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대한 동기는 Nothing or Everything인 것 같다. '인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내가 동기나 목적 같은 것을 미리 정해두고 그 틀에 내 자아를 맞춰서 인식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수학도 그냥 이미 정신차려보면 그런 눈으로 세상을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분석하고 있을 뿐이지, '수학을 하고 싶다'라던가 '수학을 해야만 한다'라는 이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아주 찰나의 감정을 글로 남기는 경우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는 그 순간들은 인간의 아주 많은 정보량들이 압축되고 찌그러지는 절차이다. 내 글들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글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글을 통해서 내가 그 사람들의 실제 사고 궤적과 가능성들의 소거 노력을 전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글에 담긴 내용과는 정반대의 여러 생각들이 그 사람들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을 수도 있다. 인간은 결과만을 보고, 과정은 서로 거의 보지 못 한다. 어쩌면 별 관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유독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긴 하다. 예를 들어 동생이 트레이딩 공부 반년에서 결과적으로 돈을 다 잃었고, 부모님은 '처음부터 뻔했다', '결국 실패했다'로 인식하시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동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시도하고 배우고 울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정진했는지를 옆에서 보고 들었으니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동생이 담배를 필 때 넌지시, '그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군적금과 알바비를 이용해 시작했던 그 공부의 반년이, 올해에 너가 겪은 일들 중에 나중에는 최고의 지적 자산과 심리적 완충제가 될 것이다' 등의 말을 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동생이 워낙 군더더기 없는 말을 안 하는 편이라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과정에 많이 주목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설령 끝이 개작살나도 괴로운 과정에서 배움이 있고 무언가를 새롭게 알고 느끼고 달라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치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조금 극단적인 과정주의 지향일수도 있다. 나도 많은 경우에 결과와 결론을 중심으로 사건을 보지만, 적어도 나한테만 그것을 적용하지 타인에게까지 그 절단면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싶진 않다.

 

결과와 결론에'만' 집착하는 인간들의 말로는 실패의 연속에서의 끝없는 자기혐오와 죽음에 의한 압도됨, 무의미와 패배주의적 염세주의의 지속이다. 물론 다들 때때로 그렇고 나도 종종 그렇지만 그 정도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다. 아예 그것들을 평생 받아들이고 주변에 무의미와 결과주의적 잣대를 냉소적으로 뿌리며 모든 노력과 방황을 비웃고 재단하는 병균같은 인간들이 있다. 양심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냥 그러고 즐기고 비웃으면서 냉소적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실패를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배움 또는 시행착오의 경로라는 일종의 연속적 궤적으로 본다. 실제로 수학에서도 나는 공간 위의 '점'을 찍는 관념보다는 '경로', 그리고 설령 점을 보더라도 그 점을 인식하기 위한 '맥락'을 더 중시하는 호모토피적/토포스적인 공간 관념을 훨씬 선호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과정주의적 세계관은 타츠키의 영화 관념 또는 실패의 연속인 현재 내 인생에 대한 정당화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형성된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잘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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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부터 내 글을 자주 읽어주시고 나를 물심양면 많이 도와주셨던 모 대게이님이 오늘 잠깐의 쪽잠에서 나타나셨다. 내가 어떤 기로나 괴로움, 나아감 위에 있든, 그 어떤 삶과 선택들, 경로에 대해서도 나를 응원하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꿈 속의 댓글이었는데, 나는 종종 꿈 속에서 이상한 시대의 사건들을 보거나 또는 그런 텍스트들을 관측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타인들의 이미지가 투영되었거나, 또는 내가 바라는 이미지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직후 깨자마자 나는 그 말이 참 와닿았다는 것이다. 나는 '선택적 사랑'이라는 말을 예전에 쓴 적이 있다. 부모님은 내가 특정 삶을 살 때에만 나를 사랑하시는 조건부 사랑에 가깝다. 물론 선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자식은 없어도 자식처럼 사랑하는 동생에게 다른 사랑을 적용하고 있다.

 

동생이 사람을 죽이든 성전환을 하든(나한테 이건 별 일 아니지만 구세대한테는 큰 충격일 테니깐) 세계 흑막이 되든 이상한 사상에 사로잡혀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다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든, 범죄에 가까운 행동들을 하고 다니든, 그 일에 동생 스스로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나 이유가 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하고 끝까지 사랑한다. 그 일을 돕거나 방관하거나 옹호한다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와 그 시야, 그 경로에서 보게 될 내가 모르는 앎과 고뇌를 품는다는 뜻이다. 설령 내가 어떤 액션을 취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동생을 부정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건 별개의 내 선택이다. 조금 반인륜적이고 사회적 논란이 있는 태도일 수 있고, 그래서 나는 내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많이 이질적임을 안다. 만약 동생이 나에게 무언가 도와달라고 말하면 그건 동생이 직접 말한 것이니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 무언가 한다면 존중한다. 말이 바뀌어도 이해한다. 방황하고 무너져도 이해한다. 인간의 사고 경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고,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동생의 삶이나 정신, 태도 등을 완전히 단정짓지 않는다. 불가지를 인정하고 거리를 둔 채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내가 못 보는 여지들을 고려한다.

