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시리즈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제 1-1탄.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http://www.ilbe.com/1990768533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2탄.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왜(倭)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http://www.ilbe.com/2041803634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제 1-3탄. 복수전의 서막 - 관산성 전투의 초기 상황

http://www.ilbe.com/2163761455




















이번 편은 관산성 전투 초반 백제의 승기가 확실시 되던 전장의 분위기를 단숨에 뒤바꿔놓은 전투이자 신라판 300인 굴산성(屈山城) 전투와 백제 성왕의 대가야 진공 실패와 그에 따른 신라,백제의 격돌인 핏골전투에 대해서 써볼까 하盧



지금까지 글에 달린 댓글보면서 재미있게 읽어주고 ㅇㅂ나 ㅁㅈㅎ를 준 게이들한테 노무노무 고맙盧


고퀼이 아니지만 부족한 글 보고 극찬해주니 몸둘바를 모르겟盧ㅋ  무튼 성원에 힘입어 이번글 또한 알차게 써볼께ㅋ








앞선 글에서 관산성 전투 초반부를 살펴 봤을거야.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짤을 보자ㅋ




관산성 초기 전투상황도.jpg






다시한번 곱씹어 보자면 553년 12월 9일 시작된 백제 주력군의 전격전으로 그날 유시인 오후 5~7시 경에 함락되는걸 보면 당시 백제 주력군의 공격은 엄청났을거야. 그런 이유로 인해 관산성 방면군 사령관이였던 이찬(伊湌) 탐지(耽知)가 전사하고 추측으로 신라군 5천은 괴멸했을거야. 그 이후 백제군은 기세를 몰아 삼년산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관문, 굴산성으로 진격하게 되고 백제 성왕이 이끄는 연합군은 주력군의 보조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대가야 지역으로 향하기 위해 추풍령 쪽으로 향하다가 소식을 듣고 속히 지원군을 이끌고 오던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 각간(角干) 우덕(于德)의 지원군 또한 영동지방에서 격파하여 각간(角干) 우덕(于德)이 전사했다는걸 전편에서 서술했어ㅇㅇ  


일단 여기까지가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초반 백제군이 승기를 잡던 시기였지.



그럼 관산성 중반의 전투상황은 어땠을까? 에 대해서 알아보자ㅇㅇ 



먼저 백제의 주력군의 움직임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 연합군의 상황을 살펴보는게 순서에 맞을거 같盧



청성면 보청천.jpg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報靑川)이 흐르는 청성면 일대는 옥천 일대에서 가장 넓은 벌판을 가지고 있고 군량미 조달의 핵심인 너른 벌판까지 갖고 있어. 


굴산성은 토성인데 옥천(沃川)일대에선 옥천군의 삼양리 토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어. 신라가 이곳까지 확대되기 전에는 백제나 마한세력이 축조한 토성으로 보이며, 굴산리토성 배후의 저점산성이 신라가 이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석성이야. 


아무튼 굴산성은 삼년산성이든 영동으로든 가는데는 꼭 거쳐야 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현재도 굴산성 인근으로는 19번 국도가 지나고 있거든ㅋ


지금은 포장도로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이 방향으로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을 것으로 추측 할 수 있어.







필자인 나의 생각에는 산성에 대해서 고찰할때는 그 구조도 구조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격과 방어측면에서의 고찰이라 생각해. 


그래서 구조적 특성에 대한 설명은 가급적 줄일께. 물론 고고학적으로는 유물이라든가 구조적 측면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 측면이 군사적 관점에선 더 중요하다고 봐야 되지 않겠盧? 특히 고대 삼국시대의 전투는 독립된 산성만의 전투가 아니라 인근 산성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그런 지리적 연결관계는 삼국시대 전투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투를 파악하는데에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어. 이런 산성간의 시스템적 지원관계는  삼국시대가 가장 원할 하였고 반대로 시대가 내려오면서는 그 연결성이 떨어지다가 조선 중기 이후엔 유명무실화되어서 외침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였어.

 

그런의미에서 굴산성전투 당시 지리적 위치와 군 기동로의 연결성을 구글어스를 통해 그려보면 다음과 같아.




굴산성과 삼년산성-충주의 진격로.jpg




딱 봐도 보청천을 건너 굴산성을 통과하여 쭉 올라가면 삼년산성과 그 뒤로 보이는 중원부가 보이지?


이게 바로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의 주공 루트이지ㅇㅇ



삼년산성 주변의 지역을 한번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



신라의 3대 루트.jpg



짤에서 보면 알겠지만 삼년산성을 점령하면 바로 충주로 들어가는 잣고개,활목고개가 열려ㅇㅇ 

속리산이 옆에 있지만 조령보다는 군사를 이동시키기 쉬워서 바로 충주로 들어 갈 수 있는 길목이 열리게 됨을 의미하는거지ㅇㅇ


이 삼년산성을 점령하면 부수적으로 삼년산성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속리산 고개길도 열리므로 정리하자면 삼년산성을 점령하면 상주,충주 방면으로 압박할 수 있으며 조령의 군사적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충주를 압박하게 되면 신주(新州)로 통하는 길목인 남한강 중,상류 지역을 백제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이야.


만약 이 삼년산성을 점령하게 되면 신주(新州)의 김무력군을 고사 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천안 일대 방어선에 대기 하고 있는 백제군이 손쉽게 고토(古土) 한성지역을 다시 수복 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지역이지.


그러므로 백제 주력군은 이 삼년산성을 목표로 해서 진군하는걸 목적으로 하였어.


