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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12월 26일 오전 6시 20분경 주민의 실화로 인해 발생한 대화재.
이 사건으로 6.25 전쟁 당시 부산에 대피시켜 두었던
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 등을 포함하여 국보급 문화재 3,500여점이 소실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에 밀려
부산으로 후퇴했던 대한민국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서울에 있던 궁중유물을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황급히 이송시켰다.
대한민국의 궁중유물은 장거리의 부산까지 운반되어
어느 한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이 창고가 바로 부산국악원 창고였다.
해당 창고에 보관됐던 유물들은 총 4,000여점이었고 그 목록은
궁중일기, 조선 국왕들의 어진, 왕실 유물, 역대 재상을 그린
초상화, 어필, 수많은 고서적과 은제기 등의 국보급 유물들이었다.
이 유물들은 전시에 한 번도 폭격당하지 않았고
1950~1954년에 발생했던 크고 작은 화재에도 무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창고 안에 있는 유물들은
즉각 서울로 옮겨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 1년을 보냈다.
당시로서는 북한과 전쟁을 잠시 멈추는 휴전 협정을 맺은 직후였기에[3]
언제 다시 전쟁이 날지 예측할 수 없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피시킨 문화재를 휴전선과 인접한 서울에 바로 다시 가져다놓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의 인근에는
화재에 취약한 피난민 판자촌들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장 문화재를 서울로 옮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부산 안 다른 곳이든 다른 지역이든
안전한 곳으로 유물을 옮기는 조치는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이 되도록 이러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1954년 10월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1909~1990)이
문교부에 공문첩을 보내 유물 보존에 불행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고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화재가 발생했다.
경향신문은 1954년 12월 31일자 속보에서 해당 화재로 판자집에서 창고까지 불이 번져
"구황실재산사무총국 하에 보관되어 있었던
조선왕조 어진 등과 같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다"고 전했다.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해 조사단이 부산으로 내려갔고 1955년 1월 6일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유물 4,000여점 중 무려 3,500점이 소실되고 반만 타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유물 546점을 겨우 빼내
광복동에 있는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으며
영조, 철종의 어진과 덧불여 34점의 역대 재상, 왕족 초상화[4],
그리고 어필과 제기만이 남았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경향신문은 화재 당시 창고에 평소와 같이 경찰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화재 발생 20분만에 창고지붕에 불이 옮겨 붙었는데,
이 때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창고의 열쇠가 없어서 문을 열지 못해 창고가 불타는 것을 그대로 지켜봤다는 것이다.
당시 문교부와 구 황실에서는 서로 상대방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고 책임을 떠넘겼고
이러한 추태는 신문에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종합하자면 문화재를 귀중히 여길 줄 몰라 생긴 대참사였다.[5]
이 화재로 4,000여 점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 중
무려 3,500여 점이 소실되어 겨우 546점만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데[6],
이 때 소실된 3,500여 점의 유물들이 무엇이었는지 적어 두었던 서류마저
1960년 6월 6일 창덕궁 청사 방화사건에 휘말려 소실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특히 가장 유명한 피해 유물은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들이었는데,
신선원전에서 보관되었던 48축의 어진 중 무려 30축이 소실되었고[7],
그나마 건져낸 18축의 어진들은 대부분 얼굴 부분이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당시 신선원전에서 보관되던 어진들 중 얼굴이 남아 있는 어진은 단 5축밖에 없다.[8][9]
당시 소실된 어진 중에는 숙종 이후 국왕의 어진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지만[10]
목록도 불에 타 소실되었으므로 정확히 어느 시대의 임금까지 어진으로 존재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55년 1월 10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12대열성의 진영'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대에도 신선원전에 어진이 보존된 왕 12명 외에는 어진이 보존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
식민지배와 6.25 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던
당시 대한민국은 문화재를 관리 할 인력과 재원이 하나도 없어 사진 촬영 등
기본적인 수준의 보존 작업조차 해 놓지 못했던 최빈국 중의 최빈국이었다.[11]
오늘날처럼 디지털 보존 기술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필름 촬영과 속기, 모사 인력만 있었다면
그림이나 문서는 복원하거나 최소한 사진기록으로라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당시 대한민국은 이런 곳에 투자할 돈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역대 국왕의 유골은 도굴당한 성종, 중종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왕릉에 온전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유골의 골격을 분석하여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대강의 모습을 추측할 수는 있다.[12]
하지만 허가 없이 왕릉을 파헤치는 것 역시
전주 이씨 황실 후손, 문중, 종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조선 임금의 얼굴 복원은 요원한 일이다.
사건의 심각성과 달리,
이 사건은 2012년 12월 27일 네이버캐스트에 불멸의 초상, 어진이라는 글에서
언급되기 전까지 사실상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과거에는 '조선 왕들의 어진들은 6.25 시국의 혼란상에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정도로만 소략하게 알려졌을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