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왕

— SKYI 수출전쟁: S의 비극

등장하는 학교·기업·인물·방송은 모두 허구이며, 작중 여론의 조롱 표현은 소설이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상입니다.


1. 지하의 왕

서울대 신입생 이헌은 평범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가방을 메고, 강의실에 앉았다. 성적은 중간이었다. 발표는 무난했다. 친구는 세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그를 ‘조용한 애’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헌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는 지하에서 조용했다.

서울의 지하에는 왕실이 있었다. 이름은 ‘전주이씨 종친회 지하위원회’. 줄여서 ‘지하종친’. 몰락한 조선황실의 후손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그들은 땅을 가졌다. 종로의 오래된 빌딩, 강남의 지하 상가, 한강 이북의 창고들. 그들은 돈을 가졌다. 100년 동안 쌓인 땅값. 그들은 사람을 가졌다. 변호사, 세무사, 그리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

지하종친의 수장은 이헌의 아버지, 이정후. 사람들은 그를 ‘회장님’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하에서는 ‘전하’라 불렀다. 농담으로. 그런데 농담이 아니었다.

이헌은 지하종친의 후계자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왕실의 언어를 배웠다. “백성은 사랑하되, 가까이하지 말라.” “권력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강하다.” “왕은 칭송받지 않는다. 왕은 두려움받는다.”

이헌은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서울대에 입학했다. S는 당연히 첫 번째여야 했다. SKYI. S가 먼저다. 그런데 방송은 K, Y, I를 먼저 보여 주었다. 간고등어, 배추, 딸기. 민중은 그들을 사랑했다.

이헌은 TV를 보며 물었다.

“왜 S가 아닙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S는 원래 조용하다. 조용한 것이 S의 품격이다.”

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지하에서 조용히 분노했다.


2. 왜 S가 아닌가

지하종친의 회의실은 지하 3층에 있었다. 벽에는 조선왕조실록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고, 탁자에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다과는 떡이었다. 왕실은 떡을 좋아했다.

이헌이 보고했다.

“아버지, SKYI 시청률 분석 결과입니다. K, Y, I의 지지율 합계는 78%. S는 9%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한 종친이 말했다.

“9%면… 나쁘지 않습니다.”

이헌이 대답했다. “S는 1등이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물었다. “왜.”

이헌이 대답했다. “S가 먼저니까요.”

아버지가 웃었다. “S가 먼저인 것은 알파벳 순서다. 민중은 알파벳을 모른다. 민중은 맛을 안다. 간고등어는 짜고, 배추는 맵고, 딸기는 달다. S는… S는 무엇이냐.”

이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S는 무엇인가. S는 서울대다. S는 권력이다. S는… S는 아무 맛도 없다.

그날 밤, 이헌은 노트에 적었다.

K는 짜다. Y는 맵다. I는 달다.
S는… S는 없다.
S는 권력이다. 권력은 맛이 없다.
그런데 민중은 맛을 원한다.
그러면 S는 맛을 만들어야 한다.


3. 민중의 역학

이헌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지하종친의 사람이었다.

“교수님, 민중은 왜 권력을 미워합니까.”

교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민중은 권력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민중은 권력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미움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미움은 사랑보다 오래갑니다.”

이헌이 물었다. “그럼 권력자는 어떻게 사랑받습니까.”

교수가 대답했다. “권력자는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권력자는 사랑받는 척할 수만 있습니다.”

이헌은 그 말을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밑줄을 그었다. 두 번.

권력자는 사랑받을 수 없다. 사랑받는 척할 수만 있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사랑받는 척하자. 그것이 S의 전략이다.


4. 첫 번째 시도 — 왕실의 품격

이헌은 무대에 나갔다. 그는 정장을 입고, 왕실의 품격을 보여 주기로 했다.

“저는 서울대 신입생 이헌입니다. 저는 조선황실의 후손입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조선황실 후손, 서울대에 나타나다.”

이헌이 말을 이었다.

“저는 왕실의 품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왕실은 500년 동안 이 땅을 다스렸습니다. 왕실은 품격입니다. 왕실은… 조용함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웃었다. 웃음은 퍼졌다.

“저게 뭐야.”
“왕실? 지금이 조선이냐.”
“조용함이 품격이면, 나는 명품이다.”
“얘는 아직도 왕이 있는 줄 아나.”

시청률이 떨어졌다. 이헌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화가 났다. 그리고 슬펐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민중은 왕을 원하지 않는다. 민중은 왕을 웃음거리로 원한다.”

이헌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민중이 원하는 것을 줘라.”


5. 두 번째 시도 — 왕실의 자비

이헌은 두 번째 시도로 ‘자비’를 골랐다. 그는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왕실의 자비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재산을 나누겠습니다. 서울대 신입생 이헌은 오늘부터 매달 1억 원을 기부하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왕실의 자비, 매달 1억 기부.”

그런데 여론은 다르게 반응했다.

