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습한 기운이 내려앉은 심야, 불 꺼진 방 안에서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한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의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휠을 내리고 있었다. 화면 상단에 박힌 로고는 ‘일간베스트 애니메이션 게시판’.

과거 수백 명의 유저가 북적이며 십덕 토크를 나누던 그곳은, 이제 글 하나 올라오지 않는 정막한 유령선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손을 바지에 넣고 읊조렸다.
“...정말 다 떠나고 아무도 없네.”

그때였다. 새로고침. 알림 팝업
[ xxx.xxxx 했습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이 유령 게시판에서 누가? 마우스를 가져가 클릭하자,
보낸 이의 닉네임이 나타났다.

[꽃날귀]

남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꽃날귀. 그녀는 과거 애게의 유일한 빛이었던 ‘암베’였다.
애니 정보를 성실올리고 공미게와 대게 그리고 블아게에서 인기스타. 또 정게할배들과 베틀을 뜨던 귀한 존재.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애게의 권력을 잡고 있던 완장 세력, ‘카x’과 ‘딘x’를 필두로 한 친목 무리가 그녀를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픈 카카오톡 링크를 던지며 껄떡대다 거절당하자,
꽃날귀를 ‘철벽녀’, ‘돈미새’라는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했다.

그 오만하고 잔인한 친목질에 지친 귀여운 애게이들은 모두 아카라이브라는 타향으로 피난을 떠나버렸고,
꽃날귀 역시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계정을 삭제하고 사라졌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댓글에는 짧은 링크 하나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직도 배고프니? 네, 네, 우리 동생. 내가 풀어주던 수학 문제, 마저 풀어야지?]

“누가 장난치는 건가?”
남자는 침을 삼키며 링크를 클릭했다. 화면이 전환되며,
과거 애게의 전성기 시절 캡처본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x링과 x재, 그리고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친목 유저들의 닉네임이 있었다.

화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모니터 스피커에서 기괴하게 변조된 랩 소리가 흘러나왔다.
“300명이 정지? 멀쩡해 꽃날귀 동생... 누가 이 판을 이겨? 꿈 깨 꽃날귀 동생...”

가사는 점점 뒤틀리더니, 낮고 서늘한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카x과 딘x의 잘못이 있다면... DJ가 국민들이 차려준 밥상을 대통령 되기 위해서 깨버렸던 것처럼... 애게이들이 차려준 게시판을 지들 친목질 하려고 깨버린 게 아닙니까?”

“뭐, 뭐야 이거...!”
남자는 다급하게 브라우저를 끄려 했지만, 마우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키보드의 전원 버튼을 눌러도 컴퓨터는 꺼지지 않았다.
모니터 속 목소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며 이어졌다.

“맹목적인 민심이 있었으니 마음대로 짜르고 마음대로 심고 하지 않았습니까! 딘재 총재가 누구든 찍기만 하면 당선될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오랫동안 애게를 지키던 사람들을 다 자르지 않았습니까!!!”

쾅! 쾅! 쾅!

갑자기 방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을 터인 집이었다. 문틈 사이로 붉은 액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붉은색 만년필 잉크였다. 과거 꽃날귀가 수학 문제를 풀 때 쓰던 바로 그 색깔이었다.

모니터 화면이 순식간에 암전되더니, 웹캠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켜졌다. 그리고 화면에는 남자의 방 안 모습이 비쳤다. 남자의 등 뒤, 어두운 장롱 그림자 속에서 머리가 산발인 한 여자가 붉은 만년필을 든 채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눈은 초점이 없었고, 입은 기괴하게 귀밑까지 찢어진 채 웃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차가운 손을 올리며 귀가에 속삭였다.

“동쪽 전체의 야당을 여당에 갖다 바친 것처럼... 너희가 날 괴롭혀서 귀여운 애게이들을 전부 아카라이브로 갖다 바친 게 아닙니까...?”

남자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여자가 만년필로 남자의 목덜미를 강하게 찍어내렸다.

다음 날 아침, 일베 애니메이션 게시판에는 몇 달 만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 [수학] 미적분 난제 풀어왔다 이기.
작성자: 꽃날귀

내용은 없었다. 오직 피로 물든 방바닥과, 초점 없는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의 시체 사진만이 첨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글의 댓글창에는, 이미 수년 전에 탈퇴했던 X링과 딘X의 계정으로 오직 한 마디만이 무한정 도배되기 시작했다.

네, 네, 꽃날귀 동생.

네, 네, 꽃날귀 동생.


네, 네, 꽃날귀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