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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시마즈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도쿠가와 진영을 돌파하여 퇴각한 일화를 소개하는거다.
오늘날 가고시마현(鹿兒島縣) 히오키군(日置郡) 이쥬우인정(伊集院町)에서는 매년 음력 9월 15일마다 묘우엔사 참배(妙円寺詣り) 행사를 한다.
※본래는 음력 9월 15일이었으나 최근에는 참여가 쉽도록 10월 넷째 주 일요일에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묘우엔사는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인데,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폐불훼석(廃仏毀釈 -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일원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방침)으로 인해 그 자리에는 토쿠시게신사(德重神社)가 들어섰다. 오늘날 묘우엔사 참배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묘우엔사 참배 행사
묘우엔사 참배행사의 목적은 음력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전투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정권 성립에 군사적으로 기여하며 임진왜란에도 참여한 무장 세력인 ‘무단파’(武斷派)와 행정·경제·병참·군사·종교 등 전투 외적인 분야에서 활약했던 ‘이료파’(吏僚派) 사이의 대립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때문에 표면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도요토미 사후 두 파벌의 대립은 격화되어 이료파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형성했고, 무단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후대에 이시다 세력은 서군(西軍), 도쿠가와 세력은 동군(東軍)이라고 불린다. 두 세력은 정치적인 상호견제를 하던 도중 도쿠가와 세력이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를 정벌하고자 아이즈(会津)로 출병한 것을 계기로 이시다 세력이 거병하면서 상호간 대대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1600년 7월 1일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출정식을 마쳤고, 급작스런 거병으로 준비가 다소 부족했던 이시다 세력은 황급히 여러 다이묘들을 끌어모았다. 따라서 서군의 결속력은 미약했으며, 이를 타개하고자 대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해보았지만 여전히 서군의 결속력은 보잘 것 없었다.
※우키다 히데이에가 거병하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호응하였다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다의 거병은 충분한 사전준비없이 급작스럽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초상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이 때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오사카(大阪)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시다 세력의 거병으로 어쩔 수 없이 서군의 세력에 가담하고 말았다.
본래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의 요청에 의해 도쿠가와 세력이 아이즈 정벌 시 군사를 이끌고 후방의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수비를 도울 계획이었지만 당시 후시미성의 수비를 담당하던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하면서 오사카에 머물고 있던 상황이었다.
※토리이 모토타다가 입성을 거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도쿠가와가 구두로만 부탁하였기 때문에 이를 응낙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토리이 모토타다의 불신은 당연한 것이다.
진주성대첩의 경우와 비슷하게 생각해보면 도쿠가와 세력의 병사로만 이루어진 상황에서 시마즈 병사들이 입성하면 성의 방어체계가 혼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여 거절한 것일 수도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초상화
↑신장의 야망에서 그려진 시마즈 요시히로의 일러스트 ↑오늘날의 후시미성
비록 원해서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인 9월 14일의 작전회의에서 야습을 건의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의 군대는 1500명 규모였는데 이는 사쓰마, 오스미, 휴가 3국을 통치하는 다이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규모였다. 그 때문에 서군 내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시를 받았으며 야습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요시히로는 본국에 계속해서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 요시히로의 형)와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 - 요시히로의 삼남)는 요청을 묵살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당시 시마즈 가문 내부의 난인 쇼나이의 난(庄内の乱)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서군이 패배하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변명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시마즈가의 영지 중 하나인 사쓰마 ↑시마즈가의 영지 중 하나인 오쓰미

↑시마즈가의 영지 중 하나인 휴가
1600년 9월 15일, 서군과 동군은 세키가하라(関ヶ原)에 집결한다.

↑에도시대에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그림

↑세키가하라 참전 다이묘와 병력규모
서군과 동군의 한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하다가 동군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부대와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가 교전을 시작하면서 전투에 돌입한다.(이 때를 오전 8시로 보는 견해와 오전 10시로 보는 두 개의 견해가 있다.)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가 분전하는 상황에서 다른 서군의 다이묘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자 이시다는 사자를 통해 서군 다이묘들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시마즈 진영에도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이 사자로 왔는데, 거만하게 말을 탄 상태에서 출전을 부탁했다는 이유로 요시히로는 이를 묵살해버렸다.
이에 이시다가 직접 찾아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였지만 요시히로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라고 대답하며 더 이상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임진왜란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보내는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여러 번 수행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시마즈 가문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

