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시리즈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4탄. 신라판 300인 굴산성 전투와 핏골전투






















재미있게 읽어주는 게이들이 있어서 힘이 노무노무 난다!

이제 백제 멸망사 시리즈의 제 1탄인 관산성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盧ㅋ

이번편은 백제의 영웅왕이였던 성왕의 최후와 연합군의 붕괴에 대해 써볼거야. 

재미있게 읽어준다면 글쓰는 입장에서 무지무지 기분 좋盧ㅋ
















전편에서는 태자 여창의 백제주력군의 굴산성 전투와, 성왕의 연합군의 김천전투,핏골전투에 대해서 서술했어.

다시한번 되새김질 하는 차원에서 곱씹어보자ㅋ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지휘한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屈山城)과 저점산성(猪岾山城)의 신라 방어선을 끝내 뚫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어. 신라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격전지로 이동하여 병력 손실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던 반면에 백제는 그렇지 못하였지. 

특히 겨울에 시작한 전투는 봄을 지나면서 장기화 되자 지방귀족 소속의 병력은 보충되기는 커녕 이탈 조짐까지 보이고 말아. 특히 후방에서 날라온 비보로 결국 백제 주력군은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주 전장터는 굴산성(屈山城)에서 다시 전쟁발발 직전의 상황인 옥천(沃川)의 관산성(管山城)지역으로 돌아가게 되버렸어.
 
 

결국 이러한 백제군의 움직임에 관산성(管山城) 전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게 되었어.


밑의 짤이 바로 이 당시의 양군의 배치와 상황을 나타낸 짤이야.






관산성 전후 후반기 각군의 이동 루트.jpg



 관산성 전투 후반기 각군의 이동경로와 배치 상황도



 

백제 주력군이 후퇴하면서 태자 여창(餘昌)은 몸져 드러눕게 되버렸어. 

태자 여창(餘昌) 휘하엔 백제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가야(大伽倻)와 왜(倭)의 병력까지 함께 있었어. 

게다가 태자 여창은 백제 귀족들의 열렬한 지원하에 전쟁을 감행 한 것이 아니라, 원로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력히 추진해서 개전한 터라, 전황이 백제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되자 그 심적 압박은 상당했을거야.








현재 환산이라고 불리는 고리산의 산성 축조물들은 이때 축성되지 않았나 추정해. 밑의 짤은 내가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그려본 고리산성의 항공사진이야.


고리산성 추측도.jpg



현재 고리산성에는 확인된 보루가 총 5개인데 제일 높은 해발 581m 환산 정상부에 제 5 보루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바로 밑의 약 30m 지점에 학계연구조사 결과 북서쪽과 북동쪽 산등성이를 감싸앉고있는 테뫼식 산성이야. 또한 북동쪽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가면서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석축의 보루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보루들 또한 테뫼식 보루로 보여. 다들 작은 규모의 보루로서 둘레가 약 150m 내외의 자연할석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려놨으며, 가파른 산기슭을 최대한 이용한 백제식 산성이야.

이 환산성을 삼국사기에서는 고리산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성왕이 전사한 곳과 가깝다고 써있으며, 백제군의 마지막 결전이 일어난곳과 아주 가깝다는 기록을 토대로 나는 이 고리산성 주변을 백제 주력군의 본진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게이들이 보는바와 같이 약 3만명이 배치되었을 리가 만무하잖盧?

아마 이 환산 주변 어딘가에 백제 주력군이 있을거라고 일단 추측을 해보고 태자 여창의 백제주력군의 위치는 다음글에서 확인해보자ㅋ

일단 우리는 이 편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의 본진을 고리산성(古利山城)이라고 비정하자ㅋ








식장산 방어선.jpg

백제의 주 방어선인 식장산 능선



 
윗짤과 같이 고리산에서 이백리산성과 노고산성으로 이어지는 식장산 능선을 따라서 많은 보루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주 방어선이었어. 


고리산성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위치였는데, 글로만 보면 이해가 안가니 다시 한번 구글어스의 힘을 빌어보자.






고리산성 조감도.jpg

고리산성에서 바라본 산성분포



어떠盧? 백제군과 신라군의 배치가 눈에 그려지盧?

짤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백리산성과 노고산성은 탄현(炭峴)고개를 방비하는 관문 같은 역할을 하는 산성으로서 그 어느곳보다 방어가 엄중하였을거라 추정 해 볼 수 있어.

저 산넘어 백제의 산성들이 줄지어 보이지? 고리산성에서 저 멀리 성티산성까지가 백제군의 석성산 방어선이야.

