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조소앙·안재홍 50년대 독자적 통일운동”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70858.html


지은이는 그 근거로 조소앙 안재홍 등 재북 민족주의자들이 1956년 7월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재북평통)의 활동이 상대적인 독자성을 보였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재북평통을 결성하면서, 분단상황이 계속된 사유로 “통일에 대한 견해와 방법에서 남북 당국의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만의 침략정책과 독재정치를 분단의 뿌리로 본 북한 정권의 견해와 크게 다른 것이다. 조소앙과 안재홍은 또 ‘남북 정부 연합론’을 폈다. “사회주의 체제와는 다른 민족주의 노선을” 북한 사회에서 표방한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262&aid=0000001867
전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 11년만의 폭로(신동아)


원래 이러한 공작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현재 평양대극장 뒤 조평통 건물 안에 평양주재 한민족민주전선 대표부와 함께 들어 있다)의 주 업무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월북자들로 구성되어 남한에 있는 연고자들에게 편지를 발송하거나 방송심리전, 직접접촉 등을 통해 인물을 포섭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교류라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도 인물 포섭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통전부는 류미영에게 오익제의 심리정서를 타진하는 차원에서 성천에 있는 본처와 딸의 소식을 알려주게 했던 것이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8_1950_06_30_0140

드럼라이트 주한미대사관 참사관, 북한군 한강 도하 및 인천 함락위기 등 전황 보고
게재지명 미 국무부 한국 국내상황 관련문서 Ⅱ ; 한국전쟁 자료총서 40, 428쪽
날짜 1950년 6월 30일

적은 이른 아침, 한강방어선 전역을 공격하였으며, 포 공격으로 한강 근처 교량 통과에 성공하였다. 한국군은 하루종일 포 공격에 시달려야 했으며, 미군 장교들의 방어선 사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 보병과 교전도 하지 않고 철수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적 탱크가 한강을 통과하지는 못했으나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통과할 것이다. 김포 반도의 상황은 불확실하지만 김포 비행장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인천 역시 함락 위기에 놓여 있다. 서울 동쪽의 상황 역시 불투명하지만, 적이 이미 한강을 통과해서 남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동쪽으로부터 수원에 대한 압박이 들어 올 것이다.

한국군 제6사단은 원주의 북쪽을 방어 중이며, 제8사단은 강릉-원주간 도로 동남쪽 50마일 지점인 진부령 산악지대에 집결해 있다.
한국군 참모들은 하룻동안의 전황으로 인해 매우 낙담해 있다. 정일권 준장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채병덕을 대신하여 3군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피난민들로부터 입수한 보고에 따르면, 원세훈, 조소앙, 김규식과 기타 ‘중간파’들이 적 치하의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몇 몇 정치범들이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드럼라이트(Drumright)
미 국무부 한국 국내상황 관련문서 Ⅱ ; 한국전쟁 자료총서 40, 428쪽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대한뉴스~


http://film.ktv.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61&mediadtl=379&gbn=DH&quality=H


퀵타임 설치가 필요.(고화질)


http://film.ktv.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61&mediadtl=379&gbn=DH&quality=W

 

출처 : http://film.ktv.go.kr/ (대한뉴스를 볼수있는곳)

 

북한에 있던 조소앙이 지령을 내려서 암살시도를 했으나 실패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01500329203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0-15&officeId=00032&pageNo=3&printNo=3034&publishType=00020


조소앙지령으로 음모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0150020920301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0-15&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57&publishType=00020


기소장내용 이대통령암살음모 上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20020920302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2&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75&publishType=00020


기소장내용 이대통령암살음모 (2)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300209203005&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3&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76&publishType=00020


기소장내용 이대통령암살음모 (3)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400209203007&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4&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77&publishType=00020


기소장내용 이대통령암살음모 (4)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10500209203005&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05&officeId=00020&pageNo=3&printNo=10078&publishType=00020


(기소장 내용을 대충 옮김)

 

조소앙의 지령으로 이뤄진 1955년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10월 15일 발표)


민영수(55, 전 사회당 법제정책위원장. 변호사) 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이며 사회당 조직부장 김병호(44,일명 김중민) 중국 남의사 출신이며
중경 임정계(임시정부 계열) 김재호(52,일명 김백암), 전 한독당 중앙상임위원이었던 <나재하>(70)등은 4283년(1950년) 8월 조소앙으로부터

"인민군대의 국토 통일이 국연(국제연합군인듯)군의 참전으로 붕괴되어가고 동족의 살상은 치열해가고 있으며 협상의 가능성은 이승만 박사의 존재로써 말살되고 있다. 조국이 협상에 의한 통일로써 연립정부를 수립하여야한다. 나는 인민군대와 같이 월북한것이로되 한독당 및 사회당계에서는 잔류하여 협상공작을 추진하여 남북이 호응하여 통일을 완수하라."

운운의 지령을 받는 동시 이승만을 제거 혹은 암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산집단과 협상하기위해,


이승만을 암살하여 군내 수뇌급을 회유선동하여 무력봉기와 이에 따른 계엄선포등을 선포, 국내를 혼란시켜 국제적인 협상이 추진될거라 하여 이를 모의한다. 기회를 노려 혁명투사 집단 갑오구락부를 연락장소로 정하고 중경 임정출신이며 갑오구락부 간부인 김익중(57),예비역 육군대령 김동혁(31) 탈영병(도망병) 이영도(31,이범륜), 육군중력 유성연(33),육군소령 김동훈(28)등을 포섭 규합. 거사일은 10월 3일 개천절 기념식 혹은 10월 4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장으로 선택한다.


그 방벙느 유시태, 김시현의 1952년 이승만 저격미수 사건을 교훈삼아 수류탄을 투척하려했다. 그리하여 혼란스러워 하는 국내 정계에 박차를 가하여 군내 고급 지휘관을 선동,설득등으로 회유하여 무력 쿠데타를 하려하고,계엄령을 선포하려했다. 그래서 군수뇌부 책임자 및 지휘관 명단을 작성. 그리고 숙청 대상으로 김태선,윤치영,임철호,이기봉,최순주,갈홍기,구용서, 박마리아, 김활란,김유택외의 정계 요인 수십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은 만일을 대비해 청산가리를 휴대했다.

