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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즈막한 오전.


아침을 먹기도, 점심을 먹기도 어중간한 시간에 눈이 떠진다.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머리는 며칠을 감지 않아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나갈 때만 씻으면 문제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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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입는 김치국물 묻은 런닝.


무릎이 튀어나오고 엉덩이에 크게 PINK 라 박혀있는 츄리닝을 걸친 채,


컴퓨터를 부팅시킨다.





기다리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대충 묶고,


츄리닝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북북 긁는다.


'오늘은 뭐라고 수다를 떨까..'





들뜬 마음으로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하자마자 수두룩히 뜨는 광고 배너와 툴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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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하나하나 포인터로 클릭해 닫는 것이 늘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이거 왜 자꾸 뜨는거야..인터넷 할 때마다 뜨네..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금방 꺼..얍! 얍!'





창을 다 닫고 나자,


이제는 엉망이 된 바탕화면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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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맛집 소개한답시고 호구를 꼬셔 갔던 레스토랑 사진을 비롯해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매번 미루기 일쑤였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파일들.


그 와중에도 가지고 싶은 신상 백은 간결하게 브랜드별로 폴더 정리를 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문득 엄마가 '너 언제 일할거야..' 라고 했던 말이 스쳐지나간다.





학교는 휴학한 상태.


나름 내 꿈을 찾겠다며 부모님이 말리는 것을 단호히 거절.


한 달까지는 '좀 쉬면서 아이디어 구상이나 해 보자' 며 친구들을 불러내 놀던 것이..


이제는 몇 달이나 지났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





그렇다고 중간에 일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 경리일을 잠시 하기도 했었고, 편의점, PC 방에서도 일을 했었다.


비록...짧게는 며칠에서 몇 달만에 나오긴 했지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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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힐링이 필요해서 그런거야...내일이면 날아오를 거야..' 라는 생각이


'정 힘들면 취집가지 뭐~ 원래 내 꿈이 현모양처 아니겠어? ㅎㅎ 연봉 억대 남자 꼬시면 돼' 라는 생각으로


바뀐다.





즐겨찾기 해 놓은 여초카페로 들어가자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곳에서는 나도 연예인이고, 잘 나가는 전문직 종사자, 냉철하고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이니까.





'그런데..이상하게 글이 별로 없네..?'





평소같았으면 서로 ㅋㅋㅋㅋㅋㅋㅋㅋ와 '긔' 를 연발하며 은근한 자존심 싸움을 했을텐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조용하다.





'뭐 어때'


무엇인가 자랑할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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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옆, 어제 먹다남은 피자조각을 보며


'가로수길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있는데 우연히 벤츠타고 지나가는 재별 2세가 전번을 물어봤다' 는


말도 안되는 컨셉의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닦지 않아 찐득해진 키보드와, 버튼 사이에 먼지가 잔뜩 낀 마우스를 굴려가며


짧게 글을 쓰고 올리려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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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벨 소리가 울린다.





"김치년씨~! 우체국이에요~ 등기왔어요~!"





인터폰을 보고 우체국 아저씨임을 깨달았지만


세상은 무서우니까. 함부로 열어주면 안된다는 생각에


버튼을 누르고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라 말한다.





어이없는 표정의 우체국 아저씨는 표정이 굳어지며


"법원에서 온 거라 직접 받아야 돼요!!" 라 소리친다.





'아아..귀찮아..근데 법원에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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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지 않은 겨털을 가리기 위해 가디건을 대충 걸치고 


마구잡이로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헤치며 현관으로..





빼꼼히 현관문을 열어 사인을 하고 등기를 받는다.


사인을 받고 빠르게 사라지는 우체국 아저씨.





'뭐길레 이래...'





신경도 쓰지않은 채, 식탁에 던져놓고 쓰던 판타지 글쓰기를 마무리한다.


'이정도면 부러워서 뭐라 댓글을 달지 않고는 못 배길 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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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글을 올리고,


'다른 글들이 뭐가 있나' 하면서 목록을 보는데..


낯설은 제목의 글들이 올라온다.





'언냐들...소환장 받았어??'


'나 미칠거같아 누가 도와줄 사람 없긔?'


'여기 변호사 하는 언냐 없어?'


'엄마 쓰러졌어..ㅠㅠ 아빠 지금 회사에서 조퇴하고 오는 중이래..도와줘..언냐들..'





보기만 해도 심각한 제목들의 글.




'뭐야 냔냔들...'


순간, 식탁에 내팽개친 등기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설마...'


내키지 않는 발걸음과 떨리는 손으로 등기를 뜯어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소환장'





순간 눈이 커지고, 몸에 식은땀이 난다.


미처 꺠지 못한 잠은 저 멀리 간 지 오래.





당황해서 집안을 왔다갔다 거리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답답한 마음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언냐들..나도 받았는데..이거 뭐야..? 왜 온거야..? ㅠㅠ'





몇 안되는 냔냔들이 댓글을 달아주고, 곰곰히 생각해보고 나서야 퍼뜩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누군가의 신상을 털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나..나는..그..그냥 ㅅㅂ년이라고 한 것 밖에는 없는데..'





누구하나 속시원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다들 ㅠㅠ 와 도와줘~ 로 도배된 글 뿐.


답답한 마음에 지식인에 들어가 질문을 해 보려는데


이미 수두룩히 올라와있는 고소, 고발, 명예훼손 등등의 질문들.


아이디가 가려지긴 했지만 대부분 눈에 익은, 같은 카페 회원들로 보이는 글들이 대다수였다.





보이는 창마다 클릭해서 읽어보고, 또 읽어봤지만..


결국은 '처벌을 면하기 힘들다는 것'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며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 널브러진다.





장난삼아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멘붕, 인실좆' 이라는 게 이런거구나.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릴 수만 있다면..


멍하니 집 천장만 바라보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나도 모르는 새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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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 안의 선풍기는 눈이 시리도록 열심히 바람을 내 얼굴로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