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이어짐)

6. 한일협정(1965)과 포항제철(1968~1973): 고금리와 오일쇼크 직전의 막차
한일협정으로 확보된 자금은 포항제철을 비롯한 핵심 인프라의 종잣돈으로 투입되었다. 포항제철 1기는 1973년 7월 가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제1차 오일쇼크(1973년 10월~) 직전이었다. 만약 당시 야당의 반대에 밀려 협상이 수년 지연되었다면, 유가 급등과 원자재·설비가격 상승, 금리 상승이 겹치며 동일 자금의 구매력은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제철소 건설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치솟았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세계 호황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산업화의 종잣돈과 뼈대(포항제철)를 제때 구축함으로써, 이후의 불리한 대외 여건 속에서도 국가 성장 궤도를 흔들림 없이 이어 갈 힘을 확보할 수 있었다.

7. 경부고속도로(1968~1970): 마이카 시대와 물류 혁명의 선제적 대응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다닐 차도 없는데 도로만 닦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10년 뒤, 대한민국은 폭발적인 물동량 증가와 '마이카(my car)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만약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미뤄졌다면, 지가(地價) 상승으로 인한 보상비 폭등과 오일쇼크로 인한 건설비 증가가 겹쳐, 공사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수십 배의 건설비용을 더 치러야 했을 것이다. 위기의 파고가 덮치기 직전 성공적으로 완공된 국가 대동맥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이 인프라를 발판으로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를 막힘없이 질주할 수 있었다.

8. 과학입국·기술자립(1966~1970년대 초): 인재 유출과 기술 장벽 직전의 이중 골든타임
1966년 KIST 설립을 계기로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정책을 국가 전략의 최전선으로 끌어올리며, 곧 닫혀 버릴 두 개의 '마지막 골든타임'을 정확히 포착했다.
첫째는 인재 유출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반전의 시기였다. 1960년대 중반은 미국 유학 1세대 한국인 과학자들이 막 박사 학위를 마치고 진로를 결정하던 때였다. 이들이 미국에 완전히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 교육이 본격화되면, 귀국은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들이 현지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 파격적인 대우와 비전을 제시하며 그들을 조국으로 불러들였다.
둘째는 '선진국 기술 이전의 마지막 개방기'였다. 1960년대 후반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기술 이전에 비교적 관대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되자, 선진국들은 자국 기술을 보호하려는 '기술 보호무역주의' 장벽을 급격히 높이기 시작했다. 만약 박 대통령의 KIST 설립과 기술자립 정책이 단 몇 년만 늦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기술 장벽에 갇혀 '복제품 생산국'이나 '기술 식민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온갖 반대와 회의론을 뚫고, 이 두 개의 '닫히는 문'을 동시에 통과해냄으로써, 오늘날 반도체·IT·바이오로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강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9. 전자산업(1968~): 선진국이 문을 닫기 직전 올라탄 '마지막 기차'
국가 발전의 '결정적 시기'를 포착하는 박 대통령의 선견지명은, 이후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탄생 과정에서도 예외 없이 빛을 발했다. 그 중심에는 '전자공학계의 피타고라스 정리'라 불리는 이론을 발전시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석학, 김완희 박사가 있었다. 아직 '전자공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1967년, 박 대통령은 이미 그것이 미래의 '산업의 두뇌이자 꽃'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직접 김완희 박사를 초청하여 전략 자문을 의뢰했다. 이후 김 박사는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 독자 기술 개발은 늦으니,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핵심 전략을 보고했고, 이는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설계도가 되었다.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13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설계도를 현실로 바꾸어 나갔다. 당시의 선택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두고, 김완희 박사는 2022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0년대 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어요. 우리는 그 막차 맨 끝을 타려고 했던 겁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그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지금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3개월 뒤엔 다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런 판에 후진국들이 제 아무리 흉내 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린 그때 참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 면에서 박정희란 분을 대통령으로 만난 것은 한국민에게 행운이었다고 봐요." 김 박사의 증언대로, 1960년대 말은 후진국이 선진 전자산업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결정적 순간에 박정희 대통령의 과감한 선택이 없었더라면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 등 핵심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오늘날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독보적 위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진국들조차 한국의 제조 인프라와 기술 역량에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글로벌 전자 공급망의 핵심국'으로 부상한 이 놀라운 현실은, 그 마지막 기회를 향해 주저 없이 뛰어든 한 지도자의 결단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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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동북아 전문가인 에즈라 보겔(Ezra Vogel) 전 하버드대 교수는 2011년 3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타이밍'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규모가 중간 정도인 국가라면 1960년대가 스스로의 힘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케네디 라운드로 선진국의 관세가 대대적으로 철폐되며, 수출 산업화의 창이 열렸고, 선진국이 된 일본은 해외에 투자처를 물색하기 시작했지요. 한국은 당시 OECD로 갈 수 있는 막차를 탄 겁니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새마을운동, 의료보험, 산림녹화, 전자산업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정책적 성공이 아니라,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고 온 국력을 집중해 '타이밍의 승리'를 일구어낸 전략적 혜안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 모든 정책들이 제각각 흩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결집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력한 추진력과 정책 일관성을 제공한 유신체제라는 정치적 기반이 있었다. 그 체제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역사적 시비(是非)를 떠나, 적어도 박정희 정부가 국가 생존과 산업화를 위한 결정적 타이밍을 붙잡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게 한 핵심 추진 장치였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정 최고의 타이밍은, 전쟁의 폐허, 절대빈곤, 북한의 위협, 정치적 분열이 한꺼번에 이 나라의 미래를 압박하던 그 순간에,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등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그가 놓치지 않은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 낸 거대한 금자탑이다.

본문 출처: 이재훈, 『박정희는 역사이다』, 118~12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