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 멸망사 시리즈

 


[정보/스압/BGM]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1-1. 관산성 전투. 과연 신라의 뒷통수인가?

http://www.ilbe.com/1990768533

 

 

 

 

 

 

 

 

 

기다린 게이는 없겠지만 오래걸렸다;; 


사실 3주전에 다 쓰긴 했는데 내용 중 가야와 왜(倭)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것이 너무 환빠틱하다 못해 쓴 내가 어이없어서 다듬고 또 다듬고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직접가서 열람해서 수정하느라 좀 걸려서 썼는데 태그가 많다고 오류가 생겨서 걍 빼버리고 올리게 되었다;


 


 

이번 글은 관산성 전투 직전의 긴박했던 국제정세와 그로 인해 결성된 백제--대가야의 삼각동맹과 신라의 한성 점령 대해 서술할거야.


그리고 빼버린 내용은 나중에 외전격으로 -일 고대사의 미씽링크(Missing Link)인 3개의 국가의 관계를 여러가지 사료와 기록유물자료를 토대로 다각도 측면에서 추측추적 하여 서술할까해. 



좀 길지만 재미있게 읽어줘라ㅋ

 

 

 

 

 

 

 

 

 

 

 

 

 

 

 

 

 

 

 

 

 

 

 

 

 

 

 

 

 

 

 

 

 

 

 

 

 

 

 

 

 

 

 

 

 

 

 

 

 

 1.jpg

(아무상관 없는 짤방...)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고토(古土) 한성을 신라가 차지한 직후인 서기 5538월에 백제는 또다시 왜에 긴급한 군사지원 요청의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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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庶先日本兵未發之間伐取安羅絶日本路其謀若是臣等聞茲深懷危卽遣疾使輕舟馳表以聞伏願

天慈速遣前軍後軍相續來救逮于秋節以固海表彌移居也若遲晩者噬臍無及矣所遣軍衆來到臣國衣糧之費臣當充給

來到任那亦復如是若不堪給臣必助充令無乏少別的臣敬受天勅來撫臣蕃夙夜乾乾勤修庶務由是海表諸蕃皆稱其善

謂當萬歲肅淸海表不幸云亡深用追痛今任那之事誰可修治伏願天慈速遣其代以鎭任那又復海表諸國甚乏弓馬

自古迄今受之天皇以禦强敵伏願天慈多弓馬 ....

 

 

(중략)....일본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획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깊이 품었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보냅니다.

 

그러니 빨리 군사를 보내어 서로 이어와서 구원해주길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밖 관가를 지킬테니

만약 늦는다면 후회하게 될 터인데 그러므로 한시가 급하게 되었소.

지원군이 우리 백제에 도착하면 옷이나 식량 등은 마땅히 우리 백제가 공급할 것이니 그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오.

만일 왜의 지원군이 백제 땅에 바로 오지 못하고 가야 땅에 내리는데 가야가 군수지원을 못하게 되면

그것도 응당 우리 백제가 맡을 것이니 아무쪼록 신속한 지원군이 급하게 되었소이다. 활과 말이 많이 부족하오이다.“

 

-日本書紀 欽明天惶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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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진 상태에서 백제는 전통적인 우방인 왜()에 대해서 군사적 밀착도를 더욱 증가시킬 수 밖에 없었어.

(백제와 왜(倭)의 우방 관계는 백제 근초고왕 재위 이전부터 존재... ㄷㄷ하盧)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시종일관 적대적이였듯이 고구려와 왜의 관계 또한 견원지간처럼 적대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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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는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의 대다수가 가야,백제,신라인이였거든ㅇㅇ; 


 

그런 이유로 해서 백제는 왜()에 군사지원요청을 할 때는 고구려의 공격을 내세우기도 하였는데, 관산성(管山城) 전투 초기 백제가 왜()의 킨메이(欽明)덴노에게 보낸 군사 지원 요청에 보면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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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奏若但斯羅者有至臣所將軍士亦可足矣今狛與斯羅同心戮力難可成功

伏願速遣竹斯嶋上諸軍士來助臣國又助任那則事可成又奏.”

 

 

 

(생략)...따로 아뢰길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 입니다.

그러나 박(:고구려)이 사라(斯羅:신라)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를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생략)

 

 

-日本書紀 欽明天惶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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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보면 백제나 왜는 신라의 위협보다 고구려의 위협을 더 높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백제는 아신왕(阿莘王)때 광개토대왕에게 치욕적으로 무릎 꿇은바 있으며 왜(倭)의 경우에는 신라 내물왕때 경주를 애워싼 왜()군을 광개토대왕이 격파한 내용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는 부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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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고구려군의 고증은 이게 아닌데....)