삼년산성이야 말로 對 백제의 전초기지라 할 만큼 신라에겐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였지.



삼년산성을 보면 알겠지만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지속되었던 시기에 조령,죽령,삼년산성 이북은 고구려의 영역이였고, 또한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충북 괴산군으로 넘어가는 잣고개나 활목고개는 고구려의 신라 압박의 주된 공격루트였기에 삼년산성은 신라군의 최고의 정예부대가 양성,주둔되었던 곳이지.


이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전 글에서 밝혔듯이 이사부의 명을 받고 對 고구려 전을 수행하던 파진찬(波珍飡) 거칠부(居柒夫)의 중원사령부가 있던 곳이야.


위에 짤에서 충주를 중원부(중원경)으로서 중부방면군 사령부라고 썼지만 명목상으로 그렇지 실제 군대 사령부는 충주가 아닌 삼년산성이였어.





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략하는게 백제 주력군의 목표인걸 누누히 이야기 했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옥천,영동에서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목은 한가지 뿐인데 바로 굴산성이지.





보청천 사진.jpg


표지판을 잘 보자. 딱 길목이란게 눈에 보임.




이 굴산성(屈山城) 앞에는 현재도 유유히 흐르는 보청천(報靑川)이 자리잡고 있어.이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554년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어. 


굴산성(屈山城)이 백제군에 점령당했는지는 알 수 없어. 다만 굴산성에서 배후의 저점산성(猪岾山城)으로 연결되는 신라의 방어선을 백제가 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여. 저점 산성 넘어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이어지는 루트상에 신라가 방어진지를 많이 구축하여 지금까지 곳곳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백제와의 전투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저점산성과 굴산성에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의 진군은 멈쳤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어.  

 

그럼 굴산성(屈山城) 전투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건 한국,일본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굴산성 주변의 지형지물을 보고 판단해 볼 수 밖에 없을거야.


필자가 추측하는 굴산성 전투의 초반 양군의 전투 배치상황을 알아 보기 전에 굴산성(屈山城)을 알아보자.








굴산성.jpg



굴산성(屈山城)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즈막한 야산에 흙으로 빚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굴산성 안으로 들어가보면 중,대형규모의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서 군 주둔 지휘형 토성임을 금방 알수 있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보청천(報靑川) 일대의 평야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지휘 관측 및 주둔형 성곽으로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토성이지.



전편에서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자세한 내용을 서술했는데 눈 여겨본 게이가 있으면 알수 있을거야.


이 굴산성(屈山城)은 서기 470년인 신라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에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같이 축조 되었을 거라 추측 하고 있어.


또한 16년 뒤인 서기 486년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에 이찬 실죽에게 명하여 현재 선산(善山)인 일선군(一善郡) 부근의 정부(丁夫) 3,000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과 굴산성(屈山城)을 대대적으로 개,보수를 단행해. 서기 483,486년 두번에 걸쳐 소지마립간이 일선군을 직접 순행한 기록이 나타날 만큼 삼년산성과 굴산성은 신라의 축성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표적인 신라의 성(城) 중 하나이지. 


왜냐하면 당시 기준으로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은 각각 對 고구려 방어, 對 백제 방어의 선봉 역활을 하였기 때문인데, 굴산성의 지리적 위치를 생각해보면 이곳은 백제의 서남쪽 통로를 통한 신라군의 침입을 저지하고 나아가 금강 유역의 서부 지역을 확보하여 백제의 왕도인 당시 웅진성(熊津城)과 사비성(泗沘城)의 인후(咽頭)를 향하여 있기 때문에 아마 견제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축성 되었을 거라 보이기 때문이지.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굴산성은 포곡형(包谷形) 산성, 한자 뜻 그대로 산성이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산성을 말하며 대체적으로 중,대형 산성이 여기에 속해.




공산성.jpg


포곡형 산성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공주 공산성(웅진성)




이 포곡형(包谷形) 산성의 특징은 계곡부분에 수구(水口) 즉, 성벽 안의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설이 필수적으로 있으며, 하나의 봉우리 또는 두개의 봉우리에서 성벽이 시작하여 양쪽 능성을 따라 내려오다 적정한 시점에서 계곡을 감싸 안은 형태의 산성이야. 


연구 조사 결과, 굴산성(屈山城)의 성곽 규모는 대략 1,500m의 거점성 역활을 하였으며, 성안에 주거와 주둔군의 농성이 가능한 규모였다고 밝히고 있어.


또한 뒷산에 위치한 저점산성(猪岾山城) 또한 대형 산성에 들어가는데, 아마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규모의 산성이 축조 되었을거라 생각해.



아 그리고 저점산성(猪岾山城)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치세에 축조했단 기록이 있어ㅇㅇ;







일이있어서 옥천(沃川)에 들린적이 있었는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찾아가 보질 못해서 아쉬워 하던 찰나에 인터넷에 어느 아마추어 사학자의 굴산성,저점산성 답사기의 사진을 퍼왔어. 이분은 남한의 성곽을 전문적으로 찾아서 답사하는 분 같盧... 여러 좋은 사진과 글들이 많네그려!!


