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군사적 관점에서 본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정보/스압/BGM] 군사적 백제의 관점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정보/스압/BGM] 군사적백제의 관점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정보/스압/BGM] 군사적백제의 관점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4탄. 신라판 300인 굴산성 전투와 핏골전투


[정보/스압/BGM] 군사적 백제의 관점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5탄. 백제의 영웅왕, 구천에서 지다.


[정보/스압/BGM] 군사적 백제의 관점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6탄 마지막편. 백골산 전투, 삼한의 판도를 바꾸다.




아까 올린글은 이상해서 삭제하고 수정해서 재업했어ㅇㅇ;;




한동안 심층면접 준비하느라 이제서야 올리는점 盧無盧無 미안하盧
일베에 텍스트 제한이 있었나?? 다 올리려고 하니까 에러가 나서 몇몇 부분에 대해선 걍 삭제함...;
 
관산성 전투에 관하여 외전으로서 관산성 전투로 인하여 멸망하는 대가야를 향한 왜(倭)왕 킨메이(欽明)의 분노에 찬 절규와 관산성 전후의 동북아시아의 정치외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국시대 전반의 고대 한국의 갑옷과 무기,전술편  3개를 다루워볼까 해. 
 


이번편은 관산성 전투의 여파로 인해 멸망하는 대가야(&후기가야연맹)와 이에 따른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왜왕 킨메이의 분노에 찬 절규에 대해서 알아볼거야
 
즉, 고대 한-일 관계의 Missing Link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텐데, 문제는 좀 길다보니 내가 쓰다가 많이 생략할 수도 있고 또한 이편을 두개로 쪼개거나 시리즈 제 2탄인 '백제의 마지막 포효' 편에서 백제와 왜(倭)의 관계를 다룰수 있을거같盧...;; 밀게인데 이번 외전 3개 중 2개는 역사글이라서 미안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타이틀의 제목이였던,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는 약간 어폐가 있는거 같아서 원래 의도했던 '군사적 관점'이란 필자의 의도가 잘 안보여서 밀게이들이 오해 했던거 같盧; 그래서 이글과 차후 쓰는 시리즈의 제목을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백제멸망사'로 바꿨으니 걍 그러려니 해줘라ㅋ;
 
여태까지 군사적 관점에서 백제의 멸망에 대해 집필하면서 전사를 중심으로 서술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니 역덕후는 밀게에서 꺼지라는 말좀 하지말아줬으면 한다; 밀덕후에 역사 상식이 없으면 그게 밀덕이냐? 단지 총기나 무기의 스펙만 달달 외워서 자위하는 저급한 오타쿠일뿐 아니盧??ㅋ;
 
'밀리터리 상식(or스펙) + 역사적 상식 + 정치,외교 등등 다방면의 문화적 지식'을 갖춰야 진정한 밀덕후이란걸 밀게이들은 다 알고 있지만 간혹 뭐라고 하는 아주 극소수의 게이들이 있길래 좀 비꼬와봤어

그렇다고 기분나빠하지는 말아줘라; 다 밀게이들과 좋은 토론을 하기 위함이란걸 밝히는거니까ㅋ;;
 







사설이 노무 길었盧;; 그럼 본편으로 넘어가자ㅋ  

스압이라서 좀 내용이 많아. 다음편 시리즈를 위한 사전 지식함양을 위해 걍 밑의 요약글만 봐줘도 고맙盧ㅋ;













지금까지 제1탄인 관산성 전투 시리즈를 읽어왔던 게이들이라면 머릿속에 깨름직한 의문이 드는 게이들이 있을거야. 

Why? 왜(倭)가야회복운동(임나재건회의)에 뛰어 들었을까? 


과연 왜(倭)의 킨메이 덴노가 백제 성왕의 상황극에 놀아나 對 신라 전쟁에 참전하였다고 생각하기엔 많이 부족하지 않盧?
또한 달리 생각해서 김치맨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나일본부설을 위한 참전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아다리가 맞지 않아;
 
백제멸망사 시리즈의 핵심내용인 고대 한일 관계의 Missing Link에 대해 설명하기 까지 좀 돌아 온거 같다; 이 부분을 다루기 전에 먼저 가야의 설화와 일본 만세일계(萬世日係)사상의 연결점을 살펴보면서  될거 같아.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거라 주류사학계의 정론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을거야. 
 
 
 
 
 
'神으로부터 시작된 이래, 절대존엄의 만세일계(萬世一系)'

(Kia~ 일뽕들 풀발기 하는 소리가 들리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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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등에 지고 있는 아시아 끝 열도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왕가는 외세의 침공이 없이 하나의 혈통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해.
 
그러나 문화의 이동은 자연의 법칙과 동일하듯,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일본 열도 또한 폐쇄된 채 존재 할 수 없어.
 
 
현재 세계각국의 왕정국가들은 왕가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오히려 더욱 긴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게 보일거야.
 
또한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에도 자기 성씨를 밝히는 것이 위엄을 알리는 것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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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희안하게도 일본왕가의 이름에는 성씨(姓氏)가 없어. 오직 이름만 있지. 
왜냐하면 한 가문의 혈통이 순수하게 지속되었기에 성씨가 필요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해.
 
 
하지만 이러한 이유에 반기를 드는 사학자들이 최근 나타나고 있어.
일부 국내 사학자(주류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부 학자들조차도 일왕가는 최소한 3번 이상 혈통이 바뀌었다고 말해. 
 
일왕가에는 성씨가 없고 오직 이름만 존재한다는 것이 도리어 왕가 혈통변화의 비밀이 있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고 주장하거든.
 
나도 이러한 주장과 이론에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

정확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는 동시대 인근 지역의 역사서와 비교하며, 유물과 유적을 연구하며, 지명의 유래와 언어의 고찰로 풀어 볼 수 있는데, 특히 언어의 공통점은 민족과 문명의 이동을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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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게이들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알고 있盧? 모르거나 알더라도 한번 알아보자!!
 
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에서 우리가 시작 할 백제 멸망사에 대한 역사추적의 첫 시발점(始發點)이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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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전설

태그많다고 해서 한자 생략...

(중략)....해초를 따고 있던 남편 연오랑은 움직이는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고 바다 건너 나라의 사람들이 연오랑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하여 왕으로 삼는다.
남편을 잃은 세오녀는 바닷가에서 남편의 신을 발견하고 슬퍼하고 있는데 바위섬이 움직여
그녀 또한 바다 건너 남편 곁으로 데리고 간다. 부부가 사라진 후 신라에는 해와 달이 사라진다.
놀란 왕은 세오녀가 짠 비단옷으로 일월지(日月池)에서 제사를 드리니 해와 달이 예전과 같게 된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한다.
 
三國遺事 駕洛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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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하게 생각해 본다면, 기록상 연오랑과 세오녀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일본 열도에 이주한걸로 생각이 될 수 있어.
산라에서 바다를 건넜을때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일본이거든ㅇㅇ
  
대륙으로부터 이동한 유목민 진한(辰韓) 부족들은 12개국으로 한반도 남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2세기 중반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로국(斯盧國)은 가락국(駕洛國)과 교류하면서 철기문명을 흡수하고 신라(新羅)라는 고대국가로서 성장하려는 초기 철기문명 부족국가였어.
   
이러한 사로국은 5대 파사왕(婆娑尼師今)부터 한반도 동남부의 군소 부족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해.
 
파사왕은 가락국이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공격하자 이를 물리치고, 가락국의 고강도 철기무기로 무장하여 음집벌국, 실직국,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등 진한 12국을 거의 합병한 초기 신라의 정복왕이라고 기록되어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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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변한 24소국
 

가락국은 후에 진흥왕(眞興王) 전후에 신라에 병합되지만 일부 고위층은 대거 일본 열도로 이주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
 
마침내 아달라왕은 북으로 조령, 남으로 울산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는데, 경북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근기국(勤耆國)도 사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
 
가락국(=구야국)를 복속시켰을 때에도 그랬듯이, 근기국의 고위층도 사로국으로 많이 흡수되었을 거라 추측이 되고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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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한의 매장 모습

그러나 근기국은 아직 제정일치의 원시적 부족국이므로 신관직(神官職)을 겸하는 지배자는 복속의 굴욕보다는 도망을 선택하게 되는데...
 
삼국유사의 글을 보아 연오(延烏)와 세오(細烏)는 사로국에 의해 근기국이 점령당할 시점에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정치적으로 도피한 것으로 판단이 돼.
   
일반적인 설화 분석으로는 부부를 일반 평민이라 하지만, 평민이 아니라 해와 달을 모시는 사제 혹은 왕과 왕비로 추론 할 수 있어. 이점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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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 기술


세오녀가 비단을 짜고 보유한다는 것이 당시 첨단 직조기술을 가진 고위층이라는 의미야. 이름에 까마귀 烏가 있는게 보이盧?
고대사회에서 까마귀는 태양과 하늘을 의미하고, 랑(郞)과 녀(女)는 신라가 지역을 복속한 후 근기국의 고위층 예우 차원에서 붙인 최소한의 호칭인 듯 해.
 
