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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센딕 ㅡ 현대수학의 게임체인저
그로센딕은 '구조', '틀'을 수학에서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다.
그는 대수학, 위상수학, 갈루아 이론, 범주론 등 여러 source를 이용해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들을 창안해냈다.
스킴, 에탈 위상, 에탈 기본군, 모티브, 토포스, 데생당팡 등 아주 많다. 모티브의 경우 양자장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물리학, 자연상수들의 수학적 근원)
물론 실제로 편지 기록 등을 보면 그 당시 거장인 세르, 아틴, 베유 등 많은 대수기하학자들이 영감을 주거나 이미 어느정도 되어있던 구체적인 작업들이 있던 것을 개선하고 통합한 것이다. 즉, 그로센딕은 기존에 널브러져있던 것들을 조감도에서 내려다본 뒤 어떤 하나의 가장 적절한, '최선의' 잘 맞물리는 개념을 생각해내서 조립하는 일을 정말 잘했다.
그로센딕은 수학이 정수론과 같은 이산성, 해석학의 연속성, 그리고 이 이산성-연속성의 간극을 이어주는 다리인 기하학 이 셋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외에 그로센딕과 관련하여 유명한 모든 분류 틀, 관점들은 그저 그 문제를 보기 위한 도구 또는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로센딕은 그 도구와 프레임들을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실제 수학적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여러가지 서로 다른 '렌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고 있었다.
그로센딕 이후의 현대수학은 이 도구와 프레임 그 자체에 대한 유용성의 영광에 너무 빠져들어 그 역할성을 맹신하거나, 반대로 너무 단편적인 대상들의 구체적인 문제만을 기술하느라 통합적인 시야를 잃게되는 등 양극단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그 중간 지점에 있는 연결고리와 같은 수학자들은 정말 귀한 인재이다.
정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상들을 묶은 뒤 그 분류끼리 정적인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서로 다른 구조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있고 언제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라는 '관계'를 보는 일이 필요했다. 수학적 플라톤주의자들은 그 모든 서로 다른 대상과 구조들이 하나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보려면 동일성을 해체하고 차이를 보면서 그것들을 서로 흐르도록, 즉 어떻게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것에서 갈라져 나오고 언제 어떻게 흘러서 변하는지의 물줄기를 볼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수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view'의 점진적 개선. 그러나 그 'view'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이산적인 것, 연속적인 것, 서로 다른 구조에 갖힌 대상들의 갈라파고스 환경들, 이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하나의 세계에 포섭되는가? 그게 가능하긴할까?
현대물리학에서도 비슷한 목적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즉 수학과 물리학은 현대에 이르러 수많은 자료들 위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추적중인 것이다.
현재로서는 비관적인데, 달리 그것을 부정하는 뚜렷한 근거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제안된 것들이 서로 너무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분야의 것들이라, 그것을 하나의 조감도로 한꺼번에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학계에서 키우거나 선호하지 않는 현대에서는 요원한 꿈이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했다가는 수학자의 진로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정하고 분야를 확정하여 밥벌이를 하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결국 너무 거대한 꿈에 사로잡혀 작은 성과 하나 내지 못 하게되기 때문이다.
현대수학은 너무 갈라파고스화되어있다. 연결하려고 해도 그 연결망이 단순한 선 몇 개라기보다는, 온갖 복잡한 유기체들의 혼파망에 가깝고 서로 맞물리지 않는 그것들을 묶는 일은 정말로 난해하다. 예컨대 7대난제가 왜어려울까? '뭘 해야 풀리는지'부터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제를 수학적 언어로 아는 것과 그런 유형 문제의 기존 접근 방법론들, 그리고 그것들의 한계와 더 일반론적인 전략에의 유추의 어려움 등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로센딕은 그 짓이 가능했던 마지막 수학자였기에 전설로 남아있다. 그는 국적도 버렸고 달리 연구기관 소속이나 자금줄 등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분방했고, 말년에는 그래서 수학으로부터 벗어나 산속에서 길고 긴 어떤 세상 회고록을 쓰거나 신을 연구하기도 했었다. 신을 예감했던 수학자들 중에는 그로센딕, 리만, 파스칼, 오일러, 괴델(이 사람은 직접 신을 증명하려고 했고, 그 증명은 불완전했지만 의의는 상당하다), 그리고 종말론적 우주관과 신에 미쳐있던 연금술사 뉴턴 등 생각보다 많다.
