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4탄. 신라판 300인 굴산성 전투와 핏골전투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5탄. 백제의 영웅왕, 구천에서 지다.
























이제 관산성 전투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야.

사실 2편 쓸 당시 너무 텀이 길었고, 밀게에 전쟁사를 올릴때 자세하게 쓰다보니 이게 전쟁사 글인지 역사글인지 애매해 게이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까 혼자 의식해서 걍 접고 다시 눈팅종자로 돌아갈라고 생각했었어;

그래도 한번 한 약속이니 2탄 올려보고 싫어하는 분위기면 깔끔하게 접고 눈팅만 하자. 했는데 예상외의 뜨거운 칭찬과 성원에 노무노무 기운났다ㅋ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글을 쓰게 되기까지 밀게이들의 기다림과 성원이 나한테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아 이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남긴다ㅋ


ㅁㅈㅎ 주는 게이들아. 사실 ㅁㅈㅎ 줘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ㅋ 
읽어보고 게이들의 생각과 다르니까 ㅁㅈㅎ 준거라고 생각하盧ㅋ 틀린 내용이 있으면 ㅁㅈㅎ 주고 댓글로 일침 부탁한다ㅋ


















사설이 노무 길었盧

이제 관산성 전투의 하이라이트인 백골산 전투와 전투 결과에 따른 여파에 대래 써볼께.

이번글은 여타 글보다 조금 들어가는 초입부분이 길거야ㅇㅇ; 이번에도 기록을 토대로 내 추측이 난무하겠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해볼께

그럼 첫번째로 백골산 전투의 주역인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군주 아찬 김무력(金武力) 군이 어디에 있었을지에 대해 알아보자ㅋ













 
한성백제의 옛땅을 신라가 차지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군이 바로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이야.






김무력 일러스트.png

김무력 일러스트(?)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 즉, 한성백제의 옛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新州)로 삼았어. 그 신주의 군주(軍主)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무력(金武力)이지.

이 신주(新州)를 살펴보면 신라의 독특한 지역지배 방식을 엿 볼수 있어. 하지만 이 글을 적으면 계획했던 분량을 너무 오버하게 되니 게이들이 직접 한번 찾아보는게 좋을거 같盧ㅋ


무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무력 휘하 부대의 주둔위치야.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新州)뿐만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에도 주둔하고 있었어.  삼국사기만 봐도 당시 도살성과 금현성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요충지였지. 

바로 그곳에 김무력 휘하의 신주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 군단이 백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대미를 장식하게 돼.




그 당시 신라가 설치한 신주(新州)지역인 한성백제 옛땅은 신라 입장에서는 최전방중의 최전방이야.  
보통 최전방엔 군 최고 사령부가 위치하지 않고 보다 후방에 위치하잖아?


이 추론의 근거는 삼국사기 진흥왕 11년조에 기록되어 있어. 


-----------------------------------------------------------------------------------------------------------------------------------------------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개의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획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상 김무력이 획득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해. 

진흥왕 11년엔 이사부는 고령인데다가 실전에 참여하지 않는 병부령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지. 



이사부.jpg



그럼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은 어디일까?  


일단 이것부터 알아야 앞으로 서술할 김무력군의 진격 예상경로를 알 수 있을거야.






 
관산성 전투를 엄밀하게 다루어 볼때 그 시작은 도살성(道薩城) 전투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어. 도살성 전투라 하면 성왕 28년인 서기 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먼저 공격해서 빼앗고 그로부터 2달 후인 3월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보복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서 시작한 전투이지.

이 전투에 대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28년(550년)에 기록이 있어.


-----------------------------------------------------------------------------------------------------------------------------------------------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聖王 28年 


-----------------------------------------------------------------------------------------------------------------------------------------------



그런데 이 전투의 결과는 엉뚱하게도 백제나 고구려의 승리가 아닌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는 점이야.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백제와 고구려가 치고받고 시작하였는데 끝은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한 결과를 내고 말았어. 

이때부터 진짜 백제가 신라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시각을 버리고 신라와 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어.





신주의 위치.jpg

신주(新州)의 범위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 신라는 553년 한강하류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그 발판은 이 도살성(道薩城)이었어. 

한강하류 지금의 하남시 지역에 신라는 신주(新州)를 설치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신주는 도살성과 금현성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야. 








551-553 당시 신라의 행정구역지도.jpg

551~553년 당시 신라의 행정구역지도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경주 이남을 하주, 그 윗지역을 상주(上州)라고 하는데 현재의 상주(尙州)가 바로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지명이야.

※참고로 고려시대에도 이 지역을 상주라고 불렀는데 단지 한자가 다른 상주(尙州)라고 불렀어. 現 상주시의 한자 표현이 2개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어. 어느곳에는 上州, 어느곳에는 尙州로 표기되어있는데 거의 후자를 사용한다고 하니, 그렇게 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거 같盧 ㅋㅋ;;



 그 후 신라가 팽창하면서 소백산맥을 넘어 새롭게 차지한 한강유역일대를 모두 신주(新州)라고 칭하였어.

※지도에서 내가 중원경(中原京)으로 표기한 지역은 사실 당시의 지명은 삼년산군(三年山郡)이야. 근데 왜 지도엔 중원경으로 쓴거냐 하면 관산성 전투가 끝난 후인 3년뒤 서기 557년 진흥왕 18년에 이 충주를 국원소경으로 명칭을 지정했다가 경덕왕때 중원경으로 바뀌었고, 이 지역을 예로부터 중원경으로 쭉 고려시대까지 부르는 점을 감안하여 부르기 쉽게 썼음ㅇㅇ; 이해바란다ㅋㅋ;

 

따라서 한강 하류인 뿐만 아니라 도살성도 신주에 속하는 영역인데, 관산성 전투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주 군단이였지.






관산성 전투 후반기 양군의 최종 대치도.jpg

성왕 전사 직전의 백제, 신라 양군의 대치도



관산성 전투 초기 백제-왜-대가야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던 신라가 굴산성(屈山城)과 김천,핏골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관산성에서 성왕을 사로잡고 난 후에 역전된 전세를 확고하게 잡았다고 전글에서 추론했어

그 후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을 전멸시킨게 바로 신주의 김무력 군대인데, 그 신주 군단의 근거지가 사실상 도살성과 금현성이라고 비정 할 수 있어. 



어떻게 보면 신라와 백제의 국운을 뒤바꾼 관산성 전투의 시작점이자 끝점이 도살성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도살성의 위치조차 모르고 도살성 전투에 대해서 역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盧?!

또한 도살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한차례 더 기술되는데,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어.


-----------------------------------------------------------------------------------------------------------------------------------------------



二年, 秋八月, 百濟將軍殷相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出禦之, 分三軍爲五道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僵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擊,

時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진덕여왕2년(648)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치므로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 장군들을 시켜 방어하도록 하였다. 김유신은 3군을 다섯방면으로 나누어 적군(백제)을 쳤으나 서로 승부를 주고 받으니 10일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을 가득 메우고,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유신은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말을 쉬게 하면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재차 진격할 계책을 도모하엿다.
 
이 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신의 군막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흉조라고 여기자 유신이 말하기를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정탐을 하려는 백제의 첩자가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신은  사람을 시켜  군중(軍中)에 령을 내렸다.
"굳게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 결전을 하리라."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자 은상(殷相) 등은 신라에 원군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의혹과 더불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일시에 들이쳐서 크게 이겼다. 벡제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達率) 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여 왔으나 유신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서울(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中  발췌 
 

-----------------------------------------------------------------------------------------------------------------------------------------------





관산성 전투(554년) 이후 약 100여년이 흘러서 또 다시 신라와 백제는 도살성 부근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던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피가 흘러 방패가 떠 다닐정도였다.” 라는 부분에서 전투의 치열함과 처참함을 정말 노무노무 잘 표현한거 같지 않盧?  