문제가 된다면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자삭하겠음ㅇㅇ;





백제군 시각에서 본 굴산성과 저점산성.jpg


궁촌재에서 바라본 굴산성





궁촌재(505번 국도)에 있는 고개마루 정자에서 바라본 청성면 소재지이며, 사진 아래의 마을은 궁촌리라고 불리우며, 저 멀리 보청천 넘어로 조그만 언덕이 보이는 곳이 바로 굴산성(屈山城)이야. 딱 보면 알겠지만 굴산성 한 가운데로 도로가 지나가ㅇㅇ 이게 앞서 말한 505번 국도임ㅇㅇ;


이 고개를 통해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 25,000명이 넘어 왔을거야. 




궁촌재에서 바라본 저점산성과 굴산성.jpg


궁촌재에서 바라본 저점산성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굴산성 한 가운데로 도로가 나 있어서 양분되어 있는 모습이 보일거야.


양분된 왼쪽 산 능성을 타고 올라가면 산 꼭대기가 보이지 않盧? 그 부분에 저점산성(猪岾山城)이 자리잡고 있어. 

즉, 청성초등학교 바로 뒷산이 바로 저점산성이 위치하고 있는거지.


이 저점산성은 위에서 언급했지만 굴산성(屈山城)을 보조하는 역활도 하였으며, 굴산성이 포위당하였을때 지원군이 도달 할 때까지 버텨야 하는 농성의 역활도 같이 했을거야.



 

궁촌리.jpg


궁촌재에서 바라본 궁촌리 마을 전경



이 궁촌리 마을이 아마 백제 주력군의 굴산성(屈山城) 공략의 본진이였을거야. 아마 이곳에 본진이 위치하고 있으며 궁촌리 바로 오른편 산등성에 백제 주력군의 사령관인 태자 여창과 여러 백제,왜(倭)군의 고위 장수들이 굴산성 공략전을 전두 지휘했을거라 생각해.





굴산성의 성곽.jpg


現 굴산성의 성곽




보면 알겠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밭으로 개간된 모습이야. 본연의 모습은 잃어 버렸지만 굴산성의 윤곽은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盧?


사진 중상단에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평지 보이盧? 산과 산 가운데ㅇㅇ


그곳이 백제 주력군의 본진이 있었을거라 내가 추측하는 장소야. 저 산과 산 사이로 나 있는 궁촌재를 넘어 백제 주력군이 넘어왔을테지ㅇㅇ


고갯길을 따라 빽빽히 내려오는 백제군과 왜(倭)군의 깃발을 보고 지렸을 신라군을 생각하니 불쌍하盧....







저점산성에서 바라본 보청천.jpg


저점산성에서 본 보청천




꽤나 높아 보이지? 사진 상단을 보면 좌측의 높은산이 보이盧? 


곳이 바로 팔음산(八音山)이고 우측의 높은 봉우리가 바로 백화산(白華山) 포성봉(933.8m)이야.


이 백화산은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금돌산성(今突山城)이 위치하고 있어.


이 금돌산성은 김유신(金庾信)이 사비성을 공략할 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금성(경주)에서 직접 나와 친정을 하며 주둔한 곳으로 유명하지ㅇㅇ;





지점산성에서 바라본 굴산성.jpg


지점산성에서 바라본 굴산성




어떠盧? 굴산성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盧?  


지금은 청성면이 행정구역개편으로 인해 옥천군에 속하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굴현(堀峴)이라고 해서 지금의 보은군(報恩郡)의 옛말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속현으로 되어 있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어. 


참고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군의 속현이 두개로 적혀있는데, 하나는 굴산성이 위치해 있는 굴현이고, 다른 하나는 살매현(薩買縣)으로 남한강 지류인 달천강(疸川江) 상류인 現 청천면 지역이야. 이는 삼년산성(三年山城)이 축조된 뚜렷한 목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다시한번 곱씹어 보자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교두보로 남으로는 굴산성을 중심으로 옥천(沃川) 바로 옆의 백제의 군사,경제 중심지였던 금산(錦山)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곡창지대인 논산(論山)과 사비성(泗沘城) 주변의 금강(錦江) 연안을 견제하는것이고, 북으로는 달천강(疸川江) 상류, 청천성(靑川城)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을 견제하는 목적이였지.



저점산성.jpg


現 남아있는 저점산성의 남쪽 성곽



난 참 아쉬운게 말로만 '관광대국을 만들자' 라고 떠들어대는 정부의 한심함에 너무 치를 떨어.


이번에 2차 시험에 붙으면 한동안 글을 쌀 수 없겠지만, 붙고 3차까지 붙으면 원하는 부서로 발령나서 문화재 복원과 보존에 대한 예산 늘리는데 건의를 하고 싶어. 전편의 글을 봐도 알겠지만 한국은 주변 산등성이 마다 한개씩 산성이 있을 정도로 전 국토가 산성이란 문화재가 정말 많이 있는 곳이야.


현재 유학중인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과 보르도, 루아르 지방을 들릴때마다 느낀점이 강의 지류마다 있는 성을 잘 보존하고 복원해서 관광지로 만들어 그에 따른 막대한 수입창출을 하는걸 보고 부러웠어. 한국 또한 프랑스와 중부유럽의 성(城)의 나라라고 칭해지는 독일보다 더하면 더하지 적지 않은 산성과 성곽이 있는 나라인데, 막상 프랑스 친구나 펜팔하는 일본친구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 와서 역사 유적지를 보여달라고 하면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게 슬프더라;;


이 저점산성의 사진만 봐도 세월의 풍파에 무너져 내리면서 시간이 좀더 흐르면 세월에 묻혀 없어질거 같지 않아 보이盧?


특히 더 웃긴건 2008년인가? 2009년에 굴산성이 70대 노인에 의해서 50m정도 무너진 기사도 있어.