나는 여기서 현대수학계의 다크호스인 헤겔 세계관을 소개하려고 한다.
실제 철학자 헤겔이 뭔 얘기를 했는지 공부할 깡도 없고 그거에 인생 쏟아부을 자신도 없지만, 내가 말하는 수학에서의 '헤겔스러움'은 되게 어떤 느낌으로 그냥 잘 와닿는다. 요컨대 헤겔이 뭐 어쩌고저쩌고 철학 용어를 읽는 것과 달리 그냥 수학적 프레임들을 이것저것 안 다음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하면 그게 내가 설명하려는 헤겔 세계관이 된다.
그러니깐, 플라톤적인 것을 우리는 추구한다. 그래서 동일성에 기반한 세계 유추를 써왔지만 철학이나 수학이나 둘 다 그 방법으로는 한계에 이르렀고, 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주장하면서 존나 때려부수니깐 뭔가 좀 변화 중심의 동적인 세계관이 정말 유용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 끝없는 변화와 재창조, 반-플라톤주의가 아무리 우리를 근현대부터 빠르게 발전시켰댄들, 그 행위 자체의 쾌활함과 자유로움, 긍지 따위 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목적이나 종착점이 없는 무한한 발산과 변화의 생성 느낌이다.
예컨대 우주는 그냥 변화하기 위해 존재하고, 변화 그 자체가 곧 궁극의 가치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플라톤의 세계는 없거나, 결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헛된 꿈인가? 우리는 현대수학에서 돈 안 된다고 비주류로 밀려난 것들에서 매우 좋은 보석들을 발굴해낼 수 있다.
<토포스>에 대해 간단히 말해보자면, 그냥 집합의 추상화이다.
그러나 집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너무너무 다르다. 그보다 더 위에서 내려온 개념이다.
위키나 nlab에 있는 정의는 논문 쓸 거 아니면 처음에는 ㅈ까고 그냥 대충 뭐하는 새끼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등을 봄으로써 그 윤곽을 잡아보자.
(어차피 대부분의 추상적 개념들은 그 자체의 정의보다는 그것들이 다른 것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계속 파고들어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실루엣'이 동시다발적으로 어떤 세계 서사 느낌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지, 그 각각이 처음부터 어떤 고정적 개념으로서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학계의 구원이었던 [집합]이 러셀의 역설이나 공리계의 불완전성 문제 등 여러가지 자기참조적인 역설에 갖혀 있음을 알고,
수학과 논리, 알고리즘 등 인간의 이성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단들도 괴델이나 튜링 등에 의해 이미 그 필연적인 한계가 지적된지 오래이다.
그러나 사실 현대수학의 다크호스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직관주의 논리'이다. 구성주의 수학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 둘을 그냥 비고전 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건 쉽게말해 고전 수학의 성배인 배중률이랑 선택공리를 허용 안 하는 논리이다.
배중률이 없으니 당연히 귀류법을 이용한 증명도 안 통하고, 참/거짓, 존재/부재, 유한/무한 같은 고정적 판단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문장에 대해 부정의 부정을 하면 원 문장과 같아야 하는데, 직관주의 논리에서는 부정의 부정을 하면 원 문장도 그 부정도 아닌 제3의 이상한 게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적 반-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왠지 그냥 의미없이 다 때려부수고 차이를 만들어서 변화시키고 보는 철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 같다.
그러나 여기서 물리학이 브레이크를 걸어준다는 것이 내가 느껴온 포인트이다.
직관주의 논리에 따라 계속되는 부정-부정-부정-부정-.. 제3의 창조를 거듭하는 동적인 변화 흐름은 정보량의 바다에서 어떤 흐름을 형성한다.
즉, 고전 논리에서는 애초에 알고리즘적인 실제 구성을 안 하고 바로 진리 판단을 하므로 정보량이 아작나있지만
직관주의 논리는 컴퓨터 알고리즘처럼 실제 구성을 안 하면 증명이 아니기 때문에(구성주의적 증명) 정보량의 처리 과정을 수반하고, 그 정보 이론적 최적화가 곧 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 엔트로피의 개념을 도입할 수도 있고, 이와 관련된 흐름의 최적화 체계는 내 개인 연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테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자.
