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北서 나온 음모론… 운동권·TV프로가 키웠다
'육영수 여사 암살' 음모론의 뿌리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백수진 기자
조선일보 2026.10.01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암살자(들)’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최기웅 기자
1974년 8월 15일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자(들)’이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작극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북한 영화의 리메이크’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저격범 문세광이 아닌 다른 자가 육 여사를 암살했다는 황당한 주장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음모론
저격범 문세광은 195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 2세로, 17세 때부터 ‘폭력혁명고교생전선’에 가입하는 등
일본 극좌 학생운동 단체들과 어울리면서 좌익 사상에 경도됐다.
조총련과 접촉하고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는 제안에 빠져 암살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한다.
1974년 육 여사 저격 사건을 벌이고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당시 일본 경찰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수사에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 저격 사건의 배후인 조총련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앞서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본에서 주권을 침해당했다고 여겨 반한(反韓) 감정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 내용이 한국과 다른 것이 있으면 그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일본 내에선 일본 출신의 20대 초반의 좌파 한국인 2세가 그런 엄청난 테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일본 주간지 등을 중심으로 “총성이 문세광의 것보다 더 많이 울렸다” “경호원의 오발에 대통령 부인이 맞았다”는 등의 주장이 나왔다.
“반(反)유신 여론을 탄압하려는 국면 전환용”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후 한국 측에서 일본 경찰에 전달한 내용에 따라 문세광이 오사카 고즈(高津) 파출소에서 탈취해서 강에 버린
권총 케이스를 찾아내는 등 한국 수사 기관의 조사 내용이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을 일본 측도 인정했다.
이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1980년대 국내 학생 운동권 사이에서 ‘박정희 자작극이었다더라’는 식으로 꽤 소문이 퍼졌다.
1987년 6·29 선언 뒤엔 가판대에서 팔리는 선정적 주간지에서 ‘알고 보니 육 여사는 문세광의 총탄에 맞은 게 아니다’ 류의 억측 보도가 나왔다.
당시 국립극장 무대의 오른쪽 뒤편에 있던 신원 불명의 사람이 진짜 범인이었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총탄의 실제 궤적과는 전혀
다른 엉터리 주장이었다. 현재 문화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586세대는 이 시절 청년기를 보냈다.
1989년엔 사건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가 한 잡지 인터뷰에서 ‘육 여사를 쏜 사람은 문세광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세광의 불발탄이 몇 번째 탄이었는지 헷갈리는 등 기초적 사실 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그의 주장에 신빙성은 없었
◇북한 선전 영화, “박정희가 자기 처를 죽였다”
김정일 지시로 1992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북한의 체제 선전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 여사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묘사했다.
연단에 오른 박 대통령이 뭔가 신호를 보낸 뒤 총을 든 문세광이 달려오고, 무대 오른쪽 뒤에 있던 의문의 남성이 육 여사의 등에 총을 쏜다.
이때 흐르는 내레이션에선 “자기 처를 제물로 바쳐 뒤흔들리는 독재 정권을 유지한 살인 악마”라고 했다.
‘박정희가 자기 아내를 죽였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 익숙한 탈북민 출신이 영화 ‘암살자(들)’을 관람하고 나서 내용이 흡사하다는 후기를 밝히면서
‘북한 영화 리메이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 2000년대 한국에서 다시 고개 든 음모론
던 음모론은 2005년 1월 노무현 정부가 한일협정 문서와 함께 문세광 관련 기록을 공개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엔 TV 시사 프로그램이 앞장섰다. 그해 2~3월에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육 여사가 문세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총탄에 맞았을 수도 있다”며 공식 수사 기록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16년 만인 2021년 4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분명 누군가 문세광의 뒤를 봐준 사람이 있다”는 등 상당히 단정적인 어조로 의혹을 제기했다.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이 세 프로그램은 이후 만들어지는 음모론의 ‘교과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암살자(들)’의 허진호 감독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제기된 의혹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자작극 가능성’이라는 영화적 설정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쏟아지자 허 감독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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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편집국 역사문화전문기자
고려대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석사) 졸업. 조선일보 사회부와 탐사보도팀, 사회정책부 등을 거치며 교육부와 문체부 등 출입.
2003년부터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 '뉴스 속의 한국사' '유석재의 돌발史전'과 프리미엄 기사 '유석재의 악인전'을 연재 중.

백수진 기자문화부
문화부에서 영화, OTT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