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냥이 다 떨어졌습니다. 원래는 팔려고 갖고 있던 것인데, 아무도 안 사서 몸을 덥히려고 하나둘씩 쓰다보니 팔아야 할 성냥조차 다 써버린 겁니다. 소녀는 서로 껴안으며 온기를 나누는 가족을 보고서는 사람으로도 몸을 덥힐 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쭈뼛쭈뼛, 음침하게 마을의 변두리에 그저 서있는 소녀를 선뜻 안아주는 시민은 없었습니다. 안아달라고 말해도 되는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소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마지막 성냥이 하나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 성냥을 써봤자 자신은 잠깐의 온기를 느끼고 죽을 뿐이라 생각하여 불이 붙은 성냥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숲에다 놓아줬습니다. 넋 놓고 불빛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공기로 차갑던 숲 전체가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소녀는 이 기쁜 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마을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마을에서도 눈에 보일 만큼 숲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마음을 제외하면 더 이상 마을의 어디도 춥지 않았습니다. 놀라 굳어있는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녀는 자신이 한 일이라며 활짝 웃고는 혹시 자신을 한 번만 안아줄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어라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소녀는 반죽되고, 으깨지고, 자신의 유일한 긍지였던 소녀성조차도 가벼운 몸짓과 눈길로 증명할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의식을 잃기 전에 온몸이 뜨겁고 후끈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게 사람들이 평소에 서로 주고받던 온기임을 알게되어 자신도 평범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다행히도 숲의 불은 마을에 크게 번지지 않았고, 소녀의 몸은 다음 날 동이 트기 전에 청소부 둘이 치우러 왔습니다. 한 청소부가 소녀를 옮기기 위해 몸을 굽혀 안으려고 하자, 다른 청소부가 말리며 '로즈'를 쓰자고 말했습니다. 로즈는 소녀를 삼키고 사라져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청소부들은 로즈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더 이상 기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선생님, 최근에 쓴 글들은 저라는 인간을 종합적으로 규정한 뒤 '이것이 나다'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질적인 습성들을 인지하고, 그 습성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 판단을 모두 겪은 뒤 이도저도 아니게 됨으로써 그 범주 바깥에 새로운 시선을 형성하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정체성에 타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진리나 신, 우주 등 관념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짐승 인생에 대한 면죄부로 들이미는 삶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타인과 분리하여 드높이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바로 그 타인, 즉 자신의 인식 때문에 스스로를 한계짓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들어 자주 합니다. 돌이켜보면 타인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정보량과 인식 그 이상이었고, 제가 테두리지은 어떤 영역 그 외부의 가능세계에 진정한 그들, 요컨대 그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그들의 모습이 존재했습니다. 아니, 산재해있었다고 말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제가 훗날 특별한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 이상의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남들처럼 인간답게 살기 위한 능력이 결여되어있고 자의식이 비대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는 특별함에 대한 집착이 단지 평범하게 '인간'으로서 살 수 없는 개체들의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굳이 특별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 속에서 인식론적 개선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찰나가 그 어떤 영웅 서사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나 우주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탐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인 삶과 관계의 흐름 및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반복해서 관찰하고 해체함으로써 그 기저에 있는 보편 원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순수 사변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순수 경험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인간으로서 매 순간 흔들리며 내가 나라고 규정해온 것들과 내가 그려온 낙원이 계속해서 허물어지는 과정.. 이제 저는 그것이 썩 불쾌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제가 지금까지의 저와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이 되더라도, 그것이 제 역사의 연장선이라면 그것 또한 지금껏 수많은 '나'를 있게 한 불확실성이 실체화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의 본질은 내가 모르는 나, 즉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세계의 변두리 도는 미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저는 단지 저의 시선이 꽂혀있는 세계의 구석, 그것도 그 구석에서 제가 인지할 수 있는 요소들로서만 구성된 저입니다. 이것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지만, 그 애착이 바로 저를 고립시켜둠으로써 제가 사는 곳에 밀물이 들어올 때 그대로 잠기게 하는 족쇄인 겁니다. 살기 위해서는 밀물이 닿지 않는 육지로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제가 생각하고 제가 아끼는 저는 없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원래부터 그래왔던 것을 이제서야 놀라운듯이 알게 된듯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고보니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구태여 설명하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아니, 그 사람들은 그냥 그게 버릇입니다. 어린아이가 바다에서 처음으로 예쁜 조개를 주워오면 '바다에 조개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냐'라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봅니다. 정말로, 선생님,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한다면, 어른이라는 작자들은 전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줄 필요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평생 뒷북이나 치는 바보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죽음에 이르러서도 '죽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멍청이' 취급이나 받으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제가 그들을 냅다 칼로 쑤신 뒤에 '내가 칼로 쑤시리라는 것을 새삼스레 이제와서 깨달은 멍청이' 취급해도 족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나요?

