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1탄. 조선의 군편제와 군사력

http://www.ilbe.com/1856638141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1탄. 명나라의 행정제도와 경제,재정,조세제도

http://www.ilbe.com/1871293859


[정보/캐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2탄. 명나라의 군 전략

http://www.ilbe.com/1874898566


[정보/스압/BGM] 조선초 당시 동아시아 군사력에 관한 이야기 

제 2-3탄. 명나라의 군사력과 군편제(수정)

http://www.ilbe.com/1883510224





외전 



[정보/BGM] 포방부의 정신적, 육체적 스승인

동아시아 화력덕후 조선의 화포를 알아보자

http://www.ilbe.com/1866916083











조선초 동아시아 군사력을 쓰던 게이야. 

전편 시리즈는 너무 졸작이라서 더이상 진행하기가 뭐한 시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보게이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똥을 안 싸긴 뭐하잖盧?

그래서 현재까지 별다른 자세한 정황이 들어나지 않은 백제 멸망사에 관하여 면밀히 분석한 사료와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덧붙여서 써볼까해.



이 시리즈는 주류사학계의 입장과 재야사학계, 일본사학계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여 쓰는 글이기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흐름과는 약간 좀 다를수도 있다는걸 미리 밝힐께. 이번에는 내 나름대로 준비 많이 했으니 중간에 갑자기 안 쓰는 상황이 없도록 하겠盧...ㅋ; 



백제사는 거의 수수께끼로 알려져 있어. 사실 백제사는 우리 한반도 보다는 고대 일본에서 편찬된 서적에 보존되어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지.


이점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막판에 들어가면 그 이유를 알게 될거야.


간보지말고 바로 시작할께ㅋㅋ;


















































1.jpg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 멸망의 기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5~7차 교육과정을 거친 게이들이라면 초등학생때부터 귀에 박혔을지도 모를거야.


'의자왕 치세 말년의 대규모 삽질이 원인이 되었다.' , '희대의 암군(暗君) 의자왕 '  등등 의자왕에 관하여 아주 까내리고 있어.






2.jpg

( 개인적으로 드라마 계백에서 의자왕 역을 맡은 조재현이 딱 본연의 의자왕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었다고 생각함ㅇㅇ;)





사실 나이먹고 역사에 관심이 많아져 한번쯤 뒤져본 게이들이라면 이런 말들이 다 허구였다는걸 알거야.


실제로 우리의 이러한 고정관념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주의(事大主義) 발상으로 시작되었다는걸 알 수 있어.


그럼 우리는 이번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고대자료를 하나하나 모아 거대한 흐름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백제의 멸망에 대해 추적해볼거야.










3.jpg





사람마다 백제의 멸망의 전초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의 짱구를 굴려 말하지만


나는 여러가지 사료와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을때. 백제의 멸망의 전초가 되었던 시점을 '관산성(管山城) 전투'로 보고있어.




만약 지금 고딩때 가지고 있던 국사책이나 삼국시대 관련의 책이나 만화책을 살펴봐봐 




뒷통수.gif



가지고 있는 책에서는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트리고 백제의 뒷통수를 친 신라의 일격이라고 평할거야.


이때부터 백제가 제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사실 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승리하였다면, 당시 물 만난 고기처럼 세력 확장을 하던 신라의 기세를 한번에 꺾고 사비 백제가 다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뻔 했거든....







" 그럼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신라의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까? "

 

 






거의 대부분의 시각이 관산성 전투를 신라의 비열한 배신행위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뒷통수 맞은 백제의 시각에서 봤을때 이야기이지


국익을 우선시하는 관점에서 볼때는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어.











사실 내가 백제의 시각에서 본 백제의 멸망사 라는 타이틀을 달고 쓰는거지만 

엄밀히 말해서 백제의 입장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어.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백제와 연관되는 모든 사서(史書)를 바탕으로 '불투명했던 백제의 멸망사'를 쓰는거라 말할께.



















다시 돌아와서, 백제의 뒷통수를 제대로 때린 신라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하겠지? 









4.png





신라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치밀한 계산 하에 국제동향을 면밀히 관찰하여 국익(國益)에 가장 이득이 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산성(管山城) 전투를 신라의 비열한 배신행위라고 말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면에는 개인적 윤리관을 그대로 옮겨, 그들의 잣대로 국가간의 정치외교전을 맘대로 판단하는게 아닐까?



