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위한 한국교회의 ‘조직신학 서술’이 필요할 수 있는 이유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 것이 그런 예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경제 또한 본질적으로 포용적이었다.”(대런 에쓰모 글루, 제임스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시공사, 2025. 2012초판. 141쪽.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와 별개의 교리를 논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에서 잘 이해된 복음주의 조직신학 특정 판본을 깔고 논할 수 있다면, 그것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한국 기독교인 사이에서 sns로서 신앙 표현하는 것을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한국은 ‘조직신학 챕터별’로 한국인의 잘못된 신앙 유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를 집단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책할 때가 됐다고 본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신앙을 훨씬 넘어서는 상징성이 있다. 신앙의 진리를 되살려야 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정치기독교인에게서 가장 흔한 현상이 있다. 유교의 죄론과 조직신학의 죄론을 헷갈리는 경우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신학대를 나왔으되, 한국학 및 유불선 신앙 체계에 약하다. 신자들에 확실히 울림이 있게 바른 교의로 끌고 오는 힘이 부족하다.
 
부활절이 곧 다가온다. 한국은 서양무신론 인본주의 이성이 없다. 성경의 부활이 아닌 부활 믿음이 많이 있다. 최근에 사주가 원불교인으로 알려진 jtbc는 불교와 토속신앙 내용에 걸쳐진 비기독교적 부활 믿음을 담은 드라마를 편성한 바 있다. 이런 부분도 정리가 필요하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운운하는 표현이 유행한다. “ 생명 유무에 관계없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우주의 근원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라는 무교의 생명을 살린다는 어법과 어물쩡 섞여 있다. 조직신학 성령론에 대하여 제대로 신자들에 가르쳐야 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필자가 가장 비판적인 부분이 있다. ‘복음통일’이란 이름하에 워딩 분석만 해도 대놓고 드러나게, ‘대동세상’과 이어지되 삼위일체 성령론과 무관하게 가는 어법이 나타난다.
 
대런 애쓰모 글루의 한국 분석은 한국의 내재적 분석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한국에 군사독재 체제의 이면에서도 포용적 제도로 이르는 기반이 깔렸다는 사실을 논하지만, 그 논하는 표현에 걸맞는 근거제시는 없다. 한국과 비슷하게 군사정변을 경험한 터키 출신의 미국인의 시각으로, 빈틈이 있고 부족한 부분에서 대런 애쓰모 글루의 약점이라고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아시아에 근대화(서구 자유민주주의) 선호 지배전략은 성공적으로 작용했었다. 그 속에서 한국에서 기독교는 유불선 신앙 중심의 착취적 지배권력 제도를 부정하는 힘이 됐다. 지난 30년 지배층은 전적으로 모든 민주화가 자기들 유교붕당 연합의 성과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치 결속에서 최대다수의 군중을 호출하고 소환하는 과정에서, 문화 자체가 기독교 기준의 서양민주주의로 깔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모든 데모는 실패했을 것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직신학”으로 바른 교의를 수호하는 연합이 가능해야, 군사정권 때 제3세계 가난한 국가였는데도 성경진리를 통해 경제 정치 법치 사회 윤리등 모든 분야에 연결된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성공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NCCK가 기독교기구인지 동학 기구인지 색깔자체가 헷갈리게 존재하면서, 거의 전분야의 조직신학에 바른 교의인지, 토착종교인지 전투적으로 전방위적으로 바른 교의 헷갈리게 하는일일을 만들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한국에 방한해서 한국인이 번역된 서양문화를 읽더라도, 결국은 한국의 토착종교를 통해서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에는 서양철학의 이면에 깔린 로마종교가 없고, 양명학적 언어로 서양근대를 번역한 ‘일본의 메이지근대화’와 그 연장선의 동북아 근대성 문화에 속해 있다.
 
대런 애쓰모글루의 포용적 제도는 결국은 서양근대성에 깔린 서양진리관을 옳다고 긍정하며, 두번다시 고대와 중세의 지배질서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고백에서만 한국에서 힘을 받는다.
 
이재명 민주당의 일반정치언어에서 너무 많은 중국식 대동세계 강조하는 어휘와 그 의미의 자장이 발견된다. 이는 보수진영에서 33년째 보수진영의 서양근대성 문명파괴의 선두주자 격인 조갑제씨가 알고 있는 법치 자체가, 영남에 퍼진 전라도 유교 씨족주의이고 서양법과는 거리가 완전히 먼 점에 있다.
 
法은 외지인을 벌하는게 아니라, 法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 그 믿는 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으로서 죄를 논하는 서양법적 상식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 사회는 ‘진리’기준으로 단결하는 신앙인식이 복원돼야 한다.
 
[질문] 한국에서 대런 애쓰모글루의 포용적 제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따르고 행하는 믿음의 힘과 그 사회적 힘에서 존재했다고 봐야 하며, 터키 사람 대런 애쓰모 글루에 감격을 시킨 군사정부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모두 기독교문화 전제로 나타났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며, 한국의 자유민주-법치주의-시장경제가 바로 짜이려면, <성경 진리 믿음의 갱신>이 필요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대런 애쓰모글루가 말하는 경제성장의 포용적 제도의 거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힘이다. 약속을 지키는 문화가 타종교에서도 존재하지만, 수입된 서양이론문화만큼 완벽한 체계를 보여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