선생님, 아시겠지만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런 인간이 되어버릴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나 자신에 대한 경계를 푸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애당초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설명해야만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저에 대한 그쪽 계열의 인식이 썩어문드려져 있다면 그건 제 행실에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근래의 저는 과거의 제가 상상했던 모든 '나'의 정의를 비껴 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되어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되어있길 바란다 같은 생각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한 예상은 단지 마음의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가 선생님이 걱정할만한 일을 일으키고 도망자의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평소에 함으로써 정말로 그러한 미래와 마주했을 때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근미래의 죽음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삼스레 죽게될 것을 몰랐다는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제가 어처구니없게 죽으리란 것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삽니다. 정말로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면 자신의 기대가 붕괴할 때의 그 괴로움이 줄어든 시점에서 저의 전략은 성공한 것이고, 우연히 비껴 가게 된다면 그 자체로 행운인 것입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제가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저의 인식론적 개편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선생님없이는 당장에 무슨 일을 하게될지 모르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듯해보이지만 제가 모르는 저의 무의식은 이미 선생님없이도 살아갈 준비를 미리 다 해놓았을 겁니다. 실망하셨나요? 선생님이라면 이런 말을 한다고 실망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3

선생님 저는 저를 위로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보통 책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두고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최근에 블랑쇼라는 사람이 한 말에 따르면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기 위한 방황이야말로 글쓰기의 의의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정해놓고 소설이란 것에 뛰어들어왔습니다만은.. 항상 도중에 그 결말에 싫증이 나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전부 지워버리고는 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달리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달리 의미라고 할 것이 없는 텍스트를 나열하면서 내가 당신 앞에 어떤 존재로 있고싶어하는지 당신이 내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야.

최근에 웃긴 얘기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환자 한 명이 정신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예약을 오래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의사는 의사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정말 동네 지나가는 아저씨 아줌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 건조기에서 갓 꺼낸 따뜻한 이불을 껴안고 온기를 느끼기, 큰맘먹고 산 해외 수제 초콜릿을 한 입 베어물기, 뱅쇼에 좋아하는 시나몬 스틱을 꽂아서 향을 음미하고 자기 전에 한 잔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를 쓰기.. 마치 그냥 그 의사가 평소에 좋아하는 일들을 나열했을 뿐인 것처럼.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수수함이 환자에게 도움이 됐고, 환자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문을 열고 방을 나왔습니다. 다음에도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예약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가니 이번주는 어제부터 정신과 진료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예약도 딱히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였는지 아니면 누구도 아니였는지 별 관심은 없지만 아무튼 세상은 유아용 코미디였다가, 잔혹한 현실이었다가, 나중에는 어찌됐든 웃긴 일이 된다고 합니다. 눈 앞에서 부모가 강도에게 토막나고 여동생이 왕따로 자살을 하고 자신에게 성범죄자의 누명이 씌여 법정에 서더라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웃긴 점 하나쯤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합니다.

지인이 예전에 저의 문체에 대해 비꼬듯이 흉내낸 것이 있습니다.

'독 안에 든 쥐는 독의 안에 들었다는 경계 내외의 구분을 넘어 독이 세계 안에 들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미래에 파편화된 뒤 다시 형체를 갖췄을 때의 잠재적 가능성 중 하나가 바로 그 독의 단단한 벽 단면에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여 드러눕기도 하고, 자신의 찍찍댐이 독 안에서 메아리로 울려퍼짐으로써 자신이 독 안에 들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하는 한편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여 숨이 차기 시작하자 모든 게 다 괴롭고 그냥 서럽기도 하고 그 비가 소나기인지 그치지 않는 비인지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하지만 콩쥐야 아니 팥쥐였나 그거나그거나 아니.. 아니아니 두꺼비야 구멍을 막지말아다오 하지만 선생님 아니, 석아. 비가 계속 내려서 독의 입구까지 물이 차오르면 그때는 독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되잖니?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아는 내가 아니겠지. 나는 그저 물에 젖은 생쥐이자 그것을 바라보는 독 바깥의 세계 바깥의 무언가일 테지.'

