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업적에 비해서 저평가받는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거 다 개소리야.
전두환 집권 초기에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은 곤두박질쳤고,
그나마 박통의 유산이 있기에 중기~말기에는 황금기를 맞이하였지만, 그게 전장군의 업적은 아니지. / 이런식으로 모르는부분 소설로 창작하지 말자.
김재익이 옆에서 ‘ 각하, 이러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 어떠신지요? ’ 라고 하면 전두환은 ’ 그래. 그럼 그렇게 하게. ’ 라고 결재 서류에 싸인만 할 뿐이라는 거지. / 읽기 힘들면 아래 굵은 글씨, 색글씨만 읽어봐라. 막연하게 추측하는것하고 실제하곤 약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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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전두환때 경제가 3저호황때문이란건 왕구라
3저호황 3低好況 (박영사경제학대사전)
198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라는 이른바 3저에 힘입어 국제수지가 흑자로 반전되고 GNP성장률이 연 10% 이상을 기록하는 등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상황을 말한다.
3저 호황은 86년부터고 넓게 잡아도 84년부터지.
연도별 소비자물가상승률 도매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1980 28.7% 39. -3.7%
1981 21.3% 20.4 5.9%
1982 7.19% 4.6% 7.2%
1983 3.42% 0.2% 12.6%
1984 2.27% 0.7% 9.3%
1985 2.46% 0.9% 7.0%
1986 2.75% -1.5% 12.9%
1987 3.05% 0.5% 13.0%
2.
아래는 펌인데 김재익의 과도 풀로 펌해줄게. 김재익 공만 펌해놨더니 전두환이는 한거 아무것도 없다고 무식한티내면서 리플 달아놨던데 ㅋ
이하 펌
전두환 시절에 나온 경제치적은 그의 참모 김재익이 한 것이고 전두환은 그의 정책을 모조리 실행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김재익 신화라는건데요. 사실 김재익 신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바로 1991년 중앙일보 기자였던 이장규의 저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책에서 부터였습니다. 5공화국 경제를 알기 위해선 누구나 봐야 할 바이블로 통하는 이 명저는 문화일보 기자이자
프레시안 창간주였던 박태견씨도 명저라고 극찬하였죠.최근 2006년에 올림출판사에서 개정증보판이 다시 나왔는데, 이 책을 집필한
이장규 기자는 자신이 김재익을 지나치게 띄워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김재익 신화는 반전두환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애용되어 오곤 했습니다. 즉 전두환은 무식하니깐 김재익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김재익이 짜준거 실행만 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한 것이죠. 그러나 김재익씨가 경제관료로서 매우 훌륭한 분이긴 했지만 그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김재익이 의도했던 경제정책 중에선 오히려 한국경제의 장기적인 성장궤도를 후퇴시킬 수도 있었던
아찔했던 것도 있었으니깐요.
아 물론 김재익은 전체적으로 한국경제사에 있어 그러한 과오보다는 공이 훨씬 큰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물은 공과가 있듯이 그의
과오도 살펴보는게 사안을 균형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럼 먼저 김재익 수석의 공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김재익 수석이 내세운 물가안정을 80년대의 한국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그것을 선진국패턴의 궤도에 올려놓은 대단한 업적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그의 최대 공적으로 봐야 합니다. 해방 이후 이미 이승만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두 자릿수의 구조화된 고물가
체제였습니다. 이승만 시절(54~60)에 한국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23%였다면 박정희 시절(61~79)엔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6%정도 였습니다. 해방 이후 수십년간 두 자리 물가상승은 지속되었기에 당시 한국사회에선 이러한 고물가 체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했던 1980년에는 소비가 물가가 30% 도매물가가 40%에 가까운 역대
최악의 물가광란 사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화된 고물가 체제를 무려 3년이라는 최단 시간 내에 한 자릿수의 저물가 체제로
전환시킨 사람이 김재익입니다.