 

그만큼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고구려의 움직임은 백제나 왜()에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관산성(管山城) 전투 전후의 고구려 사정은 백제에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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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당시 고구려의 내부사정은 귀족들간의 왕위계승다툼으로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내전같은 피바람이 불었는데 이 기록은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7년으로 알 수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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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大亂。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高麗以正月丙午。立中夫人子爲王。年八歲。狛王有三夫人。正夫人無子。中夫人生世子。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其舅氏細群也。及狛王疾篤。細群。麤群。各欲立其夫人之子。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 싸우다 죽은 자가 2천명이였다.

백제본기에는 "고구려가 정월 병모에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8살의 나이였다.

안원왕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는데 대부인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은 세자를 낳았고 외할아버지는 추군이였으며 

소부인은 왕자를 낳았고 외할아버지는 세군이였다. 

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추군과 세군이 각각 중부인과 소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자가 2,000명이었다.' 라고 하였다.


欽明天皇 7年 6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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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배운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국내성 반란, 즉 간주리의 난(干朱里─亂)의 이야기야.


여러가지 사전이나 인터넷에서는 귀족 간주리가 일으킨 난이라고 설명하지만 사실상 살펴보면 국내성 귀족 집단의 평양 왕권에 대한 항거였어.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귀족세력 간의 충돌이 지방까지 확산이 되며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나타내고 있었지.




또한 북서 변경에선 강력한 기마세력인 돌궐(突厥)이 고구려의 요동지역을 강타하는 내우외환의 시기라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작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어.

 

따라서 백제는 왜()가 확실히 움직일 수 있는 동기로서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하는 것 처럼 국서를 꾸며 보냈다고 볼 수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썼을뿐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당시 고구려의 나제동맹 이간책을 사전에 성왕이 파악했다고 볼수 있는부분이야.)

 

전통적으로 왜()는 한반도에 강력한 국가가 형성되어서 왜()로 진출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는 정서가 있는데 백제가 그것을 군사적으로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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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선의 삽화)



아무튼 백제는 고토(古土) 한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왜()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는데, ()는 백제의 계속되는 군사지원요청에 대해서 축자(쓰쿠시 국-현재의 후쿠오카 현  동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이 지역을 잘 기억해. 뒤에서 나오니까ㅋ)의 군사 1천명, 1백필 그리고 배 40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해. 물론 이런 왜()의 응답에 백제는 역박사(曆博士)등 백제의 고급 기술과 인력을 왜()에 보내주는 일종의 맞교환을 하였다고 전편에서 서술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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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가야 중장기병 / 고증이 거의 완벽에 가깝盧 ㄷㄷ... )



한편 관산성(管山城) 전투에는 가야의 병력도 동원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대가야의 병력 중심이 되었어. 그 기록은 애석하게도 우리역사서엔 나와있지 않고 일본서기(日本書記)에 기록이 되어 있으나, 이 또한 추측을 통한 결론이야.

 

 

()의 킨메이(欽明)덴노가 주도하는 것으로 나오는 임나복권회의(任那復原會議)라고 하는 가야회복운동을 말하는데, 이는 신라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는 임나가라(任那加羅)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것이였어.

 

왜왕인 덴노 중심으로 기술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조차도 서기 541년의 임나재건회의는 백제의 성왕이 주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서기 541년 당시는 신라는 법흥왕 28년 인데 이사부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 지역의 일부를 공략하여 신라로 편입시키고 있던 때였어. 



이사부.jpg

가야,왜놈 척살병기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이사부를 단지 우산국 정벌로 기억하지만 이사부는 법흥왕 16년인 서기 529년 금관가야를 복속시키는 장본인이자 이로인해 위기감을 느낀 아라가야의 지원요청에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을 문자 그대로 도륙해버리고 2년뒤 마찬가지로 지원요청을 받고 도착한 백제군까지 격파하고나서 금관가야를 압박. 결국 구형왕이 직접 왕관을 들고 나와 받치며 금관가야를 신라에 강제병합시키는 일등공신이지.


그러므로 당시 법흥왕 2년인 서기 541년 병부령에 오른 가야,왜놈척살병기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가야연맹은 극도의 위기감을 받았으며 결국 541년 임나재건회의가 열리는 계기가 됬어.

 

건국이래로 줄곧 반신라적이고 당시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던 가야가 신라에 의해서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으므로 가야연맹의 보호자 역활을 하던 백제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어. 또한 이러한 재건회의에 열렬히 환영한 왜(倭)왕 킨메이(欽明)덴노는 이러한 재건회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천명해. 그래서 백제가 중심이 되어서 일종의 가야의 망명정부 핵심요인들과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도래계와 더불어서 가야회복회의를 하게 됨을 뜻하게 되는걸 알 수 있을거야.




결국 적의 적은 나의 동지가 되는 옛말처럼 비록 고구려에 대해서만큼은 백제와 신라는 동맹국이였으나 가야문제로 돌아서게 되면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지ㅇㅇ;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굳건히 그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을때에도 사실 그 포장지를 뜯어 상자안을 살펴보면 백제와 신라는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였단 이말이지.