방패가 떠 다닐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의 전투를 상상해 보면 치열했던 격전 상황을 그려볼 수 있어




이렇듯 도살성은 또 한번 신라와 백제의 대규모의 처절한 전투의 장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역사속에서 뭍혀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盧?
 
모름지기 전쟁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투지역과 각 군의 배치를 먼저 살펴야 그 전개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데,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를 모른다는 점이 내가 관산성 전투의 재구성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어.
 
그래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여러 관계서적을 뒤져봐도 딱히 여기다 하는 내용이 없었으며, 사학자들도 대충 여기저기 추정하고 있을 뿐이었지.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인터넷자료를 보면 도살성과 금현성을 중국대륙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환빠글을 보면 어이가 없었어.


삼국유 미상지명.gif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위치를 모르겠다고 하는 지명들이 중국대륙의 지명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짤




당시 삼국간의 전투전개상황과 병력배치나 이동등을 도외시 하고 단지 “Kia~ 주모 여기 국뽕 한그릇 가지고 오셔!”라는 생각에 신라가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척없는 생각이였지.
 
일부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서 대륙 백제설을 주장하는 경우는 있지만, 분명하게 관산성 전투 당시에 신라,백제,고구려 간의 전투는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건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이라면 그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어. 

이것에 대해서는 문헌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물로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 당시의 도살성 위치를 중국대륙이라고 주장하는 환빠들을 보고 씁슬함을 느낄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군사적 관점에서 객관적 자료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도살성의 위치를 찿아보고자 마음 먹고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어. 경제는 경제 논리로 풀고 정치외교는 정치외교 논리로 그리고 전쟁은 군사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일반적 논리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 판단 아니겠盧?
 

그러므로 난 3가지의 주장을 펼칠까 해. 내 주장을 읽어보고 게이들의 많은 의견 부탁한다ㅋ


 




첫번째.  도살성과 금현성은 그렇게 멀지 않은 인접 거리내에 있어야 함.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이사부의 병력이 두 성을 모두 차지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한다면 신라의 동일한 부대가 작전을 수행한것으로 이해 되므로 두 성의 위치는 신라가 동시에 작전을 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해. 달리 말하자면 금현성과 도살성은 서로 그렇게 멀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




두번째. 역사적 기록에 근거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했고 그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도살성은 고구려 영토에 있어야 하고 금현성은 백제 지역에 속해 있어야 해.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도살성과 금현성을 마지막엔 신라가 차지하고 말았으니, 두 성은 신라가 접근할 수 있는 범위내에 존재해야 하지. 

즉, 이말은 도살성,금현성 모두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접경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지
 
 


세번째. 두 성을 차지한 이후 신라가 한강하류인 한성일대에 신주를 설치.



김무력을 신주의 군주로 파견하게 되기 때문에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가 한강하류로 접근할 수 있는 루트상에 존재해야 해.

549-550년 당시 보은,문경,충주,천안 지방의 각국의 주공루트.jpg

549~550년 당시의 세력 구도 // 점자로 표현 된 곳이 551년 고구려로부터 백제,신라가 빼앗은 영토


즉, 지금의 경상도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중간지역에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550년 당시 신라는 이미 충청도 보은의 삼년산성과 문경세재의 고모산성을 발판으로 해서 충주지역까지 진출한 상태이므로 도살성과 금현성은 삼년산성과 고모산성 그리고 충주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으로 봐야 해.
 







이러한 3가지 사항을 공통분모로 할 수 있는 삼국시대의 성을 찾기로 했어. 그게 지금까지 내가 구글어스로 표현한 모든 지도에 찍혀있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들의 분포이지ㅋㅋㅋ;  사실은 나중에 쓸 글들에 대한 사전 준비로 제작한걸 유용하게 써먹은듯ㅋ










연기금이성.jpg

연기군 전이면의 금이성



인터넷의 자료엔 상당히 많은 자료에서 천안(天安)을 도살성으로 그리고 연기군 전의면(燕岐郡 全義面)을 금현성의 위치로 추정하고 있었어. 

천안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천안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천안의 삼국시대 지명으로 도살성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그리고 금현성에 대해서는 천안 바로 아래인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금이성을 금현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위치를 봤을때는 지리-군사적 측면에선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그러면 어떤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냐? 라고 되묻는 게이들이 있겠지? ㅋㅋ



내 생각은 다음과 같아.



먼저 현재의 천안 시가지가 형성된 지역은 삼국시대 보다는 고려시대에 와서 융성한 지역이야. 삼국시대엔 현재 천안 지역보다는 목천(木川) 지역이 보다 중심이 되는 지역이었어. 


천안시의 이동.jpg


현재의 독립기념관으로부터에서 유관순의 만세운동이 일었던 병천(竝川)지역으로 지칭되는 목천일대는 웅진백제시대 강력했던 군사호족이자 국상(國相)이였던 목협만치(木劦滿致)의 세력 근거지이기도 해. 

※ 사료와 기타 인터넷 자료에서는 목협만치를 그냥 대신으로 추정하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태자 문주를 데리고 웅진으로 내려갔다는 정황과, 문주가 신라의 원병을 데리고 한성으로 다시 간 점을 본다면 국상이였거나 or 최고위 관직의 관료라고 판단이 되서 써봤盧...ㅋ;

그런데 이런 곳을 도살성이라 비정하는 것은 천안 목천일대가 도살성이 고구려영역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아. 또한 천안-목천 일대지역은 신라의 중부지역 최고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충북 보은(報恩)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550년 당시 나제동맹 주력군이라 할 수 있는 고모산성과 충주산성에 배치된 신라군의 지원을 받기에 부적합한 장소로 보여.





천안의 지정학적 위치.jpg

천안의 지정학적 위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안을 도살성으로 추정한다면 가장 먼저 천안은 당시 고구려의 영역도 아닐뿐더러 신라가 접근하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아. 

서기 550년 당시 신라는 소백산맥을 겨우 넘은 정도에 불과해. 이때 신라군의 사령부 및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곳은 상주 군단 휘하의 죽령방면군으로는 온달산성과 단양적성 쪽이 되고 문경세재를 넘는 조령방면군의 사령부는 고모산성이 핵심기지였어. 





550년 당시 신라 방면군 군 사령부 위치.jpg

550년 당시 신라의 방면군 사령부 위치
(구글어스의 성들의 색깔을 일일이 지정하는 불편함 때문에 지도의 퀼이 ㅎㅌㅊ인점 미안하盧)



고모산성의 전방 기지는 충주시에 있는 충주산성으로 비정이 될 수 있어. 그 다음으로 추풍령 방면군의 사단 사령부 역할은 삼년산성(三年山城)이고, 그 삼년산성의 전초기지역할은 옥천군 청성면(沃川郡 靑城面)에 자리잡고 있는 굴산성(屈山城)이였지.





도살성이 천안이면.jpg

 

이렇게 신라군이 군사령부를 고모산성과 삼년산성에 두고 있는 전선배치에 대해서 고구려군은 괴산(槐山),증평(曾坪),진천(鎭川)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어. 따라서 만약에 천안이 도살성이라 한다면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는 괴산-증평-진천을 거쳐가야 하는데 군 작전과 군 기동의 보편적 원칙에 맞지가 않아.
 





금현성이 금이성이면.jpg


또한 금현성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금이성의 위치 또한, 당시 백제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청주(淸州),청원(淸原) 일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역시 이치상 맞지가 않아.
 
만약에 천안이 도살성이라 하고 연기군 전의면 일대를 금현성(金峴城)이라고 가정할 때, 백제가 고구려의 영토인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가 백제영토인 금현성을 차지했다고 한다면 금현성의 위치가 도리어 백제가 차지하고 있는 도살성보다 더 웅진(공주)쪽에 가깝게 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 두곳은 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지 않겠盧?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좀 더 많은 자료를 찿아 보았어.
 





그중 천안은 도솔(兜率)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단 자료가 있어. 이를 근거로 한번 추론해볼께.
 
