 말미암아 아막성 전투가 발발하게 된 원인은 다음편에서 자세하게 파헤쳐볼께ㅇㅇ



그러므로 백제가 대왜 교통로를 안전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남원 일대에 대한 안정적인 확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라의 4성 축조 및 영역 침범으로 인해 형성된 이 일대의 군사적 긴장감은 백제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지ㅇㅇ


게다가 신라가 요천을 넘어 남원지역까지 장악하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곡성,구례,하동 등의 지역과 남원 인근의 순창, 임실,장수 지역 또한 차례로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백제의 대왜 교통로 차단, 백제 내지로의 진출로 및 다양한 공격루트 확보, 비옥한 곡창지대인 섬진강 수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원 일대에 대한 점진적인 진출을 준비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신라는 7세기 초 운봉지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4성 축조를 중심으로 남원지역으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한것이고, 결국 이를 좌시할 수 없던 무왕은 602년 좌평 해수에게 명하여 4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운봉지역의 신라 성들을 공격하였던 것이지ㅋ













자..... 앞서 필자가 아막성 전투 발발원인의 이유가 왜(倭) 야맛토 정권에 있었다! 라고 쓴 내용을 봤을거야.


사실 관산성 전투 발발 직전의 백제,왜,가야군의 행군로와 그 집결지를 알아보는 짤에서 대충 파악했을텐데, 백제史를 통틀어 백제를 지원하려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의 주 이동로는 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경향이 두드러져ㅇㅇ


주로 근초고왕의 북방정벌전과 성왕의 관산성 전투, 그리고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온 왜군 3만명은 다 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왔지ㅇㅇ


근데 아막성 전투의 발발 원인을 설명하는데 뜬금없이 남해안의 수계원인 섬진강이 백제의 대왜 이동로 or 교통로 ??


뭐... 교통로가 1곳이 아니었다는건 다들 알겠지만, 제일 중요한건 백제와 왜의 주 교통로가 남해안->서해안이 아닌 남해안으로 지정된건 우연한 결과가 아니며, 신라가 對왜(倭) 이동로를 끊으려 했다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안드盧?





또한, 백제는 비교적 큰 전쟁을 치루는데 혼자가 아닌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져.


앞서 나열했던 근초고왕의 북방정벌전, 성왕의 관산성 전투, 위덕왕의 아라가야 지원, 백제부흥운동의 야맛토 지원군 등등, 잘 보면 백제 전쟁사의 한 축은 왜(倭) 야맛토 정권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지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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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실은 지금 이 아막성 전투 또한 백제와 왜(倭)의 연합 작전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


한국사 교재에는 이 아막성 전투를 백제 단독의 전투라고 규정하는데, 사실 여러 사서를 보면 백제 혼자가 아닌 왜(倭) 야맛토 정권이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와.




말로만 떠들지 말고 한번 그 증거를 한번 살펴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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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新羅。


(음력 서기 601년 11월 5일) 

신라를 칠 것을 의논하였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9年 11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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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目皇子爲擊新羅將軍。授諸神部及國造。伴造等。幷軍衆二萬五千人。


(음력 서기 602년 2월 1일) 

구메(來目)황자를 신라를 치는 장군으로 삼고, 여러 신부(諸神)와 국조(國造),반조(伴造)와 군사 2만5천명을 주었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10年 2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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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來目皇子到于筑紫。乃進屯嶋郡。而聚船舶運軍粮。


(음력 서기 602년 4월 1일) 

구메(래목)황자가 축자(筑紫)에 도착하였다. 이에 도군(嶋郡)에 나아가 주둔하여,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10年 4月 1日




大伴連囓。坂本臣糖手。共至自百濟。是時。來目皇子臥病以不果征討。


(음력 서기 602년 6월 3일) 

무라지 쿠이(大伴連囓),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坂本臣糖手)가 백제로부터 도착하였다,

이때 구메황자가 병으로 인해 쓰러지며 신라를 토벌하지 못하였다.(예정이 늦어졌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10年 6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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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뭔가 딱 감이 잡히지 않盧?


위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던 602년 8월과 비슷한 시기에 야맛토 정권 또한 신라 정벌을 꾀했음을 알 수 있어.