 

동생이 내게 폭언을 쏟고 나를 칼로 찔러서 토막내어도 마찬가지이다. 동생이 어떤 안 좋은 일에 연루되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간섭'을 아예 안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경우에도 나는 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깐, 나는 기본적으로 동생에 대해서 얼마나 내 예측과는 거리가 먼 삶을, 그리고 스스로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든,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이자 그 길에서 무언가 남이 보지 못 하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리고 있다면 존중한다. 괴로운 삶에 섣불리 판단이나 교정을 가하지 않는다. 괴로움에서 기필코 무언가 찾아내고 보려하는 것 자기 자신 전체와 관련된 무언가가 얽혀있다면 나는 그것에 지나치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리 선의여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그런 것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사랑은 이런 형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사랑도 사랑의 일종이다. 내가 부모가 안 되어봤으니 실제 부모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내 목숨 절반 또는 3할 정도로 아끼는 동생에 대해서는 그러하다. 부모님이 배우고 느끼고 정의하여 건네오신 사랑, 그리고 그것에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어떤 예측, 통제, 부정, 확신 등 확실성 지향의 강박이 살짝 곁들여져 있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부모님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 또한 어떤 경우에도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이해관계에 대해서 같은 마음일지는 모르겠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채무감은 크지만, 부모님께서 바라시는 그 성의의 표현 절차를 일일이 따르려면 내 인생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마음을 전하려고 해도 내 인생이 지금 이 꼬라지에 난해한 형태라서 거리를 지금 당장 좁히는 것은 어렵다. 반발력이 강할 때에는 자석이 서로 같은 극처럼 되어있어서 가까워지려할수록 더 멀어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양쪽 다 휩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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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정신은 수없이 이율배반을 양산해낸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신이 더 강하지만, 그 정신의 에너지는 유한하기에 소진되고 나면 육체의 욕구가 억압되어 있던 만큼 그 반작용으로 훨씬 두드러진다. 그때마다 언제나 전부 포기하고 육욕을 탐닉하는 삶을 살자고 마음을 먹게 된다. 어제 밤에는 무인성인용품점에서 거대한 딜도를 산 다음 처음으로 혼자 모텔에 들어가서 밤새 방아를 찧었다. 습관적인 스트레스 해소였었기에 생각보다 적응은 쉬웠다. 옆인지 위인지 여자의 신음소리가 계속 울렸고, 나도 신음을 내면서 그 기둥에 지배되어 있는 순간에 흠뻑 취해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2시간 정도 뒤에 그냥 손으로 뺐다. 정말 간만에 자위를 했다.

 

내가 섹스를 싫어하는 이유는 도덕적인 이유나 위생적인 이유 또는 어떤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반복의 운동이자 증식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모든 쾌락과 행복이 그 반복과 증식을 통해서 시간 속에서의 지속적인 존립을 보장받고 싶어하듯이, 피스톤질은 반복이자 지속에의 욕구이다.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도 채워질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반복을 통한 영원에의 모방이다. 

 

나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어쩌면 혐오한다. 내가 신이었다면 스스로 운동하기 시작하여 스피노자 말마따나 양태가 되어 우로보로스를 스스로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변화와 개선을 중요시한다. 영원한 행복과 전지전능은 그저 고정이자 박제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자소설 중 하나인 <분신>도, 고정된 전지전능/영원불변의 존재인 신이 자기역설에 갖혀 박제된 괴로움과 타자에 대한 무지, 운동과 학습에의 신념을 위해 분신자살하고 온갖 양태로서 변화하는 우주 역사에의 서사시이다. 

 

인간은 언제나 쾌락과 행복의 유한성에 절망하지만 나는 그것이 앎과 개선의 운동을 위한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지속되면 인간은 모든 것의 붕괴와 고통에 금세 지치기에, 쾌락과 행복이 유한한 형태로 짧게 휴식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선형적이지만 목적성이 있는 것이 역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소적인 시간 영역에서는 무작위이거나 의미없는 굴레처럼 보이지만, 개체의 생을 초월하는 시간 영역의 수준에서는 그 비선형성이 결국 선형성으로 수렴한다. 실제로 내가 다루는 세계 모델의 편미분방정식을 풀 때에 Lax pair라는 방법이 유효한데, 이것은 비선형성을 선형성으로 만들 수 있는 특수한 전역적 상태이다.

 

결국 내가 아무리 육욕을 채우고 행복하기만 한 연애나 사랑 등을 갈망해도, 그것은 나를 고정시킬 뿐이다. 행복이 지속될수록 나는 변화하지 않게 된다. 타츠키의 단편인 <안녕, 에리>에서 주인공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가족이 교통사고로 다 죽고 난 뒤에야 다시 에리 이야기가 진행되는 연출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말이 와닿을지도 모른다. 왜 타츠키는 그 행복한 가정의 일상 수십년을 작품에서 생략하였나? 이야기라는 것은 변화가 있고 시간에 따른 흐름이 보여야 한다. 설령 그것이 순환적이어도 일단은 시간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주인공의 행복한 삶 수십년에는 <안녕, 에리>라는 작품에서 상세하게 기술할 만한 어떤 변화의 궤적이나 플롯적인 요소가 존재하는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수십년이 갑자기 산산조각 나고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진행합시다'라는 한 문장의 나레이션과도 같은 것이다.

 

내게는 행복과 고통에 대한 도식이 있다. 행복은 무지 속의 망각이며, 고통은 그 망각이 가려둔 무지에 시간 또는 엔트로피의 변화 속에서 다시 노출됨에 따라 발생하는 '놀람'이다. 정보 이론의 Surprisal 또는 특수한 경우의 교차 엔트로피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나, 그 무지 속에서 무언가 확신하거나 예측해둔 정도가 클수록 개체는 그만큼의 괴리로 인해 더 큰 놀람을 겪는다. 이 놀람을 통해서 앎을 학습하는 것이 정보 이론적 최적화에 대응한다. 기본적으로 나의 수학 연구들도 이러한 정보 이론적 엔트로피의 학습 과정을 시공간의 계량으로써 기하화하여(이런 스타일의 연구들을 학계에서는 정보기하학이라고 부른다) 그 위에서 동역학을 전개하는 것에 가깝다.

