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8살쯤이었나.

 

어릴 때 멍하니 건너편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별생각 없이 손바닥을 눈앞에 펼쳤는데 이상한 게 보이는 거임.

 

손가락 너머로 자전거 바퀴가 보이는데 손가락 끝부분 근처에서 바퀴의 둥근 선이 묘하게 굴곡돼 보였음.

 

손을 치우면 멀쩡하고 다시 갖다 대면 손가락 끝 주변에서 또 휘어 보임.

 

8살짜리가 그게 뭔지 알 리가 없으니 그냥

 

“뭐지 이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한 채로 기억에 남아 있었음.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과학시간이었는지 책에서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 중력으로 끌어당긴다.”

 

라는 걸 배우게 됨.

 

그 순간 갑자기 어릴 때 봤던 자전거 바퀴가 생각났음.

 

“아 시발 그게 이거였구나.”


 

손가락도 질량이 있음

→ 손가락도 중력이 있음

→ 자전거에서 오는 빛이 손가락 주변을 지나감

→ 손가락 중력이 빛을 살짝 휘게 함

→ 그래서 바퀴가 손가락 끝에서 굴곡돼 보였던 거임

 

고딩인 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짐ㅋㅋ

 

나중에 더 크고 나서 중력렌즈라는 것도 알게 됨.

 

실제로 엄청나게 큰 질량을 가진 천체 주변에서는 시공간이 휘고, 그 주변을 지나가는 빛의 경로도 휘어져서 뒤에 있는 천체의 모습이 휘거나 왜곡돼 보임.

 

이걸 보고 또 생각함.

 

“거봐. 내가 8살 때 본 게 이 원리였네.”

 

그렇게 별 의심 없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음.

 

근데 최근에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서 제대로 알아봄.

 

결론:

아니었음ㅋㅋㅋㅋ

손가락에도 중력이 있는 건 맞음.

빛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게 맞음.

 

중력 때문에 뒤에 있는 물체가 왜곡돼 보이는 중력렌즈라는 현상도 실제로 있음.

 

근데 문제는

내 손가락이 태양이나 은하가 아니었다는 거임.

 

사람 손가락 정도 질량이 만드는 중력으로 빛이 휘는 정도는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님.

 

그럼 내가 8살 때 실제로 본 그 기이한 현상은 뭐였냐?

 

광학적인 현상이었음.

 

눈앞에 손가락처럼 가까운 물체를 놓고 멀리 있는 자전거에 시선을 두면 눈은 가까운 손가락과 멀리 있는 배경을 동시에 정확하게 초점 맞출 수 없음.

 

거기에 손가락 경계에서 생기는 흐림이나 회절, 눈의 수차, 양안 시차 같은 효과가 겹치면서 뒤쪽 물체의 선이 손가락 주변에서 밀리거나 휘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음.

 

그러니까 시간순으로 보면

 

8살:

손가락 끝에서 자전거 바퀴가 이상하게 휘어 보임

“뭐노 이거 신기하네”

고딩: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는 중력을 가진다는 걸 배움

“아ㅋㅋㅋ 8살 때 그게 중력이었구나”

 

나중:

중력렌즈라는 현상까지 알게 됨

“역시 내 추측이 맞았노ㅋㅋ”

 

현재:

제대로 알아봄

 

그거 니 손가락 중력 아님

 

그냥 니 눈이 렌즈였음

거의 수십 년 동안

8살 때 우연히 중력에 의한 빛의 휨을 직접 관찰한 줄 알고 살았음ㅋㅋ

현상 자체는 실제로 본 게 맞고, 질량이 빛의 경로를 휘게 한다는 과학적 사실도 맞았는데

 

둘을 연결한 내 추론만 틀렸던 거임.

 

한줄요약:

8살 때 발견한 미스터리를 고딩 때 물리학으로 해결한 줄 알았는데, 다늙어서 알고 보니 범인은 내 눈깔이었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