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사회는 유목민족의 역동적인 문화와 농경 정착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고구려만의 독창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 유연한 사회 체제와 신분 상승
고구려는 혈통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민이 전쟁에서의 공훈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하거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등 사회적 유동성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았다.
고구려의 핵심 세력이었던 맥족의 인구는 약 15만 명에 불과했으며, 방계 혈족인 예맥족을 모두 합해도 약 70만 명 수준이었다. 이후 인구가 약 350만 명까지 증가한 점을 고려할 때, 최소 200만 명 이상은 외래 혈통(중국 한족, 몽골계, 만주계, 삼한계 등)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외래 혈통이었지만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을 공유한 집단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고구려 사회가 비교적 개방적이며, 구성원의 자율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신라는 혈통을 매우 중시한 폐쇄적인 사회였다. 동일한 지배층 내부에서도 암묵적인 ‘계급’을 넘어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여 우열과 귀천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관복의 색상, 옷감의 종류, 머리에 쓰는 관모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차등이 규정되었다. 훗날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이러한 골품제는 폐지되거나 대폭 간소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가 가졌던 초기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후기로 갈수록 기득권 층에 의해 무너졌다. 대토지 소유, 세금 포탈과 국가 재정 파탄, 신분 고착화(노비제도)와 음서 제도가 그것이다. 우왕과 최영이 전쟁(요동정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고려는 멸망하게 된다.
조선은 고려의 부패를 비판하며 세워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리학의 교조화를 통해 기득권 구조는 더 견고해졌고 노비 문제도 심각해졌다. 그래도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군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은 성리학적 문치주의에 빠져서 병법을 몰랐기에 전쟁이 터지면 왕과 함께 도망치기만 했다. 양반 기득권층은 토지를 독점하고 군역(병역)과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 국가는 운영 비용이 필요한데 정작 부유한 양반들은 세금을 안 내니, 그 부담이 남은 평민들에게 집중되어 평민들이 다시 노비로 추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조선은 개국 약 200년 만에 임진왜란을 맞이했지만, 재정이 열악해서 스스로 군대를 육성하지 못했고 명나라 육군과 그들의 군수물자에 의존하였다. 심지어 이순신의 수군도 화약을 명나라에 의존하였다. 당시 명나라가 지원한 화약은 조선군의 화포 전력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는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 양반들의 선민사상은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기초 위에 세워진 아주 견고한 특권 의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지배층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성된 존재(중화(中華)'를 계승한 주인공)'이자 '세상을 교화할 유일한 주체'라고 믿었다. 반면에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는 평민과 노비는 '금수(짐승)'와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가혹한 수탈과 처벌을 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가치관이 현대 한국 사회의 '엘리트 의식'과 '선민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이 정치적으로 강한 당파성을 보이고, 패거리 문화(붕당 정치나 연고주의), 인맥 중심의 관계, 선민의식, 폐쇄적인 집단사고, 엄격한 위계질서와 서열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조선 사회의 전통적 특징과 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특성이 약하다면 고구려 사회의 성격에 더 가까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