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한편 썼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바란다




고려(高麗)의 고구려 계승론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기획된 정통성'과 실체적 단절을 중심으로



 

Ⅰ. 서론: '고려'라는 기호와 역사적 실체의 괴리

 

역사 기술에 있어 '계승(Succession)'이란 단순히 명칭의 유사성을 넘어 혈통, 영토, 제도,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의 실질적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한국 주류 사학계는 왕건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불변의 진리로 상정해 왔으나,

이는 실상 신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삼한 재통합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구려 멸망(668년)부터 고려 건국(918년) 사이의 250년은 한 세대가 10번 가까이 교체되는 긴 시간이다.

이 단절의 강을 건너 '계승'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실체적 근거가 필요하지만,

사료를 정밀 분석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고구려와의 연결 고리가 아닌, 신라적 기반 위에 덧칠해진 고구려라는 '외피'뿐이다.

본 논증은 계승론의 허구를 지배층의 인적 구성, 지정학적 실체, 통치 체제의 불연속성이라는 세 가지 축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Ⅱ. 지배 엘리트의 정체성: 패강진 세력의 '신라적' 기원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지배 계급의 연속성 측면에서 고려는 고구려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1. 왕건 가문의 모호한 혈통과 작위적 계보 구축

 

고려 왕실인 개성 왕씨 가문은 고구려 왕족인 고씨(高氏)와 아무런 혈연적 연관이 없다.

『고려사』 세계(世系)에 기록된 왕건의 조상 이야기는 용건(龍建)이나 작제건(作帝建) 등 설화적 요소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신생 왕조의 미천한 배경을 세탁하기 위한 사후 조작의 전형이다.

실제로 왕건의 선조들은 예성강 하구에서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재지 호족'에 불과했다.

이들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당시 패강진(대동강 유역) 일대에 남아있던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정략적 선택이었을 뿐,

생물학적·계급적 정통성과는 무관하다.
 

2. 중앙 지배층의 인적 구성: 신라 6두품의 전이

 

고려의 초기 관료 집단을 형성한 핵심 세력은 고구려 귀족의 후예가 아니라, 신라의 골품제 아래서 좌절했던 신라 6두품 지식인들과 지방 호족들이다.

최응, 최지몽 등 초기 설계자들은 신라의 유교적 학풍과 행정 실무를 익힌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이 구축한 고려의 국가 시스템은 고구려의 5부 체제가 아닌 신라의 관등제와 당나라의 중앙 집권제를 변용시킨 형태였다.

지배 엘리트의 사회적 DNA가 신라의 것을 계승하고 있다면, 이를 고구려의 계승이라 부르는 것은 형질 전환에 대한 오독이다.





Ⅲ. 지정학적 실체와 '북진 정책'의 허구성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가장 강력한 상징인 '북진(北進)'은 실질적인 영토 회복이 아닌, 자국 안보를 위한 경계 확장과 명분론적 수사에 그쳤다.
 

1. 요동(遼東) 상실과 영토적 단절

 

고구려의 정체성은 요동과 만주라는 대륙적 지평에 기반한다.

그러나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요동을 수복하거나 실질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고구려의 진정한 영토적 후계자는 대진국(발해)이었으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할 당시 고려는 이를 방관했다.
 

만약 고려가 진심으로 고구려의 계승자였다면, 고구려의 심장부인 요동을 점유한 거란(요)과 금나라에 대해 타협 없는 영토 전쟁을 수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고려의 외교 정책은 철저히 '반도 내 안보'에 국한되었다.

서희의 담판 역시 강동 6주라는 반도 내의 접경지를 확보하는 성과에 만족했을 뿐, 고구려의 본령인 만주로 향하는 길목을 여는 데는 무관심했다.
 

2. 서경(西경)의 도구적 활용과 묘청의 난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킨 것은 고구려에 대한 향수보다는 개경 세력을 견제하려는 태조의 정치 공학적 판단이었다.