신라에서는 남녀 존칭에 ‘-랑’과 ‘-녀’라고 호칭한 것이 기록에 자주 보여. 또한 '바위섬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부분은 과장된 신화적 표현이라 생각해. 돌로 만든 배는 셀프 운지 아니겠盧?!
 
그러나 배 이름이 바위나 돌에 관한 한자가 적혀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유사한 근거도 있어.
 
바로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노미코토는 돌배(岩船)를 타고 이즈모(出雲)에 도착한다는 기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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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부네(岩船)

실제로 이즈모의 카라카마신사(韓竈神社) 근처에는 이와부네(岩船)는 곳이 있는데, 이 이와부네의 뜻은 '돌로 만든 배'란 뜻이야.
 
배의 앞 모양처럼 생긴 이 바위는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신라국 소시모리에서 바다를 건너 타고 온 배'라고 전해져.
  
그리고 ‘이즈모의 땅이 부족하여 농사 지을 수 없으니 신들은 신라와 여러 곳에서 땅을 끌어와 이즈모의 땅을 넓힌다’는 ‘쿠니비키 신화(國引神話)’가 '이즈모쿠니풍토기(出雲國風土記)'에 기록되어 있어. 땅을 끌어 당겼다는 것과 바위섬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매우 유사하지 않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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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넓힌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볼수 있어. 풍요로운 농경문화의 시작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필수적이지
 
즉 쿠니비키 신화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철기문명인들의 유입과 정착을 의미라고 판단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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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타라 제철방식 고증 사진
 

일본의 제련법은 고대 가야로부터 전수받은 ‘다타라 제철’ 방식이야. ‘다타라’는 ‘모두 타라’는 한국어에서 유래한다고 일본 문헌학자들은 주장해.
이에 대해선 고대 일본문헌학자의 '고대 일본어와 고대조선어는 거의 같았다'란 주장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쓰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기에 여기선 생략하고 기회가 되면 써보겠지만 밀게의 성격과는 정 반대이므로 모르겄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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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진다니(荒神谷) 유적
  
1984년 시마네현 코진다니(荒神谷) 유적에서 358개의 사용하지 않은 아요이 시대(1~3세기)의 청동검(靑銅劍)과 1994년 근처 카모이와쿠라(加茂岩倉) 유적에서39개의 동탁(銅鐸)이 출토되는데, 그 이전까지 일본전체에서 발견된 청동검이 겨우 300개 남짓이였어. 일본 본토가 아닌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외진 섬에서 가장 앞선 철기문화 유적이 발견된 것이지.
 
이것을 통해 고대 이즈모 지역에 청동기와 기마문화와 철기문화가 혼재하면서 강력한 부족국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해.
 
일본서기 신대기(神代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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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の尊)는 아들과 함께 신라국 소시모리(會尸茂梨)에 살다가 배를 타고
동쪽 바다를 건너 이즈모국(出雲國)에 도착한다. 이즈모(出雲)에 도착하여 카라사비노쓰루기(韓鋤の劍)으로
매년 처녀 제물을 잡아먹는 머리가 8개 달린 거대한 뱀(八頭蛇)의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꼬리를 자른다. 꼬리에서 소리 나서 갈라보니 또 다른 칼(靑銅劍)이 있다. 뱀을 처치하고 그 칼(靑銅劍)을 취한다.
뱀으로부터 살려낸 족장의 마지막 남은 딸 이나타히메(櫛名田比壳)와 결혼하여 이즈모국(出雲國)을 건설한다.
 
日本書紀 神代記 卷 4 요약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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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비약적으로 접근한다면, 즉 한반도에서 건너온 앞선 철기 문명집단이 청동기 문명을 지닌 원시적인 인간제물의 제사의식을 행하던 8개 부족을 정복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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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마네현(島根縣) 오키섬(隱岐諸島)은 독도를 자신들의 부속섬이라고 주장하는 독도분쟁의 상징이 될 정도로 한반도 동남부와 거리상 가장 가까워.
 
양국의 옛 기록에도 표류자들이 많이 왔다고 하는걸 아는 게이들도 있을거야.
  
시마네현은 야스기의 금속, 이즈모와 마스타(益田)의 방직업이 유명한 곳 인데,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과 무관하지 않아보여.
  
이에 대해 현대에 와서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이 있는데, 한,일어 혼용 동화책 海を渡ってきた神(바다를 건너온 신)를 출간한 시마네현 마쓰에시(島根縣松江市)의 퇴직 교육공무원 니시코리 아키라(錦織明)는 한국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야. 그의 성씨 니시코리(錦織)는 일본에서도 희귀한 성씨중 하나인데, 그 이유는 그의 성씨가 고대의 성씨 중 하나이거든;
 
 
‘비단을 짠다’는 錦織(금직)라는 성씨는 금기국에서 비단을 짜던 세오녀를 생각나게 하지 않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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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지유라이기(伊未自由來記)

언제 쓰였는지 알 수 없고, 현재 복사본만으로 겨우 전해지는 오키섬의 향토 고기록(古記錄) 이마지유라이기(이하 이마지유래기-伊未自由來記)에 의하면 오키의 조상을‘목엽인(木葉の人) 부부’라고 기록하는데, ‘이마지’는 ‘이즈모’를 잘못 발음한 것으로 판단되. 언어유희로 판단되겠지만, 즉 이마지유래기는 ‘이즈모 유래기’라고도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해.
 
위에서도 그렇고 밑에서도 그렇겠지만 이러한 언어유희는 일반적으로 환빠들이 자주 사용하는거라 필자인 나는 조심스럽게 다룰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러한 언어적 고찰(or 언어유희)이 아니면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을 거의 할 수 없어.
 
특히 앞서 내가 언급한 바가 있지만, '고대 일본어와 고대조선어는 거의 유사하다'라는 연구 결과 까지 있는 마당에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안할 수가 없기에 양해 바래ㅇㅇ; 내 추측으로 썼다고 밝혔으니 거침없이 써볼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이마지 유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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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쿠니(隱岐國)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목엽인(木葉の人)인데,
아래는 짐승가죽옷을 입고 위에는 버드나무 껍질옷을 입고 다녀서 유래한 것이며,
그들은 가라사려촉(加羅斯呂觸),한지제라국(韓之除羅國)에서 온 사람들이다.
 
伊未自由來記 해석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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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게 바다를 건너 표류해온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盧?
 
한번 뜯고 씹고 맛보고 하면 가야, 사로국 등을 연상시키는 지명들로 보여. 이마지유래기에 나와 있는 '짐승가죽옷을 입고' 부분을 보면 나 원시적인 차림인것 같아 보이지만 , 가죽갑옷을 입었을거라 추측해. 즉 그들은 새로운 문명을 갖고 정착한 연오랑과 세오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영일현의 옛 이름이 근오기(斤烏支)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적고 있어. 근(斤)이 큰(大)의 이두로서 흔히 쓰인다는 점에서 ‘큰 오기’라고 읽을 수 있는데, 큰 '오기’와 현재 시마네현 이즈모의 '오키'섬의 발음이 비슷해. 언어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즈모 지역이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걸 유추 할 수 있어.
  
만약 이러한 주장이 확실하다면 한반도의 영일은 일본 오키섬 문명의 시발점(始發點)이란 의미야. 삼국유사에 기록된 도기야(都祈野)를 욱기야(郁祈野)로 적기도 하는데, 결국 욱기야도 오키섬과 무관하지 않다는거지. 사학계 일각에서는 연오랑 세오녀의 고국 근기국 역시 '큰 오키'를 음역(音譯)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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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 신궁(霧島神宮)
 
현재 고구려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후쿠오카(福岡)와 쿠마모토(熊本)가 있는 큐슈(九州)섬 남쪽 카고시마현(鹿兒島縣)에는 카라쿠니산(韓國岳)이라는 제일 높은 산이 있으며, 그 산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일왕가를 탄생시킨 곳(天孫降臨神齊場)’으로 인증한 키리시마신궁(霧島神宮)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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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종신기(三種神器)

일본 건국신화에서 최초의 신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の尊)가 그의 조모(祖母)이며 스사노오노미코토의 누나인 아마테라스(天照)의 명을 받아 3종신기(三種神器)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최초 일왕 진무왕의 증조부(曾祖父)야. 즉 신이 인간의 왕이 되는 일왕가의 역사가 시작되는거지.
 
다음의 기록을 보면 좀더 확신에 가까워 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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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皇産靈の尊(다카미무스히노미코토)는 이불에 邇邇芸命(니니기노미코토-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손자이자 일본 첫 덴노)를 

싸서  구지후루타케(久士市流多氣)에 내려 보낸다.
 
