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서북청년회는 제주4.3, 여수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대거 군에 입대한다. 

이들은 6.25가 일어나자 당시 국군및 미군, CIA의 특수부대,

육군18연대(백골부대), 포병병과의 주축이 된다. 

6.25 당시 소대장, 중대장이었던 육사5기, 8기 중에도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다수였다. 

이들은 나중에 5.16혁명의 주도세력이 되며 중앙정보부 창설멤버가 된다. 

경찰 대공수사관 중에도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많았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서북청년회를 극우정치깡패집단으로 묘사한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지역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월남한 청년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이들은 남한사람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것을 알고 충격을 받고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며 북한 바로알기 강연회를 시작한다. 

좌파들이 강연회를 테러하면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을 살해하자

서북청년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했다.  

제주 4.3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을 계기로 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침투해있다는 것이 드러나자 군대에서는 대규모 숙군이 이루어지고 

군인을 선발할 때 반공의식이라는 기준이 중요해졌다. 

이 때 서북청년회 멤버들은 대거 군에 입대한다. 



최초의 북파공작대 호림부대 

1949년 북한은 400여 명의

대규모 인민유격대를 백두대간을 통해 남파시켰다.

국군 8사단이 급히 출동해서 토벌에 나섰지만 100여 명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너희가 내려오면 우리도 올라간다.’

남측 군 당국은 북측의 인민유격대에 상응하는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호림부대는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국방부 산하 유격부대로 창설됐다.

서북청년단은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월남한 평안도 청년들이 구성한 단체인데,

흔히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하는 데서

부대의 명칭을 호림부대로 정했다고 한다.

1949년 6월, 500여 명의 대원이 강원도 설악산과 

양양 일대를 통해 북파되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강력한 소탕 작전에 휘말려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살아 돌아온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아래 영상은 북괴군에게 생포된 호림부대원들이 재판을 받는 모습. 

 




KLO부대가 평안도와 황해도 등 북한 서부지역을 담당했다면 

영도유격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침투했기에 북한 동부지역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다. 

영도유격대는 CIA가 운영했는데

영도유격대 중 해상침투를 주로하는 해상대는

한국인 최초로 UDT훈련을 받았고

오늘날 UDT의 뿌리로 여겨진다. 












국군 포병대 또한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되었다. 

이때의 편성과정에 대해 당시 제1포병 대대 부(副)대대장직에 있었던

장경석 장군(예비역 준장, 이하 생략)은

“포병대대가 창설되던 1 9 4 8년도는 아직 징병제도가 실시되지 않았고

시골에 찾아다니면서 모병을 하던 시절입니다.

’4 6년도에 보병들이 창설되었을 때도 충원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포병을 창설하려던 때에 마침 공산당이 싫어서

고향을 이북에 두고 남하한 인원이 약 3천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입니다.

이들은 남쪽에서 반공 투쟁을 하던 중 공비들이 여기저기서 준동하자

각자가 제주도에까지 흩어져서 경찰 또는 국방경비대 소속으로 공산당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포병이 생긴다’고 하니까

서북청년단 회장(문봉재)의 명령하에 모두 남산으로 모여들었고

나는 이들에게 포병으로 와 달라는 교섭을 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모여든 3 , 0 0 0명중에 1 , 2 0 0명은 경찰 또는 보병( 1 8연대 등)으로 가고

1 , 8 0 0명이 남았는데 이들은 남산에서 출발해서 세종로에서 사열을 한 다음

영등포로 걸어서 들어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김계원 장군, 이희태 대령도“6개 대대가 편성되었을 당시 제1포병대대는

대부분을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편성된 반면 2대대는 과반수 정도,

3대대는 1/3 정도가 서북 청년단 출신이었습니다.

6·2 5가 일어나고 초기 전투를 치르는 동안 온전히 살아서 조직적 으로 빠져 나온 포병대대는

제1포병대대뿐이었는데 이는 서북청년단의 정신력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한다.




김구를 처단한 안두희 
서북청년회 출신, 포병장교, 육사 8기




육사 5기와 8기는 5·16 군사혁명의 주역이었다.

7기는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기와 8기 대부분은 서북청년회 출신이거나 관련자였다.

주로 1928년과 1929년 출생으로,

이 기수에는 군 경력자를 중심으로 뽑은 6, 7기와는 달리

민간인을 대상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많이 지원했다.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정부 수립 이후 대거 군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8기생 중에 많은 수를 이들이 차지했다.

5기와 8기는 어느 기보다 나이, 학력, 출신 등에서 동질성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았다.


5기는 1947년 1월 입교하여 1948년 4월 380명이 소위로 임관했으며,

5·16 군사 정변 당시 일선 부대의 사단장이나 참모장으로서 실병력을 동원한 주역이었다.

이들은 혁명 후 요직을 차지했고, 5기생들의 혁명 참여는

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인 박정희 대통령은

1947년 9월부터 교관으로 근무하며 5기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8기생은 1948년 12월 7일에 입교했으며,

거의 70% 이상이 서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5·16 군사 정변을 초기부터 주도했다.

8기들은 육군 본부 정보국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다.

졸업 후 거의 전부가 일선 소대로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으나,

1등에서 20등까지는 육군 본부로 발령이 났다. 5등까지는 육군 본부 작전처와 군수처로,

6등에서 20등까지 15명은 정보처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육군 정보국에는 유격대 출신들도 편입되어 있었다.

이 부대들은 휴전 회담 이후에 해체되어서

일부 병력은 육군 정보국 첩보 부대(HID) 혹은 논산훈련소 교관 요원으로 들어갔다.

4·19 이후 8기들이 정군 운동을 주도하면서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일은

서북청년회의 김성주를 살해한 원용덕을 군에서 제거한 것이었다.

김성주는 KLO 부대의 공작원을 모집할 당시 서북청년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서북 출신들을 주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