 

이 계획과 구상은 조소앙의 지령. 민영수는 일제시대 판사출신(기사에는 왜정부 판사출신)이며, 사회당 법제정책위원장으로 조소앙의 복심(심복을 복심이라한다)이던걸 자인바.(무슨 말인지)


6.25때 중국군 수복 직전 월북한 조소앙으로 부터 특수지령을 받아 국내 정계 혼란을 위하여 우익정계요인들에 침투하여 수차에 한한정치파동에 참여. 김병호는 일제시대 중경 임시정부 특수공작을 위해 활동하다가 해방후는 한독당 중집을 역임하던 사회당 조직부장으로 역시 조소앙의 복심(심복)이며 민영수와 같이 지령실천에 광분.


<나재하>,김재호 역시 동일한 인물들로 합법적인 정치공작으로는 이승만 제거가 불가능하니 4287년(1954년)6월부터 4명이 모의끝에 암살로 합의했다. 동지 포섭에 있어 같은 임시정부 계열인 김익중에게 그정을 내통하여 공감을 얻은후, 서울특별시 을지로 2가 소재의 갑오구락부에 각각 침투했다. 김익중,김재후등을 간사로 취임. 그 구락부를 근거지로 하여 동지와 동조자를 물색. 6사단에서 탈영한 이영도를 하수자로 포섭하는 일,
김동혁등 3명을 포섭뒤 거사에 착수하였다.

 

기소장 내용 요약.

<나재하> - 70세. 장로. 본적 : 서울 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36번지 주소 동상(무슨뜻인가)


김병호 - 47세. 일명 김중민. 본적 :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 361번지. 주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상도동 1번지


민영수 - 55세. 변호사. 회사원. 본적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175번지의 59호. 주소 동상.


김재호 - 53세. 일명 백암. 본적 :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증악리 24번지. 주거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후생주택 247호.


김익중 - 57세. 무직. 본적 : 경기도 장단군 장남면 고랑포 23번지. 주거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7번지


이범륜 - 30세. 일명 영도. 6사단 사령부 1중대. 본적 :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북2178번지. 주거 : 서울 특별시 중구 쌍림동 175번지


유성연 - 32세. 제31정양병원. 중령(임시). 본적 :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성 동동 338번지. 주거 : 경상남도 부산 시온 천동 189번지.


김동혁 - 31세. 국방부 서기관. 본적 :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명 증악리 24번지. 주거 : 서울 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134번지의 2호.


김동훈 - 28세. 육군 본부 소령. 본적 :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증악리 24번지. 주거 : 서울 특별시 중구 을지로 4가 187번지


병역 : 이범륜(1949년 6월 6일 입대), 유성연(1950년 9월 9일 임관), 김동훈 1950년 10월 5일 임관)


구속 자료.


<나재하>,김병호,민영수,김재호,김익중,이범륜은 10월 4일 구속. 유성연은 10월 11일 구속. 김동혁 10월 8일 구속. 김동훈은 10월 6일 구속. 구속장소는 서울 형무소.


죄과 및 범죄사실.


<나재하> -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어렸을적에 한문을 습득하고, 그 이후 사립학교 선생(교원), 농립기수, 군 서기(군대가 아닌 지역 단위 군),철도 기수등을 역임. 해방 이후 서울 철도고등학교 교장, 교통부 행정실장을 역임. 기독교신자로 장로 직에 있었는데, 4279년(1946년) 6월 한독당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남북협상을 하는 당략(한독당의 지략)에 추종하여 장차 국제연합 감시하 총선거에 의해 수립될 합법적 국가 및 정부를 부인할것을 회책.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당의 중앙상무위원의 요직에 승진된다.  북한과 협상하여 연립정부 수립을 계략한다. 그리고 정부전복을 꾀하는 구체적 실행방법을 듣고 여기 승낙했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하기위해 김재호로부터 군수뇌부 전화번호부 1통(명단)을 받았다.

암살 예정일자인 10월 3일 8시경 자택에서 9시경 서울 시내 종로1가 소재 "세르판"다방에서 17시경 같은 다방에서 3차에 걸쳐 민영수를 만나 암살실행분담자들의 결행을 대기. 그리고 암살과 그후에 할일을 회의했다.


김병호 - 죄과 :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일제시대 본적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29세때 중국 상해에 갔다. 그리고 4275년(1942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영사관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6년을 받아 일본 장기(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8.15 해방으로 출감뒤 귀국. 그 직후 한국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직으로 있으면서 남북협상을 하며 건국을 방해하려 했다.


정부 수립후 당 최고 간부로써 평소 모시던 조소앙이 위의 노선을 계승,사회당을 창건할때 김병호는 4281년(1948년) 12월 한독당 창당주비위원(창당 준비위원?)으로 창당과 동시에 동당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이 되었다.

당략 정책 및 실천에 노력하였는데. 6.25가 발발하자 4283년(1950년) 7월 7일, 당간부인 민영수와 동반하여 서울시 돈암동(이하 미상)의 당수 조소앙의 주거로 찾아가 그를 방문했다. 그리고 당의 당면 문제를 협의중 그로부터 남북협상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에 힘쓴다. 그러나 그걸 위해서는 이승만을 없애야한다는걸 알고, 그걸 하려했다. 그러면서 정부를 비판하던중 4285년(1952년) 말 부산에서 김재호를 알게되어 그와 알고 지내면서 갑오구락부 회원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정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4288년(1955년) 9월 15일 14시 서 경울(아마도 서울) 태평로 소재 은마차 다방에서 김재호,민영수와 회합하여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이승만을 살해하고 쿠데타를 하여 정권을 잡아야한다고 한다. 김재호가 구상하는 암살계획 및 사후수습계획 군대 동원 쿠데타,반동분자 숙청, 정부 각료 인선문제에 대해 협의. 김재호는 수류탄을 구하고, 암살계획실행을 전적으로 책임지려했다.


