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계획 중단, 비자장사까지… 돈에 무릎 꿇은 '석유부국' 사우디




 

사우디 '미래 도시' 계획 줄줄이 멈춰
석유값 떨어지자 계산기 두드리는 사우디
사업 줄이고 비자 장사까지…




 

안준현 기자
조선일보 2026.02.15. 


 

‘돈으로 밀어붙이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가 ‘계산기 두드리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

수도 리야드 한복판에 세우겠다던 거대 정육면체 건물 ‘무카브(Mukaab)’의 건설이 멈췄다.
사우디는 그동안 국가 개조 사업인 ‘비전 2030’을 통해 사막에 신기루 같은 도시를 건설하려 했으나, 재정균형 유가인 90~110달러에
크게 못 미치는 저유가 기조가 이어지자 결국 메가 프로젝트의 ‘백트래킹(계획 철회)’을 공식화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건설 추진 중인 거대한 정육면체 건물 '무카브'의 가상 조감도. /사우디 아라비아 국부펀드


사우디 아라비아가 건설 추진 중인 거대한 정육면체 건물 '무카브'의 가상 조감도.
/사우디 아라비아 국부펀드




로이터통신은 사우디가 무카브 공사를 중단하고 재무적 타당성과 전략적 우선순위를 다시 따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무카브는 가로·세로·높이 400m 규모의 정육면체다.
내부에 인공 지능(AI) 기반 돔 디스플레이와 300m 높이의 지구라트(계단식 구조물)를 넣겠다는 구상이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20개가 들어갈 크기”라며 세계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현재는 땅을 파는 초기 굴착 작업 이후 모든 공정이 멈춘 상태다.

 

부동산 컨설팅업체 나이트프랭크는 무카브가 포함된 ‘뉴 무라바’ 개발 비용을 약 500억달러(약 73조원)로 추산했다.
그런데 실제 발주된 금액은 1억 달러 수준에 그친다. 완공 목표도 당초 2030년에서 2040년으로 10년 늦춰졌다.

 

사우디 ‘비전 2030’의 상징이던 대형 사업들이 연달아 축소·연기·재설계 수순을 밟고 있다.
네옴 프로젝트의 핵심인 선형 도시 ‘더 라인’은 170㎞ 구상을 대폭 줄여 재설계에 들어갔다.

산악 리조트 ‘트로제나’에서 열릴 예정이던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도 무기한 연기했다.
공식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건설 지연과 예산 부족으로 2029년까지 완공이 어렵다는 게 지배적이었다.
현장 관계자는 “2029년까지 준비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네옴시티 내 170㎞ 길이 선형 도시 '더 라인' 건설 현장에서 중장비들이 기반 공사를 하고 있다. /NEOM


네옴시티 내 170㎞ 길이 선형 도시 '더 라인' 건설 현장에서 중장비들이 기반 공사를 하고 있다.
/NEOM




배경은 유가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대로 떨어졌다.


사우디가 국가 예산 균형을 맞추려면 90~110달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유가는 이에 크게 못 미친다.
막대한 비전 2030 투자까지 겹치면서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대로 벌어졌다.
메가 프로젝트는 가장 먼저 ‘속도 조절’ 대상이 됐다.

 

유가 하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이 한몫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다보스포럼에서 “사우디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유가를 낮추라고 요청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에 호응하듯 사우디를 포함한 OPEC+ 8개국은 2025년 4월부터 하루 41만1000배럴 증산을 단행했다.
시장 예상보다 3배 빠른 속도였다. 5월과 6월에도 같은 규모 증산을 이어갔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브렌트유 가격이 2024년 배럴당 81달러에서 2025년 68달러, 2026년 61달러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26년 세계 석유 수요 증가폭이 둔화하고, 공급이 수요를 웃도는 잉여 상태가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사우디가 저유가 기조에 호응해 증산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자국 재정에 부담을 안긴 셈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 앞에 석유 펌프 모형./로이터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 앞에 석유 펌프 모형./로이터 연합뉴스




비전 2030의 재정 엔진인 국부펀드 PIF(약 9250억 달러 규모)도 방향을 틀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사실상 1인 지배하는 PIF는 2024년 말 네옴 등 기가프로젝트에서 80억 달러 규모 손실을 상각했다.
이후 물류·인공지능(AI)·광업 등 수익성 높은 분야로 투자 우선순위를 옮기고 있다.

무함마드 알자단 재무장관은 지난해 12월 “우선순위에 따라 조정·연기·취소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프로젝트 재조정을 공식화한 것이다.
동시에 사우디는 2030 엑스포와 2034 월드컵 등 ‘기한이 정해진’ 이벤트 인프라로 자원을 재배치하는 움직임도 있다.

 

재정 압박이 심해지자 사우디는 ‘슈퍼리치 모시기’에도 나섰다.
블룸버그는 사우디가 순자산 3000만 달러(약 440억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와 슈퍼요트 소유자에게 ‘프리미엄 거주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네옴·홍해 리조트·리야드 재개발 등 전략 사업에 외국 자본과 고소득층을 끌어오겠다는 구상이다.
‘사우디판 골든비자’로 돈과 사람을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아랍에미리트가 이미 골든 비자와 10년 장기 비자를 운용 중이어서 경쟁력에는 의문 부호가 있다.

 

석유 달러를 바탕으로 초대형 미래 도시를 밀어붙이던 사우디가 유가 하락 앞에서 속도 조절에 나섰다.
‘포스트 오일’을 내세운 비전 2030이 저유가 국면에서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다.








작년 11월 18일 워싱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작년 11월 18일 워싱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한국 기업도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한국 건설사 해외 수주액은 전년 대비 20% 감소했다.
사우디 네옴 발주 감소·지연이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다.

컨소시엄에 레미콘을 공급하던 한국의 사우디 시멘트 공장은 네옴 관련 물량 급감으로 가동 중단과 감원에 들어갔다.
발주가 늦어지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곳은 현장과 공급망이다.
네옴 등 사우디발 물량이 줄면 국내 건설·자재 업계의 중동 실적도 직접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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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현 기자


안준현 기자국제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국제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2022년 입사해 사회부 시청·기동취재팀을 거쳐 국제부에서 세계 곳곳의 이슈를 쫓고 있습니다.
한때 논문으로 세상을 바꾸는 학자를 꿈꿨지만 이제는 기사로 세상을 바꾸는 기자로 살아갑니다.

사초(史草)를 쓰는 심정으로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국경과 장르를 넘나들며 세상만사에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 간 역학 관계와 선거, 정치 제도, 그리고 시대를 움직이는 리더십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