현재 천안 일대가 사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부터야. 당시 이 지역 명칭이 동도솔 서도솔이라 불리웠다 해. 그런데 이 도솔이라는 명칭은 불교 용어에서 비롯된 말인데, 극락세계를 갈 때 꼭 거친다는 서방정토의 도솔천(兜率天-Tusita)에서 유래된 말이야. 


홍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줘야 제맛이지.jpg

홍어는 삼일에 한번 패줘야 제맛이지



그리고 통일신라말 후삼국시대엔 미륵불(彌勒佛)사상이 널리 퍼지던 시기였지. 일베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궁예(弓裔)가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부처라고 지칭한 것을 되세겨 본다면 금방 이해될 부분이야. 이 동도솔과 서도솔을 합쳐 도솔이라 불리웠는데, 그렇다면 천안(天安)과 도솔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반문할거야. 



이 근거는 바로 극락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 도솔천안(兜率天安)이기 때문이야. 


즉, 미륵불사상에 비롯된 도솔천안에서 앞부분 도솔(兜率)이 빠지고 천안(天安)으로 불리게 된 것이지.


 
그런데 이 점을 간과하고 도살성과 도솔의 발음이 유사해서 천안시청이 그렇게 표시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 천안을 삼국시대의 도살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일부 사학자들이 천안시청에 반발했고, 수정하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모르겠盧.....






연기금이성.jpg

연기금이성


또한 연기군 전의면의 금이성은 지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말 고려초의 유물만이 출토됨으로서 삼국시대 산성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왔어.


결국 나의 조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도살성과 금현성 위치에 대해서 엎치락 뒤치락 하던 중 우연하게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인터넷 기사에 도살성과 금현성에 관하여 자세히 실린 것을 보게 되었어. 이 도살성과 금현성에 대한 기사가 정말 알차더라고ㅇㅇ;




기사에 보니 청주(淸州)를 도살성으로 그리고 진천(鎭川)을 금현성으로 추정하고 있었어. 그 기사는 나의 시선을 진천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어.

관산성 전투 현장인 옥천지역의 산성에 대해서 조사할 때 옥천군 홈페이지 자료를 노무노무 잘 써먹어서 혹시나 하고 진천군청과 청주시청, 그리고 증평군청의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졌어. 이럴땐 인터넷이 참 좋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盧ㅋㅋㅋ 

 
요즘은 지방 자치단체의 홈피가 상당히 잘 꾸며져 있는데 특히 각 지역의 향토유적이라든가 유래에 대한 숨은 자료를 손 쉽게 찿을 수 있어서 인터넷의 덕을 톡톡히 보았어. 각 지방자치단체의 향토자료에서 지역 유래와 삼국시대 산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그 위치를 파악해서 구글어스에서 지형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작업을 진행했지.
 
그 결과 압축된 지역은 증평(曾坪)과 진천이였어. 



김유신 태실.jpg

진천 태령산의 김유신(金庾信) 태실(胎室)


특히 진천은 김유신의 태실(胎室)이 있는 태령산(胎靈山)과 유허지로서 유명한 곳이 잖盧?  또한 삼국시대엔 고구려 영토였으니 순간 Feel이 왔지.



군사적 측면에서 한번 살펴보면

먼저 삼국의 접경지역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도살성과 금현성은 그 위치가 서로 멀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으로 가는 중간역할로서의 지역이어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좀 더 구체적인 위치를 추정하기 시작했어. 그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밑짤과 같아





3대 조건 부합지역.jpg



기사의 내용엔 도살성의 위치를 지금의 청주로 비정하고 있盧?!. 그래서 청주지역의 무슨 산성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청주엔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있盧?!

그 지역적 유래를 보면 삼국시대엔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리웠고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낭성(娘城)이라고 하는 곳에서 들었다는 유래도 있어. 그 낭성을 상당산성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는데 위치가 마음에 걸리盧;

※ 글다쓰고 한번 찾아보니 결국 이 낭성을 청주 상당산성이라고 밝혀졌다는 기사를 봤盧......ㅅㅂ
 

도살성은 550년 당시 고구려 영토인데 상당현(청주)에 대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백제영토였다가 신라의 상당현으로 바뀐 것으로 나와. 또한 위치도 보면 신라의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과는 인접해 있지만 고구려의 작전영역으로는 조금 멀어보여. 결정적으로 금현성으로 추정하는 진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너무 백제의 영역에 치우쳐 있기에 군사적 관점에서 도살성으로 보기엔 부족해.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니 증평의 옛지명에서 단초가 될 만한 것이 잡혔고, 결국 다시 증평(曾坪)으로 눈을 돌려 보았어. 

증평군의 연혁을 살펴보는데 눈에 밟히는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증평군 도안면에 있는 이성산성(二城山城)이였지.



이성산성과 보강천.jpg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보강천



이성산성의 위치는 금강의 증평지역 상류인 보강천(寶崗川)을 자연해자로 삼고 증평의 미호평야(美湖平野)를 굽어보는 나지막한 산성이야. 그런데 그 위치가 바둑에서 본다면 혈맥의 점과 같아. 청주에서 출발하여 미호평야를 거쳐서 괴산과 충주로 가려면 이성산성을 거치지 않고선 갈 수가 없는 딱 그 위치여서지. 

밑의 짤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거야.








청주에서 충주로 가는 루트.jpg

청주에서 충주로 가는 루트


군 전략적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걸 보면 이성산성이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들어올거야. 그런데 음운학적으로는 도살성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하지만 반대로  군사적 측면으로 접근해보자면, 고구려 입장에서는 충주 국원성(國原城)에서 연결되는 이성산성은 백제의 청주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곳으로서 미호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위치야. 그런 이유로 해서 백제입장에서는 이성산성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지 않겠盧?

그런데 문제는 도살성과 이성산성이라는 이름엔 전혀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좀 걸렸지;;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국원성.jpg


구글어스로 본 이성산성



구글어스를 통해본 이성산성을 직접보니 이성산성은 산이라기 보다는 나지막한 언덕베기라고 하는 것이 더 맞아보여. 마치 우리집 뒷동산같아 보이盧...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미호평야.jpg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미호평야



그러나 이성산성에서 찍은 사진들을 검색해서 보니 눈앞에 펼쳐진 미호평와와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상류인 보강천이 한눈에 들어와 보였어. 말과 군사를 먹이고 주둔하기엔 이보다 더 편한 장소가 없어 보였지. 

그리고 나서 증평군 홈피에서 주변 문화재에 대한 게시물을 볼때 밑의 참고자료가 있는걸 보고 이거다 싶어서 찾아봤어. 그게 바로 1997년도에 실시했던 이성산성 지표발굴조사 보고서였지. 증평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관내 문화유적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이성산성에 대해서 조사를 한 것이라고 하더라고ㅇㅇ;


이성산성 발굴조사.jpg 

이성산성 발굴조사 당시의 사진



보고서를 읽으면서 이성산성이 삼국시대 도살성이라고 비정하는 학자의 이야기를 떠올려봤어. 이성산성이 관산성전투의 시발점이였던 도살성이였다고 추측을 하고 발굴 자료들을 보니까 이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초기 즉, 삼한시대까지 올라가는게 아니던가!?
 
그러면서 증평의 삼국시대 지명이 도서현(道西現)이라고 적혀있었어. 이 문장을 보니 갑자기 뒤엉켜있던 실타래가 갑자기 술술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 
 
몇가지 자료와 유물들과 이러한 지명의 변화를 통해 이 보고서가 다른곳에선 얻을 수 없었던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었지ㅇㅇ;








간추려서 이 보고서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보고서 앞머리엔 이성산성의 역사적 배경부터 설명하고 있어.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청주,보은,영동,옥천등은 백제의 군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괴산,진천,충주,음성등은 고구려 군현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먼저 밝히고 있지. 