 






'개인간의 윤리 도덕적 가치를 그대로 옴겨 '국가간의 관계'에 적용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뭐 우리 밀게이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배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보는 이유야. 




인간사, 어느 쪽의 배신이라는 것이 성립하고나서, 그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의 일방적 배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또한 그로 인해서 한쪽을 그르게 보는 것은 냉철한 당시 국제 역학구도(力學構圖)에선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








5.gif 

(  ㅆㅂ 국정원을 가지고 딴지걸어? 이런 개같은 빨갱이 새끠들 )



설사 한쪽이 배신을 했다고 치더라도 다른 한편이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국가로서 정보력의 부재라고 냉혹하게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한 것 아니겠盧?!

 






현대의 계약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계약파기를 배신으로 판단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야. 

개인간의 계약관계에서도 계약을 존속시키는 것보다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월등히 이익적 측면이 부각된다면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어. 

이것을 두고 배신이라고 소위 말하는 도덕적 잣대로만 평할 수 없는 것이지.










 

6.jpg

( 뒷통수 맞은 희대의 강철의 대원숰ㅋㅋㅋㅋ )





근,현대의 국가간에도 엄연히 계약이 존재해. 대표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FTA)과 상호방위조약(相互防衛條約),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이라든가 정전협정(停戰協定),평화협정(平和協定) 등등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휴지조각이 되기도 하고 또 역사적으로는 순식간에 깨져버리곤 했잖盧. 



대표적으로는 독소불가침조약이 그랬고 영국의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맺은 뮌헨 평화협정 등이 그랬지ㅇㅇ..; 이건 밀게이들이 더욱 잘 아니 바톤터치ㅋ








 







7.jpg

(국가간의 힘의 논리에서 피해보는건 개인...이지만 얘넨 잘 모르겠다ㅋㅋㅋ;)




무튼 국가간의 소위 '배신'이란건 철저하게 국익우선(國益于先)의 원칙이 작용한 것이야. 물론 여기선 개인간의 계약파기(契約破棄)와는 다른 측면이 있어. 개인간에 있어서 계약파기는 법적 절차에 따라서 보상책이 있지만 국가간의 계약파기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거지.








 

힘이 있는 국가가 외교적 계약을 파기했을 때, 그에 따른 제약요소(制約要素)를 극복 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국가는 계약을 파기했을 경우, 그에 따른 보복을 감당할 수 없다면 쉽게 계약을 파기할 수 없게 되잖아? 



즉 근,현대에도 국가간에 정식으로 맺은 조약도 경우에 따라선 한낮 휴지통에 들어있는 휴지조각에 불과 할 뿐인데, 하물며 고대 국가간에는 다반사였다고 보는게 합당하겠지? 







따라서 국가간에 외교협정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서 파기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봐도 항상 존재했던 상황이야. 


특히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한 동맹관계에선 더더욱 변화무쌍하지. 흔히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하잖아?













 8.gif



원래 동맹이라 함은 공동의 목표을 위해서 함께 합심(合心)하여 대항하는거지만, 그 공동의 목표가 바뀌게 되면 언제든지 동맹관계는 와해될 수 있어. 


한마디로 공동의 목표라는 관점을 공유하지 못하면 동맹으로서의 가치는 상실하게 되는거지. 


바로 이 측면에서 관산성(管山城) 전투 직전의 백제,신라,고구려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당시 국제역학(國際力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어.









9.jpg



 

흔히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신라의 배신이라고 말할 때는, 속칭 신라의 뒷통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과연 '백제는 전혀 무방비로 당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거야. 









원래 뒤통수 맞다는 표현은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일격을 당할 때 하는 표현인데, 이 점에 대해서 백제가 신라로부터 일격을 당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찾은 고토(古土) 인 한성을 신라의 기습으로 빼앗긴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일반적 견해이지? 


하지만 사료와 기록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전략적 관점에서 재구성 해보면 백제는 신라의 동태(動態)를 알고 있었다고 보여져.










10.jpg 

( 한성백제의 왕궁이였던 풍납토성 )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백제가 고토(古土)로 칭하는 한성을 잃어버린 것은 개로왕(蓋鹵王) 20년인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의 침공으로 한성 백제가 함락되면서야.




광개토 대왕에 이어 고구려 20대 태왕(太王)으로 즉위한 장수왕이 축적한 내부의 힘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펼치면서, 백제는 한성땅을 잃고 웅진으로 그리고 사비(泗沘)로 천도를 하게 되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라와 공동전선을 편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실체이지.