피고인(김병호)은 자김조달 외 김재호,민영수는 공동수행하고 <나재하>를 공범자로 포섭. 같은 달 17일 14시 경 서울시 명동 소재 향초다방에서 민영수와 만나 재숙의(재확인인듯)하여 동시에 공작김 이만환을 받는다. 김병호가 거출(돈을 많이 인출)한 만환과 함께 김재호에게 제공. 같은 달 26일에는 민영수,김재호와 동반하여 <나재하> 집을 방문. <나재하>와 같은 경위로 그의 협력을 얻기로 하고, 같은해 10월 1일 15시경 서울시 태평로 소재 덕수궁 조전부근에서 김재호,민영수와 만나 10월 3일 개천식장에 상피고인(김병호? <나재하>?),김익중의 책임하에 수류탄을 던져 이승만을 죽이려 하고 발각시 전원 음독자살을 계획, 3인이 청산가리를 하나씩 김재호로 부터 받았다. 같은 달 3일 10시 이후 은마차 다방에서 김재호,민영수와 만나 암살실행 분담자들의 실행을 대기.


민영수 - 죄과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일제시대 경성법학전문학교, 동북제국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사를 거쳐 변호사업을 했다. 8.15 해방 이후 변호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무역상원 성실주식회사 감사역으로 취임.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최고간부로 남북협상과 연방정부수립을 주장하며 한독당 노선을 계승하여 사회당을 창당할때 그는 4281년(1948년) 2월에 창당준비위원으로써 창당과 동시와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 및 법제정책위원장에 피선되어 당략책정 및 실천에 노력을 했다.

6.25 발발 직후 4283년(1950년) 7월 7일 당조직 부장인 상 피고인 김병호와 함께 그와 같은 경위로 정부 전복과 북한과 뜻을 같이함.그러면서 정부 시책을 비난하던 중 부산시에 피난 남하(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튐)하고 있던 4284년(1953년) 2월 소위 원내 자유당(원문이 이럼)에 가입하여 중앙상무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있으면서 정부제안개헌안반대를 위시로 반정부 운동에 선봉장 역할을 했다.


4286(1954년) 9월경 김재호와 알게되자 김병호와 어울려 3인 종종 만나 정국을 논하면서 뜻이 맞았다. 앞서말한 김병호와 같이,김재호 김병호등과 4288년(1955년) 9월 15일 14시 경 은마차 다방에서 만나 이승만을 암살, 사후수습책을 의논해서 결정.


같은 달 17일 14시 경향 초 다방에서 다시 의논하여 공작김 이만환을 김병호에게 제공.


같은 달 26일 <나재하>를 방문하여 그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 같은 달 10월 11일 15시경 덕수궁 석조전 부근에서 다시 의논하고 자살용 청산가리를 한개씩 나눠받았다.


같은 달 3일 8시경 <나재하> 집에서 같은 날 10시경 ~17시경에 세르판 다방에서 모두 만나, 10시 이후 은마차 다방에서 김병호, 김재호와 만나 암살실행 분담자들의 결행을

대기함과 더불어 공작김 만환을 각출(나눠냄)하고, 전후책(암살 이후 무얼 할것인가)를 의논하여 북한을 위한 행위를 했음.(원문은 전시한 적괴뢰 집단의 욕구를 구원할것을 기도)


김재호 - 죄과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평양 광성 중학교 3년 수료후 4256년(1923년)도에 만주로 갔다. 만주 봉천성 조양진에서 의생(의사?)를 개업과 동시에 중국 국민당 산하 남의사 후신인 군사통계국 지하공작책 및 항일반만 구국군 군의소령으로 복무. (그러니까 임시정부 관련인물) 해방후 한교 지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역임후, 4281년(1948년) 7월 귀국 4282년(1949년) 9월 이화고등학교 강사로 취임하여 6.25까지 생리학을 담당했다.


4285년(1953년) 민영수,김병호와 알고 지냈으며 민영수와 김병호등 공범과 관한 범죄사실에 기재된 것처럼 조소앙의 정부 전복(너무 길어서 대충 이렇게 줄임)을 위해 이승만을 죽이면 자기 꿈을 이룰것 같아서 4287년(1954년) 9월부터 이승만과 그 의 부하들을 암살하기로 결심.

그래서 장남인 김동혁(얘도 공범)과 차남 김동훈에게 그 취지를 역설하여 뜻을 같이했다. 김동훈에게 암살용 수류탄 4개를 구해오라하였는데, 4288년(1955년) 2월 김동훈이 구해온 미국산 수류탄 4개를 받아서 자기집에 감춰두고 기회를 노리던중 4288년(1955년) 9월 초순경 서울시 을지로 2가에 있던 갑오구락부에서 전부터 같은 구락부 회원으로 알고지내던 김익중과 회합하여 이승만을 암살하기로 한후, 그는 암살용 수류탄과 돈을 조달하고 김익중은 하수인을 구하기로 했다.(그걸 분담)


같은해 9월 15일 경 4시 은마차 다방에서 민영수, 김병호와 회합하여 전시 김익중과 합의한 '이승만 암살계획'을 제안하자, 다른 사람들은 이에 응해 '그후 할일들'을 의논하여 수차에 걸쳐 김병호등으로부터 받은 자김(총 5만환)을 김익중에게 주었다.


같은 해 9월 23일 하수인을 데려오기 위해 부산으로 가는 여비로써 피고인 자신(김재호)이 김익중에게 15,000원을 주었다.


같은 해 9월 입일(?日) 및 26일 경 두 차례에 걸쳐 단독 또는 김병호, 민영수와 같이 <나재하>집을 방문하여 암살후 대책을 의논했다. 암살 후 군부와의 연락하기 위해


차남 김동훈에게 지시해서 얻은 '군 수뇌부 전화번호'등을 <나재하>에게 주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민영수, 김병호와 덕수궁에서 회합하여 10월 3일 개천절 기념식장에서 김익중 책임하 이범륜,이모등이 수류탄을 던져 이승만을 죽인다, 실패시에는 모두 음독자살하자고 의논한 끝에 피고인이 김익중에게 지시하여 미리 준비한 청산가리를 하나씩 나눠가졌다.


같은해 10월 3일 그의 집 천정에 숨겨둔 미국산 수류탄 4개를 레이션 공상자(C-레이션 박스인듯)에 넣어 하수 책임자 김익중에게 줘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울시 을지로 4가에 거주하는 차남 김동훈에게 맡겨두었다가 그를 통하여 김익중엑 줬다.