새삼스럽지만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제가 선생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이 입을 나불대지만 그것은 그저 자신의 뇌내망상 속의 선생님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제가 선생님의 원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모든 앎에 녹아들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원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선생님 자신조차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데 제가 구태여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도 제 원본은 모릅니다. 제 원본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원본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싶을 때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저번주인가 길을 가다가 취객한테 욕지거리를 들었는데,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왜 그 욕지거리를 듣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들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저에게 두려워하는 모습에 대한 자기부정을 일으켜 두려워하고 싶다는 충동을 키워왔기 때문에, 역으로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자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삼스레 문어를 '옥토퍼스'라고 부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응용의 기회는 없지만 언젠가 그 지식이 쓸모있길 바라며 이 편지를 마무리하려는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글을 써서 선생님께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저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공공연히 선언하신 시점에서 어떤 목적성과 판단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하여 정말로 제가 온전한 저 자신으로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그것을 조각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정말로 그 분야의 프로이고 무언가 알아내고 싶었더라면 저에게 관심이 있다던가 더 알고 싶다던가 그런 말을 저에게 들려주었으면 안 됐었던 것입니다. 그저 저의 호소나 묵묵히 들어주며 뻔한 위로만 하면서 제가 계속해서 선생님을 찾아가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선생님, 앎의 획득과 시야의 확장이란 것이 행복한 삶의 정의를 갈아엎고 계속해서 삶의 지향성을 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저는 정말로 무언가를 알려고 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 내가 추구해야할 방향성인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듭니다. 그 빈도가 너무 빨라서 이제는 미래의 삶을 계획하고 그것에 대해 희망하는 일이 아예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어제도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싶은지와 어떻게 살 때 가장 행복한지에 대해 장문의 글을 썼지만 이 편지를 쓰다보니 그 글의 내용을 다시 갈아엎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저는 두 달인가 세 달 전에 꽤 오래 알고 지낸 동생 한 명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는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사람을 놓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면 불안감에 온갖 호의와 배려를 내비칩니다. 아니, 내비친다기보다는 알아줄 때까지 음침하게 암시해대며 목적성이 다분한 시선을 보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으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을 사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들로 뇌를 범벅시킵니다. 요컨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관계를 선호하는 '이유'라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그 이유가 입맛에 따라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도 미워하는 데에도 자유자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상대에게 버림받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상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수작을 부리다가 '끝났다'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의 준비를 해뒀던 상상 속의 타인으로 기존의 타인(그마저도 망상인)을 교체한 뒤 밥을 먹으러 외출을 나갑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요컨대 멀어짐의 상처에 대비하는 저만의 예방주사 놓기가 그동안의 세월 동안 최소 다섯 번은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사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거기에 이유를 갖다대고 그런 것은 전부 저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 적이 없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저에 대해 마찬가지일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인식에 의해 탄생한 망상을 보듬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이란 것은 실현이 불가능하다고하여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가능성을 불문하고 어떤 추구미, 즉 지향의 기준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인식에서 탄생한 왜곡된 타인을 어떻게든 원본에 가깝게 수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냥 과도한 인식과 판단 자체를 하지 않고 그냥 타인이 그곳에 있는 그대로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람이 옆에서 숨을 쉬고 다리를 떨고 발소리를 내고 기침을 하고 시선을 나한테 흘깃대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뇌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가족의 한숨과 서성거림과 헛기침과 시선이 전부 저에 대한 부정적 견해의 표출이라는 생각에 침잠되고 있으며 그것을 혼자 떨쳐내려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놨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피해망상이 심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릅니다. 