11.jpg 

( 고구려가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아차산성 )





나제동맹(羅濟同盟)은 동성왕 치세에 가장 굳건한 신뢰를 쌓으며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데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였지만, 신라가 한성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게 되는 서기 553년에서 결정적으로 와해(瓦解)되는데,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백제는 신라의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르지 않았다는걸 가늠 할 수 있어. 오히려 미리 알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지.





12.jpg



앞서 말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굳건하던 백제 동성왕(東城王) 23년인 서기 501년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의 진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어. 이때부터 꾸리꾸리한 냄새를 맡았다고 볼수 있지.






관산성 전투가 있기 전인 성왕(聖王) 26~28년(AD 546~550)에 백제가 고구려와 독산성(獨山城)과 도살성(道薩城), 금현성(金峴城)을 놓고 서로 치열한 공방하고 있을때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면..





---------------------------------------------------------------------------------------------------------------------------------------------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서기 540년 9월)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 百濟本記 券26 聖王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之濟一戰 大破之"

(성왕) 26년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양원왕)이 예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에게 명하여 갑옷을 입은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맞이하여 백제군과 함께 한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 百濟本記 券26 聖王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성왕) 28년 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하였다.


- 百濟本記 券26 聖王




---------------------------------------------------------------------------------------------------------------------------------------------





기록을 보면 치열하게 서로 공방전(攻防戰)을 벌이면서 엄청난 국력이 소모 되었다고 볼 수 있지? 특히 백제의 경우 고토(古土)인 한성부근을 잃고 흔들린 왕권을 조금씩 회복해 가던 시기였으며,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침략이 대두(擡頭)되던 시기였어. 그만큼 두 국가가 남은 힘을 최대한 짜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어.









13.jpg

( 이사부 異斯夫 )



하지만, 양국이 서로 소모전을 벌이며 지쳐있는 틈을 타서 신라의 병부령인 이사부(異斯夫)가 모든 군권(軍權)을 총괄하며 도살성(道薩城),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병사 1000명을 주둔케 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어. 기록을 보자면 다음과 같아





---------------------------------------------------------------------------------------------------------------------------------------------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百濟本記 券26 聖王




十四年 ...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14년(553년) ...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新羅本記 券4 眞興王



---------------------------------------------------------------------------------------------------------------------------------------------





즉, 자신들을 믿고 있던 백제에게 일종의 뒷통수 거하게 후려치고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盧?

 


또한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점령지에 대해선 반격(反擊)을 하지 않은 반면에 백제에 대해선 공방(攻防)을 계속했어. 고구려 입장에서 전선을 3개로 늘린다는건 아무리 당시 한반도의 대국(大國)이라도 피하고 싶은 상황이였겠지.


그렇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병력의 출혈이 거의 없었지만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공방(攻防)으로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출혈이 심할 수 밖에 없었지.


 


이런 상황에서 볼때 상식적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행동을 보고 백제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잖盧....



이미 백제 수뇌부들은 신라의 변화를 감지했다고 봐야 해. 









실제로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무너짐을 간파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密約)까지도 눈치챈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記) 킨메이(欽明)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아.






----------------------------------------------------------------------------------------------------------------------------------------------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을 원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으랴'


-日本書記 欽明天皇記



----------------------------------------------------------------------------------------------------------------------------------------------




※이 킨메이(欽明) 덴노에 대해 일부 학계의 충격적인 설(說)을 나중에 소개할께. 고대 한일관계의 미씽링크(Missing Link)에서 튀어나오는 파격적인 이야기들이므로 소개하면 재미있을거 같盧...









본문으로 돌아와서 해석하자면 '하늘이 고구려의 손을 들어주는데 굳이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필요가 있겠냐?' 하는 속내를 은연중에 내 비추고 있어. 

이 사항에 대해선 차후 쓰겠지만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고구려의 혜(慧) 법사를 통해서 고구려 수뇌부와 내통한 정황이 포착되는 부분이야. 




무튼 진흥왕의 발언은 '국익을 위해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정세의 약육강식을 증명이라도 하는 전략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는거지.

 


또한 552년에 백제 성왕과 왜(倭)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데, 이때 백제는 한일 양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유명한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1)의 불교전파” 부분이야. 불상과 불경을 왜에 보내서 왜에 불교를 전파한다는 내용이지. 




14.jpg 








일본서기(日本書記) 킨메이(欽明-흠명) 13년 10월 기록에 이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의 불교전파에 대한 기록이 있어.