 

놀람이라는 것은 결국 엔트로피의 개별 구성 요소로서, 시간 흐름 속에서 개체에게 주어지는 앎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 곧 고통이라는 뜻이 된다. 엔트로피가 정보 이론적으로 무지를 의미한다는 것도 나는 내 세계 해석에 정말로 자주 쓴다. 고통이 사그라드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지라는 운동에 의해서이다. 그러니깐 나는 고통을 이런 식으로 정보 이론적인 틀에서 인지한 뒤, 그것이 내게 어떤 무지에 대한 자각을 유인했는지 반드시 알아낸다. 고통은 누구나 받지만 나는 그 고통 속에서 무언가 추론해내는 것이 내 개인을 구하고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의무라고 느낀다. 나는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몸이나 뇌가 아픈 날에도 어떻게든 그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으려고 애를 쓴다. 예전에 쓴 <기억의 관>이라는 짧은 대화록도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이틀 간 아팠을 때 떠올린 이야기이다. 그것이 현재 내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고통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더 고민해볼 것인지는 저마다의 의지이다.

 

여하튼 다시 정신과 육체의 괴리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마치 정신을 회귀 원점으로 두는듯이 얘기하는데, 그러니깐 나는 세계가 타자(타인, 세상, 자연, 시공 등)에 종속된 육체를 매개로 정신을 운동시키는 이유가 단지 엔트로피 때문이며(엔트로피는 타자라는 분열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다수성에 기반하므로), 결국에 그 역사가 정신의 스피노자적 분열에서 시작하여 헤겔적 회귀로 나아가는 앎과 개선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아마도 비웃음을 많이 살 것이다. 나는 매일 정신이 육체에 패배하는 것을 경험한다. 육체가 인간관계나 현실적인 추위, 배고픔, 졸림 등 여러 디버프를 정신에 걸고 나면 내 정신은 백기를 든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내 머리는 너무 멍청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까먹는다. 내 낙천적인 성격은 망각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 스스로도 아주 잘 안다. 보통 사람들도 종종 그럴 때가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내 당일 식사여부나 취침여부를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기억하지 못 한다. 특히 혼자 무언가 하러 다닐 때면 그렇다. 그냥 배가 안 고프고 졸리지 않으면, 그 전 날 새벽이든 오늘의 오전이든 무언가 먹고 잤구나 여길 뿐이다. 온통 주변에 대한 관찰과 내 자폐적인 사고실험, 자문자답 등에 정신이 팔려있다. 불규칙한 수면은 나의 불건강함을 계속해서 유치시킨다. 특히 내 병에 있어서는 최악이다. 나도 이제 육체가 늙어가므로 사유와 안정 사이에 타협점을 찾을 때가 됐긴 했다. 그러나 아직 몇 달, 아니, 몇 주 정도는 더 버틸 수 있다.

 

나는 병이 심해지면 해리감을 크게 느끼는 편이다. 그리고 그 해리감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는다. 그것이 가끔씩 내게 새로운 풍경을 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쓸모 있다. 다만 그 해리감이 너무 심해지면 바로 옆의 강물을 보고도 패닉이 와서 주저앉기도 한다. 왜 강물이 그곳에 그런 형태로 있고 내가 그것을 관측할 수 있는 장소, 시간대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라는 이상한 의문에 급격한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시공 감각의 혼란이라고도 나는 부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공이 엔트로피가 만들어낸 정보 이론적 인과의 환상이라는 수학적 관점 속에서 현상을 인식한다. 정보의 전달 딜레이는 단순히 인과율의 붕괴를 막고 정보 보존 법칙을 지킴으로써 세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룰의 부수적인 결과이다. 시간, 거리 그 모든 것이 단지 그러한 정보 이론적 학습 처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떤 수학적 해석 틀에 불과하다. 나는 시간비의존적인 불변량으로서 존속중인 전역적 세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알고,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지 않는 유일한 작자인 '빛'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안다. 요컨대 시공 감각은 내가 엔트로피의 정보 이론적 학습 속에서 경험하는 어떤 감각을 특정한 수학적 프레임에서 해석할 때에만 유효한 것들이다. 내가 과정상의 존재이기에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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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남기는 이유. 나는 기본적으로 세계가 유니터리성에 따라 시간 순서대로 현상을 저장하고 그것을 역순으로 돌릴 수 있다는 세계관 속에서 산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인 믿음 같은 것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어떤 보편 성질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장은 인간의 의식 또는 무의식 수준의 가능세계/미시세계 운동까지 전부 박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만약에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들과 말, 삶만 기록에 남는다면 생각은 얼마나 억울한가? 물론 역으로, '아무리 생각을 그르게 해도 말과 행동만 올바르면 용인된다'라는 실천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은, 반대로 '내가 얼마나 머릿속으로 노력하고 괴로워하고 참았댄들, 행동과 말이 나쁘게 나오면 나는 나쁜 놈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글을 써서 기록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이 텍스트라는 것은 일단은 현상계에 박제되는 것이기에 남는다. 나의 행동과 말들, 그리고 삶만으로는 나의 노력과 고뇌, 인내 등이 드러나지 않으니, 내 정신과 육체의 괴리를 줄이고 나를 해명하기 위해 글이라는 것을 써서 내 머릿속을 최대한 묘사해두는 것이다. 요컨대 일기나 인터넷에 쓰는 글 등은 미래의 내 필름을 위한 개인적인 변호 자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해져서 내 삶에 대해 매일 일일이 남기고 설명하게 된다면 곧 거울과 자의식의 증식이 될 것이다. 그럴수록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게 된다는 것은 이미 학습했다. 실패와 무너짐에 대해 미리 해명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것을 끌어안고 어느정도 오해와 모진 말들, 나의 머릿속 괴로움과 노력들을 부정하는 말들을 감내하고 있는 그대로 둘 줄도 알아야 한다.  