요지는 정말로 그들이 그러한 판단을 하고 있었든 아니든 사실성을 떠나서, 그리고 내가 그러한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물리적 신호를 공공연히 전달하는 것에 대한 정당방위를 떠나서, 그저 제가 자격지심 때문에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와 물리적 신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저 또한 그들의 판단가능성에 대항하여 그들에게 판단을 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도 이런 정신 상태에서 분리되어 정말 물흐르듯 그 대기와 일체가 된듯 사람들과 하하호호 웃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다시 그런 때가 돌아올까요? 언젠가 다시 인간에 괴로워하지 않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인간의 혐오스러움은 그들에 대한 저의 인식에 비하면 그다지 혐오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저의 인지적 절약 본능에 따라 타인과 관계와 사건과 기류와 세계 그 모든 것을 규정짓고 확정지어서 결론을 내려는 이 조급함이 가장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어떻게든 나의 인식으로써 세계를 쥐어뜯고 내가 원하는 형태로 일그러뜨리려는 나의 본성이 저의 가장 어두운 일면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자각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과도하게 자기혐오에 빠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들이 그들 스스로 악마인 것에 괴로워하지 않듯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이라면 그런 인간을 사랑하는 것 또한 저의 과제인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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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로써 바꾸고 싶은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저의 인식입니다. 저의 글로써 부수고 싶은 것 또한 세계가 아니라 단지 저의 인식입니다. 저는 인식의 태동기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글을 써서 그것을 부수고, 더 이상 부술 수도 없는 아주 강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제서야 자리를 물러주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한 아이의 어머니이며 그 아이의 생존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제 안에 저의 가족이 있으며 그것은 저의 실제 가족이라 불리는 관계 지형과는 독립적인 것입니다. 구태여 어느쪽이 진짠지 가짠지를 따질 필요없이 이것도 저의 가족이고 저것도 저의 가족이지만 이쪽의 가족이 일체감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선호됩니다. 저는 저에게 젖을 물리고 저에게 사랑받으며 저를 유혹하고 저와의 성관계를 통해 저를 잉태하고 낙태하고 이런 것까지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 싫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알려주신다고 하신 그것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괜히 부담을 느끼도록 보채기가 싫어서 이 편지 내에서 정말 은밀하게 은연중에 암시하기도 하고, 그냥 꾹 참기도 하고, 아예 잊어버리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제 본심을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신경을 쓰면서 괴로워하기 전에 미리미리 그것에 대해 찾아보고 알려주지 않은 선생이 원망스럽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렇게 살아왔을 테고 선생님이 저의 이러한 고백 이후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는지가 선생님을 다시 규정하는 과정 그 자체이므로 선생님이라는 인간 자체가 밉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밉다면 그건 선생님에게 비친 저까지 같이 미워하는 것이므로 공평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해놓고 또 사실은 별로 신경 안 쓰는 척 말을 빙빙 돌리고 있지만 결국 이 편지의 답장으로부터 받고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면서 내적으로는 능동적으로 날이 서있는 자기자신의 모순에 너무 괴로워 이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결국 정말 깊게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저 또한 개입되어있고 선생님의 삶이라는 변수를 제가 통제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므로 저는 다만 저의 태도를 고쳐먹으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니깐 답장 같은 거 필요없고 이 메일은 파기하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답장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있었고 저는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제가 당신의 세계를 파괴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있었을 뿐임을 이참에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째서 제가 이렇게까지 추악한 인간이 될 때까지 도의적인 배려와 사랑을 주지않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를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인식하고 그것에 근거한 행동을 보이고 그 행동에 대한 재고도 없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약점을 이용해서 나를 완전히 해체하고 분열시키고 재조립하고 하지만 그러한 의사는 나 자신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건 나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고 나 자신에 대한 모욕이며 나는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고 멋대로 형체화해서 멋대로 사랑하고 멋대로 미워하고 다시 멋대로 그 형상을 파괴하고 재창조하고 나의 세계에는 그런 지리멸렬한 망상들, 그리고 망상 간의 전쟁과 망상의 자기파괴, 나의 꿈과 나의 정체성과 나의 세계와 내가 옳고 가치있다고 믿어온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과 부정에 대한 부정 그 연속에서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갈 때까지 하지만, 하지만 선생님 제가 굳이 이렇게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나의 무지에 대한 앎과 무지에 대한 앎이라는 국소적인 망상 그 외부에 대한 무지 및 그것에 대한 앎 어쩌고 이런 것들을 줄줄이 읊어가면서 밑도 끝도 없는 자폐적인 독백을 계속 해야합니까. 