----------------------------------------------------------------------------------------------------------------------------------------------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명왕)이, 서부 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권을 보냈다.




日本書記 欽明天皇記



----------------------------------------------------------------------------------------------------------------------------------------------





당시 불교는 지금같은 하나의 종교차원을 넘어서는 선진문물(先進文物)이자 중국과의 교류의 통로였어.


한마디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외교적,사상적으로 한차원 올라설 수 있는 밑바탕이었지.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日本書記)에도 이 내용이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당시 왜왕인 킨메이(欽明)덴노은 백제 성왕(聖王)이 보낸 불상과 국서(國書)를 보고 미쳐 날뛰듯이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런 내용을 교과서를 바탕으로 공부한 우리는 마치 백제가 왜(倭)에 특별한 시혜(施惠)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제대로 된 역사 이해가 아니겠지?






15.jpg

( 일본 제 29대 덴노(일왕) 킨메이(欽明) )






생각해봐. 모름지기 세상살이에 공짜가 없듯이, 특히 국가간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는걸 까내는 경우가 없잖盧?! 


항상 밑장빼기를 하기 위한 복선(伏線)이 깔려있잖아?


백제는 역박사(曆博士)(2)이나 불경,승려 등의 고급 인력,기술을 전해주면서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왜(倭)의 군사지원을 받아내었어. 

이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쓰고 싶지만 차후에 설명할께ㅋ






553년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를 보낼 때 역시 백제는 앞으로 전개될 군사행동을 설명하면서 왜(倭)의 군사지원을 요청하였어. 




글자가 깨지길래 그냥 번역해서 쓸께. 앞으로 한글로 자료 인용하는건 글자가 깨진거라고 생각해줘ㅋㅋㅋ;





---------------------------------------------------------------------------------------------------------------------------------------------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가 덴노(天皇)에게 백제 명왕의 친서를 건내며 앞으로 전개될 신라 공격에 대해 설명하니

덴노가 기뻐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하명하였다."


日本書記 欽明天皇記



----------------------------------------------------------------------------------------------------------------------------------------------








이 기록을 보면 '왜(倭)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하는데, 현재 시각에서 보면 상호간의 비교우위(比較優位)에 있는 선진문물과 군사를 서로 맞바꾸는 일종의 무역을 한 셈이라고 정치 외교학 적으로 주장하고 싶어. 또 다른 주장이 있지만 이건 차차 글을 쓰면서 설명할께. 이것 또한 고대 한일관계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라 현재 학계에서도 논의중이거든;




16.png

( 본문과 아무 관련없는 문서..ㅋ )






무튼,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왜에 건너간지 바로 이듬해인 서기 553년, 킨메이(欽明) 14년이자 백제 성왕 31년 정월에 백제는 상부(上部)의 내솔(奈率)로 승진된 과야차주(科野次酒)를 재차 보내서 군사지원 요청을 하게 되. 그만큼 삼국간의 전황(戰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기록이지.

 






17.jpg

( 하.. ㅅㅂ 새끠들 꾸리꾸리 하다 싶었는데 진짜 뒷통수 치네.. )




이와같은 정황을 고려해 보면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붕괴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며, 정치 외교학 적으로 신라가 백제를 비열하게 뒷통수를 쳤다고 생각하지 않는게 맞는거 같아.






다음편은 긴박했던 당시 정세와 치열한 외교전에 대해 써볼께. 


꼭 밀게이들 전멸할때 올리니까 뭔가 허전하盧....ㅋㅋ;;
















~*~*~*~*~*~*~*~*~*~*~*~*~*~*~*~*~*~*~*~*~*~*~*~*~*~*~*~*~*~*~*~*~*~*~*~*~*~*~*~*~*~*~*~*~*~*~*~*~*~*~*~*~*~*~*~*~*~*~



부연 설명



(1)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일본에 불교를 전수하였다. 백제 서부(西部)의 희씨(姬氏)로서 관계는 달솔(達率)이었다.

552년(성왕 30) 10월 성왕의 명에 의하여 석가모니불의 금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일본에 전하였다.


이들을 올리는 글에 불교의 예배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모든 법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깨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주공(周公)·공자(孔子)도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이 법은 능히 헤아릴 수 없고, 가도 없으며, 복덕과보(福德果報)를 낳고 곧 위 없는 보리(菩提)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은 천축(天竺)으로부터 이곳 삼한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의해서 받들어 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일본에 전하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여 “내가 일찍이 이와같이 미묘한 법을 들어보지 못하였노라.” 하고 소가대신(蘇我大臣) 이나매(稻目宿禰)의 주장을 받아 들여 일본에 불교가 전래하게 되었다.