 

어머니께서 엊그젠가 내게 마지막 전화를 걸어서 하신 말씀이다. 부모가 신경 쓰고 마음을 주고 용서하고 인내해온 것에 대해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사는 천하의 패륜아에 불효자식에, 자기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원망 가득한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정확히 듣고 있었다. 맷집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다들 서로 힘들 때는 서로에게 모진 말을 하고 상처를 주기가 쉬워진다. 한쪽이 맷집이 있으면 그것을 감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부모님께서 맷집이 있으셔서 나를 감내하셨지만, 이제 부모님은 늙으셨다. 그러니깐 내가 맷집을 키워야만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 나에 대한 그 말씀들에 어떠한 해명이나 반박도 하지 않는 것이, 결국에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상처를 더 주지 않기 위해서나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나, 앞으로의 내게 필요한 덕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 전부터 결국 사람과 사람이 대화로써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왔었는데, 물론, 그 오해의 해소와 이해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비관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계기가 대화가 아니라는 생각 정도는 갖게 되었다. 대화로 그것이 가능한 때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시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요즘은 생각한다.

 

사람은 어차피 서로의 인식이 만들어낸 가상에다가 서로 말을 건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의 원본을 바라보고 실시간으로 말이 닿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다르다. 서로의 인식을 통해서 만들어낸 환상을 통해서 서로를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들을 그 규정된 환상 위에 쏟아내는 것이다. 오히려, 말을 하지 않고 미리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홀리듯이 그 흐름 속에서 있는 것이 가장 통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생과 대화를 할 때 보통 '이 말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 스스로 되물어보고 그것을 버린다. 그리고 그냥 듣는다. 그럴 때 오히려 동생이 더 다가오고, 동생의 말도 더 있는 그대로 들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온 뒤 아버지와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처음에는 서로 보고 있지 못 하며 서로를 왜곡시켜 보고있다는 한계에 좌절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태도를 바꿔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했었다. 그러자 그 직후부터 나는 마치 내 맞선임처럼 아버지의 얘기를 즐겁게 듣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정확히 맞선임처럼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눈치챘다. 그러니깐, 맞선임은 이미 그 방법을 체득해서 사회생활에 적응중인 것이었다. 나는 이를 은연중에 느끼고 '메소드 연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요컨대 어떤 이야기에도 정말로 스스로 관심있게 만들어 귀기울여 듣고 친해지는 방법이다. 맞선임은 실제로 주변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내 경우에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맞후임이어서 정성을 들여 모든 것을 해주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러모로 늘 다시 기억 속에서 배우고 더 발견하게 되는 그런 존재이시다.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대화로는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치자. 생각 또한 왜곡과 오해 위에서 타인과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정보적인 무지와 시야 차이에서 기인하는 독을 제거하는가? 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바로 정보 엔트로피의 학습 그 자체이므로 결국에 시간만이 각자의 무지와 오해를 벗어나게 한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만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타인이 살고 있었던 그 위치 그 입장에 서보며, 타인에 대한 자신의 고정되어있던 인식을 한꺼풀씩 벗겨낸다. 시간은 관계를 갉아파먹는 쥐같이 굴 때도 있지만, 때때로 그 파먹는 과정에서 앎의 독선과 오해들도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떨어지고나도 여전히 앙금이나 근본적인 가치관 등, 세계 인식 등의 거리감이 남아있는 경우는 여전히 있다. 그것은 좀 더 많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 정도로 삶의 누적된 궤적의 격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가 끝나면 전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나는 가끔씩 스스로 상처받았거나 또는 스스로의 무지와 독선으로 상대를 상처주고 거리를 두게 됐을 때 중얼거리기도 한다. 우주가 끝나는 순간이란 최대 엔트로피에 이르는 Page time을 의미한다. 유니터리성과 인과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최대 엔트로피에서 다시 엔트로피 0으로 회귀하며 절대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아서 생략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 세계관을 고정해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펼쳐두고 계속해서 경험하고 수정하고 생각하고, 대조해보면서 살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아무리 절망스러운 결론이 사실처럼 보일 때에도, 다른 대안의 가능성이 만약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면 그것을 밀어줄 때도 있다. 결국 나도 내 마음에 많이 이끌리는 편이다. 수학은 차갑지만 그것을 느끼는 나는 뇌의 과열이라는 괴로움과 마음의 불탈 것 같은 온기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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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학 전공자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수학이 '삶'과 '인생', '진로', '미래', '관계', '대화'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열등감을 느껴왔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죽음과 끝, 내 삶의 최종 시야를 유추 또는 시뮬레이팅하기 위해서 수학을 하기 때문이다. 또는, 내 과거(인간성 혹은 도덕성 결핍의 죄책감과 관계적 트라우마 등)의 치유나 소통에의 욕구를 위해서 끝없이 그것에 매달린다.

