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총 섬광 후 육여사 쓰러지는 영상 틀자… 문세광 '아' 하며 범행 시인"
[아무튼, 주말]
[영화 암살자(들)이 소환한 1974년 그날의 역사적 진실]
당시 범인 문세광 조사한 담당 검사
정치근 前 법무 비공개 자서전 입수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조선ㅇㅇ일보 2026.10.03.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 중 문세광이 총탄을 발사한 직후의 상황.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한 상태에서 경호관들이 그곳을 둘러싸고 있고, 오른쪽엔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육영수 여사가 보인다. 조선일보 임희순 기자의 특종 사진이다. /조선일보 DB
“아!”
문세광이 신음하듯 소리쳤다.
11월 13일 2심인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였다.
정치근 부장검사가 비디오 필름을 검증할 때 자신의 권총에서 섬광이 번쩍이자마자 육 여사가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나서였다.
(정치근 회고록 ‘백돌의 꿈과 추억’ 209쪽) 이날 그는 자신이 쏜 총에 육 여사가 피살당하는 결정적 장면이 제시되자,
그동안 법정에서까지 웃으며 여유만만했던 태도를 바꿔 “범행을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암살자(들)’이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일어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본지는 사건 당시 범인 문세광을 조사했던 담당 검사가 최근 쓴 비공개 회고록을 2일 단독 입수했다.
회고록을 쓴 사람은 지난 3월 11일 95세로 별세한 정치근 전 법무부 장관이다.
정 전 장관은 43세 때인 1974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서 문세광의 주임검사를 맡았으며,
이후 제18대 검찰총장(1981~1982)과 제32대 법무부 장관(1982)을 지냈다.
정 전 장관의 회고록 ‘백돌의 꿈과 추억’은 2024년 5월 50부 한정판 비매품으로 출간됐다.
속표지에는 ‘鄭致根’이라는 서명과 ‘○○/50’이라는 넘버링이 되어 있다. 책을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나눠 줬다고 한다.
웃기만 하던 文, 조사관 애 태워
서울지방검찰청 공판부장이던 정 검사는 김치열 검찰총장의 명을 받아 문세광의 주임검사로 지명됐다.
문세광이 1차 조사를 받던 중앙정보부(중정)에 가 보니, 혹시 모를 자해에 대비해 온몸을 포승줄로 묶고 양손에 수갑을 찬 채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문세광은 묻는 말에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조사관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중정의 1차 조사 때, 신직수 중정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김기춘 검사가 조사에 참여했다.
그가 문세광에게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 얘기를 하며 ‘당신이 바로 자칼이 아니냐’고 했더니 문세광이 ‘맞다’고 하면서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검찰과 중정의 긴장 관계는 문세광의 조사 절차를 훨씬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당시 중정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았고, 김치열 검찰총장과 신직수 중정부장의 사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수사가 조기에 검찰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다. 8월 18일 김 총장은 정 검사를 불러 “이런 사건은 검찰이 바로 맡아야 한다”며
사건을 인수해 오라고 지시했다.
1차 구속 기간 만료일인 24일, 정 검사는 사건을 송치받아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는 “만약 그 당시 국내외적으로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중앙정보부가 국제적으로 비중이 있는 그 사건을 오랫동안 조사하였다면
아마 더 많은 의혹이 부풀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썼다.
실제로 현재 음모론의 근거가 되는 일부 내용들이 초기 중정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정 검사는 “사건이 워낙 국제적이다 보니 막강한 정보력을 지닌 중앙정보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검찰은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문세광을 조사하기 위해 통역 신문 방식을 정했고, 이를 철저히 지켰다.
검사가 직접 일본어로 문세광에게 신문을 하고→문세광이 일본어로 답변하면→통역인이 한국어로 문답을 통역한 뒤
→참여계장이 조서에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조서에 기재하고→문세광이 조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극좌파 재일 한국인, 조총련 지시 받아
문세광은 195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교를 중퇴하고 민단 산하 청년 조직 ‘한청’에 가입해 활동했다.
