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이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미국 정부와 미군은 박정희 개인과 그의 정권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졌으며, 시기에 따라 극심한 갈등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경계하고 마찰을 빚었던 주요 이유는 시기별로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1. 집권 초기: "이 사람, 혹시 공산주의자 아닌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미국 정부(케네디 행정부)와 주한미군 수뇌부는 박정희를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좌익 전력 파문: 박정희는 과거 1948년 '남로당(남조선로동당)'에 개입했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보당국은 "한국에 친공(친공산주의) 군사 정권이 들어선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 민주주의 파괴: 쿠데타로 합법 정부를 뒤엎은 군부 세력이라는 점 자체도 민주주의와 명분을 중시하던 케네디 행정부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 불편한 해소: 박정희는 미국에 자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증명해야 했고, 이후 베트남전 파병 등을 추진하며 비로소 미국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2. 닉슨 독트린과 안보 갈등: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미국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이 책임지라"며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습니다.

  • 1·21 사태와 미국 반응: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襲擊(1·21 사태)하고 미국 푸에블로호를 납치했을 때,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만 치중하자 박정희는 미국에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 자주국방과 핵개발: 미국을 100%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자체적인 독자 핵무기 개발과 방위산업 육성에 나섰습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막강한 압력을 행사했고, 양국 관계는 수면 아래서 매우 험악해졌습니다.

3. 집권 후반기: 카터 대통령과의 최악의 대립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한미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갈등 요인상세 내용
유신독신 및
인권 문제
카터는 '도덕 외교'를 내세워 유신체제의 인권 탄압과 긴급조치 발령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주한미군
완전 철수 추진
카터는 주한미군을 전면 철수하겠다고 공언하여 박정희 정권을 거세게 압박했습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박정희 정권이 미 의회에 로비를 벌이다 발각된 사건으로, 미국 내 반한 여론이 극에 달했습니다.
 

1979년 한미정상회담 당시

청와대를 방문한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주한미군 철수 및 인권 문제를 두고 격렬한 고성과 설전을 벌였습니다. 회담 분위기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카터는 회고록에서 *"내가 가졌던 정상회담 중 가장 불쾌했던 토론"*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한미 양국은 냉전이라는 공통의 적(북한·음의 공산권)을 두고 결속된 혈맹이었지만, 미국 지도부는 박정희 개인의 독재 체제, 인권 탄압, 독자적 핵개발 움직임에 대해 매우 싫어하고 경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