그리고, 토포스가 바로 직관주의 논리 기반이다!
여기에 배중률을 추가하고 고전 논리적으로 제한하면 우리가 아는 집합론과 기존의 논리 체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토포스가 그러면 어디에 쓰이는가?
토포스는 위상수학에서 구체적인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애당초 대수학에서 보는 딱딱한 것들을 부드럽게 주물러서 무언가 논하려면 위상의 개념이 필요하다.
집합 위에 '열린/닫힌' 등 위상 구조를 부여하여 주무를 수 있는 연속적인 공간처럼 만들게 되면, 토포스에 배중률을 강제하는 것은 이 집합의 위상 구조를 이산적인 불 대수로 고정하는 것과 같아진다.
그러니깐, 토포스의 관점에서 집합 위에 위상을 준 건 이산적이고 딱딱한 것들을 연속적으로 주무를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인데,
여기다가 배중률을 강제하면 그냥 이산적인 것만 뱉어내서 말짱도루묵이라는 것이다. 고전 수학이 얼마나 인간-친화적인 발상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들은 흐르지 않고, 다만 흐름 속에서 고정하고 박제한다.
즉, 토포스와 그 직관주의 논리는 동일성과 고정적 관념을 일단 흐물흐물하게 연속적으로 주무르게 해주는, 말랑말랑 귀염뽀용 수학이다.
물론 그 대신 '이건 이거다'하고 속시원하게 고정하고 판단하려는 인간 본성과 반대되므로 굉장히 애매모호한 얘기들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제 무언가 구체적으로 논해야 밥벌이가 되는 영역에서 토포스나 직관주의 논리가지고 무언가 하려면 꽤 골치가 아파진다.
그로센딕은 토포스를 대수기하학에 끌고왔는데, 그게 바로 사실상 스킴의 본질이라 불리는 '층(Sheaf)'이라는 개념이다.
층이 도대체 뭐하는 녀석인가? 얘는 쉽게 말해, '이 작은 open set에서만 주체적 진리'라는 국소적인 편린들이 토포스 내에 직관주의 논리에 따라 분포해있을 때, 그들을 하나의 일관성 규칙(예를들면, 우리 논리에서의 무모순성)에 따라 이어붙여 하나의 전역적인 전체의 진리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풀같은 것이다. 즉, 주체적이고 국소적인 저마다의 진리들이 사실은 거대한 전체 객관적 진리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풀-공간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층을 범주론적으로 토포스로 볼 수 있다.
사실 대수기하를 아무리 패션수학으로 접근하게 되더라도, 결국은 대수기하학 자체의 관심사 내에서 보게 되고, 나도 몇 년간 그런 것밖에 모르고 있었는데,
그로센딕이 하던 수학의 진짜 묘미는 오히려 철학적인 해석에 있다. 물론 수학적으로 무언가 생산적인 걸 즉시 내놓는 건 아니고, 우리의 'view'에 가깝다.
토포스는 논리학의 개념이고, 대수기하학도 model theory나 sheaf topos 등 추상적으로는 논리학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논리학보다는 조금 더 기하학적(?), 세계적(?)이다.
애당초 그로센딕이 다룬 '스킴'은 제대로된 공간이 아니다. 스킴'만'보면 공간의 점(대수기하학에서는 prime ideal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아는 다항식의 영점(해) 같은 것들이 이렇게 대수화된다) 같은 것들을 생각해줘도 그걸로 뭔가 제대로된 수학을 할 수가 없고 졸라 딱딱한 점박이처럼 무쓸모가 된다.
애당초 그런 스킴 위의 점들은 선택공리 없이는 존재성조차 일반적으로 보장해줄 수 없다. 그러니깐, 스킴만 볼 때 우리는 그 공간 위에 '고정된 대상/판단들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고전 수학 치트키를 안 쓰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선택공리를 쓰면 배중률은 자동으로 참이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세계(적어도 우리가 운동중인 틀로서의 세계)는 그런식으로 설명되지 않고, 토포스여야 한다.
여기서 '층'이 나타난다. 층은 스킴 위에서 국소적 근방의 함수들의 위상적 규칙 뭉치로서 딸려온다.
