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이 1866년 7월 25일[2]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3]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사건은 신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으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
1931년 평양 화교학살

1931년 7월 4일 오후 6시, 평양 이문리 길가에서 조선인 3명이 지나가던 중국인 2명을 구타했다. 일본제국 경찰은 이를 제지했고 이 때만 해도 큰일은 없었다. 그 날 밤 평양 중국 요리집 동승루에서는 조선인 20여 명이 달려가서 "굳게 닫아걸은 문을 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6] 7월 4일 저녁 진남포(鎭南浦)의 중국 영사 서수(徐隨)는 경성부와 인천에 배화[7]폭동이 일어난 걸 알고 5일 새벽 평안남도와 황해도, 두 도청의 경찰부장과 평양경찰서장에게 전문을 보내고 진남포 경찰서장과 면담하여 화교와 지역 상회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5일 오전 11시 평양경찰서 경찰서장 안도(安藤) 고등계주임은 평양상회 상무위원 장경현(張景賢)에게 이렇게 말했다.
폭동이 발생하면 본서가 반드시 확실하게 보호할 것인데, 만일 조선인들이 도발할 경우 양보하기 바라며 일찍 문을 걸어 잠그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8].
평양에서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던 7월 5일 밤, 치안 책임자들은 연회에 출석하는 바람에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9] 그리고 안도 주임의 말과는 다르게 밤 11시에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손전등과 곤봉, 칼, 도끼, 돌 따위 흉기를 들고는 조를 나눠 화교를 살상하고 화교들의 가게와 집을 파괴•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 주일공사가 보기에 군중은 조직이 잘 갖춰진 집단처럼 보였다. 이 군중들의 폭동은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일본제국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 7월 8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09명, 부상자가 163명, 생사불명자 63명이었다.[10]
5일 오후 8시경부터 평양부 신창리에 있는 중국요리점 동승루 앞에 조선사람 수백명이 모여들어 그 곳을 습격하였다. 점점 모여든 군중들은 합세하여 종로통으로 나아가며 대로변에 있는 큰 중국인 상점들을 차례차례 습격하였고, 골목에 있는 중국인 가옥까지 습격하였다. 피습된 상점은 상품이던 가구던 남아있는 것 없이 완전히 파괴를 당했고 남아있던 중국인도 피해를 입었다.
폭동이 이런 식으로 6일 오전 3시까지 이어지면서 전차는 오전 6시가 돼서야 겨우 운행됐다. 평양 내 중국인 소유의 집은 거의 습격을 당했고 보통강변에서 농사를 짓는 중국인 가옥도 소각되었다.[11] 평양경찰서 근무자들이 총출동했고 헌병과 보조헌병 70여명과 소방대원 약 200명이 출동해서 경계하였다. 평양근교에서 피난해 들어온 사람까지 포함한 중국인 피난자 3,100명은 평양경찰서 광장에 수용되었고 400여명은 대동경찰서에서 수용했다. 평양경찰서는 이번 테러사건 주모자로 인정된 조선인 57명을 검속했고 폭동에서 경계하던 경관 2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12]
한반도에서 외국인 집단린치 사건은 거의 전부 이북에서 일어남
그게 일본이 됐건 미국이 됐건 짱꼴라가 됐건
빨갱이 잘 때려잡던 서북청년단도 이북애들 모인곳이었고
확실히 저짝이 밤낮없이 북방민족하고 치고받던 국경지역이라 애들이 기질이 쎄긴 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