주목할만한 점은 야맛토정권이 신라를 치려 했던 시기가 백제가 아막성을 침공했던 시기와 비슷하며, 당시 원정군 장군들이였던 무라지 쿠이(대반연설),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판본신강수)등이 이시기에 백제에 다녀왔다는 점이야.


이 기록을 보면 백제 무왕은 야맛토 정권과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던 정황이 딱 들어나지 않盧?





그럼 왜 백제는 야맛토 정권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을까?


이에 대해 필자는 2가지 이유를 들고 싶어.












첫번째. 대야주 지방의 신라방면군 분산




운봉지역으로 밀고 들어온 신라는 후기 가야연맹을 복속시키고 이 지역에 최소 10,000 ~ 20,000명의 군사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이로 인해 백제군이 침공했을때, 백제가 승리할 가능성이 그닥 높지 않았으므로 왜군이 신라의 해안선을 공격하여 대야주의 신라방면군이 분산되는 그때 아막성을 공략하고 빠르게 진격하려는 전략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지.











두번째. 가야 회복운동의 부활




가야가 멸망한지 채 40년이 안된 상황에서 백제와 야맛토 정권은 가야 영토를 회복하여 가야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관산성 전투 당시 왜(倭)의 덴노였던 킨메이는 죽을때까지 가야를 도와야 된다고 외쳤으며, 이는 다음 일왕인 비다쓰 덴노도 마찬가지였어.


또한 위덕왕 치세에도 신라가 가야연맹을 차례대로 복속시키는걸 우려하여 몇차례 신라를 공격하였던 기록이 남아있던 만큼, 무왕이 왜군을 끌어들였을 명분 중 하나가 바로 가야 연맹의 부활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이득없는 전쟁에 어떤 국가가 나서겠盧? 임나회복전쟁이라는 기치를 무왕이 들어 올렸으면 당연지사 자신의 조상이라고 일본서기에 딱 하니 적어놓던 야맛토 정권은 군말없이 참전했을거야ㅋ










이 두가지 이유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복합적인 조건과 이유들이 아우러져 아막성 전투 발발 전, 백제와 왜(倭) 간의 사전 물밑 접촉이 빈번히 일어났고,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백제와 왜(倭)는 602년 6~8월에 동시 다발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예측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배웠던 역사에는 아막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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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時。來目皇子臥病以不果征討。



이때, 구메황자가 병으로 인해 쓰러지며 신라를 토벌하지 못하였다.(예정이 늦어졌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10年 6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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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서 나타나듯, 총 병력 2만 5천명인 왜(倭)군 원정대가 큐슈 일대에 주둔하여 정비를 다 마쳤지만, 원정대 총사령관인 구메황자가 병으로 쓰러지며 일정이 애매해졌어.


아막성 전투가 602년 8월에 일어났다는걸 염두하면, 만약 구메황자가 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아막성 전투에 대한 한국사의 기록에는 백제,왜(倭) 연합군의 언급이 나타났겠지ㅇㅇ




구메황자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무왕이 접했을까?


이는 당시 해상 교통 사정을 생각한다고 하면 아막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 알았다고 해야 정답일거 같아.


북 큐슈에서 사비성까지 해상 교통로를 이용한다고 하면 대략 1달에서 2달정도 걸리며, 이는 아막성 전투 시리즈가 끝날때 쯤 자세히 기록으로 살펴볼께.








이쯤에서 2-2인 아막성 전투의 발발원인을 급하게 마무리 지어볼께.

좀더 디테일하게 쓰고 싶은데, 몸상태가 메롱인지라..;; 이해바라盧...



다음편은 아막성 전투 초반 상황과 당시 백제,왜,신라군의 상황을 자세하게 살펴볼께.

좋은 밤 보내고 감기조심해라ㅋ













3줄요약


1. 신라의 운봉지역 진출은 남원지역을 통한 전라도 지방 공략을 위한 사전 포석작업이였음.


2. 또한 백제와 왜(倭)의 상호 교통로였던 섬진강 일대를 압박하여 신라가 점령하여 이를 컨트롤 하기 용이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도 작용했음.


3.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에 무왕은 왜(倭) 스이코 덴노와 물밑접촉을 하여 602년 6~8월쯤 신라에 대한 양국의 대대적인 침공전을 벌일 계획을 가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