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짐)
붉은 깃발의 유행: 이념을 넘어선 생존과 해방의 도구
박정희라는 개인의 행적을 추적하기에 앞서, 먼저 그가 숨 쉬고 있던 시대의 공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해방공간‘이라 불리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던 시대정신은 오늘날의 잣대로는 재단할 수 없는 복합적인 층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논의의 시점을 1910년대 전후로 확장해 본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국권을 피탈당한 것이 1910년인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17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체제 아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제국주의 타도’와 ‘피지배 계급의 해방’을 외치는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 이념은 강렬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2). 공산주의 실험의 현실적 폐해나 모순이 아직 드러나기 전이었기에, 이러한 이념은 구체제를 무너뜨릴 혁명 사상이자 나아가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도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로 나뉘어 전개되었는데, 특히 만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인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3). 일제는 이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며,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통해 수천 명을 검거하며 조직을 와해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해방 전후 대중에게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는 정체성은 불온한 사상범이 아니라 일제에 가장 치열하게 맞선 '항일 투사' 또는 '애국지사'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해방 직후 남한 사회의 현실 역시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대중적 호응을 오히려 더욱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다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부(富)는 소수의 친일 지주와 자본가에게 편중되어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혼란 속에서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라는 사회주의적 구호는 추상적인 계급 이론이 아니라, 당장 굶어 죽을지 모를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던 민중에게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로 들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해방 직후 남한 사회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처럼 부정적이거나 금기시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실제로 1946년, 미(美)군정청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한, 같은 해 8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해방된 조선이 앞으로 어떤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 ‘7%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한 반면, 자본주의를 선택한 비율은 14%에 그쳤다. 이 수치는 당시 국민 대다수가 사회주의·공산주의 같은 ‘좌익적 이념’을 '공정한 분배'와 '친일 청산'을 실현할 수 있을 개혁적 대안으로 기대했음을 보여준다(4).
미군정의 태도 역시 초기에는 이러한 흐름을 전면 차단하기보다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한반도 문제가 ‘신탁통치’와 ‘미(美)·소(蘇)공동위원회’라는 국제적 합의 절차에 따라 처리되기로 하면서, 미군정의 한반도 정책이 ‘소련과의 협조’를 전제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좌익세력을 전면 배제·탄압하기보다는, 감시와 통제 아래 두면서도 정치 지형의 한 축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병행했다. 그러던 중 1946년 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익 세력이 ‘정판사(精版社) 위조지폐 사건(5)’, ‘9월 총파업’, ‘대구 10월 폭동’ 등 체제 전복을 시도하며 폭주하자, 미군정의 기조는 ‘관리와 조정’에서 ‘강경 진압’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합법 정당과 불법 폭력 세력의 경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뒤섞이고, 어제까지는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던 인물이 오늘은 ‘폭도’와 ‘체제 위협 세력’으로 지목되는 대혼란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바로 이 격랑의 한가운데에, 청년 박정희가 누구보다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가 있었다. 박상희는 단순한 시골의 좌익 선동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구미 지국장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간부로 활동했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경북 지역에서 항일(抗日) 애국지사로 널리 신망을 얻었던 그는, 해방 정국에 들어서는 지역 좌익 진영을 대표해 민족운동을 이끄는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6).
상실의 틈새를 파고들다: 형의 비극적 죽음과 남로당의 기만적 회유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10월 폭동’은 한 청년 장교의 인생 궤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분기점이었다. 미군정의 미숙한 식량·치안 정책, 친일 경찰의 복귀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폭발하는 와중에, 박정희가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셋째 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다(7). 이 사건은 단순한 가족사의 비극을 넘어, 청년 장교 박정희를 좌익 조직과 연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 교수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의지해 왔던 셋째 형이 광복 직후 미군 치하의 경찰 총에 죽은 이후였다.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은 미군정에 실망했고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형의 친구였던 이재복 목사가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으면서 박정희 대위를 끌어들였다. 미군정하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가 아닌 합법단체였다."
가장 존경하던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청년 박정희에게 깊은 상실감과 분노를 남겼고, 이 비극적 순간에 그에게 접근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죽은 형 박상희의 고향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던 이재복(李在福)이었다. 그는 형의 장례 절차를 도맡아 치르고, 유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지다시피 하며 박정희의 환심을 샀다. 나아가 “형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며, 박정희의 분노를 자극했다. 그가 택한 공략 방식은 이념적 설득이 아니라, 혈육의 정과 도덕적 부채의식을 파고드는 정서적 접근이었다. 당시 남로당 입장에서 박정희는 1차적인 포섭 대상이었다. 빈농(貧農) 출신의 계급적 배경, 형의 죽음으로 인한 미군정과 우익에 대한 반감, 그리고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육사 교관으로 재직 중인 엘리트 장교라는 지위는 조직 침투 공작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의 친구, 고향 선배, 집안의 은인이라는 삼중의 신뢰 관계 속에서, 박정희는 이재복과 그를 매개로 연결된 남로당 인맥과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인간적 유대로 묶이게 되었다.
박정희의 이러한 심리 상태를 간파하고 있던 이재복은 1946년 말 춘천 제8연대 경비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 중이던 그를 찾아왔다. '고향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는 남로당 관련 인사들이 박정희를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한 포섭의 장이었다. 박정희는 훗날, 자신은 처음에 그 말을 단순한 향우회 초대로 받아들였을 뿐, 그 배후의 정치적 의도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남로당 입당 원서에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은 바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재복을 매개로 한 이 접촉은 훗날 남로당 연루 혐의의 중요한 빌미가 되었고, 박정희는 결국 군 수사기관의 강도 높은 조사를 거쳐 군사재판을 받게 된다(8).
박정희는 남로당 가입 혐의로 1949년 2월 8일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4월 18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남로당 조직 안에서 실질적인 지휘·공작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수사 과정에서 군내 좌익 조직의 실상을 진술하며 숙군 작업에 협조했다는 점, 그리고 군 내부의 여러 인사들이 그를 놓치기 아까운 유능한 군사 인재로 보았다는 점이 참작되었다(9).
본문 출처: 이재훈, 『박정희는 역사이다』, 271~276페이지
※ 그렇다면 군사재판 석방 이후, 냉전기 미국 정보기관과 수사 기록은 박정희의 사상적 정체성에 대해 어떤 최종 결론을 내렸을까요? 박정희가 소위 '원조 빨갱이'라는 정치적 프레임과 무관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1차 사료와 객관적 근거들을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밝혀냅니다. 감정적 낙인을 걷어내고, 오직 엄정한 기록으로 역사적 진실을 검증해 나가는 다음 연재 글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