성티산성을 눈에 여겨봐봐

 


성티산성의 위치와 전략적 의미.jpg


이 성티산성은 백제의 주요 주둔지로서 보급은 물론이고 곤룡재와 닭재를 통해서 대전(大田)과 사비성(泗沘城)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특히 성티산성은 백제계 산성으로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거니와 성티산성의 위치는 대전으로 넘어가는 관문 뿐만 아니라, 금산(錦山),추부(秋富),마전(麻田)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삼각로에 위치하고 있어.

즉, 이 석성산 방어선에서 고리산-이백리-노고산성과 더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지.

 

그리고 백제의 진영 맞은 편으로는 신라가 어렵게 찿은 마성산성, 용봉산성 , 관산성, 서산성, 구건리 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어.

백제와 신라 양 진영 사이로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西華川)이 백제와 신라의 방어선을 나누고 있어.





구비구비 흐르고 있는 서화천(西華川) 옆의 관산성(管山城) 바로 아래 돌출된 지역이 바로 구진베루라고 알려진 구천이야. 이곳이 백제의 영웅왕이였던 성왕이 전사한 곳이지.
 
이곳을 좀더 확대한 그림으로 보면 밑의 짤과 같아.  


관산성 주변 확대 지도.jpg




양 진영 사이로 흐르는 서화천은 양군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금산(錦山),추부(秋富),마전(馬田)의 백제군의 이동 통로이기도 해. 즉, 성티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고리산성(古利山城)으로 이동할 경우 서화천(西華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지.



이렇게 백제와 신라는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 계기가 바로 백제 성왕의 죽음이었어. 

첨예한 대치상황에서 어찌하여 성왕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서화천(西華川)을 따라 가다가 구진베루에서 신라 복병에 걸려 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어. 지금으로 치자면 한마디로 총탄이 난무하는 곳 사이로 비무장한 채로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간 것과 같은 것인데, 논리상 선뜻 이해되지 않아. 


 
그렇다면 어째서 성왕이 바로 저 구진베루에서 죽게 되었는지, 다각도로 살펴보고 진실을 파헤쳐 보자ㅋ











개인적으로 한국사에서 세력 판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몇 안되는 역사의 분수령 중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의 백제 성왕의 전사야. 



사비성 복원도.jpg

사비성 복원도


성왕이 사비성(泗沘城)에서 전선의 상황을 보고 받다가  태자 여창(餘昌)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하러 갔다면 절대로 신라의 매복에 걸려들지 않았을거야. 왜냐하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에서 태자 여창이 진을 치고 있는 고리산성(古利山城)으로 갔다면 성왕의 전사지인 구천(구진벼루)근처엔 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성왕의 전사지(戰絲地)에 대한 의문이 꾸준히 머리속을 맴돌았었어. 

그래서 백제멸망사에 관한 글을 쓸때 제일 처음으로 타겟을 잡은것이 관산성 전투을 재고찰해서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백제가 결국 멸망 할 수밖에 없었다는걸 주장하고 싶었어.

쥬댕이만 놀리면 입만 살았다고 하겠지? ㅋㅋ 이제 이것을 여러 기록과 구전설화를 근거로 규명토록 할께.
 














흔히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군의 총 지휘를 성왕(聖王)이 하였고 결국 전사했다고만 알고 또한 위키백과를 참고로 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면, 태자인 여창(餘昌)이 총 지휘를 하고 성왕은 궁궐에서 보고를 받은 것으로 & 참전은 했지만 하나의 백제군을 지휘했다고 알겠지만, 지금까지 내 글을 봐왔다면 성왕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과 다른 루트를 목표로 한 군대를 지휘한 걸 알거야. 

이전의 글을 안보고 이글을 보고 있는 게이들이 있을까봐 다시 한번 복습차원에서 밑의 짤을 보자ㅋ






관산성 초기 전투상황도.jpg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주력군은 굴산성(屈山城)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고 마찬가지로 성왕이 이끄는 연합군도 김천(金泉)일대로 진격했다가 밀려밀려 충북 영동(永同)의 핏골전투에서 대패하면서 금산(錦山)방면으로 퇴각하였어.



대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성(古利山城)과 마주보고 서화천(西華川)을 경계로 하여 현재의 옥천(沃川)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서산성(西山城) - 삼양리 토성(三陽里土城)-  관산성(管山城) - 용봉산성(龍鳳山城) - 마성산성(馬成山城)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마치 현재 휴전선의 GOP삼아 백제군과 대치상태로 접어들었어.  아래의 짤은 그 모습을 표현해 본거야.