 

이 겨누기가 극에 치닫던 시기가 바로 서기 541년인데 위에서 말했지만 임나재건회의가 일어났던 시기이며, 이때부터 백제는 잔존 가야연맹세력과 더불어서 신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봐야 해. 그러다가 서기 553년 본격적인 對 신라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는 당연히 가야는 백제군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이유가 되지.

 

결국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비밀스러운 협약에 맞서서 백제-가야-왜(倭)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을 구축하게 되었어. 뭐 백제와 왜(倭)는 예전부터 전통적인 군사동맹이였지만 말야ㅋ


당시 상황도.jpg



이런것을 종합해 보면 백제가 소위 신라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고토(古土)를 잃었다고 보는 것은 다른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어. 오히려 백제가 옛 위례성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후에 지키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게 신라의 배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선 설득력이 떨어지지.

 

그 이유는 신라보다 백제가 월등하게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다면 소위 신라의 배신을 충분히 응징하고 다시 한수 유역을 차지했어야해. 


하지만 그렇게 못한 것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게 백번 옳지 않盧?


또한 임나재건회의로 인해 백제-가야-왜의 군사동맹을 보며 신라입장에서는 백제에 의해 영토확장 정책과 국가안보가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음은 분명하지.


그렇다고 이러한 삼각동맹에 반발하여 신라가 무턱대고 백제가 힘겹게 수복한 한성지역을 뒷통수 치며 꿀꺽한건 아니야.




서기 551년 킨메이 13년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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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獲漠城之地。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遂復故地。


백제 성왕이 몸소 백제군과 신라,가야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잃어버렸던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欽明天皇 13年 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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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 적혀 있듯이 드디어 고토(古土)를 수복한 백제가 기록에 안 남아 있을 만큼 전투 없이 신라에게 이 땅을 뺏겼다고 보지않아.


다들 글을 읽어 내려왔다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거야.


분명 기록에도 분명히 적혀 있듯이 성왕이 몸소 출전하여 직접 지휘하였다면, 백제의 정예군이 참전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쉽사리 내 주었을까?


또한 백제를 지원하려 한강 하류지역에 파견된 신라군은 일종의 나제동맹의 지원군or원정군이야. 현재의 예로 말하자면 미군이 주도하는 이라크전에 한국군이 파병 된 것 처럼 백제가 주도하는 한성수복작전의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에 신라군은 단지 지원군 형식의 일개 부대로 편재된 전력 수준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주력군이 포진했던 한강 하류의 한성백제의 지역을 신라가 차지한 것을 어찌 해석해야 될까?



일단 백제의 움직임에 대해 알아 봤으니 당시 연합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신라군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ㅇㅇ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 3월기록과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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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중략)....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12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3월,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지역 10개군을 취하였다.


三國史記 券4  眞興王 12年 3月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진흥왕 12년 신미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남양주 일대)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 때 혜량 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배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그를 말에 태워 함께 돌아 와서 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 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三國史記 券44 居柒夫 列傳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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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초반 고토(古土) 회복전쟁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죽이 잘 맞았어.


백제가 고구려의 후방인 한성과 평양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해버리자 죽령 이북의 고구려 지역을 신라군이 손 쉽게 점령하지.


즉, 진흥왕 12년이자 성왕 29년인 서기 551년 나제동맹 연합군은 한성지역으로 진공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백제+대가야군은 한성지역을 신라군은 남한강 중류지역에 주둔했다고 생각이 될거야.




하지만 갑자기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틀어지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바로 2년뒤인 진흥왕 14년 가을 7월의 기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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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14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三國史記 券4  眞興王 14年 7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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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타나는 백제의 동북지역은 말 그대로 한성 지역.


앞서 설명했지만 신라가 한성지역을 점령하고 김무력(金武力)의 군을 주둔시켜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고 언급했고 또한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에 백제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을텐데 기록에는 조용한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 할 수 있을거야.







몇가지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추측해서 결국 백제가 한성지역을 수복한 이후 갑자기 한성을 놔두고 전략적 후퇴를 결심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로 난 4가지를 들고 싶어.









첫번째. 신속한 군사력 동원과 집중에 실패



이건 실제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새롭게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 새로운 군주(軍主)를 임명하고 당시 흡수한 가야인들에 대한 대규모 사민(私民)정책으로 영토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하였어. 예로 바로 한성을 점령한 김무력(金武力)이지. 


※ 김무력(金武力)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가야 왕족출신이야. 금관가야가 신라에 강제병합되고 난 뒤 신라군의 무장으로 군문(軍門)에 들어가면서 신라군의 에이스로 성장하게 되는데, 신라에 복속된 가야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돼. 김무력은 알다싶이 김유신의 할아버지인건 다들 알거야ㅋ



이런 중앙집권적인 정치-군사체제로 인해 신라는 유사시 특정지역에 군사동원을 집중 할 수 있었는데 반하여 백제는 지방 귀족세력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군사력의 집중도에 있어서 열세를 보였어.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백제의 22담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거야.)