이후 묘청 등이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황제를 칭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되찾자고 주장했을 때,

김부식을 필두로 한 고려의 주류 지배층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여 철저히 궤멸시켰다.

이는 고려라는 국가의 실질적 주인들이 고구려적 상무 정신이나 대륙 지향성을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Ⅳ. 통치 체제와 문화적 DNA의 불연속성

 

국가의 운영 원리와 사회 구조 측면에서 고려는 고구려와 극심한 대조를 이룬다.
 

1. 관료제와 귀족 사회의 성격

 

고구려는 왕권과 귀족 권력이 팽팽히 맞서는 무사 사회였으며, 족적(族籍) 기반의 자치력이 강했다.

반면 고려는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문신 관료들이 국정을 주도하는 '문치 국가'였다.

이는 고구려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통일 신라가 꿈꿨던 유교적 중앙집권 국가의 완성형에 가깝다.

고려의 문벌 귀족 사회는 신라 골품제의 변형된 계승이지, 고구려의 역동적인 신분 구조와는 궤를 달리한다.
 

2. 문화적 전통의 소멸과 불교 국가로의 전회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인 벽화, 기마 풍습, 고분 양식 등은 고려 시대에 들어서며 거의 소멸하거나 급격히 변질되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 수준으로 숭상하며 내세적이고 정적인 문화를 구가했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천손 의식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 세계관이었으나,

고려의 세계관은 성리학 도입 이전부터 이미 중국 중심의 사대 질서와 타협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모순적 형태를 띠었다.

이는 실질적인 독립 자존의 계승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명분론적 차용에 불과했음을 뜻한다.





Ⅴ. 외교적 수사와 '기획된 전통' (The Invention of Succession)

 

소위 '고려 계승론'은 대외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외교적 프레임워크로 활용되었다.
 

1. 대거란 담판의 수사학적 분석

 

서희가 소손녕에게 던진 "우리는 고구려의 후계"라는 발언은 역사적 진실의 고백이라기보다,

거란의 침공 명분을 무력화하기 위한 논리적 방어 기제였다.

당시 거란은 고구려의 땅을 차지했으므로 자신들이 주인이라는 논리를 폈고, 서희는 이에 맞서 '국호'라는 형식적 근거를 들이대어 시간을 벌고 실리를 챙긴 것이다.

이를 국가의 실체적 정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대의 정치적 수사를 역사적 사실로 혼동하는 것과 같다.
 

2. 『삼국사기』와 정통성 확립의 기획

 

고려 중기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는 신라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구려와 백제를 한반도의 역사로 포섭하여 '삼한 일통'의 정당성을 완성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되찾아야 할 영광스러운 과거'로 박제되었고, 고려는 그 영광을 잇는 유일한 적자로 서술되었다.

이는 국가적 통합을 위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역사 편찬 방식이다.





Ⅵ. 비판적 논점: 발해(渤海)의 독점적 적통성과 고려 수용의 전략적 기만성

 

1. 발해의 압도적 고구려 계승 근거와 고려와의 격차

 

고려와 달리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불과 30년 만에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의 혈통, 영토, 외교적 자아 인식에서 고구려와 완전한 일치성을 보인다.
 

  • 혈통적 직계성: 발해 건국 주체인 대조영 세력은 고구려의 별종(別種) 혹은 고구려 가속(家屬)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배층의 대다수가 고구려계 성씨를 유지했다. 반면 고려 왕실은 고구려 멸망 250년 후 출현한 정체불명의 해상 세력에 불과하다.
     

  • 외교적 자기 정체성: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 왕들은 스스로를 **'고려 국왕(高麗國王)'**이라 칭했으며, 일본 측 역시 발해를 가리켜 "고구려의 옛 터전에서 일어난 후계자"임을 공식 인정했다.

