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성 정치부 차장

‘도금시대(Gilded Age)’란 말이 있다. 문학가 마크 트웨인이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의 모습을 풀어낸 책 제목이다. 당시 석유라는 새 에너지가 석탄을 대신해 산업 전반에 스며들고, 대륙횡단 철도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전기혁명’인 2차 산업혁명도 한창이었다. 카네기, 록펠러, JP 모건 등 대부호들이 등장했다. 투기 자본이 에너지에 몰리면서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각종 로비로 정치적 혼란도 극심했다고 한다. 한 꺼풀 벗겨내면 치부가 드러나는 도금에 빗대 당시 시대상을 풍자한 용어가 도금시대다.

공공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대가인 모데카이 쿠르츠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 에서 미국 사회가 ‘제2의 도금시대’로 접어들었다고 규정했다. 전기혁명을 인공지능(AI)혁명으로, 철도를 그래픽처리장치(GPU)나 데이터센터로 바꾸면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젠슨 황,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 등이 새로운 카네기, 록펠러란 얘기다. 에너지의 중요성이 유례없이 커진 것도 똑같다.
15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미국
미국·이란 전쟁으로 석유가 19세기 말 도금시대 못지않게 가치가 높아졌다. 이 전쟁의 목표 중 하나는 ‘세계 에너지 공급망 재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전 세계가 지켜본 생중계 연설에서 “이제 미국이 세계 최고 석유 및 가스 생산국”이라며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중동 원유가 세계로 나가는 길목인 호르무즈해협이 아수라장이 됐으니 일단 목적은 달성됐다. 도금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대통령이 국가를 사유화한다는 점이 꼽힌다. 트럼프가 가장 존경한다는 ‘원조 관세왕’ 윌리엄 매킨리 전 미 대통령도 도금시대 끝자락에 재임했다.

공급망 교란은 미국을 사유화한 채 암호화폐, 핵융합, 북극 에너지 및 자원 개발 등 온갖 사업을 벌이는 트럼프 일가에 밑질 것 없는 카드다. 미국은 AI, 양자(퀀텀) 등 첨단 기술 전반에서 중국과 건곤일척의 경쟁을 하고 있다. 미국의 싱크탱크 SCSP는 미래 최적 에너지로 핵융합 기술을 지목하면서 미국이 2030년까지 핵융합에서 ‘특단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 중국에 패권을 내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의 하루 원유 수출량 가운데 90%가 중국으로 향한다는 사실은 이란 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암시한다.
데탕트도 50년 만에 재현 조짐
미국과 러시아 간 ‘제2의 데탕트’ 연결고리도 에너지다. 같은 부동산 재벌이자 트럼프의 집사로 불리는 스티브 윗코프 미 중동특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키릴 드미트리예프 RDIF(러시아 직접투자펀드) 대표와 마이애미, 모스크바를 오가며 수시로 만난다고 한다. 양측이 12조달러(약 1경8121조원)에 이르는 북극 에너지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폭로도 일각에서 나왔다.

외교가 안팎에선 한국이 러시아와 우주, 원자력, 극지 기술 공동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흘러나온다. 자유주의 가치 외교가 설 자리가 좁아진 지금 주목되는 제언이다. 전례 없는 북·러 밀착 분위기에 핵 무력을 완성한 북한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한국으로서도 여러모로 좋은 전략이다. 각자도생의 도금시대 새로운 가치 외교는 에너지 확보를 1순위에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