대한민국 전도.jpg

딱 봐도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이르는 광활한 곡창지대가 보이지 않盧?


 

백제의 경우에서 살펴보면, 구당서(舊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인구는 76만호로서 고구려나 신라보다 많게 기록되어 있는데, 당연히 지도를 펼쳐보면 백제가 있던 지역은 많은 평야를 가지고 있고 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보다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盧? 


그러나 이런 백제의 인적자원은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인 체제로 말미암아 유사시 군사력의 집중에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는데, 특히 한성백제가 붕괴되고 부랴부랴 웅진과 사비로 천도한 백제왕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반이 흔들렸으며 이로 인해 웅진,사비백제는 지방귀족들의 도움 없이는 대규모의 병력동원이 힘들었어. 또한 이러한 이유 뿐만 아니라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인 담로(擔魯)가 문제였는데,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백제는 22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었다고 기록하지만 사실상 몇몇 직할지에 대해서만 왕족이나 왕자를 보냈을 뿐.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지방호족이 담당하였어. 세번째 이유에서 서술할 백제 3대 지배층을 보면 더더욱 이해가 쉬울거야.



결국 백제는 중앙집권국가였지만 사실상 약간 느슬한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어.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는 왕 아래에서는 이러한 22담로 시스템이 확고하게 연결되어 힘을 발휘했지만 이것 또한 한성백제가 붕괴되면서 유명무실해지게 되버렸지.




 

증평군 이성산성.jpg


삼국시대 도살성(道薩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증평군 이성산성(二城山城)



성왕 28년 백제 성왕이 달솔(達率) 달기(達己)에게 1만의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곧바로 고구려군의 역습으로 금현성(金峴城)을 내주는 등 서로 공방하다가 지친틈에 신라가 두 성을 차지했다고 하는 의미는 달리 말해서 백제나 고구려 두나라 모두 전투가 장기화 됨에 따라서 병력손실분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대규모 병력동원이 아닌 소규모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전을 되받고 있었다는걸 의미해.

 

그리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도 초기 승기를 잡았던 백제가 신라의 반격에 결국 무릎을 꿇게 되는 과정에서도 보면 신라는 신주(新州)의 김무력군과 그 휘하의 보은(報恩)의 삼년산성(三年山城) 주둔군, 그리고 상주(尙州) 주둔군 등 세 방면의 지원군이 옥천(沃川)의 관산성(管山城)으로 집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백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아. 결국 군사력의 집중도에서 백제가 신라에 밀린 결과이지.


672년 당시 야맛토 왜군.jpg

이에 대해서 백제 성왕은 불완전한 병력수급의 보완책으로서 전통적인 우방국인 왜(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신라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야(伽倻) 연맹을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였다고 보는게 사실적 관계 추론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지 않盧? 


실제로도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덴노 15년조 기록에 보면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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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昌謀伐新羅耆老諌曰天未與懼禍及

餘昌曰老矣何怯也我事大國有何懼也

遂入新羅國築久陀牟羅塞


여창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사옵니다.”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을 낼 것이 있겠소? ”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日本書紀 欽明天皇 1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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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耆老)라 함은 원로 신하란 뜻인데 대체로 백제의 귀족세력의 원로를 지칭해. 가로(家老)가 태자 여창(餘昌-훗날 위덕왕)의 군사계획에 적극 동조(同調)하기 보다는 반대의 입장을 표하는 것을 볼때, 그만큼 백제는 군사력 동원이 쉽지 않았을을 보여주고 있어. 이에 비해서 신라 기록은 왕이 명해서 어느 장군이 가서 싸웠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군사력 동원에 있어서의 양국간의 차이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두번째. 신라와 백제의 군사기동력의 차이





무릇 군사력의 집중은 기동력에 달려있다는건 말 안해도 밀게이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盧?


Ulm_capitulation.png


기동력의 끝판왕을 보여준 울름 전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동력(機動力) 있는 군대는 승리하게 될 확률이 높아. 특히 이러한 기동력의 甲of甲이란 칭호를 받는 나폴레옹의 기동력을 보면 승리가 불가능한 전투에서 압도적인 기동력 하나로 승리를 거머쥐는걸 보면 답이 나오지ㅇㅇ


이 기동력(機動力)이라는 부분에서 신라가 백제를 월등히 앞서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한강을 내륙 운하(運河)처럼 군사물자의 이동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점이야.



대부분 일반인들은 신라가 총력을 기울여서 죽령(竹嶺) 넘어 남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국운(國運)을 걸고 한강하류를 차지한 것에 대해서 중국과의 통교(通交)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는데,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강은 신속한 군사 보급물자 이동의 핵심적 자원이 되는 지형지물이지.



