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말씀드립니다. (장문이라 음슴체로 쓰니 양해바라요.)

요즘 고려 인구를 두고 저마다 서로 말이 다른 가운데 '고려 인구는 5~600만이었다'는 소리가 마치 팩트인 것처럼 자리잡는 분위긴인 듯함. 5~600만은 걍 멍멍이 소리임. 터무니없이 적은 인구수에 대한 기록과 억 소리나게 많은 병력에 대한 기록들이 공존한다면, 이는 사료가 충돌하는 것이니 반드시 정밀한 검증의 단계를 거쳐야 함.

 

 고려 인구가 5~600만이라는 기존 통설?의 논리는 고려 인구를 210만이라 기록한 서긍의 전언과, 그걸 그대로 받아 쓴 《송사》의 기록을 바탕에 두고 '어... 210만은 듣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을 못할 거 같으니까, 거기에 좀만 더 붙여서 때려맞추지 뭐' 이렇게 해놓고 그걸 통설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건데, 5~600만도 말 자체가 안되는 건 마찬가지임.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인구를 210만이라 했으면서 고려의 병력은 대략 60만이라고 기록했음. 고려는 서긍의 기록 말고도 수십만 대군을 꾸준하게 동원한 사례가 빈번하게, 그것도 어느 경우엔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가 됨. 즉 서긍이 《고려도경》에다 고려 인구를 뻥카로 기록했거나 뻥카를 전해 듣고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매우 아주 매우 높다는 뜻. 본격적으로 풀어내기에 앞서 정답을 먼저 귀띔해자주면 내가 여러 사료 토대로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전성기 기준 고려의 인구는 최소 1천만에 육박했음. 그러나 이 글에서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은 정답이 도출된 과정이니 지금부터 눈 크게 뜨고 잘 보시기 바람.

 

 (서긍이 기록한 60만이란, 상시 동원 가능 병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당시 군적에 등록돼 있던 전체 병력을 기준으로 말한 것일 텐데, 얼마간의 과장이 있다 해도 이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임. 고려라는 나라의 실체에 대한 세부 기록들을 조선이 자의든 타의든 전부 다 날려먹었기 때문에, 최선의 수는 남아있는 모든 사료들을 전부 추합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수치를 추론해내는 것밖에 없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떤 사료라도 절대 가볍게 보거나 함부로 버리지 않고 그 퍼즐 하나가 들어갈 자리를 어떻게든 끝까지 찾아내는 것임. 그 들어갈 자리가 설령 쓰레기통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깊은 고민의 과정이 필요함. 그렇게 구축한 논리를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될 때까지 끝 없이 정교하게 강화하는 것이, 진실의 눈을 뜨게 하는 유일한 지름길임) 

 

 '서긍이 고려 인구를 틀리게 적었다는 당신 말의 뜻은 알겠는데,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선화봉사고려도경》은 서긍이 자국 황제에게 바치는 일종의 1급 보고서인데 대체 왜 고려의 정보를 거짓으로 기록했겠느냐??'라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텐데, 고려 인구를 소개하는 국내 그 어느 기관이나 연구 논문에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았으나, 내가 얼마 전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냄.

 

 그 진실의 전말을 말해주자면 정말 웃기고도 구슬픈 서사가 숨겨져 있음... 우선 난 91년 생이고 "진짜 고려 영토사"에 관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사료를 발굴하고 수집하며 교차체크한 다음 이론을 세워서 진실을 바로잡는 운동을 거의 한 10년 이상 이어왔는데, 이 당시 국력의 지표인 영토를 제대로 알려면 필히 수반돼야 하는 데이터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도합 수천 개 이상의 사료를 읽으며 그 중 관련 있는 핵심 사료만 추려낸 게 거의 한 3~400백 개? 500개? 정도 됨. (사료를 수시로 검토하고 업데이트 하기 때문에 정확한 개수는 알려주기 어려움을 양해바람)

 