같은해 10월 3일 7시 그의 집에서 하수인 이범륜과 몰래 이야기하여, 김익중을 통해 이범륜에게 나눠줄 청산가리와 현김의 용도를 설명해줬다. 같은 날 10시 경 중앙청 앞 광장 부근에서 하수인을 현장에 투입한것을 확인하고 거사(이승만 암살)를 대기하던중 이승만이 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즉시 은마차 다방에서 민영수,김병호와 의논하여 10월 4일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암살하기로 회의했다.


김익중 - 죄과 :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일제시대 연희대 전문학교 상과를 졸업, 중국 상하이로 가서 3년간 김구,여운형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 평양에서 포목상을 하던중 8.15 해방 때 평양 도인민위원회 상업관리국 분배과장으로 있었다.
1.4 후퇴 당시 월남하여 부산 서울 등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 정치에 관심을 가져 4285년(1952년) 정치 파동 이후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4287년(1954년) 6월 갑오구락부에 가입하여 김병호,김재호등과 알게되었다. 그래서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정부 전복을 꿈꾸는던중 4288년(1955년) 9월 초순 김재호집에서 그와 김재호와 같은 경로로 이승만 암살을 계획.


그로부터 공작김 65,000원 중에서 50,000을 이범윤에게 나눠줬다.


같은 해 10월 1일 서울시 을지로 2가 삼성 화학약품상회에서 자살용 청산가리를 구하여,다음날 2일 포장한(청산가리 3포 = 6개)걸 김재호에게 줬다. 물론 자기것은 자기가 소지.


김동훈 집에서 미국산 수류탄 4개를 받아 이중 2개는 같은 달 3일 9시 시내 사직공원에서 이범윤에게 줬다. 하수인 이청년과 함께 즉시 암살을 위해 중앙청 광장으로 향하여 암살 기도.


이범윤 - 평양 제1중학교 → 일본 송산 고등학교 입학, 4278년 제2학년을 중퇴하여 귀국. 4279년(1946년)에 월남하여 평소 범아세아주의를 주장하던 자.


죄과 제1국방경비법 제9조 위반.


4282년(1949년) 6월 6일 강원도 원주에서 이등병으로 현지 입대하여 1등 중사로 누진 제6사단 사령부에서 인사처 고문관 통역으로 근무중. 국무에 염증을 일으키고 탈영하기위해

통역장교 임관 수속을 한다는 구실로 4284년(1951년) 8월 3일 소속대(주둔지 강원도 화천)을 이탈하여 4288년(1955년) 10월 4일 체포될때까지 전쟁중에 탈영상태(4년 1개월간)


죄과 제2국방경비법 제47조 형법 제9조 제88조 위반 내란목적 살인예비죄.


피고인은 탈영다니면서 이영도라는 가명(덤으로 1955년 기준으로 17세)라 하면서 부산, 마산의 미군병 참부대 통역 또는 육군 첩보대 문관으로 있다가 4286년(1953년) 9월 이래 무직으로 있었다.


4285년(1952년) 정치파동 이후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러던중 4287년(1954년) 7월경 화천 제6사단 포병대로 피고인이 탈영전부터 알고지내던 유성연을 방문, 1개 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부요인을 습격,체포,사살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자금 100만환을 내라고 주장. 그런데 유성연의 승낙을 얻고  같은해 12월 15일 동소(같은 바)에서 4288년(1955년) 1월 9일경 시내 산호 다방에서 같은 해 3월경 및 5월 17일경 제6사단 의무대장 숙소에서, 같은해 6우러 23일경, 서울 명동 미약주점에서, 같은해 7월 17일경 부산, 동래 모 중국 요리점에서, 같은 해 8월 20일경 부산 국제시장 내 모주점에서 각동인(공범들)과 회의하여 이승만을 암살하고 쿠데타 자금의 조달방법,선후책(그전과 그후 할일)을 회의하여 전후 5차례에 걸쳐 공작여비 도합 10,000만환을 수령하는등 내란을 음모.


한편 김익중, 김재호와 알게되어 4287년(1954년) 10월부터 갑오구락부에 출인하고 같은곳에서 알게된 김병호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와 뜻이 맞게되었다. (정부전복)

 

4288년(1955년) 9월 초순경 김재호 집에서 그와 같이 이승만을 암살하기위한 하수인으로, 부산에 있는 이청년(한자도 성씨 이자,그냥 청년)을 적임자로 추천. 김익중으로부터 같은해 10월 2일,3일 두 차례에 걸쳐 갑오구락부 부근 중국 요리점 외 일개 장소에서  공작비 도합 50,000환 및 자살용 청산가리 2포를 받은후 하나는 하수인 이청년에게 나눠주고 그 사용법을 김재호와 결정했다.

모든 준비를 한뒤 중앙청 광장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중앙청 식장내에 침입대기하여 내란을 목적으로 한 살인을 예비.


죄과 제3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피고인은 김재호,김병호, 김익중등과 같이 이승만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그걸 하려던중 4288(1955년) 10월 3일 9시경 하수인 이청년에게 수류탄을 주어 거사(암살)때 중앙청 식장에 던지려했다.

 

유성연 -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졸업, 교통병원 의사로 근무중 6.25때 부산에 피난소집되어 4283년(1950년) 9월 19일 군의관 중위로 임관하고 임시중령으로 누진. 현재까지 살아왔다.


그는 제6사단 전방 CP 의무대장으로 있던 4284년(1951년) 1월 같은 사단 인사처 고문관 통역으로 있던 상피고인 이범윤을 알게되어, 그가 주장하는 범 아세아주의에 속아서 무조건 그 사람 주장에는 찬성했었다.(세뇌되었네)


죄과 국방경비법 제47조 형법 제90조 제87조 위반.


범죄사실 1. 내란 음모죄.

피고인은 4287년(1954년) 제6사단 포병대로 찾아온 이범윤이 쿠데타 실행과 그 자금을 달라고 하자, 찬성하여 부산에 있던 버스가 팔리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암살계획과 전후 7차례에 걸쳐 그와 회의하여 이승만 암살, 쿠데타 계획등을 의논하여 전후 5차례에 걸쳐 공작여비로 도합 10,000원을 그에게 줬다.

범죄사실 2. 무허가 무기 휴대죄.