4대강 수계도.gif



지금처럼 도로나 철도가 나있지 않은 옛날에는 험한 산길을 넘어 대규모 군병력을 이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신라는 남한강 일대를 차지함으로써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한강하류에 도달할 수 있었어. 한성 점령 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의 주둔지였던 소백산맥 인근지역에서 한강하류까지 가는데 중간기착지로서의 교두보(橋頭堡)까지 마련하게 되었지. 즉 성(城) 간의 유기적인 지원 연결체제를 구비한 것이 기동력 확보에 근간(根幹)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거야.

 

이에 비해서 백제는 수도 사비에서 한강하류까지 이동하려면 순전히 육로(陸路)로만 이동해야 하고 중간중간에 적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어. 또한 지방분권적인 정치-군사체제에서 각 지역의 성(城)간에 유기적인 결합력이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었지. 결국 이런 이유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 백제가 바로 반격하지 못한 실질적 이유로 추정 할 수 있을거 같盧....



이성산성 추측도.jpg

이성산성 추측도 / 현재 발굴중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찿은 옛 백제 땅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고 비정하는 곳이 지금의 하남시 일대의 이성산성(二聖山城)이야.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보면 옛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인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바로 눈 아래 보이고 한강 건너 구리시(九里市)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전략적 요충지를 신라에 빼앗긴 백제로서는 얼마나 뼈에 사무쳤을지는 가늠하고도 남겠지?


근데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라면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하나도 없어.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는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야. 


백제가 오매불망 되찾은 옛 고토(古土)라면 또 그곳을 신라가 공격하였다면 응당 격전을 벌였어야 이치상 맞고 또 빼앗겼다 하더라도 되찿기 위한 공격을 백제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이때의 상황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엔 이렇게 적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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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漢城。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나미방이다.


欽明天皇 13年 10月




百濟王子餘昌〈明王子。威德王也。〉悉發國中兵。向高麗國。築百合野塞眠食軍士。

是夕觀覽。鉅野墳腴。平原濔■。人跡罕見。犬聲蔑聞。俄而脩忽之際。聞鼓吹之聲。餘昌乃大驚打鼓相應。

通夜固守。凌晨起見。曠野之中覆如靑山。旌旗充滿。會明有着頸鎧者一騎挿鐃者〈鐃字未詳。〉

二騎。珥豹尾者二騎幷五騎。連轡到來問曰。小兒等言。於吾野中客人有在。何得不迎禮也。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餘昌對曰。姓是同姓。位是杆率。年廿九矣。百濟反問。亦如前法而對答焉。

遂乃立標而合戰。於是。百濟以鉾。刺墮高麗勇士於馬斬首。仍刺擧頭於鉾末。還入示衆。高麗軍將憤怒益甚。

是時百濟歡叫之聲可裂天地。復其偏將打鼓疾鬪。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




欽明天皇 14年 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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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메이(欽明) 13년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인해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라는 기록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


앞서 언급했지만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했다면 분명히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았을터인데 그렇지 않고 “버렸다”라고 기록한 것을 당시 백제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장기전에 따른 귀족세력의 반발이라든가 백제내 여러 문제로 백제 주력군이 회군하였다고 가정할 수 있어. 그래서 한성 지역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자 그곳에 파견되었던 신라군이 차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盧?



이러한 내 해석에 좀더 구체적인 이유를 뒷받침 해주는 기록이 바로 킨메이(欽明) 14년조 10월 기록이야. 


14년 10월의 기록을 다 해석할 필요는 없고 중요한 부분을 해석해보자면 태자 여창(餘昌)이 신라군이 아닌 고구려(高麗國)을 맞아 싸우며 고구려군의 용사 한명을 거꾸러 트리며 백제군의 사기가 올랐으며 그로인해 고구려군 장수들이 분노하는데 그 기세를 몰아 백제군이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평양 대성산(大城山) 북쪽까지 쫒아가 물리쳤다는 기록이야.


근데 여기서 좀 의문이 드는게 대성산(大城山)이란 곳인데 대성산은 사학계에서는 평양(平壤) 북쪽의 대성산으로 추측하였다가 바로 폐기 하였고 면밀한 연구조사 결과  평양이 아닌 아차산과 남양주 일대로 비정해. 




아차산성.jpg



만약 아차산이라면 한성을 두고 백제와 신라의 격전이 아닌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가 되는데 541년 신라가 한성에 김무력(金武力)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신주(新州)를 설치했단 기록가 뭔가 아귀가 맞지가 않아. 


신라가 백제의 뒷통수를 치고 한성지역을 점령했다면 다음해에 왜 태자 여창(餘昌)이 이끄는 백제군은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라군이 아닌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을까?  당시 백제는 이러한 신라의 한성지역 진출에 대해서 배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또한 이 이후 기록에는 한성지역에 대한 백제군의 공격이나 시도 따위가 전혀 없기에 13년 10월 기록에 적혀 있는대로 아마 고구려군과의 격전 이후 백제군이 스스로 철수했다고 볼 수 밖에 없어.