사리사욕으로 인해 삼국시대의 격전장이자 우리 역사가 살아 숨쉬는 문화재를 곡갱이와 삽으로 무너트리다니 ㅅㅂ 아무리 노인공경을 미덕으로 하는 김치맨이지만 쌍욕을 하고 싶盧...;



이러한 산성을 복원,보수해서 널리 알리면 좋지 않겠盧?


두유노우 김치? 두유노우 싸이? 이딴거 씨부리지말고 한국하면 떠올릴만한 세계적 이미지로 '동양의 성(城)의 나라'란 이미지를 구축해서 한국만의 성곽문화와 그에 따른 한국역사 알리기를 동시에 한다면 이것 또한 국가 브랜드를 올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미안하다.  글이 삼천포로 빠졌다;;  잡소리가 노무노무 길었다;



이 굴산성에 자리잡고있는 마을이 바로 산계리(山桂里)인데, 현재 굴산성(屈山城)이라 부르지 않고 지역 주민들은 산계리 토성으로 불러.


그 산계리 마을의 유래비를 찍은 사진까지 찍어서 올려놓은 아마추어 사학자의 좋은 사진을 무단으로 펌한거에 대해 미리 죄송스럽다고 밝히며 유래비의 사진을 한번 보자ㅇㅇ





마을 유래비 1.jpg 마을 유래비2 .jpg


청성면 산계리의 마을 유래비






어떠盧? 지금까지 서술했던 내용과 똑같盧?




지금까지 굴산성(屈山城)과 저점산성(猪岾山城)의 답사기를 살펴보고, 이 지역의 사진을 보고 얼추 굴산성 전투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을거야.


답사기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굴산성은 현재 어느정도 성곽의 윤곽이 보이지만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잘 모르겠지?



그래서 굴산성(屈山城) 연구조사에서 밝혀진 굴산성 평면 실축도를 살펴서 굴산성의 모습을 예측해보자ㅇㅇ




굴산성_평면 실축도.gif



굴산성 평면 실축도




딱 봐도 중,대형 산성에 속하지? 외성과 내성이 존재하며 내성 안에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을 거라 조사 결과에서 밝히고 있어.



여기서 보면 북쪽의 뾰족한 부분과 서쪽의 둥근 부분, 그리고 남서쪽으로 치성과 봉우리라고 써져 있盧?



북쪽에서부터 서쪽 남서쪽에 이르는 부분이 바로 산등성이와 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이야. 이를 바탕으로 실제 항공사진과 비교해서 굴산성(屈山城)의 지도를 표현한게 바로 아래와 같아.





굴산성 항공사진 예측도.jpg


굴산성과 저점산성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실제 굴산성의 모습




그림판 실력이 나날이 느는거 같아 뿌듯하盧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때? 굴산성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盧?



바로 옆에 저점산성(猪岾山城)이 자리잡고 있고 굴산성이 북쪽으로 쭉 올라가 있으며, 그곳에 북문이 있으니 딱 봐도 굴산성을 공략해야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넘어가는 길이 넘어오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盧?


또한 저점산성과 굴산성 사이로 소로가 있어서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려는 백제군을 협공하기도 좋고, 또한 굴산성이 위급할때 소로(小路)를 통해 굴산성을 측면에서 지원 할 수 있으므로 언뜻 보면 참 공략하기 어려운 산성인게 느껴지지 않盧?


결국 백제군 입장에서는 보청천의 너비가 제일 줄어드는 굴산성 남쪽으로 공격루트를 잡아야 되는 상황이지.


하지만 굴산성 오른쪽으로 보청천을 넘으면 넓은 평지가 나타나므로 백제군의 상당수는 그쪽에 포진하여 굴산성을 동쪽과 남쪽, 두군데에서 주 공격이 이루워 졌을거고 또한 주력군에 있던 왜군은 주로 저점산성과 굴산성을 동시에 공략했을거라 난 추측해ㅇㅇ;



그러므로 굴산성 전투 직전의 백제,신라군의 배치 상황도는 다음과 같아ㅇㅇ




굴산성 전투 초기 전투배치도1-1.jpg


굴산성 전투 직전의 양측 배치도 / 포토샵 실력도 나날이 느는거 같지 않盧 ㅋㅋㅋㅋ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 굴산성 앞으로 진격, 전투 배치를 끝낸 상황을 표현했어. 


주력군의 숫자가 대략 25,000이므로 당시 굴산성의 옆을 흐르는 보청천(報靑川) 주변으로는 백제군이 득실 거렸을거야.


그에 비해 굴산성에는 대략 300~500명의 신라 주둔군이 배치 되어 있었으며, 그 뒤로 저점산성 또한 300~500명의 병사가 배치 되었을테지.


위에서 설명했지만 저점산성(猪岾山城)은 남동쪽 능선을 타고 굴산성(屈山城)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협공작전에 아주 좋은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거야.



또한 이건 개인적인 추측인데, 저점산성(猪岾山城) 바로 옆 산에 소규모의 신라군과 보루가 있었을거 같아. 그러지 않고는 우회해서 소규모의 백제군이 뒤에서 급습이 가능 했을텐데, 그러면 후방이 위태해 졌을 테고, 결국 굴산성(屈山城)이 함락되었을거야. 하지만 그런 기록이 없으니 굴산성 후방의 좌우 산등성이에는 소규모의 신라군의 보루가 있었을거라 추론 할 수 있지.... 단지 발견이 안되었을 뿐이야...ㅋㅋㅋ;;;;;;ㅅㅂ;




무튼 상황을 정리하자면 굴산성,저점산성 신라 방어군 600 ~ 1,000명 vs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왜군포함) 25,000명의 싸움이지 않盧?