관산성 전투 후반기 양군의 대치도.jpg






옥천(沃川)분지에 신라군의 주력이 집결하자, 금산(錦山)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성왕이 이끄는 연합군은 성티산성으로 본진을 옮기게 되었을거야. 
 
금산에서 옥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충남의 명산 서대산(西臺山)이 보이는 가운데 추부면 마전리에서 옥천까지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西華川)을 따라 거의 평탄하게 길이 이어지고 있는걸 볼 수 있어. 그 중에서 마전리는 계곡 사이의 넓은 평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말을 기르기엔 아주 적절한 곳으로 판단 할 수 있지.  



그럼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결론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관산성 전투 후반기 양군의 최종 대치도.jpg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盧?

김천(金泉)에서 신라의 결사적인 방어에 막힌 백제 성왕은 밀려 충북 영동(永同)의 핏골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다가 결국 추풍령으로 넘어온 신라 군단과 일대 격전을 벌였지만 패하여 연합군과 대가야 기병대을 이끌고 이곳 추부면 마전리로 후퇴하였다가, 파진찬(波珍飡) 거칠부(居柒夫)의 삼년산성 군과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가 보낸 상주,성산,달구벌,금성의 신라 군단이 옥천(沃川)의 관산성 일대에 집결하자,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했을 것으로 그림이 그려 질 수 있어. 


왜냐하면 백제군 총 병력은 3번의 큰 전투에서 3번 모두 패하였고, 특히 핏골전투에서 성왕이 대패하였으므로 크게 잡아도 35,000명으로 추산 할 수 있어.
굴산성 전투에서 거칠부(居柒夫)의 삼년산성 군과 대격돌을 하였고, 보청천이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되어있는걸 볼때, 백제 주력군은 당시 20,000~23,000으로 추산이 가능하며, 또한 김천에서 패하여 핏골인근에서 주둔하다가 추풍령을 넘어온 신라군단에 대패한 성왕의 연합군은 대략 10,000~12,000으로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신라군은 거칠부(居柒夫) 휘하의 삼년산성 군 7,000 ~ 10,000 / 잔여 상주군단 8,000 ~ 10,000 / 성산방면 지원군 5,000~10,000  / 달구벌,금성,금관가야 방면 지원군 10,000 ~ 15,000으로 예상 가능하므로 신라군의 최대 병력은 약 45,000에 육박해. 최소로 잡아도 3만은 넘으니 만약 태자 여창의 약 20,000의 주력군과 신라군 30,000이 대치한다면 숫적우위가 신라군으로 넘어가므로 고리산성을 위시한 식장산 방어루트가 돌파당할 가능성이 매우컸을거야.


좀 기니까 정신이 산만해지盧?

그럼 간단하게 양군의 가용 병력을 한번 보면 다음과 같아.


백제

태자 여창 휘하의 백제 주력군 : 20,000 ~ 23,000

백제 성왕 휘하의 백제 연합군 : 10,000 ~ 12,000

총병력 : 30,000 ~ 35,000


신라

거칠부(居柒夫) 휘하의 삼년산성군 : 7,000 ~ 10,000

각지에서 올라온 신라 방면군 :  23,000 ~ 35,000

총병력 : 30,000 ~ 45,000



어때? 좀 들어오盧?


이어서 쓰자면 연합군의 본진이동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산 추부면 마전리에서 식장산(食藏山)으로 이어지는 중간엔 백제의 주요 산성인 성티산성이 자리잡고 있어. 성티산성은 옥천(沃川)에서 금산(錦山)이나 대전(大田)으로 빠져나가는 바로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지. 성티산성이 위치한 곳은 예전부터 말동산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그만큼 예로부터 말(馬)과는 땔래야 땔수 없는 불가불의 관계의 곳이기도 하지. 또한 지역주민들은 이 마전(麻田)에서 옛날부터 마시장이 열려서 한자로는 다르지만 마전(馬田)이라고 불렀다고 해.


이상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짤로 표현이 가능해.


백제 성왕이 이끄는 연합군의 본진 예상지역.jpg




쉽게 백제의 군마 사육장은 성티산성 인근과 現 추부면 마전리에 있었다고 보면 되는데, 성티산성을 근방으로 평탄한 지형과,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이 위험할때 바로 달려가 신속히 지원가능한 위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바로 성티산성의 남서쪽 지형이지.