삼국사기 지리지.jpg

삼국사기 지리지




또한 이성산성이 위치해 있는 현재의 증평군 도안면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흑양군(黑壤郡) 도서현(道西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도서현(道西縣)의 행정업무의 중심인 도서현성을 이성산성이라고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밝히고 있어ㄷㄷ 

이 내용은 주석에 별도로 표기하고 있는데, 민덕식씨가 1983년도에 사학연구에 올린 글이였지. 그렇다면 일단은 도살성과 이성산성의 연결고리로서 하나는 찾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盧??

※ 이 민덕식씨는 삼국시대 지명과 성, 건축물 방면의 전문가이자 대가야. 이분의 자료를 한번 쭉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盧..ㄷㄷ






증평 청동기 유물.jpg

당시 발견된 토기




이성산성의 축성된 시대적 배경으로서 고고학적 유물에 관련한 내용을 보고서엔 기술하고 있는데, 증평군 일대는 고구려가 진출하기 이전인 청동기 및 철기시대 유적도 혼재하고 있다고 표기하고 있어. 이성산성에는 삼국시대 토기가 주로 발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그 시대적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이로서 이성산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임을 알 수 있었어.










진천 대모산성.jpg

진천 대모산성

 

이어서 보고서 p22에 나와있는걸 보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6년(484년) 고구려가 모산성(母山城)을 침공하였으나 나제동맹(羅濟同盟)에 의해서 격퇴되었는데 모산성(母山城)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제동맹군의 활동으로 미루어 보아 청주(淸州),진천(鎭川)부근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기술하고 있어. 하지만 모산성은 사학계에서는 진천의 대모산성(大母山城)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어서 지표조사 보고서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데 소지마립간 16년(494) 신라는 고구려군과 살수지원(薩水之原)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지금의 견훤산성)으로 후퇴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바로  '살수지원'이라는 글자야.
 


그래서 살수지원(薩水之原)이 어디일까? 하고 찾아보니, 인터넷에 금현성과 도살성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의 블로그의 자료가 눈에 띄었어.

증평이 고구려가 점거했을 당시 도서현이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수지원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성산성을 도살성이라 연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자세히 읽어보니 '현재 충북 청천은 괴산군에 속해있지만, 괴산군은 한강수계이고 이곳 증평은 금강수계라서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는것이 아니겠盧? 







금강수계와 한강수계.jpg


금강수계의 증평과 한강수계인 괴산




그래서 지도를 살펴봤어. 증평(曾坪)과 괴산(槐山)은 고개하나를 두고 나뉘어 있지만 거리는 무척 가까운 편이였지. 그러나 괴산한강수계의 중,상류지역이고 증평금강수계의 상류지역이였어. 강줄기가 다르면 문화가 다른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그렇기에 이곳이 삼국의 접경지역이며 격전지가 되는 더 강력한 단서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블로거가 재차 확인시켜줬지ㅋ





살수대첩 기록화.jpg

살수대첩 기록화

 

원래 살수하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을 떠올리는데 살수(薩水)라고 할때 살(薩)은 우리말인 “물살”할 때 그 “살”을 의미해. 삼국시대의 표기방법중 하나인 이두식(吏讀式) 표기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살수라고 할때는 물살이 쎈 강 상류를 의미하지. 따라서 도서현에 속한 이성산성과 살수지원(薩水之原)의 의미를 연결하면 이성산성을 도살성이라고 보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논리적 추론이지 않을까?



무튼 대략 도살성에 대한 위치 비정이 명확해졌어. 그렇다면 금현성은 어디일까?
 



참고한 기사에서는 금현성의 위치를 지금의 진천(鎭川)일대로 비정하고 있었어. 또한 진천에는 김유신 탄생지이기도 하고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부임한 곳이 바로 진천이지. 도살성으로 추정한 증평의 이성산성과 진천은 지도상으로 봐도 지척이나 다름이 없어. 고개를 하나 사이에 두고 충북지역에서 보기 드문 평야를 끼고 있는 곳이지.
 
이해하기 쉽게 아래의 지도를 보자. 


증평과 진천의 위치.jpg




증평의 이성산성이 도살성이다라는 추정의 근거를 앞서 서술하였는데 현재의 진천 또한 교통의 요충지이자 진천평야를 끼고 있는 곳이야.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현재의 진천을 고구려 영토인 흑양군(黑壤郡)으로 표기하고 있어. 물론 이것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으로 인해 충주를 고구려의 국원성으로 삼았을때의 시기야.





대모산성 유물.jpg

대모산성 주변에 널린 삼국시대 기와 , 토기 파편



진천에 있는 도당산성(都唐山城)이나 대모산성(大母山城)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층엔 백제의 유물이 그다음엔 고구려 상층에 신라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이 진천의 지리적,역사적 환경을 나타낸다고 말 할 수 있지않겠盧?

 
그렇다면 '어째서 진천을 550년 당시 백제의 금현성으로 추정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앞서 전제한 바와 같이 삼국의 접경지라는 전제 조건과 도살성과 그리 멀지 않고 신라의 접근성이 용이해야 한다는 조건, 신라의 한강 하류인 신주(新州)로 연결되는 루트상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등을 종합적으로 추론해서 그 주장했어. 왜냐하면 금현성에 대해선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
 




한편으로는 고대 전쟁의 불문율이라 할 수 있는 등가성(等價性) 원칙인,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

그럼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한번 보자.
 



-----------------------------------------------------------------------------------------------------------------------------------------------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聖王 28年



----------------------------------------------------------------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진흥왕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三國史記 新羅本己 眞興王 11年



-----------------------------------------------------------------------------------------------------------------------------------------------

 



한마디로 백제의 공격에 대해서 고구려가 즉각적인 보복공격을 감행하였는데 공격받은 성이 아니라 다른 성이야. 보통 이럴 경우엔 앞서 말한 등가성 원칙에 따라서 공격받은 성과 같은 성격과 가치의 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 점에서 진천일대는 증평의 도살성과 똑같은 전략적인 위치에 서있지 않盧?

다시한번 위의 짤을 가져와 봐서 보자ㅇㅇ







금강수계와 한강수계.jpg


증평 바로 위가 진천

 

지리적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의 도살성으로 추정되는 이성산성(二城山城)의 경우 미호평야를 굽어보고 있는데 이성산성 바로 앞은 금강상류인 보강천(寶崗川)이 해자처럼 두루고 있어서 자연 방호 역할을 하고 있어. 또한 이성산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충주(忠州)나 괴산(槐山)쪽으로 갈 수 없는 길목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요충지이지. 

한편 이성산성은 백제와 접하는 고구려의 최남단 성으로서 백제가 공격하기 위한 접근로가 쉽게 펼쳐져 있어.

마찬가지로 진천의 경우 진천평야를 굽어보는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금강상류의 한 지류인 성암천(聖岩川)을 앞에두고 방호구실로 삼고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어. 


진천의 국도.jpg


現 진천의 국도



또한 진천은 만뢰산(萬賴山)과 덕곡산(德谷山)을 경계로 하여 천안,목천으로 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어. 현재 21번 국도가 덕곡산을 넘어 목천으로 연결되고 34번국도가 만뢰산을 넘어 천안과 동쪽으로는 증평으로 연결되며, 17번 국도도 청주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생략 하고...) 등등을 볼때, 진천이 뚫린다면 바로 천안이나 목천,청주 등을 거쳐서 現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백제로서는 550년 당시 최전선 중에서도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곳이라 추측 할 수 있었어.
 