아무리 지형지물이 신라군에 유리하더라도 숫자에서 신라군을 후하게 쳐줘도 백제군과의 병력차이는 25배나 나는 불리한 상황이야.



굴산성(屈山城)과 저점산성(猪岾山城)에서 궁촌재를 넘어오는 백제 주력군을 보고 급하게 파발을 띄웠을거라 추측해.


굴산성이 함락되면 다음 타겟은 신라의 중요 군사요충지인 삼년산성이였겠지. 굴산성 위쪽으로 자리잡은 삼년산성에는 전편에도 서술했지만 파진찬(波珍飡) 거칠부(居柒夫)가 이끄는 삼년산성 주둔군 약 10,000명이 있었으니, 굴산성의 성주(?)는 급하게 백제의 대군이 다가옴을 파발에 적어 삼년산성(三年山城)의 거칠부에게 보냈을거야.


거리가 거리인 만큼 아마 파발이 빠른속도로 당도하면 약 2~3시간 정도 걸렸을 거라 생각이 드盧


2~3시간의 시간이면 백제 주력군은 보청천(報靑川)을 경계로 진지를 구축하였을거고 또한 첫번째 굴산성 공략을 위해 전투 배치가 끝났을 시간이야.


거칠부가 굴산성에서 달려오는 시간을 어림잡아 만 하루라고 잡을 수 있는데 휘하 기병만 이끌고 올 수 없기에 아마 중장기병과 기병대를 급파하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거칠부가 직접 보병을 거느리고 굴산성으로 내려 왔을거라 생각이 드盧.



하루를 잡고 백제 주력군의 첫번째 공략이 시작되는데, 앞서 설명했지만 두 방향에서 일시에 공격을 했을거라 추측해 볼 수 있어.






굴산성 전투 초기 전투상황도1-1.jpg


백제 주력군의 주 공격 루트




앞서 기록을 했지만 굴산성 전투 이후 삼년산성(三年山城) 방면의 산성들이 함락되었단 기록이 없는걸 보면 약 1,000 명의 신라군이 25,000명의 백제 주력군을 힘겹게 막았을 거라 추측 할 수 있어.


공성전에서 백제의 중장기병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공격은 백제 보병과 왜(倭)군이 담당했을거라 생각해.


특히 이 왜(倭)군은 경장보병과 궁수들로 이루워 졌기 때문에 내 추측으로는 앞서 기술 했듯이 굴산성 옆의 저점산성을 견제&공격을 담당 했을 거라 생각이 드盧


즉, 왜(倭)군은 굴산성의 서쪽으로 공격루트를 잡아 저점산성에서 굴산성을 지원하는걸 방해하는 공작과 더불어 방어가 취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성을 점령하려는 작전을 펼쳤을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ㅋ




함락된 기록이 없다고 했으니 신라군은 백제 주력군의 첫번째 공격에 대해서 막아 냈겠지?


아마 주둔군과 급하게 달려온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신라 중장기병들과 기병들이 굴산성 측면을 쇄도하여 갑자기 들이 닥쳤을거라 생각해.


고대엔 보병을 잡으려면 땅크인 중장기병이 제격이지 않겠盧? 그러므로 산등성이를 넘어 굴산성을 공격하던 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했으리라 봐ㅇㅇ


그러므로 굴산성(屈山城)전투 초반의 신라 중장기병대와 기병들의 기습을 나타낸게 바로 아래 짤이야.



굴산성 전투 초기 전투상황도1-2.jpg




이 중장기병대와 기병들의 기습으로 백제군은 완벽하게 당하고 말았을거야.


공성전에 중장기병이나 기병이 필요 없던 백제의 경우에는 보청천(報靑川) 이남에 배치했을텐데, 이 신라 기병들의 기습에 반격하지 못했을거야.


보청천을 건너는데 시간이 들었을 테고 또한 신라 기병과 백제 기병 사이에는 수많은 백제 보병들과 왜군이 있었을테니 속수무책으로 보병들이 당하는걸 지켜 보고있을수 밖에 없었을거야.


결국 삼년산성(三年山城) 방면 지원군의 중장기병대는 완벽한 기습을 통해 첫번째 백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았을거라 추측해봤어.





 




첫번째 전투에서 양측은 일단 간을 봤을거라 생각해. 


민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에는 보청천이 피로 물들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근거로 추정해보면 굴산성 공성전에서 백제가 그렇게까지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엔 애매해.  피로 물들 정도이면 엄청난 격전이 일어나야 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첫번째 전투에서는 서로 간만 봤다고 추측한거야.



그럼 구전에서 내려오는대로 보청천(報靑川)이 피로 물들 정도로 격전을 벌였다면? 


당연히 거칠부의 삼년산성 주둔군이 굴산성과 저점산성을 지원하러 내려와서 백제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을 거라 생각 할 수 있어.


그렇게 추측을 하면 치열했던 전투과정은 짐작하고도 남을거라 생각이 드盧. 




그럼 굴산성 전투의 중반부를 한번 살펴보도록하자. 밑의 짤이 바로 굴산성 전투의 중반부의 상황을 나타낸거야.