그리고 관산성(管山城)전투 당시 백제편에 가담한 대가야(大伽倻)는 고분발굴을 통해서 말과 관련된 유물을 많이 전하고 있어. 이런 여러 정황을 토대로 볼때, 금산(錦山)과 마전(麻田)으로 연결되는 성티산성은 백제 연합군의 중장기병과 기병대의 주력이 포진한 곳이라 추론 할 수 있어.




삼국사기에 보면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군마보급지이자 경제중심지역이던 금산(錦山)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으로 나와있어. 관산성 전투는 554년 7월에 끝났는데, 그로부터 딱 2달 후 백제의 복수전이 있었음이 삼국유사엔 기록되어 있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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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眞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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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성(珍城)은 오늘날 금산군 진산면이야. 

그만큼 백제로서는 패전과 성왕의 죽음을 겪고도 금산 만큼은 신라에게 넘겨 줄수 없는 사활(死活)이 걸린 지역이었지. 

백제의 야심찼던 복수전인 관산성 전투에서 패전한지 2달 만에 신라에게 설욕한 동력(動力)은 백제왕가가 아닌 백제 귀족세력으로 추정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백제 귀족세력 입장에선 금산(錦山)지역은 경제으로 막대한 이익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야. 뭐... 이런 명분을 들고 위덕왕(威德王-여창)에게 진언했다면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위덕왕이 당장 칼을 뽑아 귀족의 대가리를 ㅁㅈㅎ 시켰겠지? 그러므로 허울 좋은 명분인 前대왕의 복수를 빌미로 뺴앗긴 금산지역을 공격 했을거야.


아무튼 추부면 마전리는 백제 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의 결정적 단서야. 



관산성 전투 후반기 양군의 보급로.jpg

백제와 신라의 보급로와 주요 산성 (백제의 보급로는 현재도 주요 국도와 같다) 



신라군이 다시 옥천(沃川)을 장악했어도 신라의 최전선은 관산성(管山城)에서 용봉-마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넘지 못하였을거야. 따라서 백제는 성티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餘昌)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성과 식장산성으로 이어지는 보급루트를 관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이 보급로를 통해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은 말안해도 알겠盧

이러한 백제군의 연결고리를 끊어야만 신라군의 작전이 용이해짐을 신라 지휘부는 판단했을거야.  


그 근거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은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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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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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지휘부는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연결로를 끊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일종의 차단을 통한 각개격파를 위한 작전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삼년산군(三年山郡)의 비장인 고간(高干)도도(都刀)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 앞서 언급했지만 말먹이꾼이라고 일본서기에서 비하하는 고간 도도는 삼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정예 기병이라 봄이 적당한거 같盧. 





가야 중장기병.jpg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국구 깡패였던 대가야의 중장기병





왜냐하면 대가야(大伽倻)의 중장기병이 주축이 된 성왕의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선 역시 기병이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고간(高干)이란 단어는 신라가 지방민들에게 주던 관직인 외위제의 3번째 관직이야. 이 외위제는 총 11관등으로 나뉘는데 한번 살펴보자면 악간(嶽干),술간(述干),고간(高干),귀간(貴干),찬간(撰干),상간(上干),간(干),일벌(一伐),일척(一尺),피일(彼日),아척(阿尺)으로 나뉘어. 특히 간(干) 이상인 간위 관등은 원래 대,소부족장들이 칭하던 간(干)을 세분화 시킨건데, 고간(高干)이였던 도도(都刀)는 외위제의 3번째 관등이므로 나름 ㅅㅌㅊ 치던 중,대형 부족의 간(干)이였지. 


다른 말로 쉽게 표현 하자면, 고간(高干) 도도(都刀)는 지방의 유력 호족이였단 소리야. 이러한 유력 호족이 보병 일 리가 없잖盧? 







신라 중장기병.jpg


당시 신라 중장기병을 고증한 그림 / Kia 고증 지대로구만~!




그리고 중장기병이나 기병을 담당할 정도라면 고대에서는 어느정도 재력이 있어야 해. 국가가 다 지급해줬을거란 생각은 사실 나폴레옹의 국민군이 창설 되기 전까지는 역사상 어느나라에서도 통용되지 않던 생각이야. 어느정도는 국가가 지원해줬을테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비로 사야 되었지. 또한 국가가 지원을 했다고 쳐도 유지,보수비용은 순전히 자비로 충당했어. 이러한 기록과 추측을 통해 고간(高干)도도(都刀)는 삼년산성군의 중장기병이나 이러한 기병대를 이끄는 중,하급 무장이였을거란 추론이 가능해.