    고려가 훗날 서희의 입을 빌려 주장했던 '고려'라는 명칭의 소유권은 이미 수백 년 전 발해가 국제사회에서 확립해 놓은 기득권이었다.
     

  • 온전한 영토 계승: 고구려의 심장부인 요동과 길림, 환인 지역을 실효 지배하며 고구려의 '대륙적 정체성'을 유지한 것은 발해였다.

    반도 남부에 국한된 고려가 발해의 멸망 이후에도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채 명칭만 계승했다는 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의 계승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2. 발해 유민 수용의 '도구화'와 차별적 대우

 

고려 태조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받아들인 행위는 '동족애'가 아닌 **'배후 안정'과 '인적 자원 확보'**라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였다.
 

  • 방패막이로서의 유민: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개경의 중앙 권력 핵심에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북방 국경 지대나 거란과의 접경 지역에 집단 거주시켰다. 이는 거란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인적 방패'로 유민들을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진정한 계승 의지가 있었다면 발해 왕실을 고구려 정통성의 상징으로 예우하여 국정의 동반자로 삼았어야 하나, 실제로는 신라계 지배층 아래의 '귀화인'으로 격하시켰다.
     

  • 문화적 동화와 고구려 색채의 말살: 수만 명의 발해 유민이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제도나 문화에서 발해(고구려) 특유의 관제나 풍습이 주류로 부상한 사례는 전무하다. 고려는 유민의 '몸'은 받았으나 그들이 가진 '고구려의 유산'은 철저히 배제하고 신라 중심의 유교·불교 체제 속으로 용해시켰다.
     

3. 발해 멸망 방관과 '계승자 자격'의 상실

 

가장 치명적인 논리적 허점은 고려가 발해의 멸망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실재했다면, 고구려의 또 다른 후예이자 형제국인 발해가 거란에 의해 유린당할 때 고려는 마땅히 군사적 구원을 시도했어야 한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가 멸망하던 926년, 자국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만 급급했을 뿐 어떠한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다.

이후 발해 유민들이 세운 부흥 운동 국가들(정안국 등)이 거란과 사투를 벌일 때도 고려는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서 침묵하던 고려가, 발해가 완전히 소멸한 뒤에야 "우리가 고구려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기회주의에 다름 아니다.
 

4. 소결: '상속인'이 아닌 '유산 약탈자'로서의 고려

 

결국 고려가 수용한 발해 유민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고려가 고구려의 진정한 적통(발해)을 대체하기 위해 흡수한 파편들에 불과하다.

고려는 발해라는 거대한 적통 국가가 사라진 뒤 남겨진 '고구려'라는 브랜드 가치를 무주공산에서 획득한 수혜자일 뿐이다.

발해의 멸망은 고려에 있어 민족적 비극이 아니라, 자신들의 빈약한 정통성을 채워줄 강력한 서사를 독점할 수 있게 해준 '정치적 호재'였던 셈이다.





Ⅶ. 결론: 고려는 '고구려'라는 외투를 입은 '신라'다

 

본 논증을 종합하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실체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서사적 장치'임이 명백하다.
 

  1. 인적 단절: 지배층은 신라계 호족과 6두품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고구려 혈통과 무관하다.
     

  2. 공간적 단절: 고구려의 핵심 영토인 요동과 만주를 포기하고 반도 내 안주를 선택했다.
     

  3. 체제적 단절: 고구려의 상무적·족적 전통을 버리고 신라식 유교 관료제와 불교 문화를 채택했다.
     

따라서 고려는 고구려의 실질적 유산을 물려받은 '후계 국가'가 아니라, 신라의 국가 모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구려'라는 강력한 고대 제국의 이름을 빌려온 신생 국가로 정의되어야 한다.

고구려 계승론은 한반도 민족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적 신화'로서는 가치가 있으나, 냉철한 역사학적 검증 앞에서는 그 논리적 기반이 취약한 비약에 불과하다.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부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신라 이후의 새로운 '반도 국가'의 탄생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