굴산성 전투 중반 전투상황도.jpg






초반에 언급했듯이 굴산성이 포위 당하기 전에 급하게 보낸 지원요청을 받고 달려온 신라 중장기병의 활약에 힘입어 백제군의 첫번째 공격을 막았을거라 위에서 말했지?


그 후 거칠부(居柒夫)가 이끄는 삼년산성(三年山城) 지원군이 도착했을거야. 삼년산성 주변의 방어 또한 무시 못하므로 아마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빼고 약 7,000 ~ 10,000 의 지원군을 이끌고 왔을거야.




동양의 신묘한 병법과 그걸 부리는 명장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우리 밀게이들이라면 아군이 적보다 적으면 어떤 전술을 써야 될거 같盧?



뭐 다 알고 있겠지만 정답은 기만책(欺瞞策)이지ㅇㅇ;




굴산성 전투 중반에는 신라의 거칠부가 이 기만책을 사용 했을거라 생각해 봤어.


왜냐하면 아무리 초전에서 신라가 이겼다고 하지만 신라군과 백제군의 병력차이는 2배에 달해ㅇㅇ


그러므로 내 하찮은 머리로 '거칠부(居柒夫)가 기만책을 펼쳤다면 어떤 전술을 했을까?' 에 해답은 윗짤과 같이 양옆의 산등성이와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향하는 고갯길에 신라군을 배치해서 마치 엄청난 군세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다는걸 백제 진영에 보여줬을거라 판단해서 짤에 표현해봤어.


수많은 군세가 도착했다면 백제 주력군이 쉽사리 공격을 하지 않았을테니까ㅇㅇ;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고 산등성이에 배치되면서 몇달에 걸친 대치전이 일어났을거야. (그래봤자 1~2달 정도?)



백제 주력군의 후방은 백제 성왕(聖王)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든든하게 버티며 대가야(大伽倻) 지방으로 진격하고 있었으니 일단 후방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신라의 지원군 또한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게 전편에서 서술했지만 신라군의 대부분은 신주(新州)의 김무력(金武力)군과 중원경(충주)을 위시로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주둔한 거칠부거칠부(居柒夫)군, 그리고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상주군단 (사령관은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 각간(角干) 우덕(于德)이지만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관산성 초반 지원하러 달려가다 백제 성왕의 연합군에 요격당해 전사하고 지원군은 전멸당함), 그리고 대가야(大伽倻) 및 아라가야(阿羅伽倻)를 압박하고 있던 금관가야에 배치된 군단으로 분포되었기 때문에 지원군에 대해선 어디서 빼올수가 없었지.


단지 백제 성왕이 대가야로 진격하고 있다는걸 파악한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가 진흥왕(眞興王)의 재가를 받아 수도 금성을 호위하는 금성군단과 금관가야에 배치된 군단의 일부를 착출하여 달구벌로 보냈을거란 추측을 해 볼 수 있어.


한일 양국의 기록에 아무런 정보가 없다보니 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점 미안하盧;







무튼 이 대치국면이 몇달에 걸렸을지는 모르지만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마지막을 알고있는 우리에겐 그렇게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거야.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의 본진이 554년 7월 지금의 고리산성인 환산성에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거칠부(居柒夫)의 신라군단과 태자 여창의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屈山城)을 놓고 대격돌을 했을거라 추측 할 수 있어.



아래가 그 대격돌의 상황도를 표현해 본거야ㅇㅇ




굴산성 전투 중반 전투상황도 1-2.jpg



구글어스로 어느정도 높이에서 보면 이 굴산성 지역이 좁아 보이는데 사실 약간 확대만 해봐도 충분히 중장기병들이 돌격 할 수 있는 거리가 돼.


구글어스로 거리를 측정해 보니 굴산성 남문에서 부터 보청천까지 거리가 약 800m 북문쪽에서 동쪽 보청천까지가 약 480~500m 되는 걸 보면 중장기병을 운용 할 수는 있긴 해. 단지 신라 중장기병의 대다수는 굴산성 남쪽 평야지대에 배치 되었을것이라 추측해보고, 북쪽에는 일부의 기병을 배치해서 넘어오는 백제군을 상대 했을거야.


백제 주력군 또한 마찬가지로 주공을 남문으로 잡고 대다수의 기병을 배치했을거야.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아마 1:1의 비율로 남쪽과 동쪽을 동시 공략했을것으로 추측이 되어져.


굴산성 전투 중반에 일어난 대규모 충돌로 인해 우리가 앞서 살펴본 '보청천이 핏물로 물들었다'로 전해 내려온 구절을 근거로 추측해 봤어.



이 전투에서 백제측과 신라측은 서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거라 추측 할 수 있겠지만 둘다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면, 백제군의 병력이 많은 관계로 아마 굴산성이 함락되었을거야. 그러므로 이 대규모 충돌에서 신라군이 승리 했을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지.






다들 영화 300을 알고 있을거야.


아케네메스 제국의 왕인 크세르크세스가 추정치 10~20만의 페르시아 대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하는걸 스파르타의 두 왕 중 하나인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목숨을 받쳐 그리스연합군에게 피같은 수일을 벌어줘서 결국 그리스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는 시나리오지.


사실 제목을 임펙트있게 적다보니 저렇게 되었지만, 사실 굴산성의 신라군이 백제군에 전멸한 것도 아니라서 영.....


그래서 좀더 사실적인 예를 들자면 6.25 한국전에서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괴 빨갱이들은 낙동강 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반격에 발이 묶였고, 그 정점의 전투는 영웅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였던 다부동 전투를 예로 드는게 더 정확하겠盧ㅋ;


그와 거의 비슷한 양상이 서기 554년 보청천의 굴산성 전투였어.







