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전은 한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최악의 경기 중 하나였다. 경기 내용이 너무나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은 선수비 후역습 전략으로 나왔다. 4-2-3-1 포메이션으로 나섰으나, 경기 상황에 따라서는 수비 라인을 극단적으로 내리며 5-4-1 형태의 두터운 ‘밀집 수비 블록’을 유기적으로 혼용했다. 

한국은 남아공의 밀집 수비를 깨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두가지 원인이 있다.

1. 좌우 측면 넓게 벌리기 실패
중앙 수비벽이 두꺼울수록 측면을 넓게 활용해 공간을 열어야 했지만, 크로스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가 나오지 않아 남아공 수비진의 밀집 대형을 분산시키는 데 실패했다. 윙백 이태석과 설영우의 기량 문제였다. 두 선수는 남아공의 풀백인 모디바와 무다우의 속도와 힘에 완전히 밀리며 측면 침투와 크로스 공급이라는 윙백의 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밀집 수비를 깨기 위해서는 윙백들이 상대 풀백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날카로운 러닝 크로스를 올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윙백들은 남아공의 탄력적인 수비 범위에 걸려 제대로 된 크로스를 올리지 못했다.

이태석과 설영우 두 선수는 남아공 선수들의 탄력 넘치는 압박에 당황하며 퍼스트 터치 실수를 연발했다. 신체 조건과 운동능력에서 밀리다 보니 측면에서 과감한 1대1 돌파를 시도하지 못하고 백패스나 무의미한 횡패스로 일관했다.   

두 선수는 둔탁한 퍼스트 터치와 무딘 크로스로 공격의 맥을 끊었고, 남아공 풀백들의 피지컬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전반 내내 측면을 넓게 벌려주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너졌다.

옌스가 투입되고 나서야 비로소 왼쪽 측면 공격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옌스를 1차전부터 기용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기량만 놓고 보면, 옌스는 현재 한국 최고의 윙백 자원이다.

윙백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리백을 고집한 홍명보 감독의 전술적 경직성도 문제였다. 스리백은 말 그대로 윙백의 힘과 스피드가 뒷받침될 때 활용 가능한 전술이다. 현대 스리백 전술은 윙백의 기량이 전술 완성도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현재 이태석, 설영우, 김문환의 기량으로는 이 전술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다. 세계 무대에서 밀집 수비를 깨기엔 역부족이었던 두 선수의 기량 한계'와 더 나은 옵션이 있음에도 과거의 전술을 고집하며 참사를 자초한 것이다. 충분히 경질 사유라고 생각한다.


2. 움직임의 정체
밀집 수비를 깨려면 미드필더진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비 라인 사이의 빈틈(포켓 공간)을 파고들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 공격진은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정적이고 둔탁하여 상대 수비수들을 끌어내지 못했다. 

- 감독의 책임
(1) '약속된 움직임(Pattern Play)'의 부재: 밀집 수비를 깨는 포켓 공간 침투는 선수의 개인적인 영감만으로 불가능하다. 'A가 움직이면 B가 그 공간으로 파고든다'는 유기적인 전술적 약속이 훈련 단계에서 이뤄졌어야 하지만, 경기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2) 잘못된 라인업 구성과 고집: 상대가 촘촘하게 내려앉을 것이 예견되었음에도 미드필더진에 둔탁하고 정적인 선수들을 그대로 배치했다.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자원이나 변화를 과감하게 주지 못한 벤치의 판단 미스이다.

- 선수의 책임
(1) 심각한 체력 저하와 기동력 부족: 선수들의 체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포켓 공간을 파고들려면 폭발적인 단거리 스프린트가 반복되어야 하는데,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 상대를 끌어내는 움직임 자체를 가져가지 못했다. 한국은 일정 면에서도 유리했다. 같은 경기장에서 2경기를 치뤘고, 무려 6~7일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월드컵은 3~4일 간격으로 경기가 치러지는 극한의 일정이며, 선수들은 풀타임을 소화한 뒤 최소 4일 정도는 쉬어야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보다 훨씬 긴 6~7일의 휴식을 취하고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체력이나 일정 탓을 변명으로 삼기는 어렵다.
(2) 공간 인지 능력의 부족: 남아공 선수들이 강력한 신체 능력과 탄력으로 압박해 들어오자, 우리 공격진은 압박에 밀려 공을 받으러 자꾸 내려오기만 했다. 상대 수비 라인 '사이'에 서서 공을 버텨내고 돌아서는 대담함과 기술적 역량이 부족했다.


현대 스리백 전술은 측면을 혼자 책임지는 윙백의 기량이 전술 완성도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남아공은 자국 선수들의 뛰어난 운동능력을 믿고 밀집 수비와 역습을 완벽하게 수행한 반면, 한국은 윙백들의 신체적·기술적 한계가 뻔히 드러났음에도 이를 극복할 전술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 이강인의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축구
또 다른 문제는 공격 시 빌드업을 이강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원 공격·전원 수비가 요구되는 현대 축구의 흐름과 동떨어진 구식 전술이었다. 남아공은 이강인을 밀착 마크하며 한국의 빌드업 자체를 차단했다. 한국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한국의 공격 전술은 지나치게 이강인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밀집된 공간을 짧은 패스와 연계 플레이로 풀어내지 못하자, 결국 이강인의 롱킥을 바탕으로 후반 교체 투입된 조규성의 머리만 노리는 단순한 롱볼 공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남아공의 탄력 있고 장신인 수비진에게 쉽게 차단당했다. 이 경기는 한국이 선 굵은 롱볼 축구에 의존할 경우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갖춘 팀이 아닌 이상, 선 굵은 롱볼 축구는 쉽게 통하지 않는다.

- 덥고 습한 날씨
덥고 습한 날씨 또한 중요한 변수였다. 몬테레이는 북중미 월드컵 개최지 중에서도 가장 더운 경기장 중 하나다. 한국은 무승부만 거두어도 조 2위로 32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라인을 올려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경기를 운영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남아공은 공격 진영에 넓은 공간이 주어졌을 때, 아프리카 특유의 탄력과 스피드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팀이다. 한국이 라인을 내리고 수비 블록을 촘촘히 세웠다면, 여러 실점 위기 장면에서 보였듯, 측면 윙백들이 속도 경쟁에서 허무하게 뚫리는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이또한 감독의 명백한 판단 미스였다고 본다.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는 6~7일 간격으로 경기가 치러졌다. 그처럼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남아공에 대한 전력 분석과 맞춤형 전술 수립을 소홀히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피지컬과 운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 선수들에게 가장 잘 맞는 감독은 역시 벤투 감독이었다. 벤투였다면 포백 전술을 바탕으로 풀백들을 공간 활용과 연계 플레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옌스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을 것이다. 그만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국과 신장과 체격 조건이 비슷해 축구 스타일도 잘 맞는 편이다. 앞으로도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려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식의 기술과 기본기 중심의 패스 축구를 구사하는 감독을 선임하는 것이 좋다. 반면 국내 감독들은 세부 전술이 부족해 지나치게 선이 굵은 축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성과를 위해 장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는, 한국식으로 선수들을 갈아 넣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과거 한국 선수들의 선수 생명이 짧았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