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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우리 백옥자 아니면 누가 먹겟나?"

오우버오
1 2013-11-09 00:29:48

 

박정희 대통령은 항상 음식이 남으면 ‘우리 백옥자 선수 아니면 누가 먹겠나?’하시면서 남은 과자 등을 싸주기도 했지.

 

 

▲ 백옥자씨가 4일 자택 부근인 서울 잠실의 한 카페에서 옛날을 회상하며 웃고 있다.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한국 육상의 자존심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씨

‘땅에는 엄복동, 하늘에는 안창남’.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선수들을 제치고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2번이나 우승한 엄복동과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었다. 그 비슷하게 1970년대 아직 스포츠 후진국이었던 우리에게 ‘물에는 조오련, 뭍에는 백옥자’가 있었다. ‘아시아의 물개’,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들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수영과 육상에서 2연패를 달성하며 기초종목에서 극히 취약했던 한국 스포츠의 체면을 살려준 스타였다. 작고한 조오련씨는 말년에도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했지만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59)씨는 그동안 조용히 지낸 편이다. 잘 나서지 않았던 백씨가 요즘 자주 얼굴을 비친다. 여자 프로농구 선수인 딸 김계령(32·신세계 쿨캣 센터) 때문이다.



지난 4일 서울 잠실의 한 카페에서 ‘아시아의 마녀’와 만나기로 했다. 그가 현역으로 뛸 때 서울 도심과 태릉을 오가던 45번 시내버스를 자주 탔던 한 지인에게 “버스에서 백옥자를 봤는데 얼마나 덩치가 큰지 좌석에 엉덩이가 반밖에 들어가지 않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그 덩치가 어디 가랴 싶었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창 너머로 덩치 큰 백옥자씨를 기다렸다. 이때 키 큰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선다. 백옥자급 덩치는 아닌데…. 사진기자와 함께 있어서 그랬는지 대번에 알아보고 악수를 청한다. 생각보다는 늘씬하게 변했다. “나랑 처음이지?”하면서 손을 내미는데 남자 손 중에서도 작은 편이 아닌 기자의 손이 그 안에 푹 담긴다. 그런데 손이 짝 손이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20%는 더 크다. 4㎏짜리 포환을 수백만 번이나 던진 탓일까? 키 175㎝에 한창 때 80㎏이 훨씬 넘었는데 지금은 70~71㎏을 유지한다고 한다.

“날씨 참 춥네. 사진 예쁘게 나오려고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더니”한다. 운동화에 베이지색 바지, 위에는 니트에 조끼 하나만 걸쳤다.

인천 박문여중·고를 나와 인천 토박이인줄 알았더니 본적은 부산이란다. “부모님이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 오셔서 농사를 크게 지으셨지. 대농이었어.” 유복한 집안의 8남매 중의 막내이자 외동딸. 그 시기에 어떻게 투포환을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원래 덩치가 좋아 여중 때 배구, 농구 다 했어. 1967년 고 민관식씨가 대한체육회장을 하실 때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지. 내가 중3때야. 백운량 선생님이 ‘올림픽에도 육상선수를 출전시켜야 하는데 선수가 없다’며 ‘넌 덩치가 좋으니 투포환을 해보라’고 하드만. 친척이냐고? 아니야 성만 같지.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셨어.”

외동딸이 운동을, 그것도 쇳덩어리를 던지는 이상한 운동을 한다면 부모님들의 반대가 뻔해 집에 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운동하고 나면 배가 고파, 집에 가서 엄청 먹어댔어. 쟤가 갑자기 왜 저러나? 하셨지만 공부를 많이 했더니 배가 고프다고 둘러댔지.” 백옥자는 몇 달 훈련하지도 않았는데 이듬해 한국 신기록을 냈다. “17년 만에 깨진 한국 신기록이었지. 신문에 크게 나니까 그때서야 집에서도 알고 뒷바라지를 좀 해주더라고.” 가족 중 가장 큰 후원자는 복싱선수 출신인 큰 오빠 백행복(미국 이민)씨였다. “큰 오빠는 우석대 출신으로 복싱 국가대표였어. 그런데 올림픽 선발전을 앞두고 라이벌 선수가 깡패를 동원해 집단 폭행해 한쪽 눈을 실명하는 바람에 운동을 포기했대. 나도 나중에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겠어.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한 이유 중의 하나는 큰 오빠의 한을 풀어드리려고 했던 것도 있어.”