‘폭력혁명고교생전선’ ‘전국낭인공투회의’ 등 극좌 학생운동 단체에도 가입했다. 21세 때인 1972년 재일 한국인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다음 달인 1973년 9월 조총련 간부 김호룡과 만나
“박정희를 암살해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는 지시를 받았다.
그 뒤 조총련에서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
문세광은 북한 만경봉호에 승선해 공작 지도원으로부터 ‘박정희 암살’ 지시를 받았다.
동갑이자 중학교 동창생인 여자 친구 요시이 미키코의 도움을 받아 그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 명의로 자신의 사진을 붙여 여권을 만든 뒤
신혼부부로 위장해 함께 홍콩에 다녀왔다. 한국에 입국할 때도 이 여권을 사용했다.
문세광과 미키코는 내연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문세광의 진술은 묘한 데가 있었다.
정 검사는 “문세광이 홍콩에서 동창생 유부녀와 같은 방에 투숙하였다고 하여 남녀 관계는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혁명을 하는데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문세광에게 암살을 지시했던 김호룡은 정작 무기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 문세광은 “김호룡에게 권총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더니 ‘혁명을 하는 사람이 총은 직접 구해야 한다’며 자금만 지원했다”고 진술했다.
홍콩에서 권총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한 문세광은 오사카 고즈(高津) 파출소에 잠입해 스미스 앤드 웨슨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 등
권총 2정과 실탄을 훔쳤다. 문세광은 정 검사에게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다가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총을 벗어두고 자는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들어가서 총을 훔쳤다”고 자백했다.
영상을 설명하고 있다. 수갑을 찬 피고인 문세광(가운데)이 영상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선일보 DB
文의 제4탄이 육 여사를 해쳤다
정 검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사건을 수사할 때 가장 중점을 둔 핵심 사항은 누가 쏜 총에 누가 맞았는지와
문세광 범행 목적 및 배후 세력이었다.
나는 식장에서 발사된 총탄이 전부 몇 발이고 누가 쐈으며 누구를 맞췄는지 등 총탄 문제를 포함하여 문세광이 평소 자기 집에서
‘김일성 선집’ 등 공산주의 내지 주체사상 서적을 탐독한 점,
재일 교포 친북 단체인 조총련의 오사카 이쿠노니시 지부 정치부장 김호룡의 직접 지휘를 받아온 점,
북한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김일성의 직접 지령이라고 하면서 이 사건 범행을 지시받았다는 점,
권총과 여권을 입수한 경위 등 모든 중요 사항에 관한 조사를 빠짐없이 직접 수행하였다.”
문세광은 1974년 8월 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 그는 정 검사에게 “경복궁 등 시내 관광도 했고, 한국 여자들과 청평에 놀러 가서 술도 마시고 잠자리도 함께했다”고 털어놨다.
15일 아침 대형 포드 M-20 고급 호텔 택시를 불러 타고 국립극장으로 갔다.
실탄 5발을 장전한 권총을 허리춤에 숨긴 채였다. ‘일본 대사관의 아무개 고관을 모시고 온 사람’이라고 말해 검문을 통과했다.
1층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한 지 4~5분 정도 지났을 때 권총을 들고 달려나가면서 암살을 기도했다.
정 검사는 이렇게 썼다. “일어나는 순간 바지에서 총을 빼다가 실수로 방아쇠가 당겨져서 자신의 대퇴부(넙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이 총알은 내가 중앙정보부의 이모(某) 국장과 함께 직접 현장을 조사할 때 그가 앉았던 좌석 옆쪽에 그대로 박혀 있는 것을 찾았다.”
문세광은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대통령을 향해 연달아 총탄을 발사했다.
제2탄은 대통령 앞에 있던 연설대에 맞았고, 제3탄은 불발이었다.
제4탄이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고, 마지막 제5탄은 넘어지면서 쏴 연단 위의 태극기에 맞았다.
모두 다섯 발의 총탄의 탄착 지점에 대해 정 검사는 면밀히 조사했다.
정 검사는 “대통령이 총성을 듣고 바로 방탄 연설대 뒤로 피해서 피격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도 다행이었다”고 썼다.