 

무튼 신라군은 일종의 GOP격인 관산성과 이어지는 돌출부 바깥쪽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소속의 중장기병대를 주둔시키고 관산성까지 연결되는 방어 차단막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을 일본서기엔 "길을 끊었다"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게 적절 할 것 같盧.







관산성에서 본 지역도.jpg


관산성과 구천의 지역도


관산성에서 구천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신라가 차단막을 설치한 모습이 보일거야

현재는 이곳을 말머리 고개라고 불러. 이 지역이름의 유래는 밑에서 서술할께.



 

이곳 구천(狗川)에서 신라복병에 사로잡힌 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해선 앞서 다룬바 있듯이, 우리 역사서보다 일본서기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 중 상당수가 백제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서 백제 멸망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배층이 백제 역사서를 함께 가져갔을 것으로 보기도 해.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 이미 백제는 멸망하였기에, 백제 지배층은 왜(倭)의 새로운 상위 계층을 형성하면서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백제의 역사를 함께 기술했다고 보는 거지.




天知天皇.jpg


왜(倭) 제 38대 덴노 텐지(天知)


일부 학계에서는 이 텐지천황을 백제 제 25대 왕인 무령왕의 고조카손자(이게 맞는말인가?)로 보는 주장도 있어.

이 주장에서는 곤지왕의 차남(이름불명)이 일본으로 넘어가 오우진 덴노가 되었다는 주장인데... 

억측이 난무하는 주장이지만 한번 씹고뜯고 해보면 '그럴싸한데?'란 반응이 나와. 

또한 성왕이 무령왕의 차남이며, 장남이였던 순타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단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들은 관산성 전투시리즈가 끝나면 가야-왜,백제-왜의 관계에 대한 글에서 밝혀볼께.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미 멸망한 백제보다는 새롭게 몸담게 된 왜(倭)의 텐지(天知)덴노의 명으로 서술하다 보니 천황중심으로 기술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지?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는 백제의 신라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기에 신라에 대한 서술은 항상 부정적이야. 그런 연유로 해서 백제 성왕을 참수하게 되는 신라의 비장(飛將)이라 불려진 고간(高干)도도(都刀)를 말먹이 노비인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생각 할 수 있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록화.jpg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기록화



 

한국에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기록으로 인해 일본서기의 내용이 전혀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데 이런 배타적인 성향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악영향을 미쳐. 


왜냐하면 우리 역사서가 전해주지 못하는 일정부분을 일본서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상반되는 기록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비교 대조를 하고 숨겨진 뜻을 살펴 봐야 되는거지.




그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전하는 백제 성왕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ㅋ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기록에 백제 성왕의 최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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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성왕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라고 한다.

三國史記 百濟本記 卷26 聖王 3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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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보기 50으로는 신라를 습격하기 어려워. 어느 미친놈이 50기만을 대동하고 신라군 3만에 뛰어들겠盧??


이에 반하여 일본서기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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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久廢眠食。父慈多闕。子孝希成。乃自■迎慰勞。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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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에 몰리고 있는 형국에서 사사로운 부자간의 정리를 논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좀 부자연스러워. 

물론 태자의 건강을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있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성왕이 보기 50으로 이동하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어.




이 내용의 감춰진 이면을 다시 곱씹어보면, 전쟁 초기 백제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대한 승리를 장담한 태자였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 정신적 스트레스는 정말 대단 했을거야.
 
게다가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군은 중앙군 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 소속의 부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방군에 왜(倭)군과 대가야(大伽倻)까지 함께 구성되어 있었으니, 젊은 태자 입장에선 불리한 전황속에 빠진 상태에서 정치적 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이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백제 성왕은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겠盧?
 
이는 비단 태자 여창(餘昌)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어.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이 다시 규합하는 사태로까지도 비화될 소지가 있는 상황임을 성왕은 직감했을지도 몰라.



 


성왕과 휘하 가야기병.jpg 


백제 주력군 본진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 받은 성왕은 사태의 심각성에 해가 지고 있는 저녁 무렵임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거야. 그래서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급히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말을 몰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어. 

