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발언'의 진실
피의자 김재규의 일방적 진술은 어떻게 '사실'이 되었나?
10·26 사태를 다룬 거의 모든 영화, 다큐멘터리, 서적에는 필수적인 극적 장치로 차용되는 대목이 있다. 바로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국민을 대량 학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캄보디아(킬링필드) 발언'이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대중에게 '역사적 실체'로 수용된 결정적 계기는, 1979년 12월 18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가 최후 변론 중 밝힌 다음의 진술이었다.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대통령인 내가 명령하는데 누가 나를 총살하겠느냐? 그리고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도 희생시켰는데 우리 대한민국 1, 2백만 희생한다고 까짓것 문제 될 것 있느냐'고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결국은 참 소름이 끼칠 그러한 일들입니다.”
이 발언은 이후 김재규가 왜 박 대통령을 시해했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정당성으로 작동했으며, 동시에 그를 단순한 살해범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의로운 혁명가'로 부각시키는 핵심 논거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이 충격적인 발언들—즉, 박 대통령의 '직접 발포 명령'과 차지철의 '캄보디아식 학살' 언급—은 과연 검증된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사형을 앞둔 피고인 김재규가 자신의 범행을 '민주화 거사'로 정당화하기 위해 법정에서 제시한 일방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목격자 ‘0명’: '캄보디아 발언'을 직접 들은 증인은 아무도 없었다
김재규의 이 충격적인 법정 진술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그 발언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제3자의 증언이나 교차 검증 자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김재규 본인조차, 1심 최후 변론에서 이 발언을 공개했을 당시, 이 '캄보디아 발언'이 언제, 어디서, 어떤 맥락 속에서 나왔는지 구체적인 정황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였는지, 각료나 보좌관과 함께한 회의였는지, 단순한 대화 중 발언이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발언을 직접 들었다는 현장 증인은 있는가? 단 한 명도 없다. 김재규 외에는 누구도 이 발언을 증언한 바 없으며, 회의록, 녹취록, 공식 문건 등 교차 확인이 가능한 물증 역시 제시된 바 없다. 그 결과 '캄보디아' 발언은 시점도, 장소도, 증인도, 문서도 없는, 오직 김재규 한 사람의 말에만 근거한 단독 진술로 남게 되었다. 결국 이 '민주화 거사' 서사의 유일한 근거는, 어떠한 검증도 불가능한 피고인 김재규의 '일방적 주장'이었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소름 끼쳤다던 '긴급조치 10호' 주창자
무엇보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차지철의 캄보디아 발언에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한 대목은, 정작 그가 10·26 직전까지 보여준 실제 행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부마사태 발생 불과 두 달 전에 일어난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당시의 대응이다. 신현확 부총리와 김정렴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신 부총리와 구자춘 내무부 장관 등은 경찰의 외곽 경비 하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권 내부에도 비폭력적 해법을 추구하려는 흐름이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율을 무시한 채, 사전 협의도 없이 야간 강경 진압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정부장 김재규였다(1). 그의 일방적인 지휘는 결국 현장에서 여공 김경숙 씨의 사망과 수많은 노동자의 부상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더 나아가,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주요 안보 관련 장관들이 참석한 시국 대책 회의 자리에서, 기존의 긴급조치 9호보다 훨씬 강력한 '긴급조치 10호'를 주장하며 더욱 고강도의 통제 조치를 직접 요구한 인물이다(2). 그 시점 역시 부마사태 직전인 1979년 8월이었다. "캄보디아의 1, 2백만 희생 가능성"에 소름이 끼쳤다고 말한 김재규는, 정작 박 대통령 시해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국민 전체를 향해 '더욱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자고 나 홀로 나섰던 유신정권의 불망나니였던 것이다.
캄보디아 발언을 뒤집는 현장 일기의 폭로: 박 대통령의 실제 지시는 정반대였다
2024년 10월, 그동안 역사적 논쟁의 중심에 있던 '캄보디아 발언'이 명백한 거짓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가 공개되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난 궁정동 현장과 12·12 사태 발단이 된 육군참모총장 공관 총격 현장에 있었던, 현존하는 유일한 인물인 이재천 소령이 45년간 보관해 온 '현장 일기'가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라는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일기는 사후의 기억이나 정치적 의도로 윤색될 수 없는, 당시의 사실관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1차 사료이다. 그리고 그의 일기는 김재규의 '캄보디아 발언'과는 정반대의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다음은 부마사태가 한창이던 10월 20일(10·26 사태 6일 전)의 기록이다.
1979년 10월 20일(토)
부산 및 마산지역 순시
아침부터 헬기로 부산지구 계엄사령부가 설치된 군수사를 방문하였다. 오늘은 작전참모부장과 민사군정감이 동행하였는데, 이번 소요 사태는 여느 때와 달리 남포동 번화가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학생시위대에 민간인이 함께 참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총장님은 계엄군 지휘관에게 절대 실탄을 지급하지말고 공포탄을 휴대하더라도 장전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대통령의 특별 당부임을 힘주어 말하였다.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227 페이지)
김재규의 주장대로라면 박 대통령은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하겠다"고 말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재천 소령의 현장 일기는, 바로 그 부마사태 대응 현장에서 박 대통령이 "실탄은 물론, 공포탄조차 장전하지 말라"는 특별 당부를 내렸다고 적시하고 있다.
나아가 10월 25일(시해 사건 하루 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어진다.