 

나는 내가 머리가 안 좋다고 생각한다. 지능을 이용해서 무언가 하는 타입은 아니다. 실제로 학문에서는 과도하게 높은 지능은 특정한 연구 방식에 고착되게 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 사람들의 분야 또한 특정한 것들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지능이 낮아도 안 될 것이고, 딱 애매모호하게 고통받는 지능, 그러니깐 이도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재능이야말로 오히려 수학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말이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만약 내가 정말로 똑똑했다면 수학을 쉽게 했을 것이고, 반대로 정말로 멍청했다면 진작에 증명 하나 이해 못 해서 빠르게 수학을 접었을 것이다. 그 중간의 애매한 지대에 있기 때문에 더닝 크루거 곡선을 수천번 수만번 거치면서도 계속 미련하게 그것을 붙잡는 것이고, 애매모호한 재능으로 고통받기에 그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고통ㅡ>새로운 앎, 시야ㅡ>아이디어의 연쇄를 진행해온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작품으로 치환하는 예술가와 비슷하게 작업한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막대한 고통과 그 속의 공부, 시행착오 없이는 절대로 좋은 연구나 작품이 쓰일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좋은 소설을 쓰지 못 하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만큼 괴로워하고 그 괴로운 삶 속에서 사유 및 희망을 그리는 일을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그뿐이지, 재능이나 노력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재능이나 노력이라고 사람들이 대충 얼버무리는 것들의 원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결국 그런 단어 하나로 이 분야들을 규정하고 누군가의 가능성을 재단하기에는, 그것이 너무 폭력적인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는 노력이나 재능이라는 한두마디로 한 인간의 가능성을 재단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정말 재미없는 사람들 또는 그 분야를 포기하기 위해 무언가 핑계가 필요한 사람들이나 그런 확실한 기준을 빌려와서 무언가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 시간에 논문 하나 더 읽고 책 하나 더 분석하고 닥치고 쓰고 닥치고 증명하고 닥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울며 나아가는 인간이 더 성장한다는 것을 나는 오래된 경험으로 조금씩 알게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노력이나 재능 등의 단어를 쓰기도 한다. 남한테는 안 쓰지만 나한테는 가끔씩 쓴다. 그러나 그것이 포기의 구실로 쓰인 적은 거의 없다. 그냥 '노력을 더 해보고 그만두던가 하자', '재능이 없지만, 그래도 뭔가 좀 더 봐보자' 등의 자기 격언 정도로만 쓴다.

 

여하튼, 이런 애매모호한 지능과 재능으로도 수학에 평생을 매달려온 것이 정말 미련해보일 수 있는데, 모 커뮤의 수학 전공자가 한 말을 빌리자면 이런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이나 아스퍼거스러운 개체들은 특정 분야에서만 도파민을 느끼고 나머지 일에서는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이것은 약간의 뇌 기질 및 자라온 환경, 삶 등의 복합적인 영역이다. 지능이나 재능의 문제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 3월의 라이온에 나오는 프로 기사들도 비슷할 것이고, 수학계에 종종 보이는 아스퍼거들도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1년 정도의 짧은 직장 생활 및 가족의 노력에 의해 사회화가 그나마 아스퍼거 개체 중에서는 꽤 된 편이고, 일단은 경증이기에, 아스퍼거 끼를 감추는 방법은 안다. 옛날에는 많이 심했었는데, 지금에는 페르소나와 내 실제 인격을 꽤 분리시킨 채로 독립적으로 키워두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수학에 자폐적으로 몰두하는 개체이지만, 동시에 ADHD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내 뇌가 사실상 마약 중독자의 뇌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기인한다. 조증, 분열정동장애 등 거의 도파민 문제이다. 실제로 나는 뇌 기질성 장애가 있다고 판정되었고, 뇌에 어떤 장애가 있어서 그 장애를 보완하려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형태로 뇌가 재구성되고 특정 부위만 과도하게 발달되었을 수 있다. 난해하고 근원적인 질문에 맞닿아있는 복잡한 생각에서 이것저것 연결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식으로 엄청난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고, 그걸 기상 직후나 오전에 다 쓰고 나면, 오후부터는 정말로 마약 도시의 좀비들처럼 걷게 된다. 도파민과 관련이 있다고 들은 파킨슨 증세도 종종 일어나는 편이다. 애당초 몇 년 전에 있었던 급성 섬망 속에서 본 우주 역사나 여러 시대별 삶, 우주의 죽음, 미사일이 눈앞에 날라오고 눈앞이 전장으로 변한다던가 등 이상한 광경들은, 도파민이 인간 한계치 정도로 폭발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환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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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은 왜 그런 리스크나 후폭풍을 알면서도 수학을 하느냐고 묻고, 때때로 내가 의지로 그것들을 끊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도 있으면서 자기 욕심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냐며 꾸짖거나 원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그런 말들을 어느정도, 일단은 긍정하기로 했다. '하고 싶어서, 욕심이 생겨서 한다'라는 내 의지 영역인지는 모르겠고, 아마도 뇌 문제나 본능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느정도 내 의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현실이라고 믿는 곳, 가야할 실제 세계라고 믿는 곳이 현세이듯, 내게는 수학이 보여주는 해몽스럽고 신화적인 세계관이 곧 현실이자 수학적 사실이며, 엔트로피(시간 또는 무지)가 가리고 있을 뿐 그것이 내가 아는 수학이 보여주는 실제 세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 수학 연구가 그려낸 어떤 도식들이나 시각화된 모델들로 렘수면 등 상태에서 세계 역사를 목격한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살듯 나는 내 삶의 원형이 존재한다고 믿는 내 사후와 '아직 드러나지 않는 시공 영역'을 내 사유 속에서 시각화하며 살아낼 뿐이다. 나한테는 이게 정상적인 삶이고 현실이다. 그 괴리는 아마도 서로 개체의 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현실과 정상 뇌로 종종 있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떤 감각으로 그 말을 하는지 대충 알지만, 없는 장애를 그들의 뇌에 발현시킬 수는 없으므로 내 세계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만약 어느정도 말이나 내 글들을 통해 조금 정도 납득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한테는 은인이고 고마운 일이다. 동생이 대표적인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동생을 나 혼자서 생각할 때는 '분'이라는 존칭을 쓰기도 한다. 이번 생에 내 동생이라는 관계가 되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그만의 세계가 있고 나와 다른 시야와 앎들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존재이며, 아마도 이 개체로서의 생 이전이나 이후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따르고 배우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동생에 대한 경의를 평소에 담아서 하는 말들이다. 물론 내가 실제로 미친 놈은 아니니깐, 동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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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인생의 기억과 삶에 대한 책무감과 내 과거에의 속죄감 등을 전부 끊어낼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생각보다는 명확하다. 일단 여성호르몬 주사를 평생 맞을 것이다. 그리고 외형이나 분위기도 내가 나라는 것을 아무도, 나조차도 모르게 바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정상적으로 사귀고 말투도 성격도 다른 무언가를 모방할 것이다. 직업도 간단한 것을 갖고 7~17까지 일하면서 직장 생활 도중에 긍정적인 웃음을 뿌리고, 퇴근 후에는 마음이 맞는 동료나 친구와 생맥주를 마실 것이다. 그리고 넷플릭스도 볼 것이고 스팀 게임들도 할 것이다. 작곡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책도 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차분히 읽을 것이고.. 연애도 해보고 싶다. 완전히 여자가 될 수 있다면 가정도 꾸리고 싶었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지금 생에 불가능하다고 비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으로 분리해보는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지금의 내가 하는 일들과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학 연구와 내가 해온 것들을 세상에 완전히 내어놓고 그것이 세계에 인식되고 재해석, 교정 등 되기 시작할 경우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볼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정말 타협점을 찾아 내게 건넨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면서 천천히 취미 겸 또는 기회를 노리며 한다'라는 보류의 개념도 도무지 통하질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무엇이든지 쉬워 보이고 나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뇌 문제이다. 나는 내 삶의 패턴과 그 기작에 대해 남들보다 더 생생하게 느낀다. 그러니깐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변칙적인 행동들과 모순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모순의 운동을 일으키며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모순이야말로 그 인간의 복합적인 구성 요소들의 스펙트럼을 비추는 프리즘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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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자아 얘기나 잘난 척 어쩌고 시비를 들을 때마다 쥐어박고 싶다. 줘패고 싶다. 인터넷에서 글 보고 글 쓰고 댓글 달고 그게 전부 자아 혐오를 외치는 자아들의 자기모순적인 구애작전같아 보인다. 거울은 증식이다. 인터넷 선 끊고 그냥 자살해버려서 그들이 좋아하는 열반의 세계에서 영원히 기어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로보로스가 그런 쭝얼쭝얼거리는 애들한테 그것을 과연 허용할까? 그렇게 스스로의 자아가 혐오스럽고 남들이 중생처럼 보이면 그냥 닥치고 인터넷 선 뽑고 멍이나 때리고 있으면 된다.