日本書紀 神代記 卷 4 요약 해석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9명의 신관들이 구지봉(龜旨峰)위에 모이자 하늘에서 ‘너희들을 다스릴 왕을 보내노라’ 하며
 
하늘에서 붉은 끈에 묶인 보자기가 내려와 그것을 열어보니 6개의 황금알이 있다.
 
三國遺事 駕洛國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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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盧?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건국신화와 일본서기 신대기에 나오는 일본건국신화랑 매우 유사하지 않盧?

'구지후루타케'에서 일본어로 ‘후루’는 마을이며 ‘타케’는 봉우리인데, 즉 구지후루타케는 ‘구지 마을의 봉우리’이란 뜻이야... ㄷㄷ할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

위에서 언급한 근기국은 '초기 가라국(加羅國)중 하나이다'가 내가 주장하는 고대 한일관계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야. 이점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볼께.
  
근기국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남부는 원래 가야(伽倻)의 영토야. 한반도 최초로 첨단 철기문화를 주도한 가야는 가락국으로 불렸으며, 가락국의 이름은 현재 일본에서 카라쿠니(韓國)로 남아 있는데, ‘한국’을 일본 고대어에서 ‘카라’로 부르게 된 것은 가야의 이주 영향이 결정적이였다고 주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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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神社
 
이즈모(出雲)에는 건국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の尊)가 죽은 곳에 세운 카라쿠니신사(韓國神社)라는 곳까지 있는걸 보면 참 뭔가 냄새가 나지 않盧?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시는 또 다른 카라카마신사(韓竈神社)도 있는데, 시마네현 이즈모시에는 아라키(荒木)이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
 
일본어 ‘아라’는 카라, 가락, 가야를 의미하는데, 즉 아주 오래전 한반도에서 온 후예라고 추론 할 수 있어.
 
코진다니(荒神谷)라는 명칭도 '아라 성씨를 가진 신들의 계곡'이란 뜻이 되는데, 한반도에서 온 신들의 무덤이란 의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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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士市流多氣の祭

현재에도 매년 행해지는 구지후루타케(久士市流多氣)를 위한 제사의식에는 9명의 제사(祭士)들이 진행하는데. 아홉명의 제사(九士)를 일본어로 ‘규지’라고도 발음할 수 있어. 그리고 인근 오사카의 하제마치(大板土師町)에는 일본 최초의 스모장이 있어. 하제씨들은 일본 최초의 토기를 만들어 낸 기술집단이야.
 
토기는 제련기술과 마찬가지로 불을 다스리는 기술의 최첨단 기술 중 하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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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 천손강림제(霧島天孫降臨祭)

매해 열리는 키리시마 천손강림마츠리(天孫降臨祭り)에는 천만궁 내의 일본 최초의 스모장에서 대단원을 이루는데, 불을 올리고 북을 치면서 잘 차려입은 9명의 원로 제사장들이 천손강림을 알리는 축문을 하늘 향해 읽어.
  
옛날 가야 초기, 성스러운 구지봉에 모인 9명의 족장들이 춤추며 제사를 올려 하늘로부터 천손을 받는다는 내용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
  
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시아키(上田正昭)도 일본의 건국신화에서처럼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내려온 곳이 구지봉이라는 것은 가야신화와 같다고 주장해. 한국 씨름의 천하장사들을 많이 배출한 마산 역시 가락국의 영토에 속하는데, 결코 우연이 아닐 거야.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이 고천원을 '일본신화와 축사에서(나타나는) 천신(천제)가 사는 장소'라 표현하는데, ‘낙원 고천원’은 하늘이 아니라 앞선 철기문명이 있었던 바다 건너 어느 지역을 의미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

일본학계에서는 그냥 신이 살던 하늘을 미화시킨 설, 위작이라는 설, 일본 도처의 고천이란 산에 초점을 맞추며 주장하기도 해. 심지어 이즈모(出雲)가 소속된 큐슈와 중국남부라는 설이 있지만, 큐슈 인근의 다른 섬에 고천원이 있었다는 것은 맞지 않고, 중국 남부설도 당시 항해술로는 불가능해
 
또한 일본서기에 토씨도 틀리지 않게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の尊)가 신라국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의 타카마노하라의 수수께끼(高天原の謎)에는 이런 주장을 펼쳐.
  

‘고천원을 일왕가의 선조가 탄생한 곳이며, 해외라고 보아야 하니, 즉 천손의 조국은 조선반도의 남부이다’
 

ㄷㄷ하지 않을수 없는 주장이 아니盧? 그럼 한반도 남부의 어느 곳이 고천원일까?
   
경남 고령, 거창 등에는 우두산(牛頭山)이 있으며 특히 거창 가조면에는 ‘일본왕가의 본향’이란 간판이 있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고향 ‘소시모리(曾尸茂梨)’는 이두로서 ‘소의 머리’로 해석되는데, ‘-시’는 사이 씨옷, 즉 of 에 해당되. 고령과 거창이 있는 경북,경남지역은 원래 가야의 영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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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 우두산

일제가 소시모리를 신라의 이두로 분석해 ‘소의 머리’로 해석함으로서 처음에는 강원도 춘천의 우두산으로 생각했지만, 해방 후 한국사학계는 여러 가지 사료와 유물을 통해 재조명을 한 결과, 경상북도 고령군의 우두산을 소시모리로 비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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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령군 우두산

이러한 한국 사학계의 소시모리, 경상북도 고령군 우두산 비정을 일본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며 고천원은 당연히 한반도의 남부라는 설이 가장 유력시 해지게 되었지.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추측과 정황을 살펴보면 일왕가의 첫 번째 혈통은 ‘가야의 도래인‘인 확률이 매우 높아져.
 
이러한 주장에 더욱더 힘을 실어주는 예가 있는데 한번 더 살펴보자ㅇㅇ;




  
연오랑세오녀 신화와 비슷한 시기 2세기경에 일본 건국신화가 형성되는데,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일본 최초의 건국신화 이즈모국의 건국신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매우 유사점이 많아. 일본의 건국신화는 태양의 신이지.
  
그렇다면 건국신화에 관련된 중요 신사와 유적들은 당연히 해가 뜨는 일본 열도의 동부에 위치하여야 한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엉뚱하게도 일왕가가 인정하는 일본의 창조신과 관련된 신사는 서쪽 큐슈의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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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는 신화의 땅이며 신들의 고향인데, 우리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지만 2천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즈모 대사(出雲大社)에는 신의 세계를 다스린 신중의 신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の尊)를 모시는 일본 최대의 신사야.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는 신라국 소시모리에서 왔다는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손자야.
 
통상적으로 남향과 동향을 위주로 신사의 건물을 지음에도 불구하고, 서쪽 바다를 향하는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가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숨을 거둔 곳이라고 전해지는 히노미사키신사(日御碕神社)야. 신사 내부에는 카라쿠니신사(韓國神社)라는 자그만 신사가 따로 있는데, 특별히 스사노오노미코토와 그의 아들 이소타케루노미코토(五十猛の尊)만을 모시는 곳이야.
 
서쪽을 향해 있으며 스사노오노미코토와 그의 아들인 이소타케루노미코토만 모시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비약적이지만 서쪽 바다 건너 신라국 소시모리에서 두 부자가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또한 큐슈 서쪽 끝 돌섬위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나무로 지은 초라한 신사가 있는데, 스사노오노미코토이 묻힌 곳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지금까지의 기록과 추측, 전승을 다각도로 비교해본다면 '일본 건국신(도래인)은 고향 한반도를 그리워 하며 눈을 감은 것이다'라고 생각되지 않盧?
 


 
고대사회에서 최초의 지명은 세월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거치지만 그 나라이름으로 정착되는 사례가 매우 많아.
 
고조선 이래 곰을 숭배하는 고구려인들을 생각하며 고구려를 만났을 때 열도 왜인들은 쿠마, 코마 즉, 곰(熊)을 발음하고, 가장 잦은 교류와 큰 영향을 준 선진국 백제를 만났을 때 '커다란 나라'로 생각하며 '쿠다라'라고 발음했다고 주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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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본에서 한(韓)을 '카라'로 읽는 것은, 최초로 열도와 관계를 맺은 한반도의 지명이 바로 가라, 가락국, 가야이기 때문이라 판단이 되지 않盧?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을 비하하는 단어로 대표적인 것이 '왜놈(倭のあいつ)'이야. 과거 미개한 열도시절의 나라 이름에서 유래한 비하어(卑下語)이지.
 
당연히 일본이나 일뽕을 거하게 쳐마신놈들이 한국인을 비하할때 죠센진(朝鮮人), 한도진(半島人)이란 단어를 사용해. 그러나 과거의 한반도을 가리키는 '카라(韓)'라는 단어를 넣은 비하어는 일본에서 없어. '카라진(韓人)'이란 단어, 들어 본 적도 본적도 없잖아? 
 