금현성은 한자로 쓰면 金峴城이 되는데 과거에 불렸던 지명의 우리 말을 한자로 바꾸어 쓴 경우가 많아. 그렇게 볼때 금현성을 풀어보면 '쇳재','쇳고개' 이렇게 될터라서 '쇳고개','철고개','쇳재','금재','금고개' 등등의 지명이 현재 진천 지역에 있는지 조사해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진천군 덕산면(德山面)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제철-제련 지역임을 진천군 홈페이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




금암리와 덕산면.jpg
 

또한 '진천의 마을에 이름이 붙어있을까? 하는 추측으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진천읍 금암리(錦岩里)의 금성(金城)마을이 예전부터 금광 산지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로서 금현성이라 할때 '金자는 쇠가 아니라 금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해볼수 있었어. 진천읍을 넘어 이어지는 목천에는 백제 제철시설의 흔적인 쇠똥이 많이 발견된다고 하니, 진천에서 목천으로 넘어가는 이곳은 그것이 금이든 쇠이든 간에 분명히 金과 연관성이 있음이 분명해 보였지.
 


또한 진천군청 문화재 관리과 홈피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어.(지금은 폐쇄됨)

예전에 이 주제로 친구가 레포트 썼던거의 내용을 고대로 퍼와봤盧
 
----------------------------------------------------------------------------------------------------------------------------------------------


(중략)..........
도당산성은 지금은 도읍 ‘都’에 집 ‘堂’을 쓰는데 그 부분이 잘못됐고, 이것은 누군가가 한문을 바꿨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제대로 쓰려면 무리 ‘徒(도)’자, 화랑도 할 때 이 ‘徒’를 쓴다. 그리고 깃발 ‘幢(당)’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徒幢(도당)은 곧 郎幢(낭당)과 같은 개념이 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는 ‘郎幢(낭당)’이라는 무적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낭당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이 곳이고 그 낭당부대의 주력은 화랑도들이였다. 또한 17번 국도 공사를 하면서 지표조사를 했는데, 지표조사를 하면서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왔으며, 충북대 학술조사단에서 유물들을 조사했더니, 당시 발견된 무덤들이 화랑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사결과 발표했다. 

이것이 도당산성하고 연계가 됐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전투하다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도당산성도 상당히 중요한 유적이다.


----------------------------------------------------------------------------------------------------------------------------------------------


어때? 이 내용을 보고 도살성과 마찬가지로 Feel이 딱! 오지 않盧? 


550년대 도살성 전투 이후 새롭게 얻은 소백산맥 넘어의 새땅을 신라를 신주(新州)라 칭하게 되는데, 이것의 지리적 군사적 중요도는 그 위치를 지도상에 그려지려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겠盧?

이런 사실들을 現 도로망과 연계시켜서 당시 이동로를 추측했는데 다음과 같아. 







당시 도로.jpg

충주 동쪽의 파란색 고구려 성을 뺀 경기도-충청도 일대의 파란 고구려의 성은 신라성이라고 봐줘ㅇㅇ;




지도로 표현해 봤는데 뭔가 아다리가 맞지 않盧? 


연결해보면 현재 17번국도와 그 옆의 중부고속도로는 바로 이성산성(하남) -> 설봉산성(이천) -> 금현성.도살(진천증평) -> 상당산성(청주)으로 이어지는 길이 돼. 1500년전의 신라 팽창의 경로가 현재의 국도와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보면 참 희안하지 않盧?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때 증평과 진천은 그 옛날 삼국의 격전장이였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것을 지도상에 종합하여 전투 전개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아.




549-550년 당시 삼국의 대치상황과 신라의 통수.jpg

서기 549~550년의 각국의 진격로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전투력이 고갈되었을때 신라가 고모산성(姑母山城)과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근거지로 하여 충주 일대를 석권하고 증평의 도살성, 그리고 진천의 금현성 일대를 모두 차지하게 된 결과로 볼 수 있어. 그 후 지금까지 진천 일대는 김유신과 관련한 유적이 그대로 현재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것 또한 역사의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지금까지 나는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는 지역은 現 충북 증평과 진천임을 여러 사료와 기록, 그리고 자료들의 증언을 통해 비정했어.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역은 진천이야. 진천이 어떤 곳인가!?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이지 않盧?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의 첫번째 장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포풍 쎄끄쓰!!를 통해서 잉태된 것이 김유신이였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아. 


김무력의 아들인 서현은 어느날 길에서 갈문왕 입종(入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눈이 딱 맞아 버렸어. 그래서 발정난 강아지마냥 빠르게 진도를 나가 결국 74를 저지르고 말았지. 이것을 알아버린 만명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자신의 딸인 만명을 별체에 가둬서 하인들로 하여금 지케가 하고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어. 그러자 홀연히 벼락이 쳐서 별채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아. 그러자 만명은 뚤린 구멍으로 도망쳐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진천)으로 달아났지.
 
좀더 적나라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74해서 애를 가지게 되자,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여자친구를 가둬버렸고, 김서현이는 당당하게 그 집에 쳐들어가서 여자친구를 보쌈해서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이야기야. 그러자니 천둥 소리만큼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盧?

그런데 도망간 곳이 바로 충북 진천이야. 아버지가 지역사령관으로 있던 곳으로 도망간 것이지.




좀 비약해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아들의 여자친구를 구해내는데 김무력이 어느정도 힘을 써 줬을지도 몰라. 아들이 여자친구에게 74를 했는데 그것도 왕족 딸에게 74를 했으니... 허 참;; 



아무튼, 김무력 입장에선 아들이 애기까지 밴 여자친구를 데리고 도망왔는데 어쩌겠盧?  

기록에 보면, 서현은 만노군 태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김무력의 영지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리라 생각 할 수 있어.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벤 이유는.jpg

김유신과 천관녀의 러브스토리에 등장하는 자신의 애마의 목을 치는 이야기...



김유신이 화랑 시절 사랑에 빠졌던 천관녀와의 관계도 어찌보면 부전자전일지도 모르겠盧ㅋㅋㅋㅋㅋㅋ;;







 
무튼, 상황을 종합해 보면 김무력(金武力)이 지휘사령부를 두고 있던 지역은 새롭게 설치된 신주(新州)인 한강하류지역이 아니라 오늘날 진천임을 짐작할 수 있어.  신라가 한강하류로 진출하는데 중간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진천지역이 관산성 전투에서 또 한번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지ㅋ. 













지금까지 김무력의 신주군단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에 대해 아주 장황하게 설명을 했어. 

그럼 이 김무력의 신주군단이 백제 주력군을 치는 곳을 알아야 관산성 전투의 끝이 보이겠지?


마지막으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 주둔한 위치와 김무력(金武力)김무력의 신주군단이 어디를 통해 내려와 백제 주력군과 맞붙었는지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ㅋ




관산성 주변 지역.jpg


역사의 분수령인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맞딱트린 첫번째 문제는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이야. 그러다 보니 학자들마다 관산성 전투 지역을 옥천(沃川)의 삼성산 일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태자 여창(餘昌)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고리산(환산)일대라고 하는 견해 등등 정확한 지역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어. 그래서 태자 여창이 진을 쳤다는 고리산(古利山-환산) 일대를 조사해봤지만, 그 역시 3만의 대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어. 

전 글에서 구글어스를 통해 봤겠지만 고리산과 이백산성 그리고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백제의 산성들 역시 감시초소 성격으로써 대규모 병력주둔과는 거리가 멀었어.


 
그러던 중 환산(고리산성)일대의 상세지도를 유심히 설펴보던 중 환산성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어.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지 않盧?  그래서 찿아보았더니 얏빠리 노무노무 무시무시한 백골산(白骨山)이었어. 


우리나라의 지역명을 보면 백골, 핏골이라는 지역명이 꽤나 많아. 거의 대부분 전쟁과 관련된 지명인데, 대체로 삼국시대,임진왜란,한국전쟁때 붙여진 이름이 태반이야. 그래서 혹시나해서 환산성 뒤편의 백골산의 유래를 여러 자료를 통해서 찿아보았더니, 옛날 백제군와 신라군이 이 지역에서 혈투를 벌였을때 생긴 지명임을 알아내었어. 
 
또한 백골산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백골산성(白骨山城)이 존재해 있었고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지. 