세번째. 웅진,사비천도의 후유증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백년을 바라보고 하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어. 경제적 관점에서 수도(首都)가 옮겨질 수도 있겠으나 이건 현대에 와서 정립된 것이고 대체로 역사를 보면 정치-군사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수도가 옮겨지는 것이 비일비재했지. 우리가 다 알고있지만 백제는 수도를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성(熊津城)으로 그리고 부여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遷都)를 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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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위례성에서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길때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입으로 한성백제의 개로왕(鹵王王)이 참수되고 고구려에 점령당함으로써 부득이하게 문주왕(文周王)때는 수도를 공주 웅진성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어. 또한 이러한 갑작스런 천도로 인해 웅진백제는 초기부터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그러나 성왕때는 상황이 달라. 


성왕의 선대왕인 무령왕(武寧王,462~523)은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후반기 웅진백제를 재 정립한 왕이었고 그 토대를 그대로 이어받았어. 따라서 성왕이 웅진에서 부여 사비로 옮기는 것은 군사적 관점이 아닌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 배경엔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어.





 공산성.gif

공주 공산성이 바로 백제시대 웅진성



물론 좁은 웅진성(熊津城)에서 보다 넒은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겼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할 수 있지. 고구려 장수왕도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으로 천도(遷都할 때 그에 반대하는 귀족 약 2,000여명을 참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던걸 보면 뭐 말 안해도 알지 않겠盧?

 

어쨌든 수도 천도 과정에서 백제 성왕은 기존의 정치세력을 측근들로 재편하였다고 짐작 할 수 있어. 그럼 이러한 기존 정치세력인 한성백제 귀족,호족들과 이 재편 과정에서 소외된 웅진,사비,전라도 호족들의 경계가 생겼음은 자명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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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양분하는 지배층을 구분하자면 크게 3가지 분류를 할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백제 건립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성 백제호족과 목지국과 충청도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초기 마한계 백제호족, 그리고 근초고왕때 복속당한 전라도를 기반으로 둔 후기 마한계 백제호족이야.


다들 백제를 전라도, 충청도의 뿌리를 둔 국가로 생각하겠지만 큰 오산인게 백제 약 650년 역사에서 한성백제가 약 500년을 차지 할 만큼 백제는 따지고 보면 서울 경기도권의 뿌리를 둔 국가이지. 이러한 한성백제가 장수왕의 침공으로 인해 충청도인 웅진성(熊津城)으로 넘어가 웅진백제가 되었고 성왕때는 부여 사비성(泗沘城)으로 넘어가는걸 보면 한성지방에 뿌리를 두고 강력한 왕권정치를 하던 백제왕권의 입장에서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선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쉽사리 군사력 동원을 하지 못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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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소외된 귀족이나 호족들의 눈치때문에 그리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겠지? 

자기 기반을 왜 한성기반 귀족들의 병폐(病弊)로 인해 잃어버린 한성지역에 투입하는것 자체가 못마땅해 했을지도 몰라. 


백제 왕가의 한성 고토(古土)에 대한 감정과 사비귀족세력의 한성 지역에 대한 감정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인데, 사비 귀족세력은 한성옛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존재였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한성 고토(古土) 회복전쟁은 자신들의 전쟁이 아닌 남의 전쟁으로 간주했을거야. 고대 사회는 대부분 병농일치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역이 관계되지 않는다면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 


결국 이러한 웅진,사비,전라도 지방 호족들의 비 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백제는 병력동원력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어.


또한 농번기엔 일손이 부족하기 마련이야. 그렇게 되면 호족과 귀족층에선 일손부족이라는 불만을 백제 왕가에 강력히 항의했을거고 장기전으로 생긴 병력손실에 대한 복구는 이루어 지지 않는 등 전쟁수행여건이 극도로 악화 되었음을 가정해 볼 수 있어. 실제로 신라가 신주를 설치한 시기는 그해 7월인데, 한창 농번기 시절이지 않겠盧?  병력을 마음대로 이동하고 주둔시킬 수 있는 신라와 그렇지 못한 백제의 차이가 한강유역의 주인이 신라로 넘어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어.









네번째. 신라와 백제의 점령지에 대한 처리방식의 차이점




이런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의 병력운용에서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신라는 새로운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곳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어. 대표적인 것이 앞서 언급한 한성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그곳 군주로 임명한 예이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야인을 새로 획득한 땅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까지 썼다고 앞에서 언급했지?ㅋ 


그러나 백제는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 국가였기 때문에 사민(徙民)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새로 점령한 땅에 대해서 군대를 장기적으로 주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어. 왜냐하면 지방귀족휘하의 병력은 전투가 끝나면 다시 지방귀족소속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주둔군을 꾸릴 여력이 없었거든.