 아무튼 그렇게 영토 뿐 아니라 '외교-경제-군사-위상-문화-인구-사회 등등..' 연관 데이터를 무수히 접하다보니, 선뜻 모순되는 듯한 사료들도 입체적으로 풀어내게 되는 진실의 눈을 뜨게 됐는데, 얼마전 내 그물망에 고려 인구를 남긴 서긍의 기록이 딱! 들어온 거임. 어떻게 된 거냐면, 고려의 진짜 영토를 정리한 내 이론은 현재 120여 개의 사료 뭉치가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되어서 기존 통설의 벽을 돌 조각 하나도 남지 않게 가루로 부숴버리는 하나의 거대한 쇠망치라 할 수준에 이르렀는데,(사료를 1개씩 끼워맞춘 게 아닌, 반론 근거가 제시돼도 바로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재반박 사료, 혹은 논리를 확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뒷받침 자료들을 함께 배열해 사료 뭉치로 만들어버렸고, 그것들 사이 모순이 생기는 데이터가 없는지 재검증 후 솎아내서 각 뭉치들을 서로 합쳐 120개 이상으로 정리해둔 것임. 물론, 사료 1개 1개의 위력도 대부분 핵폭탄급이며,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 보니 '교과서가 완전히 틀렸다'는 가정 자체는 이미 한참 전에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됨. 세부적인 이론의 정합도 또한 최소 90%~98% 쯤 되는 듯함)

 

 그런데 이 쇠망치에도 잘 부서지지 않는 조각이 딱! 하나 눈에 띄게 자리를 잡고 있던 것. 바로 "고려의 영토는 남북보다 동서의 길이가 더 긴데, 남북은 1,500리요 동서는 2,000리에 이르며, 지금은 동북의 영토가 자못 넓어졌다"라는 《고려도경》 영토조의 기록이었음. 교과서를 믿는 사람들은 이 대목 전체가 이해가지 않겠지만, 내 사료집에 따르면 고려의 동서가 남북보다 길다는 것은 맞는 설명임. 문제는 기록이 전하고 있는 1,500이란 수치 자체가 턱없이 짧다라는 것인데, 남북 1,500리면 소위 '3천리 화려강산'이라는 한반도 길이의 딱 절반밖에 되지 않으며, 서긍이 살던 시대 기준으로 현재와 달리 1리당 약 450m를 잡는 '당송 소리 내지 단리'를 적용하더라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짧은 거리임.

 

 120여 개가 넘는 내 사료집 모든 기록의 좌표가 단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같은 위치를 가리키는데 오직 저 기록 딱 하나가 튀어나와 망치질을 해도 잘 부숴지지 않는 거. 난 조금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논리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떤 이론을 정립한 다음에도 스스로 계속 질문을 던지며 비판하는 과정을 필히 거치는데, 하나의 기록 속에 일부 참인 부분과 거짓인 부분이 섞여 있으니, 이걸 마냥 기록이 틀렸다고 봐야하나 고민이 많았음. 그렇게 머리를 막 쥐어짜는 고민을 이어가던 끝에, 바로 얼마 전 갑자기 번뜩! 하고 이에 대한 아이디어 하나가 튀어오르더니 '이것이 니가 찾는 바로 그 진실의 조각이다'라는 소리가 머리 안에 울렸고, 예상대로 그것을 대입시켜 계산을 해보니 결국 문제의 해답을 시원하게 밝혀냄...

 

 이것은 그동안 내가 밝혀온 여러 진실·교정한 이론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120여 개 사료가 통째로 쓰레기통에 가느냐 마느냐를 가르게 되는 결정적인 퍼즐 조각이라 조금 더 남다른 감이 있었다고. 아무튼 간에 다시 돌아 봐도 스스로 이런 발상을 떠올려냈다는 게 상당히 통쾌하면서도 기발하다고 생각되는데,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 스모킹 건은 다름 아닌 저~~~ 위에서 언급했던, 서긍 자신이 같은 책에 남긴 '고려 인구에 대한 기록'이었음. 앞서 설명하였듯이 '고려의 병력은 60만에 이르렀으나 인구는 꼴랑 210만이었다'는 기록은 그 기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들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에 기록 자체에 대한 신빙성을 심각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던 와중에, 불현듯 서긍이 고려의 영토를 언급한 묘사가 정확히 같은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

 

 고려의 '남북 길이가 1,500리였다'는 기록은 고려의 '인구가 210만이었다'는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 두 기록을 제외한 고려 영토 사료집 속 120개 이상의 사료 및 나머지 관련 데이터 수백 개 이상의 모든 기록 전부와 충돌을 일으켰음. 즉,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기록은 고려의 '군사력은 매우 강력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인구와 토지 등 물자에 관계되는 부분은 실제보다 터무니없게 축소'하여 고려라는 나라의 실제 체급을 감추고, 진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여지도록 의도적으로 왜곡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 마치 고슴도치 한마리가 자신의 몸을 수그린 채 날카로우 가시들을 빳빳히 세우며, '그래 알았어 니가 형님 하고 너 하는 말이 다 맞다 해줄게! 대신 나 건들지마라~ 건드리면 알지? 귀찮게 하지마'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느낌이 드는? 일명 "고슴도치 전법"이려나.

