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존 마틴 그림 떠올랐는데
이런 절망적인, 대자연적이고 초우주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편안한 죽음, 또는 그저 기적에 대한 믿음 말고 바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도대체 왜 저런 상황을 겪게끔 공포스럽고 광활한 시공간에 인간이 존재해야만 할까?


2. 이런 애들은 생존이나 삶이 목적이 아니니깐, 저런 상황에서도 무슨 트릭일지 이 다음에 어디선가 리스폰되면 무슨 전략 써야할지 경우의 수 따져가면서 싸울까?
헌터x헌터 캐릭터들은 또 저 초자연적인 절망과 그 앞의 인간, 그리고 그 이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에서 인간과 세계의 무엇을 탐구하려고 들까?
인간이 거의 확정된 죽음 앞에서 그 이후를 대비하고 고려하는 사고 자체가 애당초 가능하긴 할까? 어쩌면 맛탱이가 가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애당초 그러지 못 하도록 진화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럴 수 있도록 진화한 개체들은 뭐 때문일까?
ㅡㅡㅡ
(깨고 난 뒤 / 잡담)
3.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한된 육체 또는 시점을 지닌 채 존재해야 하는 개체들의 숙명을, '정보의 지연(Delay)'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왜 정보의 지연과 분열, 그리고 그 통합 본능(진리 또는 보편 법칙 유추의 본능)을 지닌 인식/학습 개체들이 자연에 존재하는 걸까? 서사? 망각과 상기의 과정?
4. 인식된 세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상실되어버린 현재에 대한 '기억'이고(즉,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현재에 대한 매 순간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기억, 그리고 그 위의 판단/해석만이 있음), 더 나아가 죽음은 단지 그 기억의 '망각' 아닌가?
그러니깐, 물질적인 수준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으로서의 세계와 존재를 논해야 하지 않나? 그러면 물질이 아니라 정보 엔트로피가 우주의 본질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나?
ㅡ시간의 흐름을 엔트로피의 증가(혼돈 증가, 불확실성 증가)로 볼 때, 생명 및 인간이 엔트로피를 줄이는(질서 증가, 확실성 증가) 동물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사실상 기억ㅡ망각ㅡ상기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결국 절대 진리(엔트로피 0)에 도달하는 것이 필연 아닌가?
ㅡ그리고 그 정보가 보존되고 기록되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고려하면, 애당초 기억과 망각이라는 반대의 운동이 얼마나 일어나든, 인식되는 세계는 반드시 순환적이어야 하지 않나? 시작과 끝이 일치하는, 알파이자 오메가인 '자각(모든 망각 이후 모든 기억을 되찾음)'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ㅡ인간은 어차피 스스로의 존재를 기억으로써만, 그것도 지연 속에서 인식하지 않나? 그러면 죽음(망각) 이후에도 똑같이 기억(상기)으로써, 지연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ㅡ이러한 기억/지연 과정에서 판단/해석의 임의성은 단순히 시점 차이와 기억 차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똑같은 시점과 기억을 고정해두고 기계적인 실험을 하면 똑같은 판단/해석이 나와야 하지 않나? 그런데 애당초 그 실험 내에서 판단/해석의 주체를 메타적인 제3 관측자로 설정해야 하므로(컴퓨터 내에서 컴퓨터가 스스로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해버리면 논리적 모순이 일어나니깐), 그렇게 치면 판단/해석의 근거를 세계 내에서는 찾을 수 없지 않나?
요컨대, 세계는 관측가능하고(물질 현상계 관점), 동시에 알고리즘적인 영역(정보 엔트로피계 관점)이지만, 게이지 이론이 이미 말해주듯, 관측불가능하고 비알고리즘적인 시점/기준의 자유도(Eyes)와 그 임의적인 변환의 비결정성 없이는 그 세계 자체의 운동이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인식자의 존재 및 그 분열은 세계의 운동 그 자체로 필연적이다.
ㅡ코스트코 로티세리 치킨의 저주
"코스트코 갈때마다 로티세리 치킨 사다가 버터 방울토마토 당근 감자 브로콜리 새우 소시지 넣고 오븐에 구워먹는다."
라는 짤게의 모 글을 읽은 뒤로
내게는 그것을 모방히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부럿따.
요거슬 나는 운맹이라 부른다.
아무리 그것을 피해가려고 해도 맴돌기만 할 뿐,
결국 나는 코스트코에 들르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이른바 수속이라는 것이다.
코스트코에 들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경로는 무한하지만
결국에는 우연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필연으로 수렴하는 거시다.
(두둥탁)
만약 이번생에 어찌어찌 피했어도
다음 생, 그 다음 생에서 또 그 운맹에 시달리는 거시다
그니께 그냥 영원한 깐부처럼
그냥 아파도 그 일을 부딪히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ㅡ데자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 분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회귀 속에서는 찰나 또한 영원이 되므로, 영원과 찰나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찰나 속에서 영원을 찾아내고, 반대로 영원 속에서 찰나를 찾아낸다. (먼산)(담배피면서폼잡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