여기서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 보청천의 굴산성과 저점산성을 못 넘은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바대로 백제 공격군의 병참보급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지역은 신라의 주력군의 지휘본부인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곳이야. 또한 삼년산성의 배후로는 거칠부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삼년산성의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거칠부장군의 신라군도 이곳 굴산성 전투지역으로 급파되었을 것으로 비정 하고서 지금까지 글을 써왔어.

 

거칠부(居柒夫)의 휘하의 삼년산성(三年山城) 병력은 신라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병력으로 손 꼽혀. 그들은 고구려군과 전투로 단련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또한 이 고구려군이 당시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상대로 대규모 중장기병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걸 보면 거칠부 휘하의 삼년산성 군 또한 이에 맞서 중장기병을 운용 했을거야. 소위 말하는 중장기병 만능론이 여기서도 통하나? 싶겠지만, 고대시대에 중장기병을 막을 병과는 중장기병 뿐이므로 충분히 거칠부군이 중장기병을 높은 비율로 운용했다고 추론 해볼수 있어. 


따라서 거칠부(居柒夫) 휘하의 삼년산성군이 합세함에 따라서 백제 주력군은 진격이 멈추고 보청천(報靑川)을 사이에 두고 고착화 되었을 것으로 군사적 판단을 해 봤어. 그 근거로는  이 전투이후 거칠부(居柒夫)는 승승장구해서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의 뒤를 이어서 병부령(관등: 각간角干)에 오르고 진지왕(眞智王)때는 실권자로서 군국정사를 모두 보는 상대등(上大等)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야.






결국 정리하자면, 이 굴산성(屈山城) 전투에서 백제군은 거칠부의 지휘하에 능수능란하게 전술을 펼친 신라군에게 대패를 당하여 후퇴하였다고 추론 할 수 있어.


하지만 대패라기 보단 전장의 흐름이 경색되고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라의 병력동원이 점점 커지게 되고, 이에 따른 태자 여창(餘昌)의 심리적인 압박과 후방에서 들리는 성왕의 연합군의 패배소식에 동요한 억지로 따라온 전쟁반대파 귀족들의 압박으로 후퇴를 했을거야.


이 추론의 근거는 일본서기 기록과 삼국사기 기록에 나와있는 관산성 전투 후반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 29,600이란 수치를 근거로 그렇게까지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을거라 판단하기 때문이지.



왜 백제 주력군이 25,000 이라면서 갑자기 29,600 이 되盧? 하겠지만 이건 다음글에서 설명하겠어ㅋ



 





그럼 이 시점에서 백제+왜(倭)+대가야 연합군을 이끌던 성왕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시 한번 구글 어스를 보자ㅋ




관산성 전투 중반 각 군의 진격로.jpg




관산성 중반 각군의 진격루트를 정리해봤어.


어떠盧? 전황이 보이盧? 



영동지방에서 백제 성왕의 연합군은 상주 군주였던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지원군 약 7,000명 (추정치)을 괴멸시키고 추풍령을 넘어 김천(金泉)으로 넘어왔지만, 속속 집결하는 신라군에게 길목이 막힌걸 볼 수 있을거야.



그럼 여기서 다시 전편에서 서술한 핏골전투를 다시 곱씹어 보자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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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 각계2리 동네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동리 이름은 신라 진흥왕 15년(554)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침공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하였는데  

특히 핏골에서 전멸하였으므로 그 후로 이 골짜기를 "핏골(血谷)"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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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년 12월 9일 관산성 전투가 발발 한 후 1년뒤인 554년에 핏골전투가 일어났으니... 


어디 한번 우리 추론해보자.  



우리가 앞서 굴산성 공방전을 봤고,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 굴산성,저점산성 방어군의 끈질긴 방어와 파진찬(波珍飡) 거칠부(居柒夫)의 지휘하의 삼년산성(三年山城) 지원군의 딱!딱! 타이밍 좋게 지원해서 결국 굴산성을 넘지 못하고 패하였다고 기술했지?


그럼 이 핏골전투에 대입해보면 아래와 같은 추론이 가능 하지 않을까?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 패한 소식이 영동군 각계리에 전달되었어. 이걸 들은 시점은 아마 성왕이 각계리를 지난 후의 일이니 이걸 듣고 성왕이 패하였다고 백성들은 그렇게 이해 했을 수도 있어. 백제 성왕이 금산(錦山)에서 넘어와서 영동(永同)을 지나는 루트를 좀 살펴보면, 각계리 사람들은 성왕이 553년 12월 9일 관산성(管山城)을 돌파하고 각계리를 지나 굴산성(屈山城)으로 갔다고 생각 할 수 있었을거야. 사실은 관산성을 돌파하여 굴산성을 간건 태자 여창(餘昌)의 백제 주력군이였지만 말야ㅋ


하지만 내 추론에 예상 반박을 들어본다면, "백제 성왕의 연합군은 각간 우덕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굴산성으로 가서 백제 주력군과 합세하였다가, 거칠부에게 패하여 돌아가는 도중 각계리에서 신라군과 격돌해서 결국 이러한 전설이 내려왔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연합군의 2/3이 대가야(大伽倻)의 병력이였던걸 감안하면 대가야를 지원 하지 않고 바로 굴산성으로 갔을리가 만무해. 만약 그랬으면 대가야군은 심각하면 전선에서 이탈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말야ㅇㅇ


하지만 연합군의 대가야 진격은 내 추론에 불과해. 어디까지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나와있지 않는 부분이니까ㅇㅇ






무튼 다시 이어서 쓰자면 백제 성왕의 연합군은 김천(金泉)부근까지 진격을 했다가 결국 신라군에게 진격루트가 막혔을거야.