 

 그렇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기록들을 남기게 한 것일까? 아마 두뇌 회전이 잘 되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쯤되면 대강의 눈치를 챘을 거임. 다시 결론부터 말해서 두 사료의 행간을 제대로 읽고 이 텍스트들이 전하는 진실을 한마디로 풀이하면, 바로 "고려가 중국을 도와줄 만큼 큰 나라가 아니라고 인식시키기 위해 인구와 영토를 축소한 허위 정보를 흘려, 곧 다가올 금에 대한 북송의 협공 제의 및 군사적 지원 요청을 사전에 차단한 고도의 외교적 기만술"이라고 요약할 수 있음.

 

 서긍이 송나라의 사신단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선화봉사고려도경》을 저술한 해는 1123년으로, 이는 그의 나라인 북송이 여진의 금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1127년으로부터 정확히 4년 전이 되는 시기였음. 사실 방문이라고 점잖게 표현하긴 했지만, 서긍이 당시 본국 중앙 정부에서 띠고 왔던 진짜 임무는 당연 고려의 사정을 염탐하여 그 정보를 송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한 첩보 활동의 제반. 고려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고려의 모든 기밀 정보가 중국에 넘어가도록 두손 놓고 그냥 가만~히 있었을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매우 긴박했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고려와 여진 중심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음. 우선 오늘날 하얼빈 인근에서 발흥한,(고려의 속방이었던) 여진의 완안부에서 능력 있는 족장들이 대를 이어 등장해 엄청난 팽창력을 과시하며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잠식해 나갔고,(이때 사묘아리의 '사묘부'도 흡수 됨) 이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 고려는 국가 전역에 총동원 체제를 내리고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그러니까 무려 17만 이상(후방 지원대 포함 30만)이라는 대병력을 편성해 자신의 속국인, 여진이 성장하여 한참 국력의 정점을 찍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선빵을 갈겨버림. 현종이 거란군을 막을 당시에도 통주에 30만의 대군단을 투입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번엔 말 그대로 정벌군의 성격이 강한, 1년 넘게 전문 군사 훈련을 시킨 정예군사 집단이었음.

 

 군사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중세 기준 30만 규모의 주력 공격 부대가 주는 위용이라는 것이 어느정도인지, 그러한 대부대를 훈련까지 잘 시켜서 실질적인 공격 자원으로 출동하게 하려면 한 나라에 얼마나 막대한 자본력이 축적되어 있어야하는지, 모르지 않겠지. 그렇다면 고려는 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야 했을까? 가끔 여러 인터넷 커뮤 같은 곳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윤관과 고려 조정을 무시하며 이 전쟁을 일어나선 안되었을 실패한 전쟁이니 어쩌니 떠드는데, 자 생각을 해봅시다. 위에서 이 완안부의 본거지가 하얼빈 인근이라고 했는데, 교과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 바로 옆에 거란이 있고 고려는 쩌~~멀리 남쪽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으면, 왜 가까운 거란보다 멀리 떨어진 고려가 더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며 이런 거국적인 대전쟁을 감행해야 했을까?


 이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누구나 다시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문제 아니겠음?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나라의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굶어 죽는 사람들도 나왔다고 하거든. 잘 모르겠지만 고려는 사실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라, 그만큼 국민들에 대한 전반적인 구휼과 복지에도 신경을 더 많이 기울였다고. 중세 고려가 송나라만큼 세계 제일가는 경제 부국은 아니었을지언정, 우리가 일반적인 통념에 가둬놓고 바라보는 찌질한 이미지랑은 아예 격이 다른 체급을 갖춘 나라였단 뜻임. 그런 나라에 굶주리다 죽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건 시스템적으로 노란불이 켜졌다는 뜻.(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일으키는 사업은 그게 군사 사업이든 복지 사업이든, 결국 모두 돈으로 굴러가고 세금으로 운용된다는 것은 국가경영의 기초적 이치)

 