 

부연설명을 하자면, 신라는 점령지에 대해서 강제병합으로 편입시키는 데 비하여 백제는 강제복속이 아닌 부용화(附庸化)정책이었기에 신라처럼 항구적인 영토화가 힘들었어. 이것은 백제가 멸망 할 때까지 백제가 전라도 전지역에 대한 완벽한 지배권을 가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며,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는 가야,왜계유물(倭係遺物)의 근거가 되기도 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백제사 중 가장 큰게 바로 백제의 전라도 병합이야. 사실 우리는 근초고왕이 전라도에 남아있는 마한세력을 복속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영역을 구축했다고 알지만, 사실상 이러한 부용화(附庸化) 정책으로 인해 전라도의 마한 세력을 복속시키긴 했어도 확고한 지배권을 가질수가 없었거든. 특히 한성백제 시절에는 왕권이 강하여 찍소리도 못하고 있던 마한계 백제 지방귀족들은 웅진백제 부터는 노골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보이기도 했던걸 감안한다면 백제의 이러한 점령지 정책은 신라와의 국운을 건 전쟁에서 백제가 질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지 않盧?





이러한 4가지 내 주장을 근거로 백제의 한성 포기로 인해 신라가 쉽게 한성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고 보는데 여기에 또하나 큰 추론을 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바로 고구려의 나제동맹 이간책이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고구려와 신라간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서 제대로 말하자면 고구려가 나제동맹을 파기시키기 위해 어떤 이간책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어.


하지만 이러한 고구려의 움직임은 분명하게 기록에 남아 있어.


위에서도 언급한 기록이지만 다시한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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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奏若但斯羅者有至臣所將軍士亦可足矣今狛與斯羅同心戮力難可成功

伏願速遣竹斯嶋上諸軍士來助臣國又助任那則事可成又奏.”

 

 

 

(생략)...따로 아뢰길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 입니다.

그러나 박(:고구려)이 사라(斯羅:신라)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를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생략)

 

 

-日本書紀 欽明天惶 15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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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이 왜(倭) 킨메이 덴노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의 동태를 언급한 부분을 앞서 서술했는데, 이런 기록을 가지고 군사적 관점으로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는데, 위에서도 또 언급했듯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란 만고불변의 법칙이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을 맺게 만드는 이유일거 같아.



신라의 對 고구려 정보통은 거칠부(居柒夫)였어.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에도 나오는 기록 그대로 거칠부는 고구려땅에 승복차림으로 들어가서 고구려정세를 염탐하다가  고구려 국내의 정난을 피해 죽령근처까지 내려온 혜량법사와의 일화를 보면 거칠부가 고구려에 대한 정보통임을 확신 할 수 있어.  만약에  고구려가 나제동맹에 대한 이간책으로서 신라와 접촉했다면 필시 거칠부를 거쳤음을 쉽게 추측 할 수 있지 않盧?



고증이 잘된 수용소 주화.jpg

고증이 잘된 (수용소...)짤

좌: 백제 / 중앙: 고구려 / 우: 신라



하지만 이러한 정황을 발견 할 수 있었지만 밀약의 내용은 무엇인지는 어느 사료에도 나와 있지 않아.


어쩔수 없이 전후 상황을 살펴서 유추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므로 태클걸어도 할 말이 없盧....;;







1.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발흥으로 인해 북방 전선이 시끄러웠으며 왕권 경쟁으로 인해 국내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상황에서 나제동맹의 한강 수복은 말 그대로 남방전선의 붕괴를 의미함.


2. 아무리 고구려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한개의 전선을 축소해야 되는 지경에 이르므로 결국 나제동맹을 파기시킬 방도를 모색했는데 바로 신라군의 한강지역 점령임.


3. 고구려가 한강 지역의 지배권과 금현성을 사실상 신라에게 넘겨주고 신라는 그 댓가로 고구려와 불가침 조약(동맹)을 맺고 백제를 견재한다.


4. 당시 백제-대가야-왜의 삼각동맹을 운운하며 對 신라 압박을 풀 방법으로 살살 꼬드김. 


5. 만약 나제동맹이 유지될 때 고구려가 침공하면 신라는 소백산맥 방어선만 잘 유지하면 되지만, 만약 백제-대가야-왜(倭)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하면 백제군은

관산성에서 막을 방도가 있지만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왜(倭)군과 바로 신라 옆인 가야에 대해선 딱히 막을 방도가 없음을 상기시킴. 또한 이러한 진공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다면 아무리 신라군이라도 가야,왜군의 방비를 위해 소백산맥-관산성으로 이어지는 전선의 병력을 일부 착출 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병력 공백은 결국 백제군의 관산성 함락과 더불어 중부전선의 격파를 의미하며 결국 로드 투 경주가 시작되는걸 또한 상기시킴.


6. 고구려와 신라가 밀통한다는 정보와 탄현 근처인 관산성(管山城) 부분에 신라군을 증강배치 & 고구려군의 한성 북부 증강배치로 백제군을 압박하여 사비성(泗沘城) 방어를 위해 한성 지역에 주둔한 백제 주력군을 철수시킨후 신라군이 한성지역을 장악하며, 북방전선의 잉여 군사력을 백제와 대치하는 중부전선과 대가야+왜를 방비하는 남부전선으로 보내 병력증강을 꾀할수 있는 일석삼조의 상황이란걸 어필. 어짜피 고구려는 북방전선에 한동안 매달릴 필요가 있으므로 한성지역에 대한 지역다툼에 대해선 고구려와 신라 간의 밀약을 통해 안정화 할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후방(한성일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음.