첫 한국 신기록 이후 던지기만 하면 새 기록이 나오는 행진을 거듭했던 백옥자는 한국선수단 최연소선수로 1968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러나 세계무대의 벽은 높았다. 그냥 참가하는 데만 의의가 있을 정도의 성적에 그쳤다. 18살 단발머리 소녀였던 백옥자는 1970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14m57을 던져 한국육상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다. 백옥자는 투포환에 앞서 투원반 동메달도 땄다. “투원반은 그냥 ‘레크리에이션’으로 해 본거지.”

백옥자는 첫 금메달보다 1974 테헤란대회의 두 번째 금메달을 훨씬 가치 있게 생각한다. 그동안 출전하지 않았던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얼굴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아시아의 최고를 다투는 무대였지. 올림픽 빼고 아시안게임에서 나보다 큰 선수를 처음 봤어. 중국선수가 180㎝가 넘는 덩치였는데 금메달이 유력하다고 했어. 게다가 나는 신우염을 앓아 인천 동산병원에 입원했었고 대회 당시에는 왼쪽 무릎을 다쳐 진통제를 맞고 경기에 나갔거든.” 하지만 백옥자는 16m96을 던져 두 번째 금메달을 땄다. 스타디움의 관중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고 다른 나라 남자선수들이 다리를 절뚝이는 백옥자를 업고 퇴장시켜 주었다.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붙었다.

아시안게임 사상 첫 육상 2연패는 덩치 하나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옛날 태릉선수촌 수영장이 생기기 전에 그 자리에 내 연습장소가 있었어. 하루 1000번씩 던졌더니 언덕배기에 포탄이 맞은 듯 움푹 파인 자국이 생겼어. 다들 그곳을 ‘백옥자 자리’라 불렀지. 특히 겨울이면 고역이었어. 30m 정도 서클의 눈을 치우고 연습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포환에 붙은 얼음과 모래에 오른쪽 뺨이 쓸려 항상 상처투성이야. 그래서 다들 ‘백옥자는 시집도 못갈 것’이라고 했어. 내 별명이 뭔지 알아? 시계야 시계. 태릉에서 합숙하면 새벽 6시에 점호가 있는데 나는 5시50분에 나갔어. 이 때문에 ‘운동장에 백옥자가 보이면 새벽 5시50분이다’고 했고 별명이 시계가 됐어. 그때 친구들은 지금도 ‘시계’라고 불러. 민관식 회장님이 이를 아시고는 일제 세이코 시계를 사다가 내 손목에 채워주시고는 다들 백옥자를 본받으라고 훈시하기도 했어. ”

육상 후배들이 훈련을 게을리하면 혼내던 군기반장 역할도 도맡았다. 그랬던 그도 한동안 방황했다. “남들은 백옥자하면 던지면 기록이 나오는 줄 알아 중압감이 심했어. 집이 인천이라 태릉에서 1년 365일 살았는데 힘들 때면 갑자기 지긋지긋해져. 철조망도 넘고, 경비 아저씨들을 살살 꼬드겨 여러 번 도망쳤지. 한 2∼3일 도망갔다 오면 맘이 풀리더라고.”

백옥자가 고생하는 이야기는 테헤란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한 TV에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TV에서 백옥자 선수 보고 감동했어. 오랫동안 한국육상의 기둥이 돼라”는 박 대통령의 격려에 오히려 백옥자가 감동했다. 테헤란에서의 부상 투혼도 대통령의 격려가 마음에 남아서였다. “두둑한 격려금도 주셨는데 그게 내 생활의 기반이 됐어.” 대통령 격려금은 얼마나? “집 한 채 값이었어.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잠실 땅값이 한 평에 30만원할 때 80평짜리 집을 지었지. 빌라로 개축해 ‘백옥빌라’라고 이름 붙였어. 5층짜린데 5층에는 딸이 살고 4층에 우리 부부가 살아. 나머지는 세주고.” 상가지역이라 한 30억원 하겠네요? 흐뭇한 표정으로 “뭐 그 이상이지”한다.