 직관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만약 저 시대에 사는 고려인이면 아주 멀리 떨어진, 자신들의 일상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나라가 이런 큰 전쟁을 벌이겠다고 하면 입 닥치고 찬성할 수 있겠나? 여론은 또 어떻게 흐를까? 고려가 이렇게까지 해서 전쟁을 벌여야 했던 이유는 당시 황제였던 예종이나 고려의 조정이 미치광이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고려의 북쪽 영토가 그 근처에까지 형성돼 있어 국가 안보와 국민 생활이 현실적인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는 방증임. 놀랍게도 고려는 태봉 궁예 시절부터 이미 요동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왕건 때는 하얼빈 근처에 위치한 송화강의 한 지류인 '이통하'라는 강에다, 나라의 경계를 흐르는 강이란 의미인 '압록강'이란 이름을 붙여 요동 전체의 패권을 두고 거란과 치열하게 대치하였음.

 

 아무튼,, 인구 얘기하다 말고 영토사에 대한 얘기를 여기서 더 길게 할 건 아니고. 그렇게 '해동천하의 주인'인 고려와 '당대 최강의 잠재 세력'이 된 완안부, 양국은 그야말로 서로의 모든 걸 걸고 피 터지는 혈전에 돌입했음. 처음엔 엄청난 규모로 진격해 오는 고려군의 위용에 압도당한 여진이 전부 구름처럼 흩어져, 북쪽 끝까지 달아나는 자가 셀 수 없을 지경이었고 활과 화살을 싣고 진 앞으로 항복해 오는 자만 자그마치 50,000이었다고 함. 이에 고려는 '아! 저 탐욕스럽고 미련한 여진이 군사의 크고 작음과 강약의 기세도 헤아리지 못하고 기어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였구나!'라는 말과 함께, 파죽지세로 치고 나아가 '공험진' 너머에 9성을 축성하고 여세를 몰아 남방의 주민 75,000호를 그 구역에 나눠서 이주시켜 살게 했음.(75,000"명"이 아니라 "호"임. 참고로 조선이 4군6진 당시 북쪽에 사민한 가구가 대략 2,800호내외라 하니, 단순히 생각해 봐도 이때의 군사 사업과 인구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국가지대사였는지 짐작 가능) 

 

 그러나 일순간에 생활의 터전을 쫓겨나 추방된 여진인들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 전열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익숙한 지형을 능숙하게 이용하여 지속적인 게릴라 작전을 펼치는 파상공세를 이어나감. 고려는 성을 지키고 나아가 싸우기를 반복하면서 몇 번의 큰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척준경'이라는 인간병기의 등장과 그의 귀신과 같은 재주로 인해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고 악착같이 성을 지켜냄. 그렇게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던 중, 대략 30개 부에서 뛰어난 실력자들이 모여들어 위력적인 라인업을 갖추고 있던 여진측에, 그중에서도 걸출한 사묘부 출신의 아리라는 인물이 나타나 고려 부원수 오연총의 부대를 패퇴시키고 고려군을 압박함. 고려는 오연총에게 다시 70,000의 군사를 맡겨 대적하게 했으나 '사묘아리'가 또 한번 고려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여진군 사령관을 맡은 금 태조 아쿠타의 동생인 '알사잇' 또한 활약하여 고려군을 패배시키고 고려의 성을 포위하고 나섬. 

 

 고려는 여진을 응징하고자 대원수 윤관을 재출병하게 했지만, 이내 여진에서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니 윤관의 부대는 그 이상 진군을 멈추고 곧, 양국 사이 강화 교섭이 시작 됨. 이때가 바야흐로 1109년 6~7월경으로, 고려는 여진으로부터 '다시 전처럼 대대손손 조공을 이어나갈 것은 물론, 고려쪽으로는 절대 기와 하나 던지지 않겠으며, 만약 저희가 맹세를 어길 시엔 하늘이 이 제후의 땅을 멸망시킬 것입니다'라는 약속을 받아, (《금사》에는 《고려사》와 달리 고려가 먼저 화의를 청했다고 기록했음) 물리적 국경으로 정한 공험진 이북 여러 성들의 군사를 물린 뒤 그 땅에 다시금 여진인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이 구역을 명목상 간접 통치에 의한 특수실효지배영토로 재전환하였음.(학계에선 이를 두고 '9성의 반환'이라고 설명, 아무튼,,) 완안부는 이를 발판으로 불과 6년이 지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다음 이젠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함. 그리고는 이로부터 단 10년 만인 1125년에 당시 전 세계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거란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중국 본토를 압박하여 송나라를 꿀꺽 삼켜버리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가버림.