“오발탄은 입구 쪽에서 쏜 것”
그런데 또 다른 총격에 대한 정치근 검사의 조사 결과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객석 합창단석에 앉아 있던 성동여자실업고 2학년 장봉화 양이 맞은 그 총탄 말이다.
단상 위에 있던 경호관 중 한 명의 오발이었던 것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정 검사는 “마침 밖에서 경호를 서고 있던 경호관 한 명이 총성을 듣고 행사장으로 들어와서 단상 쪽으로 달려드는
문세광을 향해 쏜 총에 합창단 여학생이 잘못 맞아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단상에서 객석 방향으로 쏜 오발이 아니라, 객석 뒤쪽 입구에서 단상 아래 방향으로 쏜 오발이었다는 것이다.
정 검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쏜 총에 맞았는지에 관한 수사 결론은 그 당시 철저한 현장 검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및 방송국이 촬영한
VTR 필름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각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의 방향을 면밀하게 조사했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나는 그때 사건의 전모를 국내 언론이 아닌 LA타임스에도 브리핑하여 상세히 보도된 적이 있다.”
권총 연습 장소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문세광이 권총을 훔친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정보와는 달리, 정 검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 파출소에서 권총을 분실했다
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문세광이 소지한 총기의 일련번호가 분실된 권총의 일련번호와도 일치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권총 두 자루를 훔쳤는데 나머지 하나는 찾지 못했다는 정보도 부정확한 것이었다.
정 검사는 “문세광은 일본에서 순사들이 자는 틈을 타서 파출소에 들어가서 권총 두 자루를 훔쳐서 한 자루는 국내로 들여와
범행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한 자루는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범행 후 압수당하였다”고 했다.
문세광의 자백에 따라 일본에 수사 공조를 요청해 일본 외무성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한다.
문세광이 범행에 사용한 권총의 케이스를 오사카의 강에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일본 경찰은 그것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
정 검사는 “당시 일본 신문을 보니 수색 장면을 찍은 사진이 1면 머릿기사로 나와 있었다”고 했다. 일본 경찰은 끝내 그 케이스를 찾았다.
그런데 권총을 쏘는 법은 어떻게 배운 것일까.
수사 초기 문세광은 “권총을 쏴본 적이 없어, 집에서 공포탄을 가지고 연습만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정 검사는 의심했다.
문세광이 뛰어나오면서도 연설대를 맞추는 등 총을 쏜 모습을 보면 총을 다루는 데 능숙한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문세광은 한국 입국 전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자택이 있는 오사카의 병원이 아니라 굳이 김호룡의 소개로
도쿄도 아타치구에 있는 아키후도(赤不動) 병원에 입원했다.
이곳은 조총련이 경영하던 병원으로, 병원장은 당시 조총련 중앙위 의장이던 한덕수의 주치의였다.
정 검사는 ‘거기에서 사격 훈련을 받았다고 의심할 수 있다’는 상부의 지적을 받은 뒤, 범행을 결심한 뒤의 문세광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했다.
정 검사는 “추정하기로는 그곳에서 사상 교육을 받으면서 총기 사용에 대해 많은 연습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격 훈련에 관해서는 문세광이 자백을 하지 않아 끝내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였다”고 했다. 일부 음모론에선 ‘주택가에 있는 병원 옥상에서 사격 훈련을 했다는 엉터리 발표를 했다’고 나오고, 영화 ‘암살자(들)’도 당시 한국
정부 발표가 엉터리였다는 근거는
“민중 봉기와 공산화를 기도했다”
거로 이를 제시하지만, 정작 검찰 조사에는 그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했던 범행의 목적에 대해서 문세광은 이렇게 진술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민중 봉기를 유도해 사회 혼란을 조성해서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정 검사는 “박 대통령만 시해하면 민중 봉기가 일어나서 공산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았다”고 했다.
처음 조사받을 때만 해도 확신범인 것처럼 행세하던 문세광은 시간이 갈수록 약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으며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당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상세히 진술했다.
나중엔 검사에게 여러 번 이런 말을 했다. “살려만 준다면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서라도 속죄하겠습니다.”