연도별 소비자물가상승률 도매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1980 28.7% 39. -3.7%
1981 21.3% 20.4 5.9%
1982 7.19% 4.6% 7.2%
1983 3.42% 0.2% 12.6%
1984 2.27% 0.7% 9.3%
1985 2.46% 0.9% 7.0%
1986 2.75% -1.5% 12.9%
1987 3.05% 0.5% 13.0%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두환은 김재익의 안정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2년만에 7%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면서 한자리 물가 시대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죠. 즉 82년부터 이제 한국은 아무리 물가불안에 시달려도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찍는 시절은 넘어갔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수십년간 두자리 인플레의 향연을 즐기던 한국경제에서, 구조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한자릿수 물가를 불과 수년만에 빠르게 정착시켜놓은건 굉장히 경이적인 일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82년은 한국경제가 이제 과거 개도국
고물가 체제를 완전히 졸업한 원년으로 평가를 받는답니다. 이것은 지금봐도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인데, 심지어 이것은 세계에서도
화젯거리였습니다. 87년경 포철 회장이기도 했던 김만제 경제부총리가 IMF회의에 참석했을 때 세계 각국의 관리나 경제인들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한국이 물가를 잡은 비결이 무엇이냐고 질문공세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김만제 부총리가 밝힌 비결은 바로 전두환
정권의 긴축예산정책이었다고 답했습니다. 김재익 씨는 물가안정을 위해선 방만한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긴축론자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때 전두환 정권에서 예산개혁을 일선 현장에서 주도했던 사람이 전 대구시장인 문희갑씨였습니다. 문희갑씨는
사실 정치인 이전에 뛰어난 경제관료이자 개혁론자입니다. 이 분의 최대 희트상품은 토지공개념이지만 그 이전 전두환 정권 하에서
흑자예산을 달성시킨 것으로도 유명하신 분이시죠. 이 분의 당시 예산개혁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담고 있는 책이 87년 동아출판사의
보리밥과 나라경제입니다. 이 책은 한국에선 별 반응이 없었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정도로 외국에서 오히려 더
유명한 책이죠.)김재익씨를 비롯한 안정론자들이 추진했던 예산개혁정책도 참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83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예산 누적적자액은 3조원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84년 예산동결에 이어 85년에는 흑자재정을 일구면서 한국경제의
고질적 문제점이었던 막대한 재정적자가 감춰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부터 한국은 건전재정구도가 이어지면서 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게 되는 큰 버팀목이 되죠.(우리나라가 최단시간 내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대다수 논자들이 뽑는게
건전재정이죠. 이건 보수나 진보나 상관없이...)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 인기없는 안정긴축정책을 80년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했을때 시행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이너스 성장으로 경기가 침체하면 대게 각국의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확장정책을 펼치는데 전두환 정권은 거꾸로 긴축정책으로
나아갔다는 거에요.지금 이명박 정부나 오바마 정부도 경기확장정책을 펼치잖아요. 그런데 한국이 경기가 초침체기였던 마이너스 경제성장
시절에 안정화 정책을 추진한 것은 세계경제 역사상으로도 거의 유래가 없는 사례랍니다. 결과적으로 물가도 안정되고 성장도
회복했으니 대단히 성공한 것이었죠. 그럼 그당시 왜 경기가 침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긴축정책으로 나아갔냐?그건 전두환 정부가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군요. 민주화된 정부였다면 국민의 표를 의식해서 고통을 덜하는 확장부양정책에 대한 강력한 유혹이
존재하지만 전두환은 국민여론 의식하지 않는 독재정권이었기에 그냥 그런거 의식하지 않고 긴축안정책으로 나아갔어요. 80년대가
대량소비시대로 전환되고 중산층이 무럭무럭 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재익 씨가 주도한 한 자리 인플레로 인한 안정성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김재익씨의 공은 또 있습니다. 바로 오명 체신부 장관(현 건국대학교 총장, 전 과학기술부총리)과 함께 정보통신 사업육성에 뛰어들어
오늘날 it강국의 토대를 만든 것도 그의 공로라고 할 것입니다. 5공화국의 경제정책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어도, 최소한 정보통신
산업육성만큼은 공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비록 인문계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정보통신 사업에 관심이 무척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래 한국을 먹여살릴 사업으로 전자통신사업을 꼽았고 그의 소신은 오명 체신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의
지지와 함께 전자와 통신사업 육성에 힘을 올리게 합니다. 브라운관 산업 유선전화용 교환기 통신케이블 전자교환기 광통신인프라 분야는
비약적으로 80년대에 급 성장을 하게 되면서 오늘날 it산업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죠.
산업사와 경제사에 관한 대학특강을 들은적이 있는데 당시 김재익과 전두환이 추진한 전자, 통신사업과 반도체 사업은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잘 때린 육성정책이었다고 하더군요. 한 나라의 경제와 산업추진은 타이밍 싸움이라고 합니다. 누가 먼저 선점하여
발전시키느냐에 국가의 성패가 달려있죠. 이것을 볼 때 최소한 전두환 정부의 산업화 비전은 매우 우수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또한 대기업의 지나친 경제집중을 견제하기 위한 공정거래법,금산분리,출자총액제한제,대기업 연신관리제등 전두환 시절에 대폭 쏟아져
나온 재벌경제법안도 김재익 수석의 기본 사고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김재익 수석은 공정거래법 도입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폈습니다.