 

 이런 애들임... 얘네를 만약 고려가 초장에 알아보지 못해서 윤관 말대로 선빵 싸다구를 후려 갈기지 않고, 완전체로 성장할 때까지 기냥 두었다가 거꾸로 선빵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는 상황이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괜히 그 물러터진 조선서도 내내 윤관의 이름을 해동명장에 올리고 떠받들었던 게 아닌데, 그래서 내가 윤관 무시하는 애들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것들이라 손가락질 하는 것임. 사서를 그냥 겉핥기로 읽고 혓바닥 놀리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당시 완안부의 국력과 팽창력이 어느정도인지, 귀순주 상황은 어땠고 정확히 아군 적군이 사료상 어떻게 구분되는지, 기본적인 상황 파악도 하지를 못 하면서 무슨 '고려에 호의적인 친고려계 여진족들까지 속이고 줘패서 고려가 실패했다~~'고 빼액~~커뮤에 똥글이나 쳐싸제껴버리는 수준이니 이런 간단한 이치 하나 깨우치지를 못하지..

 

 하여튼 그 난리 와중에 서긍이 고려에 온거임... 왜 왔겠음? 즈그들 입장에서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니까 여진이 조만간 거란을 멸망시킬 기세인데, 그러고 나면 송은 고려한테 똥꼬쑈를 하든 뭔 협공 요청을 하든 뭐가 됐든, 먼저 고려 상황이 지금 어떤지 파악을 해야 하니 가서 간첩질 해오라고 사절단의 형식 빌어서 보낸 거임... 그게 아니면 송이 고려랑 사절을 왔다갔다 한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왜 하필 딱! 송이 망하기 바로 직전인 이 시점에 '고려에 대한 공식 보고서'인 이 책이 만들어졌겠음? 하지만 고려는 그런 중국의 의중을 처음부터 깨끗이 간파하고 있었으니 서긍이 왔을 때 겉으로는 최대한 환대하고 고개 숙여주는 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철통같이 감시하며 후환이 될 만한 불필요한 정보들은 미리 싹 정리를 했던 거임.

 

 그래서 《고려도경》을 보면 '오랑캐지만 예를 알아 중국을 잘 섬긴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는 요동에 있는데 그 지도를 자세히 그리고 싶어도 그리기가 쉽지 않다.' 혹은 '관사를 지키는 경계가 삼엄하여 실제 관사 밖을 나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는다.' 등의 상반되는 기록들이 보여지는 것임. 그렇담 과연 서긍이 기술한 고려 영토나 인구에 대한 정보가 그 스스로 직접 고려 산천을 발로 뛰며 입수한 순도 높은 데이터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와서 흘려준 내용을 그래도 아무것도 적어가지 않을 순 없으니 마지 못해 받아 적은 것인가,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서긍이 그 책에 다소 부정적인 내용, 가령 시장이 잘 돼있지 않다거나 뭐가 많이 부족하다거나 같은 기록들을 남겼더라도 문자 그대로 믿기 전에, 행간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함.

 

 그렇게 서긍이란 사람은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한 채, 그 크고 아름답고 엄청나다는 "신주호"에 다시 올라 쓸쓸한 뒷모습만 남기며 돌아갔는데,(오로지 고려에 위압감을 주고 유리한 외교적 결실을 하나라도 얻기 위해, 백성들 노동력 갈아가지고 세계에서 으뜸이라 전해지는 이 배를 만들었을 텐데, 그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먼가 짠하긴 함...) 이후 고려의 직감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귀신처럼 적중하여서, 거란이 멸망당한 바로 다음 해인 1126년, 송의 마지막 황제에 오른 흠종은 고려 인종에게 구구절절한 문장의 조서를 보내 군사적 지원, 즉 금에 대한 협공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이를 단칼에 거절해버림.

 

 조서의 내용은 '우리[송]는 오랜 시간 귀국[고려]과 우호를 다졌고 예를 다해 우대하였으므로 조금도 서운하게 한 바가 없다. 귀국은 금과 마주하여서 수백리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은가. 또한 금은 과거 귀국에 복속되어서 한 모퉁이에 살던 하찮은 족속들이다. 왕은 부디 어둡고 횡포한 것들[금]을 공격하고 토벌함으로써 저 사막 너머까지 위세를 떨치고 위엄을 세우기 바란다.' 대충 이런 소리... 여기서 또 하나의 애잔한 스토리가 밝혀지는데 그게 뭐냐면... 서긍이 그의 저서에 어쩔 수 없이 고려의 남북 길이가 1,500리라고 줄여서 왜곡 기술했지만, 또한 동시에 같은 책에 고려의 서북 경계가 요수, 즉 압록강[현 이통하]이란 사실은 정확히 써서 보고했다는 점임.