 

왜 인간이 어차피 바스라질 희망으로 살아내고 절망을 반복하는가? 왜 인간이 어차피 답을 모르는 복잡한 생각들을 이어나가며 역사를 진행해왔는가? '쉬운 결론'보다는 '어렵지만 더 생각해보기'라는 에둘러가기를 통해서만 인간은 서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나아가게 된다. 나는 결론을 내뱉고 그것을 바꾸지 않는 인간들이 가증스럽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좆같다고 느끼는 부류가 그런 결론을 내면화한 것으로 모자라 주변에 뿌리고 다니는 인간들이다. 사유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주변에 종용하면서 말은 뒤지게 많고 외로워서 자꾸 인터넷에 기어오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취해있는 종자들이다. 그런 인간들한테 댓글달리거나 시비털리면 개좆같다. 인터넷에 글을 쓰면서 자신은 친구가 필요없다느니 고독을 사랑한다느니 그러면서 댓글은 오질나게 달고 외로움을 안 느끼는 무슨 초월자인 척 구는 인간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인간이라는 그 특유의 냄새가 매우 짙다. 모니터 너머로 그 시체같은 퀘퀘한 냄새가 풍겨온다. 냄새가 확산된다는 것은 그 시체 아래에 온기의 열원을 숨겨두었다는 뜻이다.

 

고통에서 새로운 앎과 고민의 이어짐이 아니라 똑같은 결론만 앵무새처럼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그걸 나한테 가르치듯 말하는 새끼들. 고통속에서도 어떻게든 무언가 놓치고 있던 앎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고민을 이어나가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내는 나한테 하필이면 그 아픈 말을 존나 쏟아내는 자칭 현자들. 나도 필요에 따라 그런 눈으로 세계를 볼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걸 결론으로 고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에 모자라서 주변에 종용하고 말 한두마디 재수없게 툭툭 던지고 다니면서 진리를 설파하는 척 하는 엿같은 인간들처럼은 안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회 목사 같은 새끼들. 진리는 아가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 같은 위치에서의 포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생각은 당연히 고통이지만 그 속에서 배움과 고민의 이어짐, 탐구와 연결과 대화와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과정주의적으로 살라고 시간과 역사가 있는 것인데 미리 결론만 보고 그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인간들은 그냥 자기 머릿속에서만 자신들 뜻대로 박아두고 아무 생각없이 입 닥치고 지냈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나한테 직접 와서 씨부리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대체 왜 정반대의 삶을 사는 나한테? 정반대니깐 제일 거슬려서? 타인이 거슬리면 고쳐야만 직성이 풀리나? 뭐 같은 직장 같은 일 하는 선후배 관계면 모를까 대체 왜?