“1억? 저 사람 재산이 얼마인데.”
“기부는 좋은데, 왜 방송에 나와서 하냐.”
“저건 자비가 아니라 광고다.”
“왕실이 땅부자라며. 세금은 냈어?”

여론은 분노했다. 이헌은 당황했다. 그는 자비를 베풀었는데, 민중은 화를 냈다.

교수가 말했다. “권력자의 자비는 항상 의심받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는 자비를 베풀 때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헌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교수가 대답했다. “계산을 감추십시오.”

이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교수가 웃었다. “왕실은 원래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게 500년의 기술입니다.”


6. 세 번째 시도 — 왕실의 검

이헌은 세 번째 시도로 ‘검’을 골랐다. 그는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왕실의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무대의 규칙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지하종친의 후계자입니다. 저는 이 방송국의 광고주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여론이 터졌다.

“저건 협박이다.”
“왕실이 방송국을 움직인다고?”
“저건 권력 남용이다.”
“무서운데, 더 무서운 건 저게 사실이라는 거다.”

시청률이 폭발했다. 그러나 지지율은 0%였다. 이헌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품격을 보여 줬습니다. 자비를 보여 줬습니다. 힘을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민중은 저를 미워합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민중은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다. 민중은 네가 가진 것을 미워한다.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네가 그것을 잃기를 바란다. 그게 민중이다.”

이헌이 물었다. “그럼 민중은 왜 K, Y, I를 사랑합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이다.”

이헌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7. 깨달음

그날 밤, 이헌은 지하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벽에는 조선왕조실록이 걸려 있었다. 그는 실록을 펼쳤다. 세종실록. 정조실록. 영조실록. 그는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왕은 사랑받지 않았다. 왕은 두려움받았다. 그리고 왕은 그 두려움을 사랑이라 불렀다.

그런데 민중은 왕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민중은 왕이 죽으면 웃었다. 민중은 왕이 살면 욕했다.

그게 500년이었다.

이헌은 노트를 폈다. 그리고 적었다.

나는 수캐였다.

그는 펜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적었다.

아니, 나는 권력자였다.

권력자는 수캐다. 수캐는 무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무리는 수캐를 사랑하지 않는다. 무리는 수캐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수캐가 늙으면, 무리는 더 젊은 수캐를 데려온다.

민중의 역학은 그것이다. 민중은 본능적으로 힘과 권력을 가진 자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민중은 힘과 권력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중은 동시에 힘과 권력을 원한다. 왜냐하면 민중은 힘과 권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은 권력자를 미워하면서 권력자를 만든다. 그리고 권력자가 약해지면 권력자를 버린다.

그게 민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 민중 위에 서 있다.

이헌은 펜을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그 말은 슬펐다. 그러나 동시에 편안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권력의 조건이었다.


8. 수캐

이헌은 무대에 다시 나갔다. 이번엔 달랐다. 그는 정장을 입지 않았다. 그는 후드티를 입었다.

“저는 서울대 신입생 이헌입니다. 저는 조선황실의 후손입니다. 저는 지하종친의 후계자입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이헌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무대에서 세 번 실패했습니다. 품격도 실패했습니다. 자비도 실패했습니다. 힘도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민중에게 사랑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저는 이제 사랑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권력자가 되겠습니다. 권력자는 사랑받지 않습니다. 권력자는 필요합니다. 저는 이 무대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회자가 물었다. “어떻게 필요합니까.”

이헌이 대답했다.

“저는 이 무대의 규칙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K, Y, I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K, Y, I가 싸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겠습니다. 저는 심판이 되겠습니다. 심판은 사랑받지 않습니다. 심판은 필요합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S, 심판이 되다.”

여론은 갈렸다.

“저건 오만하다.”
“근데 맞는 말이다.”
“심판은 필요하다.”
“저 사람이 심판이 되면, K, Y, I는 어떻게 되나.”

이헌은 웃었다. 이번엔 연습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함은 사랑보다 오래간다.


9. 에필로그 — 지하의 새벽

이듬해, SKYI는 ‘심판 제도’를 도입했다. 서울대 신입생 이헌은 심판석에 앉았다. 그는 점수를 매기지 않았다. 그는 규칙을 지켰다. K, Y, I는 그를 미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필요로 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이헌 씨, 당신은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헌이 대답했다. “압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필요합니다.”

이헌이 대답했다. “그것도 압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말했다. “그게 권력입니까.”

이헌이 대답했다. “그게 권력입니다.”

그날 밤, 이헌은 지하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겼냐.”

이헌이 대답했다. “아니요. 필요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웃었다. “그게 이기는 겁니다.”

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하 회의실 창밖을 보았다. 창밖은 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새벽을 상상했다.

그는 노트에 마지막으로 적었다.

나는 수캐다.
수캐는 사랑받지 않는다.
수캐는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함은, 아주 느리게, 사랑이 된다.

아마도.

그는 펜을 놓았다. 그리고 웃었다. 지하에서, 아주 조용히.

TV에서는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SKYI 수출전쟁,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헌은 TV를 껐다. 방 안은 조용했다. 떡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