그러면 그로센딕은, '공간 위에 점을 찍고 함수를 구성'이 아니라, 역으로 '함수들이 층을 이뤄 움직이면서부터 공간이 점들로 재구성됨'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것을 체계화했다. 심지어, 공간<ㅡ>함수가 쌍대적인 관계일 때도 있다. 공간을 보는 것은 공간을 없애고 그 위의 함수들의 층을 보는 것과 사실상 같다는 것이다.
즉, 공간의 [점]이 함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함수들의 위상적 구조와 그 토포스적 뭉침 규칙이 만들어내는 운동의 rule이 역으로 공간의 점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 변화의 흐름 위에서 임의로 고정된 대상의 존재라는 환상들의 세계라는 붓다스러운 얘기의 기원이 된다. 물론, 그건 단순한 환상이 아니고 환상에도 엄연한 룰이 있고 세계가 있다. 이것은 이데아-물리세계-인간인식세계 라는 세 개의 상호순환구조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다음에 하자.
또한, 그로센딕 세계관의 정말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바로 범주론의 요네다 보조정리이다.
그로센딕은 이를 대수기하학에서 functor of points라는 관점으로 체계화했다.
대상은 그 자체로는 정의될 수 없다. 고정된 대상 하나에 대해 '안다'라는 것은, 그 고정된 대상과 나머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전부 안다라는 것과 범주론적으로 동치이다.
즉, 우주는 전부 인드라망에서 연결되어있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우주 내에는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론적으로 그게 가능한 것이 있고 그것의 역할이 상당한데, 그건 다음에 논하자.
토포스, 층이 왜 헤겔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지는 다음 글에서 얘기해보자.
헤겔을 토포스와 여러 수학적인 틀을 통해 비추어보면 세계의 형이상학적 문제들이나 각 시대별 수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전역사적 흐름 등이 관찰된다.
그리고 '층'이란 것도 실제 엄밀한 정의를 따지면 원래 '준층'이 먼저 소개되고, 그 뒤에 특정 조건 하에 '층'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층'을 통해서 토포스가 집합론으로 딱딱하게 굳는 과정이 도대체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묘한지도 다음 글에서 씨부려보자.
*쉬어가기
ㅡThe Rising Sea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그로센딕이 수학을 할 때 쓰는 방식이다.
ㅡ그로센딕은 어떤 문제를 풀 때 그걸 바로 안 풀었다.
문제가 하나의 단단한 호두라고 하자.
일단 다른 관심사들을 접하면서 어떤 거시적인 이론을 체계화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눈물을 흘리며 호두가 담긴 구덩이에 물이 차오르게 한다.
극도로 추상화된 거시적 프레임이 만들어졌을 즈음 이미 차오른 우물에서 다시 그 문제를 봤을 때, 호두는 물에 지속적으로 침투되어 흐물흐물해져있다.
그러면 그로센딕은 이제 이 문제를 아주 손쉽게 손톱으로 뜯어낸다. 뭐 드릴이나 오함마도 두드려도 안 되던 걸 물에 오랫동안 불리니깐 그냥 손으로 뜯어진다 그런 얘기
ㅡ실제로 리만 가설의 대수기하학 버전이라 불리는 1970년대의 베유추측 제4 증명은,
그로센딕의 학생이었던 들리뉴가 70페이지에 걸친 논문으로 풀고 필즈상도 탔다.
ㅡ그로센딕은 '모티브'라는 하나의 가설적 프레임워크에 대한 속성들을 이용해 1페이지로 증명했다. 물론 모티브에 대한 주요 가설들은 아직 미해결이고, 7대 난제 중 하나인 호지추측 및 대수기하학의 여러 초월성 문제들이 모티브에 관한 가설적 추론이 진실인지를 묻는 문제들이다. 그것들이 참이면 모티브가 수학이나 양자장론에서 하나의 거대한 Mother 역할을 하게 된다.
ㅡ우리 인생에 적용하자면, 어떤 문제는 그 문제를 바로 해결하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추상적인 프레임워크로 발전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내려다보았을 때 이미 실마리가 보이고 약화되어있다.
그래서 시간이 중요하다. 안 보일 때는 보이게 될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러면 원래 부술 수 없었던 답답한 것들도 약해진다. 아니면 반대로 살아남아 버텨온 우리, 또는 세계가 강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