LJS_2008.jpg

백골산에서 바라본 대청호반



이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 정도야.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고 전 글에서 고리산성을 설명할때 이야기 했지?...가 아니라 설명했던건 포곡형 산성이였지ㅋㅋ;;

옛 기록에 나오지 않아서 데이터베이스에 한자로 백골산(白骨山)이라고 치니까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34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때 축조된 것이라 하며 주위 약 39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연구조사한 보고서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골산(白骨山), 대전(大田)의 동약4리(東約四里) 옥천군계(沃川郡界)를 이루는 산상에 석뢰로써 주위(周圍) 약이백이십간(二百二十間)"이라 적혀있으며 또한 '조선유적목록'에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은 듯이 적혀있盧?!




백골산성.jpg

무너져있는 성벽


백골산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례로 완정히 무너져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 이 산성은 백제측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鷄足山城)과 동쪽으로는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의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 되는걸 짐작 할 수 있어.










백골산과 환산.jpg


지도상에서 보는 환산과 백골산의 위치



 
지도상으로 백골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주 작은 소로로 표시되어 있어.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아. 

검색해보니 백골산성보다는 인근에 있는 태고사(太古寺)를 찾는게 빨랐지. 1500년이 넘도록 노무노무 무시무시한 이름을 간직하고 내려오게 되었는지 열심히 조사해봤어. 대청호반의 옆길로 난 샛길로 지도를 확대해 보자 산봉우리 두개가 눈에 보였어. 이것이 바로 하나는 꾀꼬리봉이고 또하나가 백골산이였지.

대청호반과 이어지는 구릉과 바로 이어지는 높다란 백골산의 모습을 통해 백제 주력군이 주둔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임을 직감 할 수 있었어. 백제의 전초기지인 환산의 고리산성이 바로 코앞에 있고, 백제의 주력군이 주둔할 수 있는 넓다란 구릉과 대청호의 맑은 물은 3만 백제군의 식수원의 역활을 충분히 소화해냈을거야. 
 

백골산 조사를 통해서 마침내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어.
신라의 관산성을 굽어보는 백제의 전초 기지인 환산의 고리산성을 앞에 두고 백제 주력군은 백골산성 뒤편의 넓다란 대청호반에 주둔하고 있었을거라 생각해.










그럼 이제 김무력의 신주군단이 어디를 통해 내려왔다는것만 밝히면 이 백골산 전투의 전모가 밝혀져ㅋ


 
김무력 휘하의 병력는 신라의 정예군단이자 신라팽창의 선봉이였어. 특히 한강 중,하류 지역을 관할하는 특임대 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군단이였기에 관산성 초기 전투에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을거야. 그러다가 관산성 방면이 뚫렸고 당시 방면군 사령관이던 이찬(伊湌) 탐지(耽知)가 전사하고 또한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 각간(角干) 우덕(于德)의 지원군까지 성왕이 격파하면서 중부전선이 갑자기 절박한 위기에 몰리게 되자, 아마 거칠부(居柒夫)와 이사부(異斯夫)는 김무력의 신주 군단까지 관산성에 투입을 결정하였을거야. 이 사항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


 ---------------------------------------------------------------------------------------------------------------------------------------------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記 卷04 眞興王 15年 


------------------------------------------------------------


餘昌遂見圍繞。欲出不得。士卒遑駭不知所圖。
有能射人筑紫國造。進而彎弓占擬。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15年 12月


----------------------------------------------------------------------------------------------------------------------------------------------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신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으로 묘사하지?  게다가 기습받은 형국으로 묘사되고 있어.  

기습이라.... 기습을 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곳에 매복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 나와야 되겠지? 또한 김무력의 신주군단이 빠르게 왔음을 추측 할 수가 있어.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의 명을 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아찬 김무력의 신주군단은 성을 지키는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관산성 전투 지역인 옥천(沃川)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그 편재는 기병중심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커. 왜냐하면 지금까지 봐왔겠지만, 관산성 전투 초반 전황이 신라에게 매우 불리했으나 전황이 고착화 되면서 다가오는 추수기를 놓치면 흉년이 들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지원이 필요했고, 또한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기병을 주로 상대하였던 지역이기 때문에 전투의 양상 또한 기병중심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이 가능해.



실제 삼국사기에도 보면 김유신이 도살성에서 신라의 기병을 훈련시키고 휴식하게 한 기록이 있는 만큼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무력이 이끈 부대는 기병편재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백제 성왕을 참수하였던 거칠부 휘하의  삼년산군의 기병대 중,하급 무장인 고간(高干)도도(都刀)임을 본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盧?


그러므로 다각도로 한번 분석해보니 김무력군의 이동경로에 대한 내가 내린 결론은 밑의 짤과 같아.







김무력의 신주군단 진격로.jpg

김무력의 신라군의 진격로(추정)
 



관산성 전투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오늘날  진천&증평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 지역으로 이동하였을거야.

우리나라 지형상  큰 산줄기나 큰 강줄기는 거의 변하지 않는 관계로 삼국시대나 현재의 주간선도로와는 크게 변화가 없어. 그래서  김무력 군이 진천 지역에서 옥천 지역으로의 진격로를 추정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진천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나 중부고속도로와 거의 일치하지ㅇㅇ


결국 김무력의 신주군단은 당시 백제군의 주력이 이 관산성 방면으로 밀집해 있는 틈을 타 후방에서 백제 산성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다가 왔을거야.

백제 산성 주둔군은 뭘 했길래 못막음?? 하겠지만, 백제산성에서 김무력의 신주군단을 보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기병 위주로 편제되었을 신주군단을 막거나,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을거야(보기 비율 약 30:70(추정치)). 결국 아무런 제지나 방해를 받지 않고 빠른속도로 내려왔으리라고 봐ㅇㅇ




백골산성에서 바라본 백제 주력군의 위치1.jpg


대청댐으로 인한 수몰지역자료를 찾아 한번 추측해본 당시 대청호반과 그 일대 백제 주력군 본진 상상도 



백제 주력군의 본진이 위치한 백골산 측면은 아까도 말했듯이 대청호반이 있어. 대규모의 병력이 진을 쳐도 될 만큼의 넓은 평지와 북쪽으로는 천연 해자의 역활을 하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고 또한 바로 옆에는 백골산성과 고리산성이 있어서 주력군의 본진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어.

하지만 치명적 약점을 백제 지휘부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백골산 일대는 관산성 일대의 신라군을 상대로는 최적의 주둔지였지만,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는 등뒤가 그대로 노출되는 치명적 위치였던 것이였지.



결국 이 치명적인 위치가 비극을 초래하게 돼ㅇㅇ;








백골산 전투 초반부 상황도.jpg

백골산 전투 초반부 상황

 


550년 신라가 차지한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이 관산성 전투에서 또 다른 비수로 다가와 백제군을 도륙낼 지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을거야. 

게다가 식수원이었던 대청호반은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에게는 도망갈 길조차 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되었을테지ㅇㅇ;

또하나 주목할 점은 백골산의 백제 주력군은 주 병력이 기병이 아닌 보병 중심으로 편재되었을 가능성이야.  


그 근거로는 백골산과 연결되는 탄현은 기병이 작전하기엔 너무도 좁기 때문이지. 또한 내가 관산성 전투 초반글에서 백제군의 기병은 주로 성왕이 이끄는 연합군쪽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누누히 강조했을거야. 





성왕 연합군의 진격루트와 결과.jpg

다시한번 보는 성왕이 이끌었던 백제 연합군의 진격루트



다시 모르는 게이들을 위해 곱씹어 보자면, 성왕이 이끄는 백제 연합군의 주 공격루트는 금산(錦山)에서 영동(永同)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김천(金泉)방면으로 넘어간 후, 그곳에서 달구벌이나 바로 성산가야(星山伽倻)으로 내려가 대가야(大伽倻) 지방으로 진격하는 루트라고 설명했을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기동력을 보유한 기병 중심의 편제를 갖추고 있어야됬는데, 이 기병대의 대다수는 대가야의 중장기병들이 담당하였고, 또한 백제의 기병들 또한 성왕을 보좌하기 위해 같이 있었을거야.