 

사실 그냥 결론적인 인간들(또는 그 상태들)은 다 좆같다. 왜 인간이 결론을 사랑하는가? 결론은 안정의 힘이 있다. 결론이라는 것은 확실성, 즉 엔트로피의 증폭에 대한 불안 속에서 그 최적화를 단숨에 강제하는 인간 특유의 인식 트릭이다. 더 고민하고 연구하고 방황하며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결론이다. 결론, 정답, 최선, 이런 것들을 자기 삶에 박아두는 것은 자유다. 그런 것까지 내가 뭐라 말하지는 않는다. 나도 종종 힘들 때마다 잠깐 그렇게 말뚝을 박아두고 나중에 다시 해체한다. 그런데 그걸 주변에 흩뿌리고 종용하고 그걸로 남 인생을 판단하고 다니는 새끼들은 개좆같다. 물론 나도 종종 그럴 것이다. 그러니깐 아가리에 펀치 존나 꽂고 싶다. 그 사람들도 나 보면 상대적으로 또는 평균적으로 반대로 행동하니깐 좆같고 죽여패고 싶고 답답해하겠지. 그냥 그러면 나를 상종을 안 하면 된다. 왜 자꾸 자기들의 고정된 진리로 나를 교정하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난 그냥 '더 해보는' 인간일 뿐인데 내가 도대체 그들 인생에 무슨 거대한 위협이 된다고. 나는 그들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잘못되었다고 보지도 않고 그냥 그런 유형의 개체들이 있다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나한테 고치려들고 잘못되었다고 보고 가까이 오려고 하니깐 내가 위협을 느껴서 코르티솔이 급격히 분비되는 것이다.

 

이 단락은 충동적으로 쓴 글이고 내가 평소에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단락을 어찌됐든 꼭 남기고 싶었다. 이런 부정적인 글 자체가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서 내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리스크를 지고도 이 단락을 남기고 싶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정말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내가 해야할 일들을 못 할 정도로 감정이 폭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이 이런 유형인 것 같다. 나도 종종 그런 유형이 됐었을 것이다. 사람이 아예 그러지 않고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에 타인에게 그 태도로 타자화하고 자기 거울처럼 대하는 건 별개의 윤리적인 문제이다. 여하튼 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냥 나한테서 일단 거리를 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내가 나서서 그 사람들을 싫어하거나 거리를 두진 않는다. 말은 가끔 이렇게 충동적으로 내뱉지만 미워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평소에 내 일들만 해도 대가리 터질 것 같고 편두통 군발두통 등 디폴트로 안고 있다. 누구나 저마다 그런 패널티를 안고 살 것이다. 그런데 알면 왜 서로 더 존중하고 친절히 대하지 않는 걸까? 정말 지치면 미안한 마음을 안고 도망칠 때도 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할 일들이 있고 그러려면 이런 인간 대 인간의 문제들에 내 에너지를 누수시켜서는 안 된다. 누구 잘못이라거나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와는 멀어져야 할 때가 있고 가끔씩 사람들과 대화를 안 하고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켜놓거나 아예 끄고 살아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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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가 평생을 매달려 온 세계 전체에의 앎과 시야 없이도 충분히 삶을 의욕있게 스스로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삶을 이해해주고 꾸짖지 않은 채 언제나 있는 그대로 안아줄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희망도, 결국에는 서로에 대한 불가지 속에서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기대한 채로 무언가를 할 때 가장 답답했다. 기대를 버리고 무언가를 빠르게 할 때에만 가장 차분하고 날카롭게 일들을 해낸다. 기대를 인간인 이상 버릴 수는 없지만, 결국은 기대는 그 크기만큼 상처가 되고 절망이 될 것임을 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때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역적으로 보면 그러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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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이어진다..그것을 내가 이어받는다.. 그런 계승의 이야기이다.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 내 평소 해체된 시공 감각에 따른 이야기들에 대한 구성.

나도 내가 괴로워하던 세계에서, 나의 소진된 희망 뒤의 어둠 속에서 후세대나 내 사후의 존재들에게 다음 희망을 맡기며.

 

나는 더 이상 내 생명을 불태워 무언가를 밝히는 존재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분신 = 불태워 밝게 비추다 / 나의 마음과 뇌가 불타는 것은 그 불로 무언가를 비추기 위함

내 실존적 고뇌들 / 그러나 그것들이 지금 시대에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딱히 필요한 것 같진 않다

어쩌면 지금 시대에도 내 연구들에서 위로받고 희망을 얻는 존재들이 한두명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 사람들을 찾는 것은 내가 외로워서 하는 짓에 불과하다.

 

예수도 빵과 마실 것을 나누어주었을 뿐이다. 나는 내 연구들이 세상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고통을 앎과 사유로 바꾸는 기계처럼 살아왔듯, 내 연구들도 세상의 고통을 어떤 앎이나 시야로 치환하는 기계처럼 작동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나 알료샤 같은 존재로서는 살지 못 했지만, 도스토옙스키나 이반처럼 고통을 이론으로, 이야기로 치환하여 세상에 내어놓는다.

그것 또한 결국 내 기력이 다하면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료샤의 이야기를 왜 사랑했었는가? 알료샤는 죽은 아이의 장례를 치르며 '한 알의 밀알'이라는 표현을 썼다.