1979년 10월 25일(목)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한 참모총장 훈시문 하달
어제 전체 참모회의 석상에서 훈시한 내용을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한 군 간부의 자세'라는 제목의 참모총장 훈시 제17호를 전 군에 하달하였다. 시위대의 폭력 행사 및 관공서 기물 파손으로 마비된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부산지역에는 부분 비상계엄령을, 마산지역에는 위수령 발령 등으로 군 병력 출동이 불가피하였음을 역설하였다. 이번 사건은 치안을 관리하지 못한 경찰과 행정 및 사법기관 등 1차 기관에 책임이 있으나, 1차 기관이 감당하기 불가능할 때는 국가적 요청에 따라 군이 사태를 예방하고 해결하여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육군의 장성급 장교를 비롯한 전 간부는 국가의 안위와 대다수의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진압 시 국민을 탄압하거나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여 더욱 자숙하고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부산·마산지역에 출동하는 모든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켜 절대 선량한 시민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3).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228페이지)
이재천 소령의 일기는, 김재규의 '캄보디아 발언'이 사후에 조작된 기만적인 명분에 불과했음을 '있는 그대로의' 현장 기록으로 폭로하고 있다. 특히 이 기록에서 확인되는 박 대통령의 실제 지시는, 군 투입 과정에서도 선량한 시민에 대한 폭행과 위협을 철저히 금지하고, 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방향에 놓여 있었다. 김재규는 이처럼 국민의 안위를 최우선에 두었던 박 대통령을, 부마사태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 여론과 차지철의 평소 광포한 언행을 교묘히 끌어들여, ‘캄보디아식 학살’을 운운한 폭군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한 사람의 거짓 진술이 역사를 지배한 시간
1979년 12월 법정에서 김재규가 꺼낸 '캄보디아 발언'은 이후 45년 넘게 박정희 대통령과 10·26에 대한 역사 평가를 지배해 왔다.
무엇보다 이 발언은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국민적 기억 속에서 그의 실체를 철저히 왜곡하는 데 결정적 도구로 작용했다. "캄보디아처럼 1, 2백만 명을 죽여도 좋다,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겠다"라는 이 조작된 진술은, 박 대통령을 마치 국민 학살을 꾀한 비이성적인 폭군으로 낙인찍는 핵심 논거로 기능해 왔으며, ‘반박 불가의 진실'처럼 반복 인용되었다.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이 날조된 발언은 박 대통령 저격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상징적 장치로 활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역사 강연과 온라인 콘텐츠에서 '학살자 박정희'라는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선량한 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지시하고, '긴급조치 10호'를 주장하던 김재규를 나무라던 박 대통령의 실체적 진실은, 그 강력한 허위 프레임 속에서 완벽히 사라졌고, 국민 보호를 국가 운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그의 철학 또한 더 이상 회자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캄보디아 발언'은 국가원수 시해라는 중대한 범죄 행위를 '숭고한 의거'로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서사적 장치가 되었다. "박정희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면 수백만 국민이 학살당했을 것인데, 김재규 장군님의 영웅적 결단으로 그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 망상적 프레임은, 어느새 '예비 학살자 박정희를 제거한 민주주의 수호자, 김재규 장군'이라는 전복된 영웅 서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급기야 2020년 5월, 김재규 유족들은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받겠다며, "공정한 역사적 평가와 법적 정당성 회복"을 요구하는 재심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검증되지 않은 거짓 진술 하나가, 국가원수 시해범의 명예 회복 시도에까지 논리적 근거로 활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재심의 실질적 토대 자체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캄보디아 발언'이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허위 진술이었음이 명확히 드러난 이상, 그 법적 설득력과 역사적 정당성은 근본적으로 상실되었고, 그 거짓된 기초 위에 쌓인 모든 주장 역시 역사의 법정에서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6).
역사의 법정: 거짓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다
역사는 검증되지 않은 단 하나의 진술에 의해 4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볼모로 잡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해범 김재규가 법정에서 꾸며 낸 ‘캄보디아 발언’은 국민 보호를 중시했던 지도자를 '학살을 획책한 폭군'으로 매도하고, 국가원수 시해라는 반역 행위를 '숭고한 의거'로 미화했다. 이제, 거짓으로 쌓아 올린 '민주화 영웅'이라는 신화를 걷어내고, "공포탄도 장전하지 말라"며 '선량한 국민 보호'를 당부했던 한 지도자의 진실을 복원해야 할, '진짜 역사의 시간'이 도래했다.
[주석]
(1) 신철식, 『신현확의 증언: 아버지가 말하고 아들이 기록한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메디치미디어, 2017), 291 페이지. / 김정렴, 『아, 박정희』(서울: 중앙M&B, 1997), 360 페이지.
(2) 1979년 8월 시국 안보대책 회의에서 김재규가 ‘긴급조치 10호’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종교인·근로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난국을 타개하겠느냐”는 취지로 김재규를 질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당시 동석했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의 회고,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의 군법회의 진술, 고건 전 총리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교차 확인된다. 이는 김재규가 10·26 직전까지도 유신체제의 더욱 강경한 운용을 요구했던 반면, 박 대통령은 오히려 그 과도한 강경책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훗날 김재규가 내세운 ‘민주화 거사’의 명분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중요한 증언 자료라 할 수 있다.
출처: 김성진, 『박정희를 말하다』, 삶과꿈, 2006, 181쪽;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1979.11.18. 군법회의 진술; 『중앙일보』, 2013.3.5., 고건 전 총리 인터뷰.
(3) 부마사태의 공식 사망자는 사건 발생 40년이 흐른 뒤인 2019년, 진상규명위원회가 인정한 유치준 씨(당시 51세) 단 한 명이다. 그의 사망은 계엄군이 아니라 경찰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시 말해, 김재규의 주장 속에서 국민 1, 2백만 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 폭력의 주체로 묘사되었던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박 대통령의 특별 당부에 따라 당시 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살상 무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는 이재천 소령의 일기 내용이 현장에서 실제로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
본문 출처: 이재훈, 『박정희는 역사이다』, 159~1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