 

 다시 말해, 고려는 자신이 금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어필하려는 의도로 남북 길이를 줄여 허위로 전했으나, 송은 고려가 실은 요수에 있어 금과 매우 가까이 위치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황제는 '고려가 비록 1,500리의 작은 나라일지라도(고려의 의도와 다르게 북단이 아니라 남단을 짤게 인식한 상황)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겠지...' 혹은, '서긍이 잘못된 보고서를 올렸고 고려의 의중이 우리와 거리를 두고자 함에 있음을 알고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지...'라는 눈물 젖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조서를 한줄 한줄 써내려갔다는 뜻. (※당시에는 '요수=압록'이라 불렸는데, 고려의 압록강은 이통하-혼하를 잇는 유기적 통합 방어라인으로서 서긍은 이통하 쪽을 요수, 혼하 쪽을 압록이라 칭함.)

 

 이듬해인 1127년, 결국 서긍의 모국인 북송은 현직 황제와 전직 황제 모두가 금에 포로로 끌려가며 처참히 멸망하게 되니, 이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치욕 중 하나로 일컫는 정강의 변임. 이후 남송의 초대 황제에 오른 조구는 사신 양응성을 통해 고려에게 다시 한 번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귀국[고려]은 바다 동쪽에 있는 가장 큰 나라로 우리나라[남송]는 은혜로운 예우를 단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이제 잡혀간 두 황제를 금에서 데려오고 싶은데 고려가 길을 빌려주길 바란다. 오해는 사지 않도록 무장한 병사들은 대동하지 않고 조용히 갈 것이니 부디 부탁하노라'라고 요청했는데. 고려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지 않음?ㅋ 고려는 이번에도 '오해고 자시고 우리가 길을 빌려줬다가 다음엔 금도 송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쩔 것? 그때 우리가 뭐라고 하나?'라며 매몰차게 거절함.

 

 황제가 이번엔 자존심이 상당히 많이 상했는지 고려가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 하며 대노하니, 한 신하가 말하기를 '큰 함선에다가 수만의 군사를 태워서 바다 건너 고려를 쳐들어가면 저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응답했는데, 이에 다른 신하가 '오랑캐라 얕보다가 얼마 전 정강의 변이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그 말이 옳다 여겨 그 즉시 진노를 가라앉혔다 함. 끝. 

 

귀하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었길 바람. 이미 글도 읽으셨겠다 끝으로 자기 PR 살짝만 하면, 내가 장담하는데 고려가 인구 210만이니, 500만이니 책임감이라곤 1도 없이 주장하는 학계 교수, 공기관 및 연구기관, 기타 단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얼추 한 '800만~1000만이상 아니었을까?' 하고 때려맞춘 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도 나처럼 인구 관련 사료도 아니고 전혀 별개의 다른 사료에서 공통점 추출해가지고 그걸로 그 시대 상황·배경 분석하고 전후 맥락 파악한 다음 해당 기록을 남긴 의도까지 깔끔하게 파악해서 이 문제의 정답을 도출해낸 사람? 아마 대한민국에 없을 거임. 어렴풋이 '서긍이 거짓말 한 거 같은데~?' 싶어도 학술적 근거가 뒷받침 안되면 허망한 가설에 불과한 것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논증해낼 순 없다 생각해서. 아무튼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람 ~~

 

 

 

아무튼, 이상 여기까지 글이 꽤 많이 길어졌는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절대 후회 안할 거라 믿고. 3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1. 고려 인구가 210만이라는 《고려도경》 기록은 개구라며, 500만이라는 사학계 통설은 그 구라 위에 뇌피셜까지 올린 개똥구라다.

 

2. 고려 남북 길이가 1,500리라는 《고려도경》 기록 역시 그와 세트로 제조된 개구라이며, 이는 고려의 외교적 기만술의 흔적이었다.

 

3. 모든 증거는 이 글 안에 전부 담겨 있으며, 이 글 하나만 읽으면 진리를 깨우치고 거듭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