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에서 이어짐)

명부상 가입과 실질적 활동의 괴리

그렇다면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실제로 어떤 성격이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가입의 시점과 활동의 실체이다. 첫째, 박정희가 이재복의 남로당 명단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1946년 말은, 남로당이 미군정 하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아직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제정)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 여러 차례 대중집회까지 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정당과의 접촉을 훗날의 법적·이념적 기준으로 곧바로 '반역'이라 단정하는 것은, 해방공간의 복합성과 당시의 정치 현실을 지워버리는 소급적 단죄이다.

둘째, 그가 남로당의 핵심 간부로 활약했다는 주장은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책임자들과 재판장의 일관된 증언에 의해 명백히 반박된다. 1948년 11월 11일, 여순사건 수습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수사 지휘한 백선엽(白善燁) 정보국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남로당 군사 책임자라는) 맡은 직책 이름만 거창했지, 군 내부에서 다른 구성원들을 남로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섭(包攝) 공작을 직접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 점은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의 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룡 대위 등의 상세한 조사 작업을 거쳐 확인할 수 있었던 사항이었다. 김안일 방첩과장은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찾아와 육사 동기생이기도 했던 박정희 소령의 구명(救命)을 탄원했고, 나도 결국 그에 동의해 박 소령을 풀어준 적이 있었다. 조사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들었던 김창룡 대위 또한 내가 풀어주기로 한 박정희 소령의 구명에 동의했다(중앙일보 2010.12.27.)." 당시 군법회의 재판장 김완룡(金完龍) 역시 같은 취지의 판단을 증언했다: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하긴 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군내에서도 '인물이 아깝다'는 여론이 있어 감형이 가능했다(김완룡 당시 군법회의 재판장, 조선일보 1998.3.23.)”

수사를 지휘한 백선엽 정보국장과 재판을 주재한 김완룡 재판장의 증언은 단순한 사후(事後) 평론이 아니라, 박정희 사건을 직접 처리했던 책임자들이 남긴 1차 증언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명확하다. 박정희에게 ‘명부상 가입’ 사실은 있었으나, 조직 내에서의 실질적인 활동과 역할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은 해방공간의 사상적 혼란, 형의 비극적 죽음이 남긴 정서적 공백, 그리고 그 틈새를 파고든 좌익 조직의 전략적 포섭이 결합된 결과였다. '직책'은 있었으나 '활동'은 없었다는 당시 수사 당국과 군사재판부의 판단은, 이 사건의 본질이 이념적 전향이 아닌 '피동적 연루'였음을 명확히 규정했으며, 박정희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확고한 반공 국가관과 철저한 국가안보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선언’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다

숙군(肅軍)작업의 여파로 군복을 벗게 된 박정희는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문관(비(非)군인 신분의 군무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전투정보과장으로서 북한군의 동향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로당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던 인물에게 군은 대공(對共) 정보의 핵심 보직을 부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군이 박정희에게 품었던 사상적 의혹을 사실상 거두고, 그의 정보 분석 능력과 대공 업무 수행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김종필 중위(당시 북한반장) 등 실무진과 함께, 38도선 이북에서 유입되는 각종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단순한 정보 축적을 넘어, 북한군의 움직임 속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들을 연이어 포착하게 된다. 38선 인근 주민들이 후방으로 소개(疏開)되고, 전차와 대포 등 중장비 이동을 위한 도로 정비가 본격화되었으며, 북한군 주력 부대의 전진 배치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병력 재배치와 전력 증강의 양상이 단순한 국지 도발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북한의 전면전 준비의 조짐이었다. 박정희는 이들 첩보를 종합해 1949년 12월 17일자 「연말 종합 적정(敵情) 판단서」를 작성, 상부에 제출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분명했다. “북한군은 1950년 춘계(春季)에서 하계(夏季) 사이, 전면 남침을 감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훗날 6·25 전쟁의 발발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분석이었다. 그리고 이 경고는 단발성 보고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봄이 되자 북한군의 움직임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박정희는 거듭해서 긴급 보고를 군 수뇌부에 타전했다. 그러나 당시 군 지휘부와 미 군사고문단(KMAG)은 이러한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군의 전개를 단순한 국지 도발이나 춘궁기 식량 약탈 수준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전투정보과장이 파악하고 제시한 핵심 첩보는, 상층부의 오판으로 인해 실효성 있는 ‘전략적 대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휘부의 이러한 치명적 판단 실패는 개전 초기 아군 전선이 급속히 무너지고, 대한민국의 초기 방어 전략이 사실상 붕괴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지휘부의 무능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던 이 ‘묵살된 보고서’는 훗날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반증으로 남게 된다. 만약 그가 전향하지 않고 북한과 내통할 의도가 있었다면, 아군의 방어 태세를 강화할 핵심 정보를 반복적으로 수집·분석하고, 그것을 수차례에 걸쳐 상부에 집요하게 보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10).

박정희는 형식적인 전향서 대신, 적의 동향을 정확히 짚어낸 냉철한 정보 분석과 반복된 경고 보고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관과 국가관을 입증했다.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험이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인지하고 경고했던 인물—그가 바로, 1950년의 정보국 문관 박정희였다.

본문 출처: 이재훈, 『박정희는 역사이다』, 277~281페이지

※ 이어지는 <6·25 전선(戰線)에서 다시 증명된 반공(反共) 군인 박정희> 편에서는 끈질기게 따라붙던 '원조 빨갱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포화 속 전장에서 어떻게 완전하게 무력화되었는지를 다룹니다. 구호나 선언이 아닌, 6·25 전선의 현실 속에서 실전으로 증명해낸 군인 박정희의 철저한 반공 국가관과 전투 행적을 엄정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공개합니다.
감정적 낙인을 거두고 오직 기록과 인과관계로 진실을 검증해 나갈 다음 연재 글에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기대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