실제로 거리는 성티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본진인 고리산성(古利山城)까지는 20km가 안되는 거리야. 빠른 말로 달리면 2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

그렇기에 성왕은 해가 서쪽으로 져가고 있음에도 출발을 강행한 것으로 보여. 아마도 성왕의 머리속엔 급히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 군영의 상황을 점검하고 왜(倭)군과 대가야(大伽倻)군 그리고 귀족들이 이끄는 지방군에 대한 여러 조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지나 않았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신라가 성왕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길을 끊기위해 집결하였다는 기록으로 볼때, 성왕의 이동루트가 신라군에 간파 되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어. 


Kia~ 원숭이 통궈!.jpg

영화 연함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中 부건빌 요격 장면


마치 2차대전때 솔로몬제도를 시찰하러 가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제독의 정보를 미군이 미리 파악하고 지나가는 길목인 부건빌섬(Bougainville I.) 상공에서 요격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


 
즉, 성왕은 성티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군영인 고리산성(古利山城)까지는 작전회의차 늘상 다니던 이통 통로였기에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 있어. 래서 측근의 소규모 호위 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 여창의 고리산성(古利山城)으로 이동하다가 신라 기병에 요격당한 것이 진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이유라고 볼 수 있어.

위키백과에서처럼 태자의 안위를 생각해서 달려가다가 어이없이 참수당했단 소리가 아니며, 또한 "오히려 태자 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에 의해 관산성이 함락된 직후 후방에서 호위병을 이끌고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하여, 내지는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산성으로 오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란 추측은 아주 잘못된 해석이지.




하지만 이러한 추론과 다르게 반대로 보면,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백제는 신라군의 이동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성립하는데, 이는 정보력의 부재는 결국 전쟁의 필패를 가져온다는 군사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야.




그럼 백제의 영웅왕이였던 성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재구성 해보자ㅇㅇ



관산성 방면에서 본 구천.jpg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구천(狗川)


구천이라 함은 흔히 말하는 실개천의 개천을  한자로 적을때 개구(狗)자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는 서화천으로 불리고 있어. 

성왕은 굽은벼랑의 현지방언인 (구즌벼루, 구진베루) 밑에서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것으로 전하고 있지. 

구진베루의 끝자락 돌아가는 부분이 전사자를 염(殮)했다는 염장터야.





앞서 설명했지만 관산성 서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구천이 있으며 구천 옆으로 서화천이 흐르는걸 기억할거야.


성왕의 움직임을 포착한 거칠부는 아마 이 구진베루에 삼년산성 소속의 중장기병대와 기병대를 배치했을텐데, 이 기병대를 이끄는 장수는 고간(高干)도도(都刀)였어. 성왕이 서화천을 따라 올라올 것을 알고 고간(高干)도도(都刀)는 매복했을거야. 위에서 구천지역을 설명했을때의 짤을 기억하는 게이들이면 아마 '구천에서 매복했다면 신라 기병이 급습하면 뒤로 후퇴했으면 되지 않았나?'란  생각을 할거야. 내 추론으로는 구천에 신라 중장기병대가 매복하고 있었고 삼성산(관산성이 있는산)의 남쪽 산등성이 밑으로 신라의 기병대가 매복해서 후방을 급습했을거야. 그래야 퇴로를 막고 성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테니까ㅇㅇ



그래서 그 상황을 밑의 짤에 한번 표현해봤어.



성왕 전사 직전 신라군의 배치.jpg



서화천을 경계로 북쪽과 서쪽에 각각 중장기병과 기병대를 배치하여 진로와 퇴로를 막았을거야.


성왕은 아무것도 모른체 범의 아귀로 달려가는 상황이였지.





 성왕의 마지막 이동로.jpg

성왕의 마지막 이동 경로와 신라군의 배치


구비구비 흐르는 서화천을 따라 급히 거슬러 올라오는 성왕과 그 휘하의 대가야 기병 50기를 보고 고간 도도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을거야.

맹수는 먹잇감을 노릴때에 작은 기척도 내지 않는 법이잖아?
 

구천(구진베루)의 끝 서화천(西華川)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현지주민들이 염장(殮場)터라고 부르고 있어. 그 옛날 관산성 전투 당시 전사자를 염을 하던곳이라서 염장터라 불리우는 곳이라고 그 이름의 유래를 전하고 있지.


이 말은 즉, 염장터가 백제 성왕 일행이 신라 매복군에 걸려 들었던 바로 그 장소 였을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을거 같아.