4283년(1950년) 12월 이래 미국산 45식 권총 한자루, 실탄 7발, 4288년(1955년) 10월 초 미국산 쌍발엽총 한자로 실탄 4발을 가지고 다녔다.

 

김동혁 - 죄과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


4287년(1954년)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 평양 저금 관리소 서기로 근무, 4280년(1947년) 월남하여, 같은해 6월 20일 초순 육사 5기생으로 입교. 4281년(1949년) 4월 6일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 이후 통위부의무국을 위시하여 복무중 4286년(1953년) 대령으로 진급. 제5사단 36연대장을 경유하여, 4287년(1954년) 3월 20일 국방부 총무국 인사과장에 취임.


4288년 (1955년) 7월 8일 예비역 편입과 동시 서기관 임명. 계속 인사관으로 근무하던중 김재호가 조소앙과 친면이 있음으로, 그가 정부전복을 기획하고 있는걸 방조하여 4288년(1955년) 8월 중순경 모 토요일 7시경 정릉에 거주하는 김재호가 방문했을때,그가 이승만을 암살해야한다고 하자 설득되었다. 그리고 실현을 위해서는 군대로 장악하는게 좋다고 하면서, 포섭대상자로 군 고급장성들의 성격을 설명해줬다.


4288년(1955년) 9월 초순경 교육 총본부 창립 기념식의 일자와 대통령 참석여부를 묻자 이를 알려주었다.

같은 달 14일 11시경, 같은 달 17일 19시 3분경, 같은 달 19일 19시 3분경의 3차례에 걸쳐 같은 기념식 일자 변경사실을 문의받자 이를 확인해주었다. 그렇게 김재호의 범행에 협조.


김동훈 - 죄과 제1국방경비법 제47조 형법 제90조 제88조 위반 1 내란목적의 살인예비죄.

4278년(1945년) 일본 도쿄에서 중야(나카노) 중학교를 졸업,귀국하여 중국 북경 등지를 전전하다가 4280년(1947년) 1월 5일 통위부에 신병으로 입대 복무중 4283년(1950년) 10월 5일 소위로 현지임관. 병기감실,제1사단 등을 거쳐서 4288년(1955년) 3월 1일 소령으로 진급. 현재 육군본부 관리국관리과에 근무중인자.


4287년(1954년) 9월 하순경 자기집에서 상피고인인 아버지 김재호로부터 이승만과 그 부하들을 살해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김재호로부터 암살용 수류탄 3~4개를 구해오라고 지시를 받자, 그걸 구해주겠다고 약속. 나라를 위협할 목적으로 살인을 음모.

같은해 12월 하순경 전시언약대로 소속부대인 보병 1사단 15연대 3대대 탄약고에서 미국산 수류탄을 훔쳐,자기집에 숨겨두었다.


4288년(1955년) 2월 하순경 김재호에게 수류탄을 줬고, 같은 해 9월 중순경 김재호로부터 이승만 암살후 군대를 동원해야하기 위해 필요하니, 군 수뇌부의 전화번호를 기록해오라고 지시받아서 이걸 기록해 김재호에게 줬다.


같은해 10월 2일 14시 자기집에서 김재호로부터 전시 수류탄 4개를 받아, 김익중에게 주는등 살인을 예비했다.


범죄사실 2. 무허가 무기 휴대죄.


김동훈은 4288년 1월 초순부터 45구경 미국산 권총 1자루와 실탄 7발과 4288년(1955년) 9월 초순경부터 전기 뇌관 6개를 각각 허가없이 소지하여,무기 불법휴대를 했음.


죄과 제2국방경비벙 제40조 위반. 군용물 절도범죄자실.

김동훈은 전시죄과 제1 범죄사실의 수류탄을 구하기 위해 4287년(1954년) 2월 하순경 당시 소속대인 보병 제1사단 15연대 3대대 탄약고에서 미국산 수류탄 4개를 훔쳤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31600329203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3-16&officeId=00032&pageNo=3&printNo=3186&publishType=00020


공판에서 본 대통령 저격 음모사건 전모.


각 피고들은 범행 순순 시인. 문제의 인물 이종태는 행방불명.


이대통령 음모사건의


민간인 피고 : 김재호(54),민영수(56),김병호(48),김익중(58),<나재하>(71)에 대한 제1심 공판은 서울지방법원 임한경 원장을 주심으로
이미 5회나 공판이 계속되었으며, 16일에는 제6회 공판이 속개될 예정인데 이때까지 공판에서 어떠한 것이 밝혀졌는가?


(1) 피고들은 검사가 공소한 저격음모 사실이나 음모의 동기들은 자백하고 있으나
(2) 증거품으로 제출된 수류탄이 음모시 사용하려던 것과 다르다는 증언을 했다.
(3) 피고들의 변호를 담당한 변호인들은 이 사건이 이종태의 선동에 의해 이러우지지않았는가 의문을 제기했다.(음모론)
(4) 저격 계획날인 개천절 식장에 이종태 혼자만이 수류탄 2개를 가지고 들어갔다는 사실.
(5) 그가 범행 직전 특무대에 내통한 사실등으로
(6) 불능미수로 몰아보려 애쓴다. 이제까지 행한 공판을 간명히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물론 기자가 쓴거임)


군관계자 이범륜과 김동훈은 이미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바 있다...


제1회 공판 2월 9일
임한경 재판장 주심 강서용 감사관, 여정 정구영, 엄상섭 양씨외 3명의 변호사 입회로 개정된 공판에서는 인정심문에 이어 검사는 "피고인들이 망명가들의 친목단체인 갑오구락부를 연락처로 한 4282년(1952년)의 개헌파동 이후 이승만을 독재적이라 해서 공범 이범륜(군사재판서 사형언도),이종태(과거 특무대 문관,현재 행방불명) 두 사람을 하수인으로 하여 작년 10월 3일 개천절 식장 중앙청에서 이승만을 암살하려 음모했으나,사전 특무대에 검거되어 미수에 그쳤다."는 기소문 낭독과 피고들에 대한 환경 심문으로 시종하였다.