“박 대통령은 그 이후 자주 청와대로 불렀어. 누가 대통령 앞에서 음식 많이 먹나. 항상 음식이 남으면 ‘우리 백옥자 선수 아니면 누가 먹겠나?’하시면서 남은 과자 등을 싸주기도 했지.” 박 대통령 말고도 민관식 장관, 김택수 전 IOC위원,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많은 도움을 줬다. “김 시장님은 육상연맹 회장도 맡으셨는데 내가 집이 인천이라고 시장 관사에서 먹이고 재워 주셨어. 명절 때 공직자들이 인사 오면 ‘우리 이쁜 딸 백옥자네. 누가 중매 좀 서’하고 소개하시곤 했어. 신탁은행에 부탁해서 나를 위해 육상부를 만들었는데 대학 다니면서 실업팀에 있을 수 없어 오랫동안 휴학했어. 내가 건대 70학번인데 2년 다니다 휴학해서 졸업은 86년에 했다니까.”

백옥자는 건국대 체육과 입학동기인 김진도(부천대 생활체육과 교수)씨와 결혼했다. 인연은 어떻게? “대학 1학년 때 당시 서독육상연맹에서 아시아의 유망주를 선발해 1년간 전지훈련을 시켜주었는데 내가 뽑혔어. 그래서 그 양반에게 1년간 숙제 같은 것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지. 서독에서 돌아와, ‘많이 도와줬으니 내가 커피 사겠다’고 해 데이트를 시작했어.” 좀 강제성이 있어 보이는데요? “농구선수 출신이라 키도 크고(186㎝) 잘생겨서 사실 ‘넌 내 거다’하고 찍은 거지. 그리고 그때는 내가 잘나갔으니까.” 김 교수님은 백 선생님이 냄비라도 던질까 무서워 부부싸움도 못하셨겠네요? “나는 O형이라 왈가닥 기질이 있지만 그 양반은 A형이라 조용해. 부부싸움 그런 거 없었다고.”

백옥자는 1978년 은퇴해 5년간 인천체고 교사로 있었고 그 사이 인천대 교육대학원도 마쳤다. 딸이 6살 때 친정식구들이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 5년간 살다 왔다. “미국 이민도 생각했었는데 대학교수남편 직장도 그렇고 이민 가면 연금도 못 받게 돼 돌아왔지. 어떻게 해서 받은 연금인데.”

은퇴한 지 한참 지나 백옥자는 86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1985년 미국에 있는데 육상연맹에서 전화가 왔어. 아시안게임에 나갈 선수가 없으니 출전하라고. 1년간 훈련한 후 출전했는데 4위 했어.” 백옥자의 한국기록(16m96)은 2002년에야 깨졌다.

백옥자는 힘만 좋았던 게 아니라 여고 때 육상 100m를 12초08에 끊을 정도로 순발력도 좋아 운동에는 만능이다. 86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그는 취미로 볼링을 시작했는데 광주 반도실업팀에 입단해 전국체전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1990년 10월20일 전국체전을 다녀오다 교통사고가 나 5주나 입원하는 바람에 그만뒀다. 퇴원 후 남편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는데 드라이브 거리가 230m라고. 1년 만에 보기 플레이어가 됐다.

“우리 때는 여건은 좋지 않았지만 사명감이라는 게 있었어. 요즘 후배들은 그 부분이 좀 부족한 것 같아. 계령이도 내가 만날 혼내. 억대 연봉을 받는 만큼 몸을 아끼지 말고 투혼을 보이라고 말이야.”

인터뷰=이동윤 선임기자 dy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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