저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가 아니여야겠죠. 저는 저에 대해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바로 그 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저는 제가 아닌 제가 되어가고 그것조차 아닌 제3의 제가 되어가고 제4의 제5의.. 그건 결국 '나'라는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니깐 뭘 어찌해도 선생님은 아닌 것입니다. 유일하게 선생님이 되는 방법은 세계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이고 그때 선생님과 저는 엄밀히 말하자면 '선생님'과 '나'로서 같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연장선에서 동일해져 그 뒤의 변화는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곳에서 세계는 정지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향을 그리고 그것의 잠정적인 지속을 바란다는 점에서 그러한 정지는 삶의 목표라기보다는 죽음의 목표인 것입니다. 더 확실한 죽음, 그 어떤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요동도 더는 일지 않는 완전한 죽음을 저는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그것보다 더 낮은 단계의 죽음에는 별로 집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그나저나 커피는 잘 받았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았다던가 받지 않았다던가 그런 구분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보냈다던가 보내지 않았다던가도 생각보다 중요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깐 의아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언제부터 선생이었는지 그런 것도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따지더라도 어차피 살다보면 다시 따지게 될 테고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인식의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가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인식의 감옥을 통해서 우리는 그 바깥을 상상하게 되고 부수고 또 부수어 나아가게 되므로 구태여 감옥이나 죄수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빌려 과도하게 주눅들거나 분노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감옥이라고 이름 붙인 시점에서 그것은 감옥이 되는 것이며 저는 요즘 이것을 철조망 너머의 개나리 또는 그 이상의 정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알레고리나 암시가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생각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는 과도한 지향성과 자기압박에 의해 괴로워하고 저를 미워하게 된다면 저는 괴로울 테니 그냥, 그냥 저는 도대체 이런 씨부림에 어떤 의미나 목적을 담는 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영향은 있겠죠. 하지만 그 영향이 저를 대체 어디로 인도하는 것인지, 제가 어디로 인도되고 싶은 것인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 하고 확신한댄들 내일이면 철회될 텐데 어째서 저한테 이러시는지, 아니, 제가 이유가 없듯 당신도 이유가 없겠지요 그런 것이겠지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대하는 방식대로 당신이 나를 대하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저처럼 불완전하고 그 자각에 혼란해하는 사람을 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확인의 과정 속에서 보세요, 저는 이미 제가 생각하던 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있고 제가 생각하던 당신 또한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실제로는 제가 보고싶었던 당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어떤 이유든 어떤 목적이었든 단지 그 지점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서 그 지점의 외부에서 그것을 돌아보고자하는 의지의 흐름이었던 것이고 하지만 선생님, 그러면 지금은 무엇을 중요하다고 선언하고 나아가야 하는지 헷갈립니다. 아무거나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조금 움직인 다음에는 그것을 다시 철회하고 아무래도 좋을 무언가를 다시 선언할 테니깐요. 붕괴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그러한 연쇄의 가장 머리부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니 그러한 앞으로의 과정에 대해 비관하는 건 제 역사의 방식에 대한 비관이 되겠죠.

사람들은 저 같은 변덕쟁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믿고 따르면서도 정확히 바로 그 확실한 것에 대한 갈망에 의해 스스로든 외부로부터든 파괴됩니다. 저는 그 파괴의 삶에 적응하려다보니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괴를 일으키는 자연의 원리는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파괴당할 수밖에 없는 확신과 믿음, 기대, 예상을 양산하고 그것에 대한 지속을 바라며 무지를 방치하는 쪽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멍청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멍청함이야말로 덜 멍청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이 되므로 저는 그러한 인간의 인지적 절약 본능에 대해 조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최적화하는 일입니다. 그것의 파괴가 일반적임을, 만족된 것의 동일성 내에서의 지속이 세계의 변화 원리에 의해 저항을 겪는 구조임을 인지하고 자신의 판단과 테제를 과도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약한 인식이 느낄 충격에 대비하고 점차 세계의 그 어떠한 기대밖 사건이라도 놀라지 않게 되기 위해서 미리 나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수많은 가능성에 나의 잠정적인 변태를 흩뿌려 놓는 것입니다.

