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49년(1773년) 4월 16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조선의 21대 임금 '게장대왕' 영조는 신하들을 불러 역사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읽게 했다.

 

피곤한 나머지 잠깐 잠이 들었던 영조, 그러나 '절대로 그의 앞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네 글자'가 들린거 같자 바로 잠에서 깨는데...

 

 

"방금 내가 잠시 졸았는데, 신하들이 물러난 후 조용히 생각해보니 ‘네 글자’를 들은 것 같으나 분명하지 않다. 상번(上番) 겸 춘추(春秋)가 어디까지 읽었기에 내가 읽기를 멈추라 했는가?"

 

강문상이 아뢰었다.

 

"‘夫秦者棄禮義上首功之國(진나라란 예의를 버리고 전공만을 중시하는 나라)’까지 읽고 멈추었습니다."

 

임금께서 "그럴 리가 있겠는가? 주서(注書)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라." 하셨다.

 

주서가 읽다가 먹으로 칠한 부분(墨抹處)에서 감히 읽지 못하자, 임금께서 "왜 멈추었는가?"라고 물으셨다. 신하들이 아뢰었다.
"먹으로 칠한 곳이 있어 감히 읽지 못했습니다."

 

임금께서 "이것이 반드시 그 ‘네 글자’일 것이다. 과연 먹으로 칠해졌는가?" 하시니, 신하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임금께서 "누가 칠했다 하는가?" 하시자, 신하들이 "이는 홍문관(弘文館) 책자이니 본관(本館)에서 칠한 것일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임금께서 "강문상이 멈춘 곳과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하시니, 신하들이 "아직 두세 장 남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임금께서 탄식하셨다.

 

"그렇다면 상번 겸 춘추가 과연 읽지 못했을 것이다. 먹으로 칠한 부분을 어찌 읽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 내가 꿈속에서 들은 것이다. 이는 '흉역(凶逆)의 네 글자'로, 내가 늘 마음이 떨리고 두려워했기에 꿈에 나타났다. 이 전기(傳記)에 이런 흉악한 글이 있어 내 마음이 먼저 동요했고, 잠결에 희미히 듣고는 즉시 읽기를 멈추라 했으니, 그 행간(行間)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한일이 "성상의 말씀대로입니다."라고 받들자, 임금께서 전교(傳敎)를 내리셨다.

 

"문답(問答)을 이미 들었으니, 경전(經傳)을 어찌 누워서 듣고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마음을 붙였으나, 여러 해 읽지 않았다. 근래 심기(心氣)가 모두 쇠하여 부득이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앞서 채택(蔡澤)을 취하고 범수전(范睢傳)을 읽으라 했으니, 하단(下段)의 채택이 서쪽으로 진(秦)에 들어가는 문법(文法) 때문이다. 비록 전국(戰國)의 기풍이지만, 끝맺음은 어제와 비교할 수 없다. 오늘 비록 단비를 얻었으나, 남은 마음이 동요하니 다시 이 책을 펼쳐 백이전(伯夷傳)을 먼저 읽게 한 것은 뜻이 깊었다. 다음으로 노중련전(魯仲連傳)을 읽게 한 것은 그 이름을 들었으니 그 인물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래 응대할 때면 혼미해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자세히 들었으나 중간에 잠이 들었고, 잠결에 예측할 수 없는 ‘네 글자’를 들어 마음이 떨려 읽기를 멈추라 했다. 전교를 내린 후 조용히 생각하니, 이 책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이 심상치 않아 꿈인가 싶었다. 먼저 입시한 승지에게 다시 책을 가져오라 했더니, 과연 ‘네 글자’가 있었고 이는 읽기를 멈춘 후의 글이었다. 또 그 ‘네 글자’가 이미 먹으로 칠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칠한 글을 어찌 읽을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꿈속에서 듣고 깨어나 즉시 읽기를 멈추라 한 것이다.

 

아! 과연 그 글이 있었으나 이미 칠해졌고, 꿈속에서 들은 것도 ‘네 글자’였다. 이 글이 있기에 꿈에 먼저 나타나 읽기를 멈추게 한 것이니, 어찌 매우 기이하지 않겠는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 진실함이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는 노년의 이상한 일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비록 이미 칠해졌으나 마음이 떨리니, 이 책을 어찌 다시 읽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읽으려 하니 꿈에 먼저 나타나 즉시 멈추게 한 것이다.

 

예전에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글을 읽을 때, 내가 그 글을 읽고 이를 따랐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이는 태강(太康)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불초(不肖)하다, 참으로 불초하다! 이제부터는 문서(簿書)와 문답(問答) 외에는 내 뜻을 정했다. 이미 알았으니 어찌 신칙하지 않겠는가? 노중련전(魯仲連傳)의 이 ‘네 글자’를 각각 먹으로 칠하게 하여, 이런 패역한 말이 세상에서 스스로 사라지게 하라."