그러므로 이러한 추론을 근거로 백제군의 대다수 기병들은 성왕의 연합군에 배치되었을거야.


또한  현재 마달령의 유래를 보더라도 탄현이야말로 신라의 침입을 막는 최선의 지역임은 백제의 성충(成忠)이 언급한 그대로이지.

※사진첨부 용량제한이 꽉차서 못올리는점 미안하다;

말 두필이 연이어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바로 탄현이기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은 보병중심이었다고 추론 할 수 있어.








 
보병 중심의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과 기병 중심의 김무력(金武力)의 신주 군단, 더욱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으로서는 김무력의 기병대를 상대로 전투자체가 불가능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어. 그기에 딱 타이밍이 알맞게 백제 주력군이의 지휘체계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였지. 성왕은 신라의 매복에 걸려서 참수된 상황이고, 게다가 태자 여창(餘昌) 또한 몸져 누운 상태였으니 백제군의 상태는 최악 그자체였어.

 





당시 백골산 전투와 비슷한 양상의 전투를 생각해보니 살수대첩이 떠오르더라고ㅋㅋㅋ

살수대첩기록화를 보니 딱 그 지형지세가 백골산 일대와 판박이가 아니겠盧?!






살수대첩 기록화.jpg

살수대첩 기록화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지휘하던 백제군 주력은 안심하고 무방비 상태로 백골산 뒤쪽의 구릉지대에 주둔하고 있다가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당하자 한마디로 퇴로가 차단당한 형국이 되었던거지. 이렇게 되자 옥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거칠부(居柒夫)의 군단이 탄현 방어선을 공격하는 신주 군단의 별동대의 모습을 보며 신주 군단이 도착했음을 파악하고 바로 총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해.







백골산 전투 중반부 상황.jpg


백골산 전투 중반부 




김무력(金武力)이 백제군 주력을 배후에서 공략하자 거칠부(居柒夫)의 신라군단은 바로 호응하여 태자 여창(餘昌)이 주둔하고 있던 환산과 식장산으로 연결되는 백제 방어라인을 그대로 돌파하면서 탄현과 고리산성(환산)방어선을 격파하고 노도와 같은 돌격을 감행했지.


그리고 바로 고리산성 뒤에 있는 고리산 주둔군을 격파했어. 약 30,000 ~ 40,000에 이르는 거칠부 휘하의 신라군단이 노도와 같은 움직임으로 환산의 산능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고리산의 백제 주둔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뭐 말안해도 알겠盧? ㅋㅋ;





그럼 일본서기에서 기술한 이 백골산 전투의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ㅋ

이 기록을 좀더 뜯어봐야 백골산 후반부의 상황을 추론 할 수 있을거야.




-----------------------------------------------------------------------------------------------------------------------------------------------


餘昌遂見圍繞。欲出不得。士卒遑駭不知所圖。
有能射人筑紫國造。進而彎弓占擬。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
發箭之利通所乘鞍前後橋。及其被甲領會也。復續發箭如雨。
彌■不懈。射却圍軍。由是餘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
餘昌讚國造射却圍軍。尊而名曰鞍橋君。〈鞍橋。此云矩羅賦。〉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축자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친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안교는 우리말로 쿠루지라 한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15年 12月
 

----------------------------------------------------------------------------------------------------------------------------------------------




'여창이 포위당하자'라는 기록을 보면 우리가 윗짤들을 봐왔듯이 아마 측면과 후면을 공격당했을거야.

대전방향에서는 김무력(金武力)의 신주군단이, 그리고 백골산의 능선을 타고 돌격해오는 거칠부(居柒夫)의 신라군단을 보고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에 패닉상태가 되었을거야. 사방에서 다가오는 신라군의 숫자는 대략 4~5만, 당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은 연합군의 붕괴 이후 잔여 병력이 합류하여 약 3만에서 3만 2천에 달했지만 앞은 신라의 중장기병이요, 옆은 거칠부의 3~4만에 달하는 인간장벽, 서쪽과 북쪽으로는 대청호반이 막고있었으므로 완전히 포위된 형국에서 밀리고 밀리다보니 압사하는 군사들도 많았을거야. 

포위전에서 꽤 많은 비율로 압사당하는 점을 근거로 아마 백제 주력군의 상당수는 압사나 대청호반으로 밀려 익사했을 가능성이 있어.




백골산 전투 후반부 상황.jpg

백골산 전투 후반부 상황




또한 앞선 기록을 보면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군 기병 장교를 쏴 죽였다고 이해 할 수 있겠지?
※용감하고 씩씩한이란 표현을 볼때 아마 비장(裨將)이였을거란 추측도 가능해ㅇㅇ

앞에 나아가 신라군 기병을 쏴 죽였다라... 용감하게 나아가 신라군의 선봉 기병을 떨어트려 사기를 높이려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어.

또한 다르게 생각한다면 태자 여창(餘昌)이 있는 본진 가운데 까지 신라의 기병대가 쇄도 했다는걸로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김무력(金武力)의 신주군단이 불시에 들이 닥쳤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이 좀더 가능성이 있어보이지 않盧? 만약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백제군의 지휘계통이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을거란 추론까지 도달 할 수 있어. 적군이 총사령관이 있는 본진 한가운데까지 들어왔다는건 이미 앞에서 막고 있던 전위부대가 뚫렸다는걸 의미하지 않겠盧?

결국 이러한 추론을 근거로 신주군단이 들어 닥쳐 백제 본진을 휩쓸기 시작 할 때 부터, 백제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고 볼수 있을거같아. 그러므로 제대로 된 방어보단 학살에 가까운 모습으로 진행되었을거야. 그럼 삼국사기의 기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므로 어느정도 맞는 상상 아니겠盧ㅋ;



또한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태자 여창(餘昌)의 주변에는 야맛토 조정에서 파견된 왜(倭)군의 병력이 여창을 지키고 있었다는걸 추론 할 수 있어. 어짜피 야맛토의 파견군은 숫자가 그리 크지 않았고, 또한 성왕과 여창의 군세에 각기 분산 배치되었기 때문에 부대로서의 활약은 이 백골산 전투에서는 없었을거야. 

하지만, 태자 여창(餘昌)이 죽지 않고 위덕왕(威德王)으로 왕위에 오르는 걸 볼때, 아마 이 왜(倭)군과 백제 근위대가 태자 여창을 보호하면서 활로를 뚫었을거야. 왜냐하면 이 축자국조(筑紫國造)에게 태자 여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후대에 이름을 하사하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지.



즉, 축자국조(筑紫國造)와 왜(倭)군의 고위 장교들은 여창(餘昌)을 몸으로 보호하며, 백제의 근위대와 소수의 왜(倭)군이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아 고분분투를 하다가 두껍게 포위하던 신라군의 틈을 발견하여 간신히 뚫고 대전 방향으로 퇴각 했다고 추론 할 수 있어.





※내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 동방령군을 왜(倭)군으로서 비정한게 아주 잘못된 해석이였어.
한국사학계에서는 이 동방령의 지역을 현재 전북 고부,충남 은진,전남 구례or장성,위치미상,충남 공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게 더 설득력 있어보인다. 일본측 자료를 보다보니 내가 이런 해괴한 해석을 하다니.. 좀더 논문을 뒤져보고 시리즈를 쓸걸 그랬다;; 정보게이로서 아주 잘못된 내용을 적은 점 노무노무 미안하다;; 그렇지만 물기막기무련(物部莫奇武連)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모두 한반도 도래계의 후손인 왜(倭)인이라고 주장하는바. 내가 왜군의 다른말로 동방령군이라고 쓴것만 잊어주길 바라盧;








태자 여창과 소수의 백제군,동방령군의 후퇴로.jpg

태자 여창과 소수의 백제&왜군의 필사적인 후퇴 방향





-----------------------------------------------------------------------------------------------------------------------------------------------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백제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최종기록이야. 