"앞으로는 정부 대신 시장이 경제중심이 돼야 하는 시대다.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가 축구장의 감독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앞으로
정부는 심판이 돼야 한다. 시장은 완전한 게 아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투기와 담합, 야합이 판치는 카지노판이 되기 마련이다.
민간기업이라는 선수들이 시합에서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심판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공정거래법이다. 반칙을
하는 선수는 운동장에서 퇴장시켜야만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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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김재익 씨가 잘한 점에 대해서 서술해 드렸구요. 그 다음부턴 김재익 씨의 과오에 대해 함 알아봅시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것은 아니었습니다.(세간의 김재익 신화를 앞장 서서 반박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5공
실세였던 허화평씨죠) 실제로 그의 지론 중 몇몇은 자칫 순진하게 받아 들였다면 한국경제를 후퇴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만큼 아찔한
것이 분명 있었습니다.
일단 그는 박정희 시절부터 육성한 중화학공업에 대한 대폭축소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교우위론에 입각하여 한국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보다는 값싼 외국 중화학공업 제품을 사서쓰는게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전두환이가 김재익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화학공업을 포기하였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동남아 수준에서 정체되었을 것입니다. 중화학공업이야말로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지금도 그 때 형성된 중화학공업구조로 먹고 살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축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한국은
중화학공업을 포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전두환에게 압력을 넣었죠. 실제 전두환은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화학공업을
폐기시키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다행히 막판에 전두환이 이를 보류하는 바람에 중화학공업은 계속 성장을 할 수 있었죠.또한 그가
주도했던 중화학공업 설비투자조정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엿고, 오히려 이것때문에 자동차산업을 비롯한 몇몇 산업들이 파산위기에
몰렸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80년대 초반 전두환이 자동차 업계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여 신속하게 이를 포기하였기
망정이지, 만약 이 조치를 계속 밀어부쳤다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붕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전두환 시절의 산업통폐합조치는
설비조정은 지지부진한 상태였고 재정적인 차원에서 세금감면, 한국은행특융, 원금탕감, 이자유예조치 등 몇몇 도움을 주었을 뿐, 그냥
경기가 어려워도 버티기로 나갔던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말년에 3저 호황이 일어나면서 과잉투자되었던 중화학공업이
드디어 풀가동이 되어 부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죠.
그리고 농업에 있어서도 김재익씨는 전형적인 시장주의자답게 농업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축소를 요구했습니다. 실제 전두환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곡수매가 인상률을 한 자릿수로 낮추었죠. 하지만 이 때부터 한국농업은 본격적인 몰락기에 접어듭니다. 원래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국가가 펼치는 농업정책도 단계별로 나눠지는데 자본주의 초창기에는 농업착취정책이, 자본주의 발전기에는
농업발전정책이,성숙기에는 소득보상 정책이 자본주의 정체기에는 시장주의적 개방농정이 큰 흐름을 이루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의 미국
잉여 농산물 도입과 박정희 정권의 초기 저곡가 정책이 1단계인 농업착취정책으로 볼 수 있다면 70년대 새마을운동, 통일벼 재배,
농지개량사업, 미가인상정책이 농업발전정책으로 볼 수 있죠. 문제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거쳤어야 할 3단계 소득보장
농업보호 정책을 생략한 채, 곧바로 4단계인 시장주의적 개방농정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당시 물가안정을 위해 도입한 것이
추곡수매제 동결과 외국농산물 도입 확대였는데, 이것은 농가의 부채를 늘리는 등 적잖은 부작용을 낳게 되죠. 선진국의 경우 이
3단계를 거친 상태에서 4단계로 나아갔기에 농업의 소외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도록 가격지지정책과 농가직불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시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이 3단계 과정을 생략한 상태에서 계속 4단계 방식으로 나아간 결과
농업정책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나마 전두환이 김재익의 의견을 무시하고 농가에 대한 지원을 어느 정도는 해주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80년대에 농촌이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어렵긴 했지만 농업이라는 산업 자체는 꾸준히 발전하긴
했습니다 .80년대 당시 한국은 단위당 농업생산성과 꾸준한 영농기계화로 인한 장비투입율 등에서는 80년대 기준으로 농업선진국에
다다르게 되었던 거죠. (물론 여촌야도라는 선거구도상 농촌의 여당 표를 얻기 위해 전두환이가 정치적으로도 농촌지원을 해주는 시늉을
해줄 수 밖에 없었던 요인도 있었겠죠 ..)
