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약속

 

비가 내린 뒤의 새벽이었다.

 

젖은 골목의 빛은 희미했고

가로등 아래 고인 물은

조용히 하늘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오래된 절망처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세상은 너무 빨리 식어갔고,

사람들의 사랑은 계절보다 짧았으며,

마음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갈 뿐

끝내 깊이 닿지 못했다.

 

어떤 밤에는

하나님조차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너진 날들 속에서만

나는 아주 작은 소리들을 듣기 시작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

새벽에 우는 이름 모를 새,

빛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지는 화분의 잎,

그리고 울다 지쳐 잠든 사람의 숨소리.

 

그 모든 연약한 것들 안에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있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거대한 기적보다

작고 부서진 생명들 속에

더 오래 머무시는 것처럼.

 

나는 그제야 알았다.

 

주님은 언제나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조용히 세계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상이 힘으로 움직인다고 믿지만,

실은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위해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사랑 하나가

세상을 겨우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다는 것을.

 

십자가도 그랬다.

 

세상은

힘 있는 왕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상처 입은 몸으로 오셨다.

 

못 박힌 손과

찢긴 옆구리와

버림받은 침묵 속에서,

 

주님은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 들어오셨다.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절망보다 더 깊이 내려갈 수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완전한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대신

넘어져도 다시 기도하는 사람,

울면서도 사랑하려는 사람,

끝까지 빛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들의 제국처럼 오지 않고,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조용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인간은 쉽게 서로를 상처 입힌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욕망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많은 이들이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걷는다.

 

나 역시 수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새벽은 매일 다시 온다.

 

빛은 포기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고,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세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신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인생이 폐허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고.

 

눈물 젖은 땅에서도

언젠가 작은 꽃 하나는 피어나고,

길 잃은 영혼 위에도

끝내 은혜는 내려앉는다고.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모든 슬픔 너머에서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