사료의 단편적인 기록을 연결해서 내 생각을 덧 붙여봤는데 약간 그럴듯 하지 않盧?


사실 백제의 한성 수복지역 포기는 위에도 나열했지만 크게 4가지로 나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쉽사리 성왕이 한성지역을 포기했을 리가 없어.


그러므로 유추해본게 바로 고구려-신라의 밀약을 근거로 든거야.




이것 또한 사실상 신라의 배신으로 생각하지만 이러한 배신의 이유를 만들어 준 건 바로 성왕의 임나회복운동이기 때문이였지.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끈끈한 우대를 다지던 백제와 신라는 사실 상승세를 타서 급성장하던 신라를 막기 위해 임나회복운동을 주도한 성왕의 견재가 문제시 되었던 거라 생각이 드盧.....





지금까지 서술한 사료의 기록과 정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구도를 보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거야.



550-553년 당시 각국의 대치상황도.jpg  



이렇게 신라가 한성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져.


백제의 대가야 지원으로 인해 팽창정책에 제동과 압박을 동시에 받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유지된다고 생각 할 수는 없었을거야.


특히 자신들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가야연맹을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왜(倭)왕 킨메이 덴노(欽明天皇)와 가야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백제 성왕을 보고 난처해 하는 차에 고구려의 은밀한 협력은 불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일종의 보험이였지. 





하지만 개로왕(蓋鹵王) 전사 이후 선대왕들의 염원을 담아 백제를 다시한번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분분투하던 성왕의 오랜 비원(悲願)이였던 고토(古土) 한성지역의 회복은 이러한 뜻밖의 복병인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 버릴수 밖에 없었어.


성왕 입장에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에 대해 배반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신라가 갑자기 뒷통수를 친 격이니 분기탱천하지 않겠盧?


이게 바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성왕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안타까움으로 이야기가 약간 변질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무튼 한평생의 꿈이 물거품이 되버린 성왕의 마음속은 어떠했을지는 뭐... 게이들도 알겠지ㅇㅇ;



이개샠끼들.jpg 

이 쳐죽여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 신라놈들...


바로 이 때 성왕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마 한성지역으로 이어지는 신라군의 수송로를 끊음으로서 한성지역에 설치된 신주의 신라군을 고사시켜버리고 신라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복수전을 구상했을거라 생각할거야. 뭐.. 역사를 아는 게이들은 감 잡았겠지만ㅋㅋㅋ



img1.jpg



신라의 비열한(?)배반에 대한 통쾌한 복수전


그것이 바로 삼국시대 최대 격전 중 하나이자 백제의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시발점이 되었어.























다음편은 본격적으로 관산성 전투 직전의 백제+대가야+왜(倭)군과 신라군의 배치에 대해 써볼께.


좋은 저녁 보내라 게이들아







5줄 요약.


1. 신라의 팽창으로 인해 압박을 받던 대가야에 대해 백제와 왜(倭)가 공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백제 성왕이 직접 임나재건회의를 주최하자 신라 입장에서는 나제동맹의 배신으로 간주함.


2. 이러한 상황에서 일단은 백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의 고토회복전쟁에 참여. 죽령 이북지역과 남한강 중부를 점령하여 백제군의 진공에 보조를 맞춤.


3. 하지만 백제-대가야-왜(倭)의 삼각동맹에 불안감을 느끼던 차. 고구려가 남방전선 안정화를 이유로 신라와 서로 공조하여 비밀리에 밀약을 맺게 됨.


4. 비밀리에 밀약을 맺은 고구려는 먼저 한성 이북에서 백제군을 압박하고, 신라는 일부 병력을 동원하여 중부전선의 최전선이자 사비성 바로 옆인 관산성에 병력증강을 함.


5. 백제가 수도 사비성의 방어의 공백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한성지역을 포기. 바로 신라는 고구려와의 밀약 조건으로 한성지역을 점령. 성왕은 신라가 동맹을 파기했다며 분기탱천하여 대가야-왜(倭)에 연합군을 파견해달라며 지원요청을 하였고 결국 우리가 아는 삼국시대 최대 격전 중 하나인 관산성 전투의 시발점이 됨.










참고문헌,논문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百濟本記)』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일본서기 백제본기(日本書紀 百濟本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일본서기 흠명천황기(日本書記 欽明天皇記)』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2011,장창은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pp.5-31,2010,김병남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pp.31-76,2009,전덕재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pp.5-39,2010,차용걸

관산성전투 전후 시기 대가야·백제와 신라의 대립,2006년,김영심,김기섭

백제 위덕왕대 대신라 정책의 전개와 결과pp.131~161,2009,전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