일본에서 '카라(韓)'는 일왕가의 근원을 상징하는 금어(禁語)이기 때문에 스스로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추측이 일본 문헌학자들에게서 주장되어왔어. 한반도를 상징하는 나라이름 '카라'는 일본 건국신의 고향이며, 한반도 남부는 일본 왕가의 이상향(理想鄕)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지.
 
가야 지역의 임나일본부설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오랜 세월을 통해 일본 왕가에 쌓여진 그리움과 신격화로 만들어 진 것이라 감히 평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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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전설을 다시 한번 보면 '세오녀도 바위섬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 남편 연오랑을 만났다는 것'과 비범한 그들이 '바다 건너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것도 특이해보여.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은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음을 의미하는데,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고 추측 할 수 있어. 그들이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것을 한반도에서 알았다는 것 역시 이후 자주 왕래가 있으며 가깝다는 것을 말하는데, 시간 차이를 두고 바다를 건너간 세오녀의 정체도 의미심장해보여.
 
살짝 다른 시각에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따로 분리해서 보자면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을거 같아.
 
2세기 중반 사로국의 팽창으로 인한 한반도 동남부 정벌을 피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의 오키섬과 큐슈 시마네현과 이동한 가야의 일족 중 하나인 근기국의 연오랑 세오녀는 원시 부족 왜국에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명을 전수한 최초의 왜국 지배계층이 된 것이며 한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쳐 일본열도로 넘어간 것이라 추측해 봄직해.
  





여기까지 가야 건국설화와 일본 만세일계 설화를 비교했어. 하지만 이것만으로 고대 한일 관계의 Missing Link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할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ㅇㅇ;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하고 고민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다가 요번 추석즈음을 기점으로 한가지 단서가 눈에 띄었어.
 

 
그 단서가 바로 5세기 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금관가야‘이였어.


  
이러한 금관가야를 추적하다가 뜻밖에 재미있는 역사적 발굴을 찾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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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 무덤(土壙墓), 덧널 무덤(土壙木槨墓), 굴식돌방 무덤 등 130여개의 가야식 무덤이 발견되었어.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데,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였지. 덧널 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棺)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 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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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점의 토기류, 청동유물, 철기유물, 철정(鐵釘), 중국제 동경(銅鏡) 등이 출토되는데 한반도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는 한,중,일의 문화교류를 말해주고 있는데, 특히 파형동기(巴形銅器-윗짤 왼쪽하단)와 오도로스(Ordos=鄂爾多斯)형 동복(銅鍑) 등 층층이 다른 시기와 다른 양식의 무덤에서 이질적인 유목민의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한꺼번에 발굴이 되었어.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대성동 고분에서 6개의 파형동기(巴形銅器-방패에 붙이는 회오리 모양의 구리장식)가 발굴이 되면서 한일학계가 발칵 뒤집혀.
 
이 파형동기는 일본에서만 100 여개 발견되었던지라 일본학계에서도 김해 대성동 고분의 파형동기에 관심을 갖고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연관성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어.
 
 
뒷동산 높이의 구릉지처럼 보이는 대성동 고분을 인근의 토박이 주민들은 예전부터 애꼬지, 애꾸지라고 부르는데, 애-는 아이, 꼬지/꾸지-는 구지(龜旨)을 표현하는 경상도식 된 발음이야. 즉 대성동 고분은 작은 구지봉, 제2의 구지봉이란 뜻이지. 건국신화의 구지봉을 차용하여 작은 구지봉이라고 부른 것으로 판단해 볼 때, 가야인들에게 대성동 고분은 왕궁터이며 왕족 무덤의 성지(聖地)였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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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가야연맹 짤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을 차지하고,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의 남진정벌로 한반도는 남부지역까지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게 전편의 초기 내용인데, 김해 대성동 고분지역에는 튼튼한 성채가 축조되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된 흔적이 있어(AD 529~532년으로 추정)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진 (금관)가야인들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 기록 또한 사라지게 되지. 그들(금관 가야인)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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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는 통일신라 이후에 편찬되어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 신라를 중심으로 완성되어 가야에 관해서는 매우 적은 기록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고자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가야지역을 마구잡이로 발굴 조사한 후, 수많은 자료와 유물을 일본으로 갖고 간 후, 궁내청 소속의 왕립박물관과 도서관에 넣은 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더군(국뽕과 환빠들이ㅇㅇ;)

'한일 고대사에 관한 중요한 것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건 아닐까?' 란게 환빠들의 망상이지. 근데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은 없잖아?
그만큼 미씽링크가 많은 고대 한-일사는 매우 많은 떡밥이 있어ㅋㅋㅋ;
   
실제로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최고의 명절로 치켜세우던 2월 11일 기원절을 메이지덴노의 아들인 히로히토가 1970년 말부터 단순한‘건국일’로 바꾸고 일본을 건국한 실존인물이라고 빵빵 우긴 초대 진무(神武)덴노를 신화적 인물로 바꾸게 되는데, 이미 에도시대 학자이며 행정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는 다음과 같은 말은 한 기록이 있어. 
 
'일본 신화 속의 신(神)은 실재했던 한 명의 인간'
 
 
즉, 진무왕이 도래계 정복자임을 최초로 암시하는 발언을 하게 되.
 
토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교수도 한반도에서 도래한 기마민족이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를 이룩했다는 ‘기마민족 정복설’을 주장하여 일본사학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바 있는데, 진무왕의 실존설과 부정설을 놓고 일본 사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어. 
 
일본 개국신화의 고향 타카지호노미네(高千穗の峰)의 쿠지후루타케(구지봉) 천손강림지와 일본 건국신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の尊)를 모시는 카라쿠니타케(韓國岳-駕羅山)의 지명을 보더라도 일본 신들은 고향 한반도 가야를 그리워한 것이 분명했을거야. 니니기노미코토가 일본 최초의 궁을 창건한 남큐슈 카사사(笠沙)에는 일본 건국신 3대 능묘가 있는데, 궁내청으로부터 지정받은 금족지(禁足地)로 알려져 있지. 
 
니니기노미토코의 아들 호호데미(火照命) 능묘 다카야 산상릉(高屋山上陵)에서 가야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흔적도 없이 다시 묻어 버리고 출토품에 관해 함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는데... 사실관계가 불분명해서 쓸까 말까 하다가 걍 써봤음요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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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산상릉(吾平山上陵)


또한 손자 우가야후키아에즈(鵜草葺不合命-彦波瀲武盧茲草葺不合尊)의 아이라 산상릉(吾平山上陵) 역시 가야식이야.
 
‘우가야후키아에즈‘의 이름에서 가야의 진실이 있다고 봐.
  
야마.토정권 이전의 신 우가야후키아에즈와 신대(神代)역사를 기록한 상기(上記)와 후지미야 하문서(富士宮下文書) 등에 우가야(上伽倻)왕조의 기록이 있는데,우가야는 고대 일본어와 고대 조선어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자면 윗-가야란 뜻을 나타내. 즉 가야가 상국(上國), 모국(母國)이라는 의미이지. 손자 간야마.토이와레히코(神日本磐余彦)는 큐슈로 남하하여 이토국(伊都國)를 정벌하고 다시 열도 내해를 통해 야마.토 지역를 정복하고 가시하라궁(橿原神宮)을 짓고 가와치(內海)왕조의 왕에 등극해. 백제사에서는 그를 구수왕(仇首王)이라고 칭하는데 그가 바로 초대 일왕 진무(神武)왕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구수(仇首)도 큐슈(九州)와 같은 발음이지.
 


연오랑세오녀 전설과 관련된 최초의 일본 원주민 왕국 탄생지 이즈모(出雲)과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일본 큐슈를 중심으로 가야의 7왕자 도해설(渡海設)과 백제의 분국론을 주장하는 학설이 있는데, 일본사학계에서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 임나(任那)는 '님의 나라'라는 의미인데, 즉 가야 도래인들이 고향 가야를 지칭한 상징적 지명이라 볼수 있어.
  
또한 일본서기의 작자 오오노야스 마로(太安萬呂)는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계 도래인이라 기록되어 있어.
 
최고의 기술과 학식을 가진 사람이여도 낯선 일본열도에 도착하여 일본왕실에서 모아온 모든 문서들을 혼자 읽고 그걸 단기간에 정리하여 방대한 역사서을 저술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거야. 그러므로 작업중에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었겠지.
 