김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윗짤과 같이 대가야로 갈수 있는 루트가 열리며, 또한 김천에서 구미(龜尾)로 진격하면 몇년전 멸망한 성산가야(星山伽倻)로 진격 성산가야인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바로 달구벌로 진격하여 금성을 넘 볼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대가야로 진격하여 직접적인 지원이 가능했을 수도 있어.



※성산가야의 복속연도는 내 추정치에 불과해. 성산가야가 언제 신라에 넘어간지에 대해 사학계에서는 6세기 중반이라고 설명하는걸 보면 아마, 관산성 전투 직전이나, 관산성 전투 후 몇년 뒤에 성산가야가 신라에 복속되었을거라 라 추론해. 내 글에선 이 성산가야는 이미 신라에게 넘어갔을거라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전 글에서 밝혔듯이 대가야의 참전 병력을 보면 대가야가 말 그대로 국력을 쥐어 짜서 보냈을만한 수치이기 때문이지.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소국이지만 당시 맹주의 지위였기 때문에 최대 병력한도는 2만에서 3만에 가까웠을거야. 이런 추론으로 인해 참전한 대가야군은 대가야 총병력의 1/2~1/3의 수치였으니,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었으니까 가능한 병력동원수치라고 판단했어.




그러므로 연합군의 앞을 가로막은 신라군과 연합군이 격돌 했으며, 여기서 성왕의 연합군 또한 패하여 후퇴하여 핏골 부분에서 굴산성 전투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길목을 지키다가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진격해온 신라군과 각계리 핏골에서 다시한번 격돌하여, 패하여 금산방향으로 후퇴했다고 추론 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종합하여 만든 짤이 바로 밑의 짤이야.





성왕 연합군의 진격루트와 결과.jpg



김천전투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으므로, 순전히 내 추측에 불과해. 속된말로 망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이지ㅇㅇ;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내용을 쭉 봐왔다면 성왕 연합군의 진로는 반드시 영동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대가야로 향하는 김천인게 분명해.


그러므로 성왕이 각간 우덕의 상주방면 지원군을 격파하고 김천일대로 들어섰지만, 각지의 신라 지원군이 성왕의 앞길을 막았으며, 이걸 돌파하려다 실패해서 영동군 각계리 핏골에서 전방의 태자 여창(餘昌)의 주력군을 보조하는 역활로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가, 신라군이 추풍령을 넘어 영동(永同)지방으로 들어서면서 일대 격전이 일어났을거야.




짤을 더이상 만들기 귀찮은 관계로... 핏골전투의 양상은 뭐... '핏골' 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면 아마 백제군의 대패로 추론 할 수 있을거야.




그럼 굴산성 전투랑 한번 엮어보자ㅇㅇ 핏골전투와 굴산성 전투. 이 둘중 제일 먼저 일어난건 굴산성 전투인게 분명해.

일단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순서를 매겨보자ㅇㅇ








1. 553년 12월 9일 전격전을 단행하여 관산성과 옥천을 돌파하여 바로 굴산성으로 주력군이 움직였음. 이 관산성의 제일 큰 목적은 삼년산성의 함락이였으니 빠른 속도로 진격했을거라 추론 할 수 있어.



2. 뒤를 이어 금산에서 출발한 성왕의 연합군은 영동지방에서 관산성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군주 각간 우덕의 군세를 격파하고 추풍령을 넘어 김천으로 진격했음



3. 굴산성 전투에서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서면서 굴산성 전투가 장기화 되고, 파진찬 거칠부의 삼년산성 지원군이 도착하여 태자 여창의 백제 주력군과 맞 붙었고 백제군이 패함.



4. 김천으로 진격했던 백제 성왕의 연합군은 상주,달구벌,금성,성산가야에서 올라온 신라 지원군과 격돌하였지만 패하여 영동군 각계리 핏골에서 백제 주력군의 후방을 보호&진영 재정비를 위해 길목을 지키는 겸 진지를 구축했다가, 추풍령을 넘어온 신라군과 격돌하였고, 그 결과 대패를 하고 금산으로 후퇴함.



5. 성왕의 연합군이 대패한 소식을 듣고 후방이 신라군으로 넘어가 퇴로가 막힐것을 우려하여 태자 여창의 백제 주력군이 굴산성에서 철수하여 환산성(고리산성)으로 후퇴함.









어찌.... 5줄 요약이 되버렸盧 ㅋ










어때? 난잡했던 사건진행이 한눈에 보이제?  결국 관산성(管山城) 전투 초반에 승기를 잡고 두갈래 방향으로 진격한 백제군은 두곳 모두 패배하여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 가게 되버렸어. 여기까지가 내 추론으론 554년 3월까지의 전투 상황일거야. 날짜가 나와있지 않으므로 기록을 곱씹어 추론 할 수 밖에 없어;


이 추론 또한 전 글에서 밝혔지만 태자 여창이 몸져 누워버리는 기록을 근거로 했어.


근거는 다음글인 성왕의 전사에 관한 글에서 설명하고 노무노무 내용이 길어졌으니 여기서 이만 줄일께.


지금까지 읽느라 수고 많았고 재미있게 읽어줬다면 다행이盧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