문세광이 그러는 동안 위조 여권 발급을 도와준 공범 요시이 미키코는 일본에서 체포 기소됐다. 정 검사는 이렇게 썼다. “그 여자가 문세광의 한국행 목적을 몰랐다고 부인하여, 문세광의 자백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예비나 방조로는 기소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여자가 1심에서 보석으로 풀려나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1975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1주기를 맞아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들이 묘소를 참배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정치근 공안부장이다. /조선일보 DB
“치밀·공정하게 조사를 진행했다”
정 검사는 문세광 수사의 결론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적법 절차를 철저히 준수하고 치밀·공정하게 조사를 진행하였다.
내가 수사한 결론은 문세광이 조총련 오사카 지부 간부의 지시를 받고 파출소에 들어가서 훔친 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 저격을 시도하였고,
그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것이다.
문세광의 자백에 의하면, 조총련 간부가 몇 번이나 자기 집을 방문하였고, 총기 구입 및 범행 자금도 지원해 주었으며,
일본 오사카에 북한 만경봉호가 입항했을 때 문세광이 거기에 승선하여 북한의 지령관, 즉 공작원을 만났는데, 김일성이 직접 내린
지령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고 그 공작원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암살에 대한 김일성의 직접 지령을 전달받았다는 것이다.”(207쪽)
정 검사는 김호룡에 대해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외무부를 통해 일본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로 공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조사를 마친 정치근 검사는 1974년 9월 12일문세광을 재판에 회부했다.
주임검사로서 정경식·김영수 검사와 함께 공판에 관여했다.
“재판을 준비하면서 나는 피고인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설정해서 상황별로 신문 사항을 작성하고
VTR 자료 등 피고인 주장을 반박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자료를 철저히 준비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속은 바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은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중요한 자료 하나가 나온다.
미국 CBS 방송국이 사건 현장에서 촬영했다는 VTR 필름이다. 이 영상에는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육 여사의 머리에 맞고
관통하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고 정 검사는 회고했다. 이 필름을 국내 방송국의 촬영 필름과 함께 법정에서 증거 자료로 제시했다.
재판 중 비디오 검증 과정에서 이 장면이 나왔다. 문세광의 권총에서 섬광이 번쩍이자 육 여사가 쓰러졌고, 문세광이 “아!”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문세광은 자기가 쏜 총에 육 여사가 피살당한 사실을 시인했다.
정 검사는 “처음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발뺌하다가 우리가 증거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따져 물으니
결국 범행 일체를 순순히 인정하였고, 법원은 그해 10월 19일 사형을 선고하였다”라고 했다.
문세광은 옥중에서 정치근 검사에게 180쪽 분량의 서신을 썼다.
첫머리에는 “이 글을 육영수 여사와 장봉화 학생에게 바칩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고 정 검사는 기억했다.
12월 17일, 대법원은 문세광에 대한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사흘 뒤인 20일,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문세광의 사형이 집행됐다.
문세광은 죽기 직전 이런 최후 진술을 남겼다.
“나는 바보였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속고만 살았다. 박 대통령과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
육 여사와 죽은 학생의 명복을 저승에 가서도 빌겠다.
조총련한테 속아서 이런 잘못을 범한 나는 바보이므로 사형을 당해도 당연하다.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
아내는 아직 나이도 젊으니 개가해서 제2의 인생을 살라고 전해 달라. 아들은 형님 내외가 맡아 키워 달라고 전해 달라….”
English(영문)日本語(일문)
육영수문세광암살자(들)정치근회고록검사1974년

한쪽으로 고개 떨구는 육영수 여사 사진, 조선일보 카메라에만 잡힌 이유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본지 사진부 임희순 기자는 서울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을 취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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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편집국 역사문화전문기자
고려대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석사) 졸업. 조선일보 사회부와 탐사보도팀, 사회정책부 등을 거치며 교육부와 문체부 등 출입. 2003년부터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 '뉴스 속의 한국사' '유석재의 돌발史전'과 프리미엄 기사 '유석재의 악인전'을 연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