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1960~70년대 도시개발 과정 을 다루는 소설을 이야기하면 보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릴 거임. 『난쏘공』에서 철거민들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노동자이자 빈민으로, 명백한 피해자 임. 그래서 소설 속 선악구도도 비교적 명확 함.

반면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권씨는 다름. 권씨는 ‘구두’로 상징되는 중산층 지식인이었으나 , 이제는 자존심만 남은 몰락한 지식인으로 등장함. 국어 교과서에서는 권씨가 왜 구두를 닦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 그가 도둑이 되어 ‘나’의 집에 찾아오는 결말 부분을 중심으로 보여줌.

여기까지가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설명일 거임. 특히 교과서는 ‘나’가 아내의 수술비용을 대신 내줬다는 사실을 권씨가 모른 채 도둑질을 했다는 상황 을 부각하면서, 권씨를 가난하고 후안무치한 전과자로 인식하게 만듦. 그런데 ‘광주대단지’라는 역사를 이해하면 권씨가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했는지, 그리고 그가 왜 단순한 악인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인지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먼저 광주대단지라는 공간에 대해 알아야함

광주대단지는 『난쏘공』처럼 철거의 대상이 된 판자촌이 아니라, 이미 철거가 완료된 판자촌 빈민들을 서울 밖으로 이주 시키기 위해 경기도 광주시에 만든 공간이었음. 다만 신도시 개발 경험도 없이 빈민들을 쓰레기 버리듯 급하게 이주시킨 곳이었기 때문에 교통이나 주거환경, 일자리 등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철거민에게 주어진 입주권이 거래되면서, 원래 철거민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입주권을 사서 광주대단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거임. 이들을 전매입주자라고 하는데 , ​ 지금으로 비유하면 아파트 분양을 받은 사람 에 가까움. 이들은 전 재산을 털고 온 영세민이나 중산층 이하 지식인 이 대다수였음.

당시 기자들의 현장 르포를 보면 이들 전매입주자가 전체 입주자의 50~60%에 달했다 고 기록하고 있음. 반면 당시 정부는 전매입주자 비율을 20%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채 강력한 전매 규제를 시행함. 여기에 원래 평당 2천 원이었던 땅값을 4~8배 올려 일시불로 내라고 독촉 하면서 전매입주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함.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처음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이 철거민이 아니라 전매입주자들이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음

권씨는 원래부터 판자촌에서 살던 철거민이 아니었음. 그는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 이었고, 출판사에 다니던 평범한 소시민이었음. 또한 시위에도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음. 그는 ‘나는 여전히 광주대단지 사람이 아니며 서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을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시위 당일에도 서울로 빠져나가려다 ​ 다른 시위자에게 붙들려 나온 인물이었음.

그러다 그는 시위 도중 ‘진흙’투성이 참외를 주워 먹는 사람들​ 을 보며 정신을 잃고 시위대의 맨 앞에 나서게 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외보다 ‘ 진흙’임. 진흙은 광주대단지 그 자체를 상징 함. 광주대단지는 제대로 포장된 도로가 없어 곳곳에 진흙이 널려 있었고, ​ 진흙으로 범벅된 신발은 곧 자신이 광주대단지에 살고 있다는 증거 였음. 반면 깨끗한 구두는 광주대단지와 권씨 자신을 분리해주는 유일한 근거였음.

권씨는 시위 주동자로 몰려 전과자 가 되고 이후 '나'의 셋방에서 살게되는 빈민으로 전락 함. 이는 실제 역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데, 실제로 시위 주동자로 처벌받은 20명은 노동자, 무직, 넝마주이 등 빈민들로 권씨 같은 식자층은 없었음.

교과서에서는 교사인 ‘나’를 권씨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하는 지식인, 즉 작가인 윤흥길을 투영한 인물로 설명함. 하지만 권씨 역시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행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 를 지닌 인물임. 따라서 권씨는 사회문제에 투신하지 못한 윤흥길 본인을 대리해서 만든 캐릭터 로도 볼 수 있음.

교과서에서 배운 권씨는 몰락한 뒤에도 자존심만 부리는 모습이 주로 발췌되어 있어, 그의 구두 역시 가난한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자존심처럼 보임. 하지만 권씨가 유독 구두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허세 섞인 자존심이 아님.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치열한 노력​ 이었음.

1970년대 민중에 대한 논의들은 민중을 ‘불결하지만 건강하고, 좌절하지만 저항하며, 정 많고 활기찬’ 상상 속의 허구적 존재​ 로 그려왔음. 하지만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권씨는 철거민들과 연대하지 못했던 지식인 윤흥길 자신의 죄책감 을 바탕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러한 전형적인 민중상에 갇히지 않는 인물 로 탄생함.

권씨는 일반적인 철거민이 아니라 광주대단지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등장한 전매입주자라는 독특한 위치의 인물 임. 그렇기 때문에 전형적인 ‘피해자’로만 그려지는 철거민 캐릭터와 달리, 참여를 망설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도 결국 시위에 뛰어들고, 이후 빈민으로 전락하는 입체적인 서사 를 갖게 됨. 오히려 이러한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물이라는 점이 권씨를 현실에 살아숨쉴듯한,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줌.

광주대단지사건

송은영, 『서울 탄생기: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 2018.

조민경,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교과서 발췌 수록 양상 연구」, 2022.

주로 송은영씨 책 많이 참고했습니다 3회독 이상했는데 너무 재밌음 꼭 찾아보시는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