또한 자신의 조국인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있었으니 좋은 시각을 가질 수 없었을거야. 그러므로 신공왕후의 임나일본부도 오오노야스 마로(太安萬呂)가 만든 고의적 오류이거나 조작일 것으로 판단이 되지 않盧? 그리고 왜왕의 명으로 전국에서 모은 수많은 기록들을 읽던 오오노야스 마로도 이전에 이미 한반도 가야로부터 일본 열도에 도착하여 가야 김수로의 후손들이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을 세우면서 일본왕가의 혈통이 가야계로 왕족이라고 확신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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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블로거의 기나이설과 큐슈설에 대한 설명 지도
 ( 이 블로거의 의견 또한 결국 기나이설과 큐슈설 모두 한반도 도래계로 인한 야맛토 분국 건국설을 지지한다는 점이 흥미로워ㅇㅇ; )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당시 스폰서인 백제계 혈통 텐지(天智)덴노의 압력으로 백제중심으로 새로운 일본의 역사서을 저술해야 했기에 가야의 이주 정복사를 일본 왕가의 신대기로 조작할 수밖에 없었을거라 추측해보고 있어. 백제 도래인 오오노야스 마로와 백제 혈통 텐지(天智)덴노가 함께 만든 역사서이므로 일본서기는 당연히 백제 중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본 역사서 일 수 밖에 없지. 혈통의 확립이 중요한 고대 왕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했을거야.
 
그러므로 일본(倭)이라는 고대 국가 탄생의 모태에는 가야와 백제가 있다는 것을 일본서기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200여년 앞서 저술된 것이라고 현시(現時)에 가까운 역사서이기에 믿을 만 하다고 일본은 주장해.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사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는 '공정성의 기반'이 되는 중국과 한반도의 기록을 차용&비교하는 부분이 없어.

즉, 양쪽 사료를 차용하지 않고 한쪽 사료만으로 편찬했단 소리지.
삼국사기는 김부식과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한반도,중국,일본의 역사적 고기록(古記錄)들을 총망라하여 세세하지 않지만 나름 객관적으로 저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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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가락국기

게다가 후대에 다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이 차용한 중국의 역사기록들을 통해 정사서(正史書)로서 재입증되기도 해.

무튼 오오노야스 마로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많은 부분이 백제에 관한 역사와 교류에 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이라는 국호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저술한 일본서기에 백제의 역사에 이토록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는 간단해.
  
 
그들의 모태가 한반도이며 특히 ‘백제 혈통’의 왕실과 학자가 준비했으므로 백제 중심의 역사서가 된 것이기 때문
 

그래서 백제계 도래인과 관련되지 않은 이전의 이즈모와 큐슈에서 시작된 가야 도래계의 고대왕국에 관한 기록과 전설들이 새로운 일본왕실의 기록으로 윤색하게 됬는데, 새로운 일본에는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도 없는 순수한 일본혈통의 정통성을 가진 왕실계보가 필요한 것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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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비문

광개토호태왕비문에 기록을 가지고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하로 삼는다’는 주장은 절대 있을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일본의 명백한 해석 오류야. 당시 왜(倭)의 국력을 아무리 높게 쳐준다고 해도 백제와 신라를 복속하지 못했을거야. 이점은 국까들도 인정하는 부분일거라 생각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서울인 서라벌을 여러번 포위하는걸 보면 당시 왜(倭)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다는걸 유추할수 있지만, 그만큼 신라가 왜(倭)에 굴복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에 일제의 ‘해석오류‘라는 걸 생각할 수 있지. 그럼 왜 이런 해석이 나왔을까?
 





한성 백제는 고질적인 왕족간의 권력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당시 일본열도로 피신해 있던 아신왕과 그의 추종세력이 백제의 왕권투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진사왕과 아신왕과의 숙질간 권력투쟁이 발발해. 이것이 신공왕후의 신라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의 핑계라면 이것 또한 오류야.
(이에 따른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설과 부차적인 가설등은 설명 안함. 찾으면 나오지 않겠盧? / 일본서기 본문을 보고있노라니 이주갑인상설이 상당히 아구가 맞는거 같은데..;;)
  
즉, 한반도 침략세력이 왜인(倭)이 아닌 한반도 도래계 왜인이 되는 것이지.
  
또한 '임나'는 국명도 지명도 아니야. 4세기에서 7세기까지 고대 일본에는 큐슈가 아닌 나라와 아스카지방에서 이미 백제와 고구려 도래계 귀족들이 서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하며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이므로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쟁취하기 위해 전투력을 한반도 남부에 파병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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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구려 20대 태왕인 장수왕(長壽王,394~491)의 대규모 철갑기병의 침공으로 한반도는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장수왕의 남진정벌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최초의 민족 대이동을 야기하게 돼.
  
사로국을 굴복시킨 고구려는 417년 왕위계승에 개입해 19대 눌지왕(訥祗麻立干)을 옹립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신라와 화친관계를 유지하지만, 신라가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자 468년 다시 신라를 공격하여 실직주성을, 481년 미질부(포항시 흥해)까지 진출해 7개 성을 빼앗아.
 
그 후 사로국은 서라벌에 고구려 도독부를 설치케 하며 겨우 살아남아 24대 정복군주 진흥왕(534~576)의 등장 이전까지 고구려의 속국으로 눌려 살게 되는 운명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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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했다는 가야 여전사???

스키타이 민족의 후예이며 아마존 여전사의 피를 이어받은 듯 한 가야는 어린 여자들까지 전투에 나서는 전쟁태세에 돌입하지만 제철기술이 우수한 가야지역은 고구려의 신경을 건드리는 주요 목표였어. 이미 강력한 수군도 보유한 고구려는 풍부한 야철지와 높은 제련기술을 가진 가야지역을 수륙으로 공격하는데,가야인들은 여전사(※)들까지 나서서 방어하지만 영산강 친백제 세력과 석탈해 이후 외교를 맺고 있던 사로국조차 고구려에 무릎을 꿇으니 사면초가였지.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갑옷과 철제투구로 무장한 채 순장된 20~30대의 여성 전사들/스키타이 족 또한 여전사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유물 자료가 나와있음ㅇㅇ
 


결국 김수로왕의 7왕자 후손들은 평소 영산강 친백제 세력(이라고 쓰고 당시 남아있던 마한의 일부 소국)과 5가야와 무역교류가 있던 일본 큐슈의 일본 원시부족국가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추측되어져.
 
대성동 고분 등에서 층층이 다른 양식의 가야 무덤형태가 발견된 것은 장수왕의 남진정벌 이전까지 고구려, 백제 등 고대국가들이 한반도 남부를 공격하지 않고 평화지역으로 방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제철무역으로 풍부한 물자와 교역속에 발전한 것으로 보여. 그러나 가야의 고분군은 장수왕의 남진정벌 시기에 갑자기 축조가 중단되는 모습이 발견되고, 갑자기 한반도에서 사라졌다고 앞서 언급 했을거야.

가야는 제철을 중심의 오랜 외교무역으로 익힌 항해기술은 대규모 선단위에 왕과 귀족과 백성의 혈통, 고도의 문화, 제철기술, 말과 소 등 가야의 모든 것을 싣고 큐슈에 도착해. 우월한 무기와 문화로 무장한 가야 이주세력은 큐슈를 정복하고 이후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초기 고대국가의 기초를 이룩하였다고 한국의 일부 사학계와 일본의 사학계에서 주장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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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알겠지만 백제,가야 갑옷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 않盧? 


그것이 진무왕의 동정(神武東征)을 통해 창조된 카와치왕조(內海王朝)라고 주장하지.
  
1970년부터 일본사학계에서 그 이전까지 최고 숭배대상 진무왕을 격하시킨 이유는 이것이야.
 
가야계 혈통 진무왕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계속 숭배하는 것이므로 일왕가의 본토탄생설과 순수 혈통설에 큰 위협이 되는데, 이미 한,일간에 고대 큐슈는 백제의 속국일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로, 큐슈의 땅 밑에는 예측할 수 없는 고대의 비밀이 묻혀 있을거 같盧. 

일본 건국의 기초가 되는 큐슈 세력은 가야 도래계가 열도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세운 최초의 일본정권이기 때문이야. 즉 야마.토 조정이 나라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한 뒤 큐슈 등 일본열도 전역에 문물을 파급시켰다고 해야만 일본 본토 민족이 가야의 이주민 세력에 앞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우월성이 인정되는 부분이지.
 
이것이 메이지 이래로 가장 존경받는 진무(神武)덴노와 위대한 그의 진무동정(神武東征)을 전설로 바꾼 이유인거 같아보여.

 
진무왕의 동정과 큐슈의 초기 정권을 인정하면 가야왕국의 큐슈 이주 및 정복과 김수로왕의 후손이 고대 일왕가의 뿌리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ㅎㄷㄷ한 상황 아니盧?

Kia~ 주모 오늘은 죽어라 마시게 빨랑 국뽕 한사발 가지고 오랑께!?
 
 










 
또한 2001년 125대 아키히토(明仁)일왕은 '50대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続日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과 일본의 남다른 인연을 느낀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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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독도영주권과 종군위안부에 관한 여러가지 역사 문제로 경직된 양국의 협력을 위해 일왕이 친히 고대 한,일간의 혈연관계를 언급한 것인데, 신대(神代)에 속하는 가야의 혈통과 연결 짓기 보다는 정사의 기록으로 확실한 백제 모계혈통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나름대로 구색이 맞아. 가야 혈통을 인정하게 되면 일본의 뿌리가 되는 이즈모국, 큐슈국, 야마.토정권 모두가 한반도의 속국이나 도래인이 세운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
 
그렇게 되면 일본에는 일왕의 순수혈통이 없다는 극우원숭이들과 일뽕들이 스트레스성 간질 발작이 나타나는 결과가 나와. 결코 일왕가와 친왕파 사학자들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지.

