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이었다.
부모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는 환청에 자다가 깨는 건 옛날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다.
멀쩡히 깨어 있거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고 있을 적에도 그런 환청을 자주 들었었다.

아버지는 최근에 인사 발령으로 일하시는 곳이 다시 바뀌신 뒤로 저녁에 꽤 늦게 들어오신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저녁 7시 즈음이면 나머지 우리 가족은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이 된다.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근래에 외진 곳에서 일하시다가 다시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시면서
사정상 소홀했던 인간관계를 재조직화하느라 여러 자잘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셨던 것인지
엊그제도 어제도 바깥에서 술을 드셨다. 원래는 근 2~3년 동안 바깥에서 사람들과 술을 드시지 않으셨다. 이제 당뇨도 있으시고..

11시에 환청을 듣고 벌떡 깨서 나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꽃 따고 있었는데 동생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와서 같이 땄다.
12시에 도어락 소리가 들리길래 신발장 문을 열고 다녀오셨어요, 수고하셨어요 딱 두 마디를 했다.
바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기에는 조금 그래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아버지께 서슴없이 권할 기류는 아니었다.

관계란 것은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조직 구조나 형태가 계속해서 변한다.
그것은 평소에는 사람도 관계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가, 문턱을 넘는 어떤 사건이나 대화로 인해 갑자기 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제서야 내가 변화를 인지한 것일 뿐, 평소에도 늘 언제나 관계는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 놓여있었다.

나는 관계라는 것이 예전처럼 끈끈한 연결 또는 완전한 절단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는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스펙트럼임을 어렴풋이 느껴오고 있다.
내가 나를 정의하는 방식도 내가 타인과 외부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가 변하면서 새롭게 재편성된다.

요컨대 나는 관계 속에서만 흐를 수 있었다.
내가 본받고 싶어했던 연상들, 내게 저마다 방식은 달라도 관심을 보이고 조용히 응원해주었던 사람들, 한때 다가가려고 노력했었지만 미성숙했던 내 문제로 인해 멀어져버린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다가가는 상태에 있든, 거리를 두고 멀어져있든,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 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든
나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망가진 관계에 대한 후회나 재해석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봄으로써 배울 수 있는 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주도 언제나 거시적이고 전역적인 필연에 대해서밖에 얘기해주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많이 배우고 더 노력하게 됐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세상에 갖혀버렸을 때 나는 그것들을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발언이나 속마음, 생각, 인생 등을 단순화해서 바라보고는 했었다.

일을 안 하고 집에만 있다보면 거의 매일 이제는 내 눈앞에 없는 사람들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그 기억들이 바로 어제의 것들 같기도 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냈을 때 가장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회상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면 내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나날들을 되짚으며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도, 아예 흐르지 않았다고도 느끼는 것은,
옛날의 나에게는 정말로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일들과 적응의 연속이었던 한편, 지금 다 지나고 난 내 눈으로 볼 때에는 그 모든 게 하나의 익숙한 틀에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무력한 소년처럼 느껴지기에, 그래서 마치 모든 게 우주의 역사 만큼 길고 긴 시간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찰나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시간이라는 건 참으로 오묘하다. 물리학적인 시간은 분명히 빛과 물질 스펙트럼의 구분에 따른 보정만 해주면 계산가능한 일관적인 변수이지만,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할 때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우리는 분명 시침이 똑같은 각도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날에는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고, 어떤 날에는 그 시간이 참 길었다고도 회상한다.

인간의 삶이 꿈과 같다는 것이 나는 공감이 간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정말로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체험된다. 그러나 깨고 나면 실제로는 하루가 흘렀을 뿐인지라 그 괴리감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내가 그토록 애달프게 찾아다녔던 사랑하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던지며 맞서 싸웠던 시대상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좋고 나빴던 모든 기억들이 다 지나고 나니 그저 돌이 부서져 고운 모래가 되듯 여운으로 잔잔히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

내 손 안에서 그 모래들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면서 나는 모래시계를 떠올리게 되고, 이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흘러내린 모래들이 다시 경험될 수 있는 것인지, 그 경험 속에서 나는 다시 또 작은 일에 절망하고, 작은 일에 기쁨을 누리는 인생을 살게될 것인지

그리고 만약 꿈을 내가 깨자마자 기억해내려 애쓰지 않음에 따라 자연스레 세계에 흩어져 망각되어버리고 만다면, 그러면 그 꿈들은, 나의 수많은 다른 존재로서의 인생과 추억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되고 그리움이라는 감각마저도 사라지고 말 텐데

그렇다면 내가 미처 기억해내지 못 하고 망각의 강에 흘려보낸 모든 꿈과 또 다른 인생들은 우주가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나.
우주는 지금 내 몸을 빌려서 내 눈으로 보는 세계를 통해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나. 다른 사람들도 꿈꾸는 우주의 다양한 모습인가.

마지막에 눈을 떴을 때에는 정말로 모든 게 꿈이었고, 내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타인들의 마음과 인생도 전부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그러면 나는 더 이상 타인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단순화하여 인식하는 이 원죄로부터 해방되어, 세상 그 무엇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알려진 신의 마음을 바로 그 마지막에 가서야 전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반 카라마조프가 정신착란 속에서 마주한 악마는 무신론자가 사후세계에서 받게 된 판결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남자가 10억 년을 아무것도 없는 우주의 광활한 공간 속에서 걸어야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길바닥에 누워 수천 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그였지만, 남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무려 10억 년 동안 묵묵히, 그리고 때로는 절망하며 비참하게 길을 걸었다. 

마침내 10억 년의 고난을 끝내고 천국에 도달하게 된 순간, 남자는 천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단 2초 만에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10억 년을 걸어온 것뿐만 아니라, 10억의 10억 배를 더 걸었어도 아깝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 우화가 굉장히 기괴하고 공포스러웠고, 도대체 10억 년을 걸어서 겨우 2초의 천국을 경험한 것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우주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나는 10억 년보다도 더 긴 시간을 지옥 속에서 이미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 남자가 도대체 왜 마지막 2초를 위해 10억 년 동안 괴로운 발걸음을 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는지, 나는 아직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따금씩 누군가에게 정말로 몇 년 만에 진심어린 감상을 듣게 되거나, 타인에게 말하기 어려운 내 사정을 알아주는 듯 나를 조심스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이십몇년의 방황했던 인생이 지금 이 찰나를 위해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의 환희를 느끼고는 했었다.
그러니깐 그 우화도 나중에 지나고 보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내가 안다고 믿는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 그리고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 하고 있는 세계로 나뉜다.
인간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감옥이지만, 그 감옥에서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미로가 펼쳐진다.
그 미로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지면 다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나는 그 고독과 방황 끝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다고도, 관심이 없다고도 말하기가 싫다.
그러니깐 걷는 일에 이유나 목적 같은 건 필요가 없다. 그냥 걷는다. 걷다보면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다시 그것을 부정하게 된다.
걷다보면 추억도 생기고 상실도 경험한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고 풍경도 바뀐다. 이 사람도 되어보고 저 사람도 되어보면서 점점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경계가 흐릿해져 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은 둘이 같은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머리가 아프니깐 다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