결론- 김재익씨는 분명 우수한 경제관료였고 그의 물가안정, 예산개혁, 정보통신 산업육성, 대기업집단에 대한 제도적 견제장치
도입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입니다. 하지만 한 인물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금물입니다.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중화학공업 폐기정책은
자칫 한국경제를 더욱 벼랑에 빠지게 할 수 있었고, 물가안정을 위한 곡가통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농업에 대한 지원자체를 일절
축소시키고자 했던 것도 그의 과오였다는 겁니다. 다행이 전두환이가 김재익의 이러한 정책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기에 오히려
한국경제는 역설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었음을 상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김재익 신화는 다분히 80년대의 경제호황에서 전두환의 역할을 폄하하기 위해 부풀린 점도 약간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김재익 신화의 시발점인 이장규 씨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책에선, 5공화국 시대의 경제정책이 단순히 김재익
혼자의 생각이 다 녹여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성장이냐 안정이냐라는 국가의 경제정책을 놓고 청와대,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등이 치열한 논쟁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정책조정자로서의 전두환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3.
전두환이 경제에 무지했다는것의 반론 2
김재익은 전두환과 만나면서 가정교사 역할도 같이 한다. 그는 백지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을 그려 전두환의 머리에 심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또한 그는 물가를 잡는 데 전두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나라를 강건하게 하려면 인플레를 잡고 소득분배를 고르게 하고 공무원의 부패를 막아야 하는데 소득분배의 역진(逆進)이나 공무원의 부패도 따지고 보면 인플레에서 나온다고 하여 전두환으로 하여금 물가를 잡는 데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이러한 결과로 5공의 치적 중 제일 큰 것이 물가안정이었다. 김재익의 경제강의는 그만큼 깊게 전두환의 머리에 박히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문제라도 쉽게 정리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 빼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팔십노인인 자기 어머니에게도 경제를 쉽게 가르쳤다. 하루는 자기 어머니가 인플레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돈에 물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간결하고 논리적이고 명쾌한 강의는 전두환을 매료시킨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강의에 빨려 들어간다. 전두환은 시도때도 없이 김재익에게 질문을 해서 경제문제를 익혀나가고 몰랐던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질문을 했다. 그래서 김재익은 퇴근길에 전화로 질문을 받아 다방에 들어가서 답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두환이 "아까 당신이 설명할 때는 알 것 같았는데 조금 애매해서 전화로 급히 묻게 되었다"고 하면 김재익은 정성을 다 해서 설명해 준다. 이러한 결과로 전두환은 경제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일가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전두환은 기자들 모임이나 각료회의에서 곧잘 경제강의를 했다.
백완기, <김재익-경제자율화의 기수> 中
전두환이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두기까지
김 재익은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재직하던 1980 년, 전두환의 집권이 확실시되자 공무원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뜰 결심을 했었다. 살인정권아래서 공무원 생활을 하지 말라는 그의 부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와는 동명이인)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전두환이 연희동 사저로 불렀다.
金在益과 全斗煥의 운명적 만남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당시 42세)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된 과정에 대해서 관계자들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김재익씨가 전두환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국보위 발족을 며칠 앞둔 때였습니다. 허문도씨 (정보부장서리 비서실장)가 연락을 해와서 전두환 장군에게 경제강의를 몇 번 했고 그 강의가 워낙 설득력이 있어 국보위 경제분과위원장으로 발탁된 것으로 압니다."
당시 부총리 자문관 이었던 김기환 (金基桓)씨 (전 세종연구소 소장)의 말이다.
5.
전두환이 김재익을 어떻게 대했는지.
1980 년대 초반 전두환과 독대하는 시간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장세동 경호실장도 아니고 유학성이나 그의 뒤를 이은 노신영 안기부장이 아니었다. 바로 김재익이 그였으며, 전두환은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그를 “경제대통령 각하’ 또는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시간 날 때마다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 이거 보면 노무현과 전두환의 인간적 그릇차이부터 느껴진다. 선관위에서 이렇다 해도 자기는 저렇다면서 법해석도 자기가 다하고, 헌법은 그놈의 헌법이라면서 무시하고, 군인들보곤 북끄러운줄 알라고 하고, 대우건설 사장같은 사람에겐 $!$!해서 자살하게 만들고, 박정희때는 누가 했어도 다 그만큼 했고. 혼자*만* 잘난 노무현. 결과는 그 호황기에 개판쳐놓은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