근데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극우파원숭이들과 일뽕들이 더더욱 뒤집어지는 고고학적 발견이 나와. 그게 바로 영산강 장고형(長鼓型) 고분이지.

※이 영산강 장고형 고분의 발견에 대한 웃지못할 썰이 있는데.. 영산강 장고형 고분이 발견되면서 초기엔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강력한 증거라고 일본 사학계에서 떠들자 그말을 듣고 소음순이 푸들푸들하도록 식겁한 반도의 국무총리,교과부장관,문체부장관가 전화했다는 썰도 있는데 이건 걍 썰인듯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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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1991년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에서 특이한 형태의 무덤, 장고형 신덕고분이 최초로 발견되는데, 길이 50미터 높이 10미터의 대형고분이며 석실내부의 벽에는 붉은 칠이 되어 있었어.

신덕고분에서만 110cm의 일본식 대도(大刀)가 발견되어 피장자가 왜의 장군이나 백제관직을 받은 인물로 추정되는데, 목걸이와 귀걸이 같은 장신구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옥과 유리 장신구들도 발굴이 되고, 백제왕실에서 제작한 금동관 조각도 발굴되는 사건이 벌어지지.
 
일본의 기록중에서도 당시 왜인들이 백제의 중급 관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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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臣奈率彌麻沙 / 物部施德麻哿牟
키토미 나솔 미마사 / 모노노베 시덕 마가모
  
詐勢奈率歌麻 /上部德率科野次酒
코세 나솔 가마 /상부 덕솔 시나노 차주
 
日本書紀에서 백제 관직을 찾아 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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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기부터 많은 한반도인들은 오사카에 진출하여 야마.토 정권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오사카와 나라 인근 와카야마(和歌山)는 키씨 세력의 중심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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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와카야마 곳곳에는 키씨의 흔적이 지명과 상호명으로 남아 있어. 특히 430 여개의 이와세(岩橋),센츠카(千塚)는 고대 지배세력의 고분군인데,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고분이며 이는 백제 특유의 무덤 양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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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연꽃 무늬 기와와 백제 영산강 유역의 토기들은 피장자가 백제 도래계임을 알려주는데, 일본에서는 이와세에 묻힌 피장자들은 백제와 야마.토의 외교 및 무역을 대신하던 급사(給仕)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해. 와카야마(和歌山)의 고야산(高野山)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송(金松)이 자라고 있는데,백송은 왕족들의 관으로 쓰이는데, 충격적인건 과거 무령왕릉의 목관도 바로 와카야마의 금송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져.
  
또한 나가노현의 옛이름은 시나노(科野)인데, 시나노씨의 지배영역이였어. 예로부터 군마를 생산하던 지방으로 알려져 있지.
 
일부 무덤에서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20여개의 말뼈가 발견되고, 한 무덤에서는 인골이 수습되는데 유전자 분석 결과, 50세 전후의 한반도 도래인 남자로 밝혀져. 백제 선진기술을 들여와 이 지역에서 호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지.
   
29대 왜왕 킨메이 치세에 시나노에서 기른 많은 말들과 군사원조를 백제에 보낸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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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메이(欽明) 7년
말 70필, 배 10척
 
킨메이(欽明) 11년
화살 1,500개, 14년 말 2필, 배 2척, 활 50개, 화살 2,500개
 
킨메이(欽明) 15년
말 100필, 배 40척
  
日本書紀 欽明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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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도래인은 왜에서 백제의 선진 문물과 기술을 야마.토에 전하여 호족으로 자리 잡은 후, 그 대가로 군사원조를 백제에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백제의 수도는 사비야. 그러나 장고형 무덤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데, 나주 신촌 고분군에는 백제왕릉보다 규모가 큰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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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 9호고분에서는 옹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는데, 백제와는 다른 세력이 당시 존재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필자는 이 세력을 완전히 복속당하지 않고 백제의 속국으로서 남아있는 마한세력으로 생각하고 있어.
 
영산강은 내륙수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나는 대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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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안 쪽으로 들어 가면 국제적 교류가 가능한 중국 신나라 화폐 화천(貨泉)이 발견되는데, 화천은 서기 8년에서 23년까지만 사용된 것으로서, 이미 1세기부터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의 교류를 증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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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오카는 고대부터 교류가 많았는데, 후쿠오카의 마루쿠야마(丸隅山) 고분은 긴 입구와 위로 좁아지는 석축방식으로 사용한 백제의 횡혈식 석실 양식이야. 일본에서는 이것을 북큐슈 방식이라고 불러.
 
후쿠오카 하치반츠카(八幡塚)고분에서 발견된 조족문 토기는 표면에 새긴 3가닥의 새발 돌출 무늬가 특징인데, 나주 덕산리 4호 고분에서도 동일한 것이 출토되. 이는 마한세력의 특징 양식이야.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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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羅不修貢賦親征至無珍州
 
498년 동성왕(東城王) 20년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른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東城王 2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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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장수왕의 남진공략으로 한성 백제가 망하고 웅진(공주) 백제로 새롭게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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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비의 그 아들
백제,왜,가야,신라,모용선비놈들 씹어먹을 표정 보소 


 
그러나 장수왕은 청원까지 계속 침공하며, 내부적으로는 478년 22대 문주왕(文周王)은 제위 4년만에 피살되고, 480년 23대 삼근왕(三斤王)은 재위 2년만에 의문사 하는 등 웅진 백제의 정세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백제는 왜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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築紫國軍士五百人衛送於國
 
21대 유라쿠(雄略) 덴노 23년 480년 곤지왕의 차남은 츠쿠시국(筑紫國)의 군사 500명을 함께 보내
 
백제로 호위하러 보내는데 그가 동성왕이다.
 
日本書紀 雄略天皇 23年 4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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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당시 어지러운 국내 정세 속에서 백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주요왕족을 왜에 보내 차기 왕권을 준비하는걸 나타내는거라 생각해봄직 한 시나리오야. 특히 가까운 북큐슈와 오사카에 있는 백제귀족들에게 위탁되었다는게 일본서기에 나와 있지.



만약 이 시나리오가 확실하다면, 백제의 왕자들이 인질이 아닌 위탁형식의 대사로서 일본에 있었다고 판단되어 질 수도 있다고 보지만... 아마추어 좆문가인 필자가 아무런 팩트없이 떠들어봤자 프로 사학계의 거두들의 이론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는법. 걍 그럴수도 있겠구나 생각해줘라ㅇㅇ;
 
 
무튼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주 복암리 다시면의 복암리 고분에서는 옹관과 백제식 고분의 양식이 층층이 조성된 것으로 발견되며 귀갑문(龜甲汶) 금동신발이 출토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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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산 마을에도 이와 같은 장고형 고분이 발견되는데,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야.
 
1994년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는 발견된 봉분 주변에 장식된 장례의식용 원통형 토기에는 몸통에 구멍이 있는데, 일본 효고현 고시키즈카 고분(五色塚)의 주변을 장식한 일본 하니와(埴輪) 토기와 흡사한 모습을 보여.
 
일본에서는 이곳에 6세기 왜인이 묻힌 일본식 고분이며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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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방후원형 무덤이라고 추측되던 경남 고성 송학동 무덤을 2000년 발굴할 때 일본사학자들은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석실 내부벽에 붉은 칠을 한 것과 일본 고대 토기와 흡사한 것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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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동 고분 또한 전방후원분으로 판단되어 일본사학자들에게 관심의 집중이 되는데, 내부 석실의 벽에 붉은 칠이 되어 있고, 4세기 왜의 토기와 흡사한 토기들이 발굴되었어.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였다고 일뽕을 거하게 쳐먹었던 일본사학계는 단숨에 찬물을 뒤집어 쓰는 꼴이 되는데, 한국 사학계의 조사 결과 가야의 고분으로 판명나. 원래 3개의 봉분(封墳)이 연결된 것인데, 도굴되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2개가 연달아 가라 앉아, 외부에서 보기에는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지ㅋㅋㅋ
 


고성은 과거 가야국에 포함된 지역이라서 임나일본부설에 집착한 일본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관심을 두던 곳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반박해버리는 지역이 되버렸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영산강 유역에서 여러 곳의 고분을 발굴하면서 한반도 남부 등지에서 고대 왜국의 영향을 확신하게 만들어.
 
토지샤(同志社)대학 모리 코이치(森孝一)교수는 4세기 왜는 중국과 직접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데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 왜의 지배 영역을 만들었다고 주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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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북 왜관(倭館)과 같은 곳이 이미 오래 전에 영산강 일대에 존재한 것이라는 것인데, 영산강 유역의 이러한 고분 발견 때문에, 임나일본부가 가야와 경남지역이 아니라 전남지역이라고 기술한 일부 학설과 교과서가 일본에 있어.
 