제2회 공판 2월 28일

이날 오전 공판에서는 준비수속시 행한 심문을 재확인하기 시작하였는데, 피고인들은 이승만 암살기도를 시인하였다. 피고 김익중인 작년 9월 28일 공범 이범륜의 소개로 적성강위 첵코 숙소(부산에 특무대 문관으로 파견근무중이었던 소외 이종태)를 만나 하수인이 되어줄것을 모의했다는 것과 10월 1일 갑오구락부에서 피고 5명과 소외 이종태,공범 이범륜이 회의하여 음모사실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사실 또한 10월 3일 오전9시.


피고 김재호가 사직공원에서 하수자 이범륜과 이종태에게 이미 을지로 김동훈(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이 가져온 2개의 수류탄을 받아 하수자2명이 식장으로 향하였으나, 소외 이종태가 내자 파출소앞에 주차중이던 1928부대 운전수에게 범행사실을 알리고 그로하여금 특무대에 밀고하게 함으로써, 중앙청식장에서 특무대원에게 잡힌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피고들은 이승만 암살동기를 질문받자,

"과거 이승만을 존경했으나 1,2차 개헌, 관허요금인상, 인하조치에 따른 경제 혼란등으로 독재적이라 인정 분개하여서 한것이다." 또는 "선거가 공평하였다면 우리가 그 길을 택하였을것이나, 그렇지 못했기때문에 이런 수단을 택한것이다."등의 답변을 하였다.


또한 이날 오후 5시 20분부터 약 1시간에 걸쳐 비공개 공판으로 들어갔는데, 이날 비공개 공판에서는 피고 <나재하>가 9월 28일 피고 김재호와 김병호를 데리고 함-부통령을 방문하였다는 점과 10월 3일 <나재하> 혼자 부통령을 방문했다는 점에 대하여 심문했다고 하는데, 심문에서 <나재하>는 애당초 김재호등이 이승만 암살음모를 말했을때는 자기는 교회 장로로써 정치나 살인에 개입할수는 없다고 말했으나 결국 신분에 위협을 느껴 9월 28일 김재호,김병호를 데리고 부통령을 방문하고 인사소개만 시켰다는 것과 10월 3일에는 <나재하> 혼자 부통령을 방문하고 "정변이니 뭐니하고 어수선하니 사람많은데 가는 것을 삼가했으면..."하는 말을 했다는것을 진술했다고 한다.


제3회 공판 2월 29일.


오전 공판은 전날의 비밀공판의 연장으로 피고들이 부통령을 방문했다는 점에 대하여 심문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오후 공판에서는 사실 심리를 종료하고 증거 신청으로 들어갔는데 정구영 변호사는 "소외 이종태가 수류탄 2개를 가지고 식장에 들어간것으로 보아 불능미수로 해석될수있으니 이종태를 호출해달라"고 했으며, 엄상섭 변호사는 "하수인 이종태를 왜 입건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강검사는 "공소권자인 검사재량으로 기소편의주의에 입각한것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재판장이 이종태와 사건수사에 관계한 특무대 직원 3명,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이범륜, 음모시 수류탄을 감정한 과학연구소 직원을 증인으로 출두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제4회 공판 3월 8일.

범행시 사용코자 소지하였다가 압수된 수류탄을 감정한 국방과학연구소 제1과장 조규한 중령은 증인 신문에서 "자기가 감정했던것은 1945년 미국산 수류탄이었는데, 그 증거물은 1952년제 MK2 세류탄이다."고 증언하였고, 피고 김재호도 "그 당시 수류탄과 증거물과 다르다."고 증언하였다.


제5회 공판 3월 13일

변호인측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지목되는 소외 이종태는 출두하지 않았으며, 직접 하수인이던 이종태와 이범륜을 체포시 부대장을 한 특무대 행정처장 백린선 중령은 그들의 체포경위를 설명하고 증거로 제시된 수류탄이 그 당시 범인들로부터 압수한 수류탄이 틀림없다고 증언하였으며, 10월 3일 중앙청 식장으로 하수인들을 잡으러 갈때 이미 대장은 이종태의 인상착의를 자기에게 일러주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이날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이범륜에 대하여도 증인으로 심문하엿는데 이범륜은 "증거품으로 제시된 수류탄은 범행음모시 소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내가 이종태 앞에서 정부 비난을 했더니 이종태는 먼저 이승만을 죽이고자고 말하였으며 하수는 모두 자기가 하겠다고 말했었다."고 증언하였다. 증인심문후 또 다시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김동훈과 동 사건을 조사한 특무대 조사관 유현수,김춘근 두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고 폐정하였다.

 

 

이 4명은 재판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범륜,김동훈 두 군인들은 1959년에 총살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901160020910302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1-16&officeId=00020&pageNo=3&printNo=11242&publishType=00010


4.19 이후


1960년 6월 16일 경향신문

특사를 신청 김,민,나씨.


이승만 암살기도 사건의 피고로 감옥에 있던중 형 4.19 혁명으로 석방된 김재호,민영수,<나재하> 등 3명은 14일 법무부 장관에게 특사를 신청했다.

신청서에 의하면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악정을 제거하여 이 나라의 정치를 개선해보려는 결심으로 김병호등과 함께 4288년(1955년) 10월 3일 부산에서 열린 개천절 식장에서 이박사를 살해하려고 하수인을 물색하던중 공교롭게도 당시 특무부 대장 김창룡의 밀정, 이종태와 이범륜을 하수인으로 골랐다가 사전에 발각된후 구속되었다.


그후 4288년(1955년) 11월 9일 대법원에서 각각 징역 15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전주형무소(민영수),대전형무소(김재호),마포 형무소(<나재하>)에서 형집행 정지결정으로 지난 5월 1일 각각 석방된 이들은 "사리사욕으로 이박사(이승만)을 살해하는게 아니라, 정치의 개선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특사를 허락하여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게해달라고."주장했다.

 

 


요약 : 암살범들은 조소앙이 6.25때 월북하기전에 '이승만이 죽여야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여 남북연립 정부를 구성하자.'는 말을 듣고 그 계획을 준비했다. 개천절에 수류탄던져서 이승만 죽이고, 그 와중에 군장성들의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연락하여 서로 음모를 꾸며서 쿠데타한다.

그래서 다방과 중국요리집, 자택을 전전하며 회의하고 공작금이나 청산가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군인인 아들에게 시켜서 수류탄 4개를 준비.