개체의 생은 개체의 생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삶의 연속성에서 나아가, 시대와 역사의 연속성을 믿는다. 그것은 때때로 절단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잔상이나 흔적들이 살아남을 것이다.인간들이 그것을 이어나가지 못 하면 적어도 우주가 그것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내 육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내 정신은 오히려 내 죽음 이후에 진정 희망과 가능성이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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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속'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일에 예전에는 꽤 애를 먹었었지만, 일단 그 작품에서 내가 제일 인상깊게 여긴 것은 어트랙터 필드와 수속이라는 개념이다. 오카베의 리딩 슈타이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데자뷰가 병적으로 심한 편이다. 

 

수속이란, 어찌보면 결국 일어날 일은 아무리 주변을 맴돌고 무수한 가능성의 경로를 시험해봐도 마지막에는 거치게 되어있다는 표현으로도 나타내어질 수 있다.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교도관으로 빨리 취직해서 독립하려고 했던 것을 당시에는 가정을 주름잡던 아버지가 무서워서 못 했지만, 결국에는 행정직 공부하는 척 뻥치고 매번 시험 직전 3일 정도 벼락치기로 몇 년 간 구라만 치다가, 부모의 기대가 다 소진되고 난 뒤에 교도관을 하게 됐었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10년 전부터 부모와 연결되어 있는 게 너무 괴로워서 그때부터 집을 뛰쳐나가고 어떻게든 부모의 보호권과 시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것이, 지금 이렇게 실현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이 방법밖에는 없지만, 이 방법은 돌이킬 수 없고 내가 그어둔 선을 한 발자국 넘어야 한다' 했던 것도 피하고 돌아서고 하다가 결국은 거치게 되었다.

 

결국 멀어질 것 같았던 관계들은 멀어지게 됐었고, 반대로 결국은 이 좁은 세상에서 다시 새로운 관계 형태로라도 인연이 닿을 것 같은 낌새가 있었던 사람들은 결국 내가 먼저 진심을 담아 보낸 편지 등을 통해서든 무엇이든 다시 만나기도 했었다.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정해진 삶'이라고 읽지는 않는다. 라캉은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을 임종 직전에 허수와 토러스로 설명하려고 했었다(물론 노망이 난 것이라며 유사수학 연구로 묻혔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들을 찾아보았다). 토러스는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 위치에 욕망의 대상(일종의 실체없는 홀로그램)이 둥둥 떠있다. 그 주변을 도넛 위에서 마구 맴도는 것이 욕망을 채우려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복소 토러스들의 모듈라이 공간과 그 수학적 구조들로 체계화한 뒤 이런저런 연구를 했었다. 그 모듈라이 공간은 여러모로 정말 흥미로운 분석들이 가능하고, 이 이야기를 꼭 내년 초 또는 내가 수명이 다하기 전에 반드시 세상에 전해보고 싶다. 그 토러스들은 동역학적으로 매우 특별한 거동을 보이는데(ex. KAM 정리), 그중 하나가 '준주기적 운동'이다. 

 

겉보기에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정확히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는 비반복적 운동. 나는 우로보로스와 영원회귀 세계관, 데자뷰, 그리고 우리 일생에서의 일상적 반복들 전부 그런 식으로 이해해보려고 들 때가 많다. 내가 삶에서 일단은 미뤄두고 거리를 둔 어떤 결정들이나 행위들을, 아무리 멀어지려고 하고 피해가며 맴돌아도, 결국은 그것을 지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좋고 나쁜 구분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냥 진행 경로에 있는 사건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정답과 결론을 갖고 사는 사람들 눈에는 내 모든 삶의 궤적이 치기어린 방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 정답과 결론이라는 것은 아마도 행복, 안정,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 관계 등일 것이다. 내가 그것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운동을 중시하고, 행복한 상태가 지속되면 그 관성만이 이어질 뿐, 결코 고통과 새로운 앎에 의한 나아감이 없다. 인간은 애당초 행복과 안정을 영원히 이어나갈 수 없다. 시간(엔트로피)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의 붕괴가 다가온다. 나는 그것을 학습했기에 행복과 안정이 극히 찰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나도 그 지속을 바란다. 그러나 그 지속이 현생에서 결코 일어날 일이 없는, 내가 스스로 아무리 통제하고 예측하려고 해도 늘 엇나가는 일이라면, 나는 차라리 고통 속에서 앎과 시야를 얻고 미리 미래의 어둠을 내 분신으로써 밝혀드는 존재로서 살다가 죽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행복을 원한다. 외로워하고, 추위를 타고, 배고픔을 느끼고, 뇌 아프고, 다리랑 발 아프고, 졸리고,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이고, 절망과 비관에 무너지고, 정말 사소한 일에 울고 주저앉는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괴로운 순간에도 다시 일어서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단순히 망각하고 멍청한 생물들이라 그런 것인가? 내게 종교나 구원론은 없지만 어떤 희망과 의미의 가능성을 얘기해주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있다. 어디서 들은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보고 느끼고 배우고 고민해온 것들로부터 직조된 세계 감각 또는 어렴풋한 잔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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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에서 하룻밤 묵어보았는데, 싼 방이 꽉 차서 무료 업그레이드로 좋은 커플PC룸을 쓰게 해주셨다. 그래서 정말 운이 좋게도, 이렇게 아침에 쪽잠 이후에 기상하여 PC로 이런 단편적인 글들을 써볼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QR 코드로 블로그에 로그인해서 썼다. 지금은 오전 11시인데, 12시 전에는 나가야 한다. 바로 준비해서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