그러나 모리 코이치 교수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제영역에 임나가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하고 있어.
 
 
 
현대에도 이런데 과거에는 오죽했을까..? 송서 왜국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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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稱都督倭百濟新羅任那辰韓募韓
 
왜, 백제, 시라, 임나, 진한, 모한의 도독이라고 스스로 칭한다.
 
宋書 倭國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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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소나 가야는 내것이요. 내꺼라는데 누가 자기꺼라고 지껄이는게요?! ㅅㅂ...
 
 
아직도 그 위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한(募韓)’을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가야의 영향력 밖의 지역이며 이곳이야말로 왜가 점령한 임나이며 영산강이라고 주장해. 헛소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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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월야리 예덕면 신덕 고분의 내부에는 촘촘히 쌓아올린 석실인데, 내부 벽에 붉은 칠을 한 것이 일본식이야. 이것은 일본에서 발견되는 고대 고분 전방후원형 무덤과 닮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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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정권이 열도를 정복하면서 일본 전국에 전방후원형 무덤이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고분이 일본 전방후원형 무덤의 영향이라면, 일본이 4세기경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되는 것이므로, 장고형 고분 발견 당시 한국보다 일본사학계가 더 관심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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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후원분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와 성립과 지배 영역의 상징물이야.
 
야마.토 정부가 정복한 지역의 호족들이 전방후원분에 묻히게 되는데, 초대형 고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을 이용해야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을 증명해. 기록이 적은 고대사 연구에서 유물로 증명하는 고고학은 중요한 학문인데, 특히 고분의 축조기술과 출토품은 매우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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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후원분과 같은 8자 모양을 가진 중국 타호정(打虎亭) 고분은 3세기에 조성된 지역호족의 무덤인데, 북한 압록강변 자강도 송암리 88호 돌무지 고분(積石塚)은 돌로 쌓은 고구려 무덤이고 둥근 무덤앞에 사각형의 제단을 쌓아 놓은 모양이 전방후원분과 같다는 견해가 있어.
 
광주 월계동의 장고형 무덤은 주위를 둘러 싼 도랑, 주구(周溝)가 있는데, 이것은 닌토쿠왕릉을 둘러싼 거대한 호수와 같은 주구의 기원이 되.
 
1965년 최초로 발굴된 히라바루(平原) 유적에는 2m 폭의 도랑이 주위를 둘러싼 방형주구(方形周溝)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방후원분의 기원으로 봐.

3세기 후반 야요이 지방에서 시작된 방형주구묘는 키타큐슈(北九州)지역으로 전파되어 무덤의 앞부분이 길어지면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의 3세기 유적에서 봉분 주위로 깊이 파놓은 주구와 주구 안에서 철기시대의 두형(豆形)토기가 많이 발견되는데,전남 나주 노안면 안산리에서 발견된 영산강 장고형 고분도 더 넓은 폭 40m와 더 긴 길이 100m의 주구가 나타나.
 
전남 함평 월야면 예덕리 만가촌 유적은 4각형과 타원형과 사다리형 등 다양한 모양의 초기 주구형 고분이 모여 있어.
 
 
 
 
여기까지만 보면 ‘오오미 시방 고고학적으로 진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여!?’ 하겠지만
 
1996년 충남 보령 주교면 관창리 일본보다 100여년 먼저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주구묘가 발견되어 일본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아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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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외 지역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周溝墓)이기 때문에 일본 고유의 고분형태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된 주구묘가 일본 자생 독자설이라는 이론은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면서 일본사학계를 데꿀멍하게 만들어 버리지.

NHK에서 직접 헬기 대절해서 촬영해가고, 직접 현장을 찾아온 일본 사학자들 중 몇몇은 평생의 연구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통곡하기도 했다고 하더군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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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방후원분중 가장 규모가 큰 대선릉(大仙陵)고분은 앞서 언급한 닌토쿠(仁德)왕릉인데 이집트 피라미드와 중국 진시왕릉과 더불어 세계 3대 고분으로 알려진 일본의 초대형 전방후원형 무덤은 일본만의 자랑이며 야마.토 시대의 상징이야.
 
정식 능호가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차차자(百舌鳥耳原中陵)인 닌토쿠왕릉은 3중 해자(垓字)를 가진 전장 486m이며 궁내청에 의해 관리되는 일본 최대의 고분이야. 일본 오사카(大阪) 사카이(堺)의 모즈(百舌鳥)에 있어.
 
닌토쿠왕이 생전에 묘자리를 찾던 중 들판에서 죽은 사슴을 찾았는데, 그 사슴의 귀에서 떼까치(百舌鳥)가 튀어 나와 날아갔고 그곳을 묘자리로 잡았다고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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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태풍으로 왕릉의 토사가 무너져 마차를 닮은 특이한 모양의 토기관(土器棺), 마탁(馬鐸), 동경(銅鏡), 금동제 갑주(甲冑) 등 기마유물과 각종 토기류 등이 일부 출토되고, 야요이 시대를 대표하는 하지키(土師) 토기와 스에키(須惠器) 토기도 출토되어 현재 근처 사카이(堺)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
 
 
'스에-'는 '쇠'라는 한국어에서 온 말인데, 하지키(土師)는 이름 그대로 '흙의 스승'이야.
 
5세기경 가야로부터 건너온 가야인들은 왜인들에게 불의 기술을 전수해. 스에키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1,000도의 불을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이 기술은 곧 제철기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데, 스에키 토기는 쇳소리를 낼 정도로 얇고 강한 검은 토기야.
 
 
도명사(道明寺) 인근에 하제노고(土師の鄒)라는 마을이 하저씨(土師氏)들의 도읍(陶邑)인데, 도명사 천만궁(天滿宮)은 가야 도래계 토공들의 우두머리 노미스쿠네(野見宿祢命)가 무덤 주위에 토기와 토용(土俑)을 부장품으로 순장(殉葬)을 대신하자고 일왕에게 제안하여 하제라는 성씨를 받고 도읍을 봉토로 받은 것을 기념하고자 세워진 가마터 유적이라고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에서 밝히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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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궁에는 하제씨들이 사용한 거대한 나무로 깍아 만든 이동기계 슈라(修羅)가 전시되어 있는데. 슈라는 한국어 수레에서 온 말이라고 해.
 
이 슈라로 닌토쿠왕릉에 사용된 엄청난 양의 흙과 엄청난 무게의 바위를 옮겼다고 전해져.
 
닌토쿠왕릉은 연인원 약 150만명이 동원된 일본 최대의 세계적인 고분양식인데, 닌토쿠왕의 아버지 15대 오진(應神)덴노의 왕릉은 닌토쿠왕릉 다음으로 작은 전장 425m이지만 축조된 흙의 양은 더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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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왕릉이 일본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선정된 이유는 그 이전 고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기마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야.
 
예전어묘산(誉田御廟山)고분 혹은 에가노모후시노오카노미차차자(恵我藻伏岡陵)라는 능호로 불리는 오진왕릉의 내부에는 오진왕은 신공왕후의 아들이며 신라정벌 직후 츠쿠시(築紫)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그곳이 후쿠오카 우미(宇美)라고 하여 우미신사에는 오진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지. 오진왕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이란 설이 입증되는 부문이지.
 
 
오진(應神)덴노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말과 소가 왜(倭)에 나타나면서 농경문화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한반도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진 가야는 다른 삼국의 시기와 질투에 공격당해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일본 열도로 이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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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중요시 인정받는 후쿠오카 타케하라고분(竹原古墳)의 채색벽화는 고구려의 벽화를 보는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전방후원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인데, 이 고분의 채색벽화에는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와 벽화는 '중국과 조선반도의 영향을 받았다'(中國と朝鮮半島の影響受)라고 일본학자도 인정해.
 
 
지배층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타케하라 고분의 채색벽화에는 바다위에 떠 있는 배에서 두 마리의 말을 뭍으로 내리는 철갑투구와 갑옷의 남자가 그려져 있어.
 
벽화는 당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그려 넣는 것이 당연시 되는데, 당시 한반도의 말과 철기문명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온 것으로 추정되.
 
가야 멸망 이후 말과 제철기술과 앞선 문명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또한 오진(應神)덴노 이전에 일본에 말과 소가 없다는 기록이 삼국지 왜인전에 나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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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地無牛馬
 
그 땅에는 소와 말이 없다
 
三國誌 倭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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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도 일본의 건국신화에서처럼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내려온 곳이 구지봉이라는 것은, 가야신화와 공통이라고 인정해.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발언도 하지ㅇㅇ;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이며 가야 왕족인 오진(應神)덴노는 금관가야국의 멸망과 동시에 민족의 대이동을 통하여 고대 일본을 건국한 시조이다.'
 