 

이렇게 전교를 내리시고 다시 들이게 하셨다. 처음 내린 전교를 확인한 후, 모든 신하들이 차례대로 물러났다.

 

 

- 승정원일기 영조 49년 4월 16일 기사

 

 

 

그리고 그 다음날 게장대왕은 또 다시 그 '네 글자'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김상복이 아뢰었다.
"아침에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였는데 어떠하십니까?"
임금께서 답하셨다.
"기운을 논할 겨를이 있겠는가? 어제 꿈이 참으로 심상치 않았다. 꿈속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찌 좋은 징조라 하겠는가? 세상 일에 마음 둘 곳 없이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다."

김상복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이는 성인(聖人)의 영명(靈明)하신 마음이 사물을 꿰뚫어 미리 깨닫고 읽기를 멈추라 하신 것일 뿐, 꿈의 징조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이것이 어찌 실상이 아니겠는가? 내 마음이 끝내 놓이지 않는다." 하시자, 모두가 "성려(聖慮)에 두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임금께서 물으셨다.
"민간(閭巷)에도 이미 글자를 먹으로 칠했는가?"
신하들이 답하였다.
"지난 가을 이후로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곳도 있으나, 칠해야 할 곳은 모두 칠했습니다."
임금께서 "그런가? 겸춘추(兼春秋)가 비록 읽고자 해도 먹으로 칠한 부분을 어찌 하겠는가?" 하시니, 모두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라고 받들었다.

임금께서 탄식하셨다.
"만고(萬古)에 배윤명(胤命) 같은 흉역(凶逆)이 또 있었겠는가?"
신하들이 "그 자의 살을 씹고 가죽을 깔아도 부족할 역적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어 임금께서 전교(傳敎)를 내리셨다.


"아! 노년에 공자(孔子)께서도 '내가 쇠했다(吾衰)'는 탄식을 하였거늘, 하물며 지금의 나인가? 아! 노중련전(魯仲連傳)에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말이 있으니, 내가 알지 못하고 읽으라 했으나, 비록 쇠했어도 꿈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기해년(己亥, 추정)의 일로 마음이 동요해 공을 세웠으나, 다시 생각하니 하늘의 도(乾道)가 밝아 마치 이끌어주는 것 같아 억지로 술을 마셨다. 마신 후엔 본래의 일을 엄히 다스려야 하리라. 아! 배윤명의 역적 행적은 만고에 없던 일이로다. 처음에 어찌 이럴 줄 알았으랴?

한필수(韓必壽)의 청에 따라 비록 과하다 싶었으나, 이 일에 대해 내가 말하길 '인간의 본성을 가진 마음(秉彝之心)을 알 수 있다'고 여겨, 배윤명의 연좌자(應坐者)를 모두 석방했으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일률(一律)을 적용했다면 논란이 있을 수 있었을 터이나, 유배(配)에 있어서도 이처럼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역시 당시 명사(名士)들의 남은 풍조 때문이다. 당시 전 우의정(右議政) 이시관(李思觀)을 삭탈관직(削職)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엄히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배윤명의 족속(族屬) 중 유배된 자들 가운데 남자가 아닌자와 15세 미만자는 모두 논하지 말고, 나머지는 전례대로 유배하도록 해당 관청(該曹)에 분부하라. 아! 배윤명은 만고에 없는 역적이지만, 노년에 어찌 법 밖의 일을 개입시키겠는가? 이후로는 해당 관청(該府)과 집법(執法)의 신하들이 전례를 들어 주청(奏請)하지 못하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라."


- 승정원일기 영조 49년 4월 17일 기사

 

 

 

노중련전의 그 '네 글자'에 발작 버튼 눌린 노망난 게장대왕은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배윤명'이라는 사람의 일족들을 다시 유배 보내 조지라고 명령을 내린다.

 

배윤명은 이로부터 37년전인 영조 12년(1736년) 그 '네 글자'를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에 인용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은자로, 게장대왕이 얼마나 그 '네 글자'에 대해서 눈깔에 핏발이 섰는지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괜히 체제공이 정조가 "신하들이 전하 앞에서 그 '네 글자'를 읽었을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안 읽었다고 보증합니다!"라고 신하들을 필사적으로 비호한 것을 두고 정조의 아량을 칭찬한게 아닌 것이다.

 

 

영조 시대 내내 절대로 조선에서 공공연하게 말해서도 안 되었고, 시중에 유통되는 사기에도 검열삭제 되었던 그 '네 글자'는 다음과 같다.

 

 

 

이모비야(爾母婢也, 네 어미는 종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