서화천(西華川)이 휘돌아 빠져나가는 이곳을 백제 성왕과 50기의 호위대가 지나는 순간, 그 앞뒤에 매복해 있던 신라의 중장기병대가 습격했을거라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盧? 바로 아래 짤처럼 말야ㅋ







고간 도도의 습격.jpg

고간도도 휘하의 삼년산성 기병대의 성왕과 대가야 기병 습격



성왕과 그 휘하의 대가야 기병 50기가 염장터를 도는 순간 고간(高干)도도(都刀)가 공격신호를 올리자 구진베루 위에 매복해있던 중장기병대가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며 대가야 기병을 습격하여 앞을 막고, 신호를 듣고 빠른 속도로 성왕의 후미로 달려와 퇴로를 막았을거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왕좌왕 했을거야.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길은 작전회의차 자주 들락날락 했던 길이였으니 말이야ㅇㅇ 


아마 성왕이 이끌고 있던 50기를 효과적으로 포위해서 생포했을려면 고간 도도가 이끄는 기병은 적어도 2배인 100기에 달했을거야.

대가야 기병들이 필사적으로 활로를 뚫을라고 했겠지만, 결국 대다수가 죽고 성왕과 소수의 기병만이 사로 잡혔을거야.




그 이후에는 뭐... 다들 알다싶이 영웅왕의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겠지...



성왕의 최후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아주 잘 나타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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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是時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明王名主也。今使賤奴殺名主。冀傅後世莫忘於口。
已而苦都乃獲明王。再拜曰。請斬王首。
明王對曰。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我國法違背所盟。雖曰國王當受奴手。
〈一本云。明王乘踞胡床。解授佩刀於谷知令斬。〉
明王仰天大憩涕泣。許諾曰。寡人每念。常痛入骨髓。願計不可苟活。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堀坎而埋。
〈一本云。新羅留理明王頭骨。而以禮送餘骨於百濟。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名此廳曰都堂。〉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5年 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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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볼때마다 성왕이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거 같아서 짠하盧....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수도 위례성을 공격하자, 농성을 하다 태자를 살리기 위해 포위되기전에 신라로 가서 원병을 청하라고 보내버리고  버티다가 결국 한때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의 손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500년 한성백제의 역사가 끝나면서, 선대왕들의 염원인 고토(古土)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다 받친 성왕은 결국 사로잡혀 신라군의 중,하급 장수에게 목을 내주게 되었을때, 만감이 교차했을거야.


이 기록을 약간 각색해서 번역해봤어. 윗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 > 표시 안의 기록은 다른 기록에 적혀있는 기록을 첨부 한 것이거든.
이 첨부기록 또한 원기록과 맞아 떨어지므로 섞어서 번역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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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이름은 곡지이다.)가 
 
“고도는 천한 노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고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 주며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수는 없다.” 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추어 백제에 보냈으며
남은 뼈는 구덩이를 파 묻었다.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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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못 이루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 성왕의 비통함과 탄식이 묻어나는 기록이지 않盧?

이 시리즈를 쓰면서 나 또한 성왕의 분노감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었는데 이 기록을 보니 마치 내가 성왕이 된 것 처럼 비통함을 느끼며 눈물샘이 자극받盧 ㅠㅠ



백제의 영웅왕인 성왕의 비극적인 최후는 다시한번 웅비하려던 백제의 추락을 의미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어.

전투에서 패전하자 마자 태자 여창(餘昌)은 이 사실을 킨메이(欽明) 덴노에게 알리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듣고 킨메이 덴노는 슬퍼하며 탄식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있어. 이래나 저래나 당시 성왕은 당대 영웅 중 한명이였다는걸 인정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성왕(聖王)이 신라군의 매복으로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티산성 주둔 성왕 휘하의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신라 관산성(管山城)을 총공격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돼.

혼성군이던 연합군을 적절히 지휘하고 명분을 가지고 복수전에 뛰어들었던 성왕이 아무런 탈 없이 이 혼성군을 이끌고 김천(金泉)까지 진격했던 추론을 근거로 아마 병사들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았을거라 생각이 들어.

당대의 영웅이자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총사령관이 어이없이, 그것도 중,하급장수의 손에 목이 날아갔단 소식을 들었다면 어느 병사라도 분노에 차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거야ㅇㅇ






그러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신라군의 방어막을 백제는 돌파하지 못하고 말아. 대가야(大伽倻) 중장기병이 돌격을 감행하다가 저지된 그 자리는 말무덤고개or말머리고개로 전해지고 있어. 백제,왜,가야 혼성군으로 편성된 성왕 휘하의 백제 연합군은 아무래도 성왕의 전사로 말미암아 구심점을 상실한 가운데, 비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고 볼수 있지.  그 근거로 앞서 언급한 말무덤터가 전하는 그대로 백제 연합군의 패배와 붕괴를 의미해.