이 무슨 ㅎㄷㄷ한 주장인가 !?
 
일본사학계에서도 오진 덴노 이전의 신대 역사는 신화라고 말하고 있어. 후쿠오카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사카만에까지 이르는 신대기 최초의 일본왕 진무(神武)덴노의 동정과 같아. 오사카만의 평원지대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그것이 가와치왕조(河內王朝)이지.
 
이름 그대로 일본 열도의 내해(內海)를 통해 이루어진 나라임을 암시하는 단어이지 않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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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닌토쿠(仁德)왕릉 외 107기의 전방후원형의 왕릉들이 이곳에만 있는데, 가야의 혈통이 새롭게 창조한 왜국의 가와치왕조는 한반도에서의 가야 멸망후 새로운 이름으로 150년이상 존속했어. 그후 한반도에서 도래한 더욱 앞선 문명과 정치세력을 가지고 온 백제계의 이동과 유입으로 가와치왕조도 멸망하고, 백제계의 새로운 왕조는 타케노우치가도(竹の內街道,오사카-아스카간의 일본 최초의 국도)를 통해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이동한 아스카(飛鳥) 왕조시대가 탄생해.
 
 
가야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 중 결사시대(缺史時代)에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난 생각해. 가야의 역사가 복원되지 않고는 고대 한일관계의 미스테리를 풀 수 없기 때문이지.





태그많다고 안올려지니 급 마무리 해야되겠盧 ㅠㅠㅠㅠ


   
급하게 결론 지어 이 긴 글을 정리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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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남진정벌은 한성 백제의 고위층을 열도로 보내면서 차후 백제의 차기 계승자가 망명하는 수준이였지만, 가야는 완전히 열도로 옮겨 새로운 왕국을 완성하게되는데, 초기 가야 연맹체의 하나였던 근기국의 제사장 부부 연오랑 세오녀가 넘어가 세운 청동기문명의 이즈모국을 이미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반도의 모국 가야와 연락하였다고 추론할수 있을거 같아. 추론이 맞다면 이즈모국과의 교류로 일본 열도의 상황을 가야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
 
영산강에서 부산 지역에 걸친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 가야는 고구려의 남진정벌을 피해 마침내 열도의 오키나와와 큐슈 등으로 민족 대이동을 감행하여 야마.토를 건국하고 명실상부한 열도 최초의 정복자 오진(應神)덴노가 되었다고 환빠틱한(?) 주장을 펼칠수 있어.

오진덴노가 가야도래인의 후예가 아니고 원주민의 후예라고 해도 당시 야마.토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가야도래계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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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진덴노가 가야 도래인의 후예이면 당시 야마.토에는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도래인과 정치적 망명으로 일부 이주한 백제 도래인들이 공존하지만 가야는 앞선 제철기술과 기마문명과 여전사들까지 가세한 엄청난 전투력을 갖고 단기간에 큐슈와 서일본지역을 점령하고 열도 내해의 군소부족국을 정복하여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정권을 세웠을거야.
 
한반도 남부 고천원이 고향이라는 일본 건국신들의 신화, 근기국 출신의 제사장 부부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 영산강 장고형 고분과 일본 최초의 철기문명 무덤 전방후원분의 뒤에는 금관가야라는 존재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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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4,5세기, 바다 건너 열도에는 기이하게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야마.토정권이 탄생하고,수로왕의 7왕자 직계후손이 오진(應神)덴노로 재탄생 or 가야 도래계의 후손들이 무너져가는 자신들의 고향인 가야를 넋 놓고 지켜 볼 수 없었을거야. 그런 이유로 해서 결국 백제 성왕이 주최한 임나재건회의에 참가하게 되고, 성왕의 복수전에 1,500 ~ 2,000명의 군사를 파견하게 된거지.

하지만 이 절박한 도움의 손길은 백제의 영웅왕인 성왕이 구천에서 전사하고, 태자 여창의 주력군이 백골산 전투에서 괴멸되면서 좌절되어버렸어.

관산성 전투의 결과 패전의 당사자는 백제뿐만 아니라 10,000 ~ 15,000명의 병력을 참가시킨 대가야도 마찬가지였어. 대가야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을 병력을 잃게 되었는데, 그 여파가 엄청나서 백제와는 달리 회복을 못하고 8년뒤인 서기 562년 신라의 병부령인 이사부의 보복 공격을 받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려.가야는 당시 왜(倭)의 입장에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그런 왜(倭)의 고향이 신라에 망하게 된 것이지ㅇㅇ;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가야와 함게 동맹을 형성하고 약 1,500 ~ 2,000명의 병력을 파병했던 고대일본 "왜(倭)"였기 떄문에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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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 킨메이(欽明)

대가야 멸망소식을 들은 왜왕 킨메이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 그 자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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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중략)...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중략)...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23年 6月 해석

천황이 마침 대궐 밖으로 나가있던 황태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들이고 병상 가까이 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마. 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나, 옛 가야를 재건하여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천황이 이 달에 돌아가셨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32年 4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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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신라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저주 그자체이지 않盧?

그러다 보니 왜는 백제와 더욱 긴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후 백제마저 멸망해버리고 왜(倭)로 건너간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서기 집필에 깊게 관여하였으니 백제와 가야가 신라에 가졌던 감정이 그대로 일본서기에 표현된 것이지.  또한 고향인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표현하자니 자존심 상하기 때문에 왜왕인 천황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쓴 일본서기에선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왜곡한 것이 일본 역사왜곡의 핵심이야.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왜(倭)가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한다면 마치 미국이 영국을 지배했다는 논리와 같은 어불성설 그 자체이지.  이렇게 군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와 실상을 쉽게 해석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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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보더라도 신라를 공격한 것은 왜로 나오는데 오히려 광개토대왕이 끝까지 추격하여 결과적으로 멸한 것은 금관가야였어. 그 이유는 뭐겠盧?? 

바로 가야가 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기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그 근본인 금관가야 멸했던 것이지ㅇㅇ;


역사는 곧 전쟁사이므로 역사는 군사적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제대로 된 해석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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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이치에서 물은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흘러들어가듯,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문명 또한 대륙에서 대양으로 이동했어.
 
저 멀리 스키타이 평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 고천원을 거쳐 자리잡았다가 떠난 가야인들은 조용한 극동의 열도에서 영원한 태양의 제국 야마.토정권을 세우고 만세일계의 일본왕가의 첫 순수혈통을 수혈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관산성 전투에서 왜(倭)의 참전은 마지막 불꽃이 꺼질려고 하는 고국 가야에 대한 가야 도래계의 절박한 손길이였을거야.
 
 
 







 
 
 





 
 
이로서 고대 한일관계의 미싱링크 중 하나인 가야와 왜(倭)의 관계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추측과 추리로 풀어써봤어.

필자인 내가 여러 가지 사료와 유물을 가지고 무리한 억측으로 한일 고대사의 Missing Link인 가야와 왜(倭)의 관계에 대해 추적하면서 썼지만 다 쓴 지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盧; 추측이기에 주장에 대한 논지가 부족한 점에 대해선 위에서 계속 언급했지만 ‘그럴수도 있겠구만? , 색다른 주장이네‘ 하며 재미있게 읽었기를 바래. 다시한번 밝히지만 난 환빠가 아니다ㅋㅋㅋㅋ;
 
다시 한번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 많았고 다음 외전은 삼국시대 각국의 무기와 방어구,그리고 전술에 대해 알아볼께. 좋은 밤 보내라 게이들아ㅋ





ps. 태그 입력도 안했는데 무슨 태그가 많다고 안올려지냐;; 어이없盧; 쓰다만 느낌이 쌔하네....;;;;  고고학적 유물등에 대해서는 궁금하다면 댓글로 싸그리 알려줄께;;; 미안하盧;







3줄요약


1. 한일 고대사의 핵심은 백제-왜가 아닌 가야-왜 이며, 신라의 팽창정책으로 인해 압박을 받던 가야인들 중 많은 수가 초기 왜(倭)의 한반도 도래인이 되었으며 당시 우수한 제철기술과 직조기술 등 첨단기술을 가지고 건너간 가야인들은 못해도 일본열도에서 꽤 상층부의 역활을 하였을거라 짐작이 됨ㅇㅇ

2.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지만 '아마' 일왕가의 초기 혈통은 Only 가야계 or 죠몬인+가야인의 혼혈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며, 여러가지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일왕가의 초기 혈통이 가야계가 아니란걸 백번 양보한다고 쳐도 당시 야마.토 정권 내에서의 핵심 권력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또한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적을 살펴 보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임나회복운동의 변질된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으며,결국 관산성 전투 당시 왜군의 참전은 백제간의 혈통, 혈맹적 의미가 아닌 무너져가는 조국에 대한 가야도래계의 절박한 구원의 손길이였음.

(참고,인용 문헌과 논문에 대해서는 태그가 많다고 하니 나중에 정리해서 올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