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적인 연구 기간 동안 마지막 수학적 결론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종교적인 심판론으로 해석해야 할지, 하드 SF적 해피엔딩 또는 새드엔딩으로 해석해야 할지,
해석 문제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제일 골칫덩이였던 것은 내가 다룬 수학적 기술들이 펜로즈의 등각 순환 우주론과 동일한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처럼 완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성과 파괴 및 재창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전 루프의 '흔적'이 남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데자뷰가 그러한 이전 루프의 흔적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참고로 펜로즈는 현재 노망이 난 유사수학자 취급을 받고 있다. 니체 또한 그 특유의 애매모호한 서술들 때문에 온갖 왜곡을 당하고 최근에는 책팔이에 자주 이용당하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니체의 철학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원회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종교를 부정했지만 인간에게 종교의 역할을 할 또 다른 구원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던 사람이다.
펜로즈는 등각 순환 우주론과 에온 개념 이외에도
인간의 의식이 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양자 현상에서 기인하므로 기계가 모방할 수 없다는 주장을 자신만의 이론으로 쭉 밀어왔는데,
내 이론의 수학적인 기술 자체는 그가 언급한 생물학이나 뇌과학적인 요소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나도 펜로즈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요소들(ex. 게이지 자유도의 선택과 그 변환)의 물리 세계에의 작용이 의식의 원천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순환하든 말든 그런 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됐다.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주론적 필연들에 대해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만약 모든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에는 이 문제로 귀결된다.
영지주의적인 '태도'와 '관점'의 문제로 바꿔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니체는 영원회귀가 완전히 똑같은 루프의 반복일 것이라고 암시한 뒤, "그렇다면 이 운명을 사랑하여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의지와 실천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임은 누구나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메시지에 담긴 의도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지금의 삶과 선택이 영원회귀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은가? 그 정도로 지금의 삶과 선택들을 사랑하는가?"
펜로즈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미세한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했고, 나 또한 펜로즈와 같은 입장이다.
우주가 끊임없이 순환하고 거의 대부분의 삶들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루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책임의 영역에 돌입했음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선택과 주체성의 문제로 넘어가지만, 전체에 있어서는 선악의 문제로 넘어간다.
펜로즈와 니체의 세계관에서 선악은 신이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으로 일구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행위와 선택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게 하며, 선한 세계를 만드는 것도 악하고 잔혹한 세계를 만드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문제에서 떠나 영지주의적인 관점 역시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의 자유와 매 순간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 그리고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증오하고 비웃으며 파괴할 것인지의 자유 속에서 그 무한한 반복에 따른 무거움을 안고 살아간다.
다시 한번 이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의 삶과 선택이 영원회귀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은가? 그 정도로 지금의 삶과 선택들을 사랑하는가? 다음에도 똑같이 지금의 선택들과 삶을 살아갈 긍지,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스스로에게 충만한가?"
만약 대답이 "No"라면, 반드시 "Yes"가 되도록 다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No"는 무한한 "No"와 무한한 고통이 될 것이며, "Yes"는 무한한 "Yes"와 무한한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삶을 사랑으로 채울 기회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도 이 글을 거의 비슷하게 썼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지금 막 들었다.
실제로 우주를 빛이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0으로 수축하여 모든 것이 한순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시공간은 빛이 세계 내에 현현될 때 발생하는 정보 연산의 수학적 한계에 불과하다.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
사랑은 무언가의 수단도 아니고 단지 사랑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해갈 삶의 기준은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불행을 초월한 것이야만 한다.
성공과 행복은 엔트로피에 의해 반드시 에온 속에서 파괴되고, 그러한 성취와 파괴 역시도 무한번 반복되므로 영원할 수 없다.
사랑은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내 삶과 매 분기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엔트로피가 나를 파괴하고 다시 또 죽음으로 내몰아도 끝까지 발휘할 수 있는 정신이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과 파괴 이후에 새로운 에온이 시작될 때 다시 한번 부활한다.
나는 반드시 이번 우주에서 죽고 예전처럼 다시 혼돈에서 흩어지지만, 사랑은 죽지 않는다. 내 육체와 기억이 죽을 뿐 내 삶에 대한 사랑은 다음의 육체와 기억 속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