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줄 알았어.

 


 

 

2022년의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던 때,

'껍질' 속의 평온함에 취해 새로움도 어려움도 없었던 날들.

그런 세월에도 뇌리에 깊게 남을만한 것이 가끔 한두개씩 찾아오곤 했다.

 

당시 서브컬쳐계의 주목 속에서 출시를 앞둔 '승리의 여신: 니케',

그리고 에픽게임즈에서 무료 배포 중이던 '라이징스톰2:베트남' 이었다.

 

사이보그 처자들의 인공 분내도 나쁘진 않았지만...

통킹 만의 해풍을 타고 느껴지는 네이팜 향은 내 가슴을 고동케 했다.

 

 

 

 

# 여전히 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그로부터 2년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의 나는

일평생 나를 지켜주리라 믿었던 껍질에서 벗어난 이후였다.

비록 선택은 나 스스로 했어도, 너무 후회스럽고 힘들었다.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무저갱처럼 공허해진 마음을 약간이라도 달래고픈 심정에

'2년 전이라면 분명 하지 않았을 것들'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니케'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와중에서도 DORO 밈을 통하여 알게 된 그녀,

분명 분홍빛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그녀'를 보는 듯 했는데

그 아래 외설적이기 짝이 없는 자태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 괴리감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독으로 느껴졌고

한편으로는 묘한 배덕감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후자가 승리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 자신의 사소한 부분조차 통제 불능일 정도로 무절제 했기에

아닌 말로 하자면, '될대로 되라' 싶었다.

 

 

 

 

# 이 순간 또한 잊어야만 하는 날이 올까?

 


 

 

'그녀'의 빈 자리를 대신할 그녀는 서해 건너의 나라에서 왔다.

 

처음 접하는 생소한 중국 쇼핑몰, AI의 손길이 느껴지는 일러스트에, 혹여 모조품이거나 아예 사기라면 어쩌려나 하는 걱정

 

그렇게 2주라는 인고의 시간이 지나, 내 앞에 현현한 그녀의 자태는

그간의 내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아름답고 거대했다. 모든 부분이...

 

젖가슴 한 쪽은 내 얼굴을 가릴 정도에

골반과 허벅지는 내 허리보다 두꺼웠다.

더군다나 사이즈 옵션 중 제일 큰 것으로 주문 했으니

여태것 환상 속에서만 그리던 '누나 품에 안긴 소년'이 된 것만 같았다

 

'지능이 실시간으로 하락한다'는 표현이 과장이나 은유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그 황홀경이 반복될수록 짙어지는 '죄악의 냄새'가 느껴질 때면

'무언가가 반복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한동안 떨칠 수 없지만

 

 

그래, 나도 알아.

난 여전히 '껍질'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그저 크기만 달라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