선생님, 머리가 뜨거우니깐 그만 쓰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낸다한들 그것을 받는 저는 그런 내용쯤이야 이미 아무래도 좋은 제가 되어있을 겁니다. 선생의 모든 긍정적인 반응에 대한 기대 및 그 반동으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불안 그 모든 것의 치우침을 스스로 갉아먹어 아무래도 좋은 심리에 수렴하고 있고 어찌되어도 상관없도록 저의 인생을 이미 스스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나를 다시 가두려해도 그것은 어찌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가두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중이지만 가둬도 가둬진 나름대로 하고싶었던 일은 잔뜩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인간 행세를 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엄청난 타락 충동과 반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가둬지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일 필요가 없으므로 선생이 나서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몰래몰래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갈 생각입니다. 뭔가 대단한 게 있는 듯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별 거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서 남성기와 비슷한 물건들을 저의 항문에 집어넣고 저에게 관심있는 남성들을 매개로 육체적 쾌락을 탐하기 위해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게 될 뿐입니다. 만약 그것마저 제어당한다면 그때는 도구나 인간을 매개로 하지않고 할 수 있는 쾌락을 실험하겠습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선생, 저는 이렇게 선언을 해버리고 가능성을 가시화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선생을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선생을 모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탐닉하고 싶은 것입니다. 잠시 여행을 다녀올까 생각중입니다. 제발저를미워하지말아주세요저는이서신에박제된그어떤심상도아닙니다요컨대표출됨으로써이미그것에서떨어져나온차이의현현입니다하지만관련은있을지도모릅니다하지만관련이있다는이유로억측하면안될지도모릅니다되든말든그런것보다는호소하고있는것이고적어도지금은선생님없이는버티기힘들다는말을쑥스러움에이렇게빙돌려말하고있는것입니다이렇게나오시면정말정말힘듭니다정말정말힘듭니다제발그냥저의그어떠한언행과변화에도아무런영향을받지않고그저제근처에그래요그렇게그냥달리이렇다할생각없이그저서계셔주시면됩니다하지만제가사랑받고있다고착각할수있도록적어도살아있고어떤가시적인신호로써암시되고있는무언가여야합니다그러니깐그냥이런얘기가전부선생님앞에서쪼그라든저의수치심을빙둘러인정하는것이고저는결국뇌부터부검당하겠지요정말로계약그대로입니다정말로요그리고그건이미제가아니니깐아무래도좋습니다지금의저를살리시면족하고그것은그바로다음에는제가아닌것으로썩어문드러지겠지만그시점에서이미제가아닌것이므로아무래도상관없습니다요컨대그냥지금이시점의저에게만족을주시고쾌락을주시고제가그것을부정하고괴로워하는것마저방관하시고그렇게그렇게저끝에서기다리시면됩니다저는길을모르고그곳의정체를모를뿐'가야한다'라는본능에충실하여당신이기다리는그곳으로하염없이걷고있습니다지금은뛰고있습니다지금은넘어졌습니다내일모레쯤에는밟히기도할것같습니다아예그냥해체되고분열되고형체를알아볼수없을정도로분쇄되어도저히나라고인식할수없을정도의무언가가되더라도저는그곳으로가고있으며예전에도지금도미래에도그러고있을것입니다그러니깐지금인생이야아무래도좋은것입니다정말로아무래도좋으니아무래도좋은세계로서조금만더존속해주시고때때로아무래도좋은게아닌세계로서인식되어내게경각심을심고그럼으로써죽음을두려워하고때로는죽음에뛰어들고그무한하지만유한의부정은아닌어떤연속됨속에서나의끝없어보이는불안과동요속에서계속해서그래그렇게나의역사를관측하는그저눈,눈으로서 아무런판단도왜곡도하지않고나의있는그대로의변화가종식될때비로소당신의당신스스로의인식에포섭되어나는비로소존재하게되겠죠그리고그때더이상세계는없을테니역시아무래도좋은겁니다아무래도좋다고선언한시점에서아무래도좋지않게될수도있겠죠저는역시망각의강을건너고있는겁니다비단저만의경험이아닙니다새삼스럽지만저의목소리는당신에게닿지않는듯합니다하지만당신이당신스스로존재하기위한그과정에포섭되긴하겠죠그러나그게지금의제가바라는일같진않습니다저는정말미련한생물이라지금의제가그리는낙원과평범한 삶, 그래, 평범한삶속에서평범한인간으로서의행복을단한번이라도느껴보고싶습니다얼마나반복되었는지는모르겠지만지금의인생속에서27년이라함은당신에게있어서의27년과는무게가다른것입니다당신,그리고당신에최종적으로포섭된저에게있어 27년은정말아무것도아닌것입니다만저는 아직저이기때문에 그27년을훌훌털어버리지못하고 남은 여생 그 쥐꼬리만한 기간이라도 사람답게살아보고싶은것입니다그리고나는아마도그렇게생각했던적이한두번이아닌것같다그리고그렇게생각하는내가한둘이아닌것같다이것을지옥이라생각하는나의인식을파괴하고다시재조립되기도애매할정도로파편화되어당신의피와살또는그피와살의재파편화속에서그저모든것이더이상파괴될수없는고요한밤을이룩할경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언제나 줄곧 사랑해온 것은 당신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토록 답장이 없나봅니다