이 백골산(白骨山) 전투에서 백제군 약 3만이 전멸했다는 소리이지.  다들 좌평(左平)에 대해 알고있지?

좌평은 백제 관직의 최고위 관직 중 하나로서 총 6명이 있어. 이에 대해 많은 설이 있는데, 불분명한 좌평 제도에 대해선 최대한 배제하고 설명하자면...




당시 사비백제는 총 6명의 좌평을 두고 있었는데, 그이유는 백제의 행정구역인 방(方)이 5방에 근위대를 지휘하는 1명을 추가해서그래ㅇㅇ;
위에서 내가 사과한 이 방이 바로 5방을 뜻해. 이 방령은 지방 통치의 행정-군사적 지휘자로서 소위 말하면 중국의 절도사와 비슷한 관직이야.

이 6좌평은 각각의 지방과 중앙에서의 다른 관직들을 맞고 있었는데, 6좌평의 우두머리는 왕명 출납을 관장하는 내신좌평(內臣左平)이며, 또한 외교 최고위직인 내법좌평(內法左平), 그리고 재정직 최고 관직인 내두좌평(內頭左平), 그리고 병권의 최고 관직인 병관좌평(兵官左平), 법무의 최고위직인 조정좌평(朝廷左平) 마지막으로 근위대를 지휘하는 위사좌평(衛士左平)으로 나뉘어ㅇㅇ

이중 관산성 전투에 참여한 좌평을 추론하면 재정직 최고관직 내두좌평(內頭左平)과 법관 최고위직인 조정좌평(朝廷左平)이 참전 안했을거라 난 추측해.

또한 전 글에서 여창(餘昌)과 가로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난 이 가로를 내신좌평으로 비정하려고해. 귀족 원로라면 대부분 이 내신좌평(內臣左平)을 맡았거든, 사실상 이 내신좌평은 명예직이 되버리는걸 보면 그럴싸하지 않盧?

결국 이 백골산 전투에서 백제의 6좌평 중 4좌평에 해당되는 내신,내법,병관,위사좌평이 전사했을거라 추측해. 또한 성왕과 태자를 따라 참전했던 친국왕파 귀족들의 많은 수가 전사했을거야.


사실이 아니더라도 백제 6명의 좌평 중  2/3인 4명의 좌평이 전사한걸 보면 격전의 격전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들지 않盧?









img1.jpg



결국 이 관산성(管山城) 전투는, 백제 성왕이 관산성 인근인 구천에서 삼년산성의 중,하급 장수였던 고간(高干)도도(都刀)에게 참수되고 백골산 배후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 주력은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주 군단에게 후방이 막혀 고립된 가운데, 파진찬(波珍飡) 거칠부(居柒夫)의 신라군단의 측면 공격으로 결국 괴멸하게 돼.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았을 때 삼국사기가 전하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결과는 전혀 과장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 
 



















서기 550년 나제동맹(羅濟同盟)하에서 신라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차지하게 되고,  553년 한성백제 옛땅에 신라가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나제동맹이 파기되고 신라와 고구려가 은밀히 손을 잡게되자, 그에 대한 백제의 응징으로 촉발된 전투가 관산성 전투였어. 서기 553년 겨울 12월에 백제의 선공으로 신라의 함산성(函山城)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백제는 굴산성(屈山城)전투와 경북 (金泉)의 김천 전투(추정), 충북 영동(永同)의 핏골전투에서 신라 군단의 대반격에 의해 결국 퇴각하고 그 와중에 관산성 부근에서 백제 성왕이 거칠부(居柒夫) 휘하의 고간(高干)도도(都刀)에게 참수되었던 관산성 전투는 서기 554년 7월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주 군단과 거칠부(居柒夫)가 이끄는 신라군단의 협공으로 인해 백골산 전투에서의 신라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




















노을.jpg



 


이 전쟁의 결과로 인해서 백제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어. 또한 백제편에 섰던 대가야(大伽倻)는 관산성 전투에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 버리고, 관산성 전투(554) 8년후인 서기 562년에 신라의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돼.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정 이후 또 한번 동북아의 국제 역학관계가 크게 요동치게 되는 사건이였지.






































지금까지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1탄인 관산성 전투를 다 읽어준 게이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서 글을 마칠께!  

다쓰고 나니 진이 빠지盧ㅋㅋㅋ;  고생했다 게이들아ㅋ








5줄요약


1. 여러 기록과 발굴조사, 지자체 문화원에서 주장하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도살성과 금현성은 각각 증평과 진천에 있음.

2. 신주(新州)의 군주인 아찬 김무력의 신주군단 사령부는 이 도살성과 금현성 or 인근지역에 있을 확률이 높다.

3. 관산성 전투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신라가 대 반격을 하기위해 김무력의 신주군단을 별동대 형식으로 백제군의 후방에 드랍하려는 계획을 세움.

4. 성왕의 연합군이 붕괴된 시점에서 이미 지휘권을 상실한 태자 여창의 백제 주력군은 김무력의 신주군단이 후방을 기습하자 명령체계가 완전히 붕괴됨.

5. 김무력이 도착한걸 알자 옥천 관산성 일대에 있던 거칠부의 신라군단이 고리산성-석장산성에 이르는 백제 방어선을 돌파하여 협공. 결국 백제 주력군이 괴멸당하면서 삼한의 판도가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음.

















내일 외전으로서 관산성 전투의 여파와 왜왕 킨메이(欽明)의 분노에 찬 절규를 왜 했는지에 대한 고대 가야-왜(倭)의 관계에 대해 올려볼께.

올리고 한동안 밀게를 떠난다. 다들 좋은 밤 보내라ㅋ








지금까지 시리즈를 쓰는데 참고한 문헌,논문 목록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百濟本記)』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일본서기 백제본기(日本書紀 百濟本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일본서기 흠명천황기(日本書記 欽明天皇記)』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
관산성전투 전후 시기 대가야·백제와 신라의 대립
백제 위덕왕대 대신라 정책의 전개와 결과
특집(特輯) :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 ; 관산성(管山城) 전투(戰鬪)의 배경(背景)
특집(特輯) :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 ; 관산성(管山城) 관연유적(關聯遺蹟)의 현상(現狀)과 보존방향(保存方向) 
특집(特輯) :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 ; 관산성(管山城) 전투(戰鬪)의 양상(樣相)과 영향(影響)
百濟 泗沘時代의 政局運營과 益山經營 학위논문(석사) 
위덕왕의 왕흥사 건립과 왕권강화
『삼국사기』교빙 기사를 통해 본 나제동맹 시기의 재검토
新羅의 加羅國 복속 과정에 대한 一考察
百濟史上에 있어서 益山의 位置
考古資料로 본 가야 멸망 前後의 社會動向
武王代 6部체제와 益山
백제 聖王의 죽음과 신라의 '國法'
加耶의 消滅過程을 통해 본 加耶-百濟-新羅關係
百濟 威德王代의 정치 상황과 대외 관계
文化遺蹟總覽 : 城廓 官衙 篇
삼국통일의 격전지 충북의 성곽을 찾아서
曾坪 二聖山城 出土 土器樣相과 그 性格
三國의 曾坪地域 進出과 二城山城
二城山城 出土 新羅土器 硏究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咸安 城山山城 出土 木簡과 新羅의 外位制
利川 雪峰山城 出土 벌낫과 밀낫의 製作 技法 및 用度 비교 : 미세조직 분석을 통하여
노성산성 내 건물유지 시,발굴조사보고서
백제초축설이 있는 경기지역 일부 산성의 재검토
중원문화연구총서 제 10 책 : 충주산성 동문지 ; 발굴조사 보고서
忠淸南道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 朝鮮總督府
朝鮮遺蹟目錄 : 朝鮮總督府
전국문화유적총람( 만약 보고싶다면 도서관보다 여기 -> http://all.nricp.go.kr:8080 를 이용하는게 좋아)
백제사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