그런데 이범륜과 이종태가 특무대의 하수인(?)이어서 다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몇명은 감옥에 가고, 군인인 아들은 총살. 나중에 4.19가 일어나니 풀려난다. 사리사욕을 위한게 아니니 정치활동을 해달라고 부탁.

 

 


조소앙 무서운 사람이었네.


이승만이 사망시 공범이었던 <나재하>는 옛날의 내죄가 부끄럽다고 했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07220032920301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7-22&officeId=00032&pageNo=3&printNo=6080&publishType=00020


<나재하>(羅在夏. 한글 2007로 한자를 한글 변화하면 <나재하>가 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http://db.history.go.kr/search.jsp?w=">나재하">http://db.history.go.kr/search.jsp?w=<나재하>

번호 조사시기 이름 소속 관직 관등 공훈 참고사항
1 1912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과  서기  (월11)     
2 1913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서기  (월12)     
3 1914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  (월13)     
4 1915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  (월14)     
5 1916  <나재하>  지방관서 >경상북도 >부군도(부군도) >울릉도  군서기  8     
6 1918  <나재하>  지방관서 >강원도 >부군도(부군도) >삼척군  군서기  8     
7 1919  <나재하>  지방관서 >강원도 >부군도(부군도) >삼척군  군서기  10     
8 1920  <나재하>  지방관서 >강원도 >부군도(부군도) >삼척군  군서기  10     
9 1929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평양공무사무소 >[직속]  기수  7     
10 1930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공무과  서기  (월70)     
11 1931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경성공무사무소 >[직속]  기수  (월70)     
12 1932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경성공무사무소(경성공무사무소) >[직속]  기수  (월70)     
13 1933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경성공무사무소(경성공무사무소) >[직속]  기수  6     
14 1934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건설과 >[직속]  기수  6     
15 1935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건설과 >[직속]  기수  6     
16 1936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원산철도사무소 >[직속]  기수  6     
17 1937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안동건설사무소 >[직속]  기수  5     
18 1938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보선과  기수  5     
19 1939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보선과  기수  5     
20 1940  <나재하>  조선총독부직속기관 >철도국 >보선과  기수  4  훈8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im_102_00272

 

이름 <나재하> ( <나재하> ) 

민족구분 한국인
본관지 1) 금성 라씨
 
출전 1) 민국인사, 50
 
 
나이 1) 61세(1949년 현재)
 
출전 1) 민국인사, 50
 
 
출신지 1) 서울시 출신
 
출전 1) 민국인사, 50
 
 
현주소 1) 서울시 룡산구 한강로
 
출전 1) 민국인사, 50
 
 
현직업 1) 교육자
 
출전 1) 민국인사, 50
 
 
학력 1) 명동학교 졸업
 
출전 1) 민국인사, 50
 
 
경력및활동 1) 명동학교 교원, 경기도 군속, 신문기자, 철도국원 등 력임
1950년 현재 운수학교장
 
출전 1) 민국인사, 50
 
 
참고문헌 대한민국인사록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2_1946_04_18_0020

 

제목 3당합동(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위원 명단)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4월 20일
날짜 1946년 04월 18일

신당:진영
고문:이시영 조성환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감찰위원:황학수 이상만 최태섭 민필호 이부원 류동붕 함태영 최성원 홍승로 림성수 곽영구 계병호 김문빈 서창휘 백기호 최명수 경혜춘 이붕해
집행위원 김구 조소앙 이승만 조완구 조경한 신익희 이청천 엄항섭 최용덕 김학규 이범석 조병요 김의한 조시원 김재한 양우조 림의택 박찬익 안재홍 박용희 명제세 이승복 이의식 백홍균 엄우룡 류기태 호정환 김횡진 이중화 김인현 류해진 최석주 권녕우 강준표 조헌식 민용호 이두렬 채규연 김종량 민대호 공석빈 김수철 엄기영 신창균 김웅권 이태영 이문원 최학래 이댁규 <나재하> 이긍종 고신원 민걸 김창화 최흥국 이선희 민영선 이선근 이병수 이형호 이창준 이중환 서상덕 오광선 류병민 조각산 연병호 유기준 남상철 이일 이준희 방준옥 권태석 김려식 최익환 백남신 이학송 김경태 정학룡 림헌식 한홍남 박수동 강인봉 정종식 류기렬 박로수 구철회 김현구 신영달 문범주 김일청 이창섭 신용우 현경 강원방 김기환 윤병구 이용묵 이상순 김원선 장지필 성악훈 구연창 민충식 김장성 이규갑 한훈 김석황 정인환 김묘묵 허연 류기준 김선량 박현환 최희송 연북성 고병간
동아일보 1946년 04월 20일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19_0080


제목 운수부장 대변인 <나재하>, 운수관계에 대해 기자회견
게재지명 경향신문,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03월 20일
날짜 1948년 03월 19일

19일 운수부장 대변인 <나재하>는 기자단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열차증발문제=석탄을 많이 소비치 않는 시기가 오면 다소 완화되리라고 하였는데 그동안 석탄도 조김 저장되었으므로 통학생을 위하여 각지에 있어 통학차를 약 30량 증발하였다.
작년도 철도운수=승객은 약 6천2백61만3천여 명을 수송하였다. 화물 수송량과 철도운임의 수입액은 사정에 의하여 발표할 수 없다.
LST선박운영=해사국에서 운영하는 LST 선박은 그 수지가 다소 상실되지 못하는 느낌이 있으나 다액이 아니므로 장래성을 위하여 운영하고 있다.
직원공상문제=공상한 직원들의 치료기한 중에는 급료도 전액을 지불하며 급료비도 부담하고 있다. 순직자에 대하여서는 유가족에 대하여 규정한다고 적당한 봉급을 지불하고 있다.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8년 03월 20일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8_1948_08_18_0180

제목 한국독립당, 중앙부서 개편
게재지명 국제신문
게재일자 1948년 08월 21일
날짜 1948년 08월 18일

한국독립당에서는 18일 오후 2시부터 경교장에서 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중앙부서의 개편을 하였다 한다.
△조직부장 : 김학규 △재무부장 : 신창균 △선전부장 : 엄도해 △훈련부장 : <나재하> △비서처장 : 조경한
국제신문 1948년 08월 21일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2_1949_06_16_0110