↑개전 직전의 동서 양군의 포진도
동서 양군이 분투 중인 상황에서 정오가 지날 무렵, 사전에 배반하도록 협의가 된 서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부대가 도쿠가와의 독촉에 못 이겨 배반을 하고야 만다.
※히데아키는 그 때까지도 선대 다이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케(小早川隆景)와 서군의 핵심 중 하나였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사이의 친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격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성격상의 결함 등을 저울질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에 초조해진 도쿠가와는 히데아키가 주둔한 마쓰오 산에 포격을 할 것을 명령하고, 결국 독촉에 못 이긴 히데아키는 배반을 하고 말았다.
고바야카와의 부대가 동군의 편에 서서 싸우기 시작하자 그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와키자카 야스히루(脇坂安治), 오가와 스게타다(小川祐忠), 아카자 나오샤스(赤座直保), 구쓰기 모토쓰나(朽木元綱)의 부대가 동군으로 돌아섰다. 고바야카와 부대를 포함하여 5개 부대가 순식간에 돌아서자 학익진으로 포진하고 있던 서군진영의 한쪽 날개 부분이 무너졌고, 서군은 열세에 몰렸다.

↑학익진의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서군은 붕괴된다.
이시다, 고니시, 우키다의 부대가 붕괴되었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동군이 물 밀듯이 몰려들어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침내 시마즈 요시히로는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휘하의 1500기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세를 대적하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시히로는 장렬히 싸우다 할복하려 하였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의 반대와 설득으로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마즈군은 동군에 둘러쌓여 고립된 상황이었고, 도주로인 이세로(伊勢路)는 도쿠가와 측의 후방에 있었다. 마침내 시마즈군은 동군 진영을 돌파하여 퇴각하기로 결의한다.
이 상황에서 병력은 300기로 줄어있었다.

↑이세로 전 구간
시마즈군은 선진을 시마즈 토요히사, 우측을 야마다 야리나가(山田有栄), 중진을 시마즈 요시히로로 하는 진을 세워 돌격을 개시했다.
동군의 전위부대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부대를 돌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에 다다르자 방향을 바꾸어 이세가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츠(本多忠勝),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등이 뒤를 추격해왔다.
이 때 시마즈군은 퇴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스테가마리(捨て奸, 좌선진座禅陣 이라고도 한다.) 전술로 대응하였다. 스테가마리 전술은 몇몇 후위부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적장을 저격한 후 창을 들고 돌격하는 전술인데, 이 때 후위부대의 생환 가능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이다.
후위부대가 전멸하면 또 다른 부대를 후위에 두어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 시마즈군은 전진하였다.
시마즈 토요히사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 - 갑옷 위에 입는 민소매 겉옷)를 입고 요시히로의 대역역할을 하다 전사하였으며, 쵸쥬인 모리아츠(長寿院盛淳)가 "내가 시마즈 요시히로다!"라고 외치며 동군의 시선을 끌다 전사하였다. 이런 분전 덕분에 시마즈군을 추격하던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는 부상을 입었고, 추격속도는 다소 느려진다.
↑만화 드리프터즈 중 캡쳐. 시마즈 토요히사의 스테가마리 장면이다.
장렬한 희생 덕분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9월 16일 토키무라(時村)에 도착하였다. 이후 미즈구치(水口), 오사카를 거쳐 18일 후 사쓰마로 돌아왔다. 생환한 병사는 불과 80명정도였다.
- 시마즈의 기백, 지겐류(示現流 - 시현류)
여담으로 사쓰마에는 '지겐류(示現流)'라는 검술이 있다. 이 지겐류는 오직 단 일격, 일격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검술이다.
이런 과격하고 무모한 검술은 시마즈의 용맹무쌍한 기백을 그대로 반영한 검술이 아닌가 싶다.

↑만화 드리프터즈 중 캡쳐. 지겐류 검술의 정신이 드러나있다. '체스토'라는 기합은 지겐류 검술 특유의 기합이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설은 없다.

↑지겐류 창시자인 토고 시게타다(東鄕重位)는 센고쿠시대 관련 게임인 태합입지전, 노부나가의 야망 등에서도 등장한다. 위 사진은 태합입지전에서의 토고 시게타다이며, 무력이 굉장히 높게 설정되어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