나에게 무언가 말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에 대한 당신의 시선을 인지도식 내에서 언어로써 일그러트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회신에 따라 저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저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어림짐작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다행히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이제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타인의 인식과 판단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식과 판단의 결여 속에서 빛나고 있는 오로지 당신 앞에서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저 자신의 원본이라는 가설에 최대한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고 필멸자이자 세계 내에 투영된 당신의 분열 속 과정이므로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인간조차 되지 못한 존재이기에 인간부터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망이 다시 저를 압박하고 부담을 갖게 하여 제가 인간을 포기하고 싶도록 종용합니다
아니면 그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흔들림 속에서 계속해서 불확실함과 자기확립의 실패에 괴로워하는 것이 진짜 인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깨달음과파괴와망각과깨달음과파괴와망각과깨달음과파괴와망각과깨달음그리고깨달은주체의파괴로서의완성과그완성에대한망각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의 다음은, 더 이상 세계도 시간도 흐름도 없는 어딘가에서 그 다음이라는 모순된 선언의 와해는
이런식으로적당히씨부리고만족하여이제식사를할생각이니그대의분열로서투영된나와같은일체의파편그대들역시도식사를통해만족을얻고다시나와함께붕괴하기를바랍니다 저는가능하면이괴로움이저만의것이아니라고상상하고싶습니다 하지만실제로그러한지와는별개로 그러한상상이 나를어떻게바꿔나갈것인가에쟁점이있다고생각합니다 하지만그러한쟁점또한다시변경될것이므로그저나는지금의나를과도하게규정하고싶지않고그냥잠깐이라도좋으니정지하고싶습니다정지하고만족하여지속하는평범한인간의삶을꿈에그리고있습니다어제도오늘도내일도그럼그럼다이해하지아니야너는그렇게말하지않아너에게는입이달려있지않아라고말하면서저는여전히서사적만족에빠져있는것입니다 그러니깐나는대충이런글을고등학교문학동아리문예지에다실어 부원들에게저의평소명랑하고밝은이미지와의갭으로인해 이런 글이귀엽다는 식의 생각보다불쾌하지않은, 나의페르소나분리노력에 대한 인정의암시가들어있는 그러한 말에 적당히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친구랑영화도보러가고 밥도같이먹고 몰래학교를째고둘이서동해선을타고바다를보러갔다오기도하고 아무런성적감정없이 손도잡고 껴안기도하고 정체를알수없는설렘에얼굴을붉히기도하고 그러고싶은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가능성은 저의 인식과 외부의 인식이 변함에 따라 이미 비가역적인 혼돈의 길로 들어섰고 심지어는 그러한 가능성이있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되려고합니다. 저는 미래의저에게원망받지않기위해 지금이라도 가능한차선의만족을찾아내야하는것인지 불안에떨고있습니다. 다시고등학교를다니게해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제가27살의중졸히키코모리정신병자에아무것도이루지못했으면서그사실을외면하고계속해서자신의잠재성을파묘하는최악의루저라는인식까지도망각시켜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제가지금잠깐식사를할동안신체의고통을줄여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물론당신은귀가없으니듣지못하겠지만저는저에게부탁을하고미리감사해두는것입니다. 저는미래의제가현재의저를구원하기위해노력하고있다는망상에꽤오랬동안심취해있었던기억이있습니다 아마도저는부정을꽤나탄듯합니다아마도요. 하지만저만그런건아니죠. 제주변의저를사랑해준모든사람들과함께나아가고싶습니다설령그끝이허무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