백제 연합군의 비조직적인 공격 상황도.jpg


백제 연합군의 비 조직적인 공격 상황도





그렇다면 성왕 휘하의 추부(秋富),마전(麻田),성티산성 주둔의 백제 연합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할때 고리산성(古利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은 왜 협공을 왜 안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어.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기에 자세한 내용은 어쩔수 없이 추론을 할 수 밖에 없어. 






그러므로 군사적 관점에서 추론을 한다면, 백제 성왕이 급히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가고자 했던 점과 태자 여창(餘昌)이 몸져 드러누웠다는 사실, 그리고 전쟁 초기부터 전쟁반대파 백제 귀족의 반대등을 고려해 보면, 성왕이 참수될 당시 태자 여창은 고리산성(古利山城)에 주둔한 백제의 주력군에 대한 지휘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어. 





보통은 여기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관산성(管山城) 전투 이야기야.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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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記 卷04 眞興王 1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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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성왕의 죽음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성왕이 전사한 지역에 위치한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554년 백제와 신라의 전쟁인 것처럼 삼국사기에서도 묘사하고 있어.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그렇고 어지간한 책의 내용도 삼국사기의 원문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그러다보니 성왕 사절지(死節地)로 알려진 구천(구진베루,구진벼루)와 관산성(管山城)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佐平)과 사졸(士卒) 2만9천6백명이 죽은것으로 알고 있지. 
 


그러나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管山城)의 전투는 극히 일부였다는걸 우리는 지금까지 봐 왔을거야.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대전쟁 중 관산성(管山城) 지역에서 성왕이 전사한 것 뿐이지.



모르는 사람이 삼국사기 내용만 본다면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라군이 관산성에서 성왕(聖王)의 백제군을 격파한 것으로 오해하기 쉬워.

그러나 한강유역의 신라군이 관산성(管山城)이 있는 옥천(沃川)까지 오려면 중간에 백제 태자 여창(餘昌)의 군대가 있기에 바로 관산성에 올 수 없어.
 
어디까지나 성왕 휘하의 백제연합군은 주력군(主力軍)이 아닌 조력(助力)이었고, 주력은 고리산성(環山城)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태자 여창(餘昌) 휘하의 백제군이었지.


따라서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의 신라군과 백제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이 맞붙은 전투가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최종 라운드야. 그곳에서 서기 554년,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종말을 고하게 돼.


대회전의 장소는 관산성(管山城)이 아닌 백제 태자 여창(餘昌)의 진영에서 있었으니 그 전투는 바로  백골산(白骨山) 전투야.


백골산(白骨山). 이름 그대로 백골(白骨)이 쌓인 산이지. 




김무력(金武力) 일러스트



이 백골산 전투에서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군주(軍州)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은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 29,600을 격파하고 당시 삼국시대의 세력판도를 뒤집어 버려.






















다음편은 관산성 전투 시리즈의 마지막 글인 백골산전투와 그에 따른 여파에 대해 쓸께.

지금까지 읽느라 수고 많았다ㅋ








5줄 요약.


1. 신라군의 대반격에 의해 굴산성과 김천,핏골전투에서 각각 패한 백제군은 대전의 고리산성,금산지역으로 후퇴하게 되고, 신라는 옥천지방으로 다시 진출하게 되면서 금산지역으로 후퇴했던 성왕은 연합군 본진을 성티산성으로 옮김.

2. 무리하게 개전을 주장했던 태자 여창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반대파 귀족들이 규합하는 사태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면서 막중한 책임감에 의해 몸져 누워버리면서 백제 주력군의 지휘체계가 마비됨.

3. 태자 여창이 몸져 눕게 된 소식을 듣게 된 성왕은 백제 주력군이 분열되버릴까 노심초사한 마음에 저녁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백제 주력군의 진지인 고리산성을 향해 50기의 기병을 이끌고 출발함.

4. 성왕이 고리산성으로 간다는 정보를 수집한 거칠부는 휘하 장수인 고간 도도에게 명하여 삼년산성군의 기병대를 급파하여 매복하였다가 성왕의 호위대를 급습,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게 됨.

5. 성왕이 참수되었단 소식에 성왕이 지휘하던 연합군은 비조직적이고 산발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신라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버리게 되고, 성왕이 참수되었단 소식을 백제 주력군은 들었지만 반격을 안한걸 볼때, 아마 태자 여창이 백제 주력군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했을거라 추정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