(2)역박사(曆博士)


백제의 역법(曆法) 전문학자.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의 역법을 수용하였으며, 그와 관련된 전문 관부(官部)와 학자도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553년(성왕 31) 6월 백제는 왜의 박사 교대 요청을 받아들여 그 이듬해 2월 역박사인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을 파견하여 전임자와 교대 상주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의 역학 지식은 왜에 보급될 수 있었다.


602년(무왕 3)에는 백제의 관륵(觀勒)이 왜에 건너가 역본(曆本) 등을 전하여 역법이 왜에 채용되었다. 그 결과 왜는 604년 정월을 기하여 역일(曆日)을 반포하고, 이때 백제에서 전래된 중국 송(宋)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왜의 역사 편찬, 가령 『일본서기』 기년(紀年)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본문에 나와있는 지명




*사비(泗沘)


사비성은 백제 때 도읍 자체의 명칭이기도 한다. 백제 때에는 부여 일대의 평야를 사비원(泗沘原)이라 하고, 금강을 사비하(泗沘河)라고도 하였다.


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ㆍ화사(畫師)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東明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鹵辛)ㆍ구지(久遲)ㆍ부림(富林)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신문왕 때 군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바꾸어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시) 관할하에 두었고, 석산(石山)ㆍ열성(悅城)의 두 현을 예속시켰다. 부여의 명칭은 성왕이 이곳으로 천도할 때 남부여(南扶餘)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고려 이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비의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소부리(所夫里)가 ‘’로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과,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부리(夫里)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의 의미를 갖는다는 설이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부여가 동경이 되기는 어려우므로 후자의 설이 타당한 것으로 본다.




*탄현(炭峴)


대전광역시 동구와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의 경계에 위치한 식장산(食藏山)에 있는 고개이다. 

대체로 옥천지방 또는 대전 동쪽 식장산을 가리킨다고 하나, 보다 정확한 위치는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와 군북면 자모리의 경계인식장산 중심 산록 중 깊은 자루목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자 유배중이던 충신 흥수(興首)에게 좋은 방책을 묻자 백마강과 탄현을 지킬 것을 말하였으나 간신들이 이를 무시하였으므로 당나라의 군사는 백마강을, 신라군은 탄현을 함락하게 되어 백제가 멸망하였다.


탄현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사실은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도 옥중에서 임종시에 왕에게 이 곳과 백마강을 잘 지켜 국방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입증된다. 여러 자료로 미루어볼 때 사서(史書)에 나오는 심현(沈峴)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독산성(獨山城)


한강 북쪽(한북.漢北)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다. 




*도살성(道薩城)


도살성(道薩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7 잡지 제6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에 보인다. 도살성에 대해서는 ① 충청북도 음성의 백마령(白馬嶺), ② 충청남도 천안설, ③ 충청북도 증평 이성산성(二聖山城)과 진천 두타산성(頭陀山城)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도살성은 천안의 옛 지명인 ‘도솔(兜率)’이 도살과 비슷하다는 천안설보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5 신라 한주(漢州) 흑양군(黑壤郡) 도서현(都西縣)[현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의 옛 지명인 도서현이 보다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이며, 청주를 통한 신라의 북진과 관련된 지명으로 이해된다.



*금현성(金峴城)


오늘날의 충청북도 진천군 서쪽이라는 설이 있고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과 전의면의 경계에 있는 금이성(金伊城)이라는 설도 있다.

금현성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 성왕 28년 3월조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양원왕 6년 3월조 및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 11년 3월조에 유사한 기록이 각기 실려 있고, 「이사부열전(異斯夫列傳)」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










참고 문헌,논문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百濟本記)』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일본서기 흠명천황기(日本書記 欽明天皇記)』
『정책학 원론(개정판),1997,정정길,대명출판사 』
『외교정책론,1989,전웅,법문사』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2011,장창은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pp.5-31,2010,김병남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pp.31-76,2009,전덕재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pp.5-39,2010,차용걸
관산성전투 전후 시기 대가야·백제와 신라의 대립,2006년,김영심,김기섭
백제 위덕왕대 대신라 정책의 전개와 결과pp.131~161,2009,전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