제목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감찰위원회, 부서 개편 단행

게재지명 조선일보,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9년 06월 18일, 1949년 06월 17일
날짜 1949년 06월 16일

한독당에서는 16일 개최한 제1차 중앙집·감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부서를 개편하였다.
?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완구 △비서부장 조경한 △조직부장 김학규 △선전부장 엄도해 △재무부장 김종량 △훈련부장 <나재하> △로농부장 문석부 △청년부장 문현승 △대동단결추진위원장 류동붕 △독립운동사료 조사위원장 김의한 △재정대책위원장 신창균 △경제정책위원장 김규복 △보건후생위원장 김영석 △법제위원장 조두석·남상철
? 중앙감찰위원회:△위원장 김승학 △부위원장 이상만
(조선일보 1949. 6. 18)
그리고 동당에서는 금반 대회의 명의로 트루만 미대통령 및 스탈린 소수상에게 메시지를 발송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조속히 실시할 수 있도록 미·소 양국의 협조가 있기를 희망한 것이며 또 한편 맥원수에게는 맥라인확대와 일본재무장을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송하였다.
(동아일보 1949. 6. 17)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9년 06월 18일, 1949년 06월 17일 

 

뒷이야기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np_da_1960_12_01_0880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4·19의 양지  민영수씨(암살공범. 김구의 부하였던 조소앙의 부하였다) ; 이승만암살계획 15년형받고 4년 6월만에 출옥 하수자 배신으로 탄로  
발행년월일 1960-12-01  
발행구분 석간(옮긴이 주 : 특이하게도 이 시대에는 조간과 석간 신문이 따로 있었다)  
면수 03  
단수 04  
표제어 한국-정치·정부-4·19의거(4·19의거)

 

1인 독재에 분격하여 이승만을 저격살해하려다, 실패 옥중의 몸이 되었던 사략(판독 불가)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거사도 못해본채 15년이란 형을 받고 그리 세상에 알려짐도 없이 투옥되었다가 4.19 이후 4년 6개월만에 옥문을 나서게 된 사람도 있다. 바로 당년 60세인 민영수씨, xx동(한자를 몰라서...) 38의 18,조그만 영단 주택을 간신히 얻어 살고있는 민씨의 방에는 옷걸이 못이 몇개 벽에 받혀있을뿐 가구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쓸쓸하기 짝이 없다.

부산 정치 파동시에도 애무하게 김일성한테서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모진 악형을 받은 끝에 3년채형 언도,그러나 국회기립투표로 이(이승만)의 야욕이 이루어지자, 3개월만에 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민씨의 마음속 깊이 싹트기 시작한것이 바로 이승만 암살계획이었다. 그러한 계획을 품게된 동기는 도저히 민주주의 방법을 가지고는 이승만의 불법적인(?)즉력때문에 이승만을 몰락시킬수 없다는것을 통감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맨처음에는 본격적으로 군을 동원하여 혁명을 기도할 생각으로 상당한 시일을 두고 고급장성들과 접촉하였다.(전화번호부는 김동훈이 가져다줬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거절(옮긴이 주 : 어떤 사람이 같이 쿠데타하자고 하면 할까?) "지금 생각하면, 응해주지않은것이 섭섭도 하였지만 그 당시 그러한 사실을 일체 입밖에 내지않고 그분들이 비밀에 붙여준데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씨는 두줌하니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가득실어가며 감개무량한듯이 말했다. 이처럼 군대의 동원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시는 규모를 적게 돌려 이승만이 가는곳마다 선을 대었다. 그 첫번째가 광주 군부대 사격대회, 그러나 뜻하지 않은 폭우로 실패로 돌아갔고, 두번째 이승만의 광주 행차에는 사전에 TNT를 묻어놓았으나 또한 이틀전에 내린 폭우로 불발하고 말았다. 다시 계획은 치밀하게 반복되고 88년(1955년) 현역하사관으로 있던 이범륜이란 청년을 만나 아주 성능이 강한 최신식 수류탄으로 폭사시킬 계획이 이루어졌다. 우선 전방에 있는 김모 소령(공범 김재호의 아들 김동훈)으로부터 수류탄 3개를 입수하고 10월 3일 개천절날로 결정, 그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거사일이 다가오자 혼자서는 마음이 좀 켕긴다는 이범륜의 말에 의하여, 이범륜이 추천하는 현역 군인인 이종태란 동지를 가담시키었다. 이처럼 진용(진영인듯)을 강화한 그들은 그해 10월 3일을 기하여 면밀한 계획 아래 움직였으나 이승만이 때마침 김해 별장에 휴양차 내려갔기 때문에 개천절날 동 식전에 참석치 않는다는 정보를 듣고 모두 실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10월 5일 X사(한자를 잘몰라서 X처리) 졸업식에는 틀림없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긴장, 그날을 거사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실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3일 일단 사전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빈 축하화분(거사일은 그속에 수류탄을 넣고 들어가기로 하였다)을 갖고 들아간다고 해놓고는 이범륜이란 자가 은닉해둔 수류탄을 갖고 당시 특무대장인 김창룡한테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모든 계획이 폭로되고 군재(군사재판)결과 하수인 이범륜은 사형, 민씨는 민사재판에서 15년형을 언도받고 말았다.

 

"유능한 청년이었는데 나때문에 사형을 당하였으니 지금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돈이 생기면 절간에 아직까지 그냥 맡겨둔 유골을 찾아다 장사라도 지내줘야겠다고 민씨는 가슴이 아픈듯 말한다. 이처럼 민씨는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싸웠을뿐아니라, 일찌기 일본 동북 제대(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다년간 변호사업을 통해 민주투쟁을 뒷받침한바 있는 유능한 법률가(옮긴이 주 : 일제시대때 판사일을 했다)며 인자스러운 1남 1녀의 어버지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이 쫓겨난 지금 단촐한 살림이나마 민씨 집안에는 따스한 햇볕이 저절로 느껴지는듯하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np_da_1961_03_29_0510


사형 벗어난 몸 리도쇄신에 감찰위원장으로 지명된 민영수씨


(한자가 너무 많다)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OldNewsResult.jsp

[경향신문(조간)] 1960-06-16 03면


http://gonews.kinds.or.kr/BEFORE_90_IMG/1960/06/16/19600616KHM03.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