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와우근린공원은 현재 주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평온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곳은 56년 전, 박정희 정부 시절 발생한 비극적인 아파트 붕괴 사고의 현장이기도 하다.

1969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육군 준장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도시 개발을 밀어붙여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무리한 개발 정책은 결국 와우아파트 붕괴라는 참사를 낳게 된다.





1969년 김현옥은 서울 시내 달동네를 정비하겠다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불과 3년 동안 약 2천 동, 10만 호 규모의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대규모 계획을 내세웠다.

시민아파트 10만 호 건설 공약은 1969년 10월 실시된 3선개헌 국민투표를 수개월 앞둔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주택 정책을 넘어 정치적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고, 도시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은 민심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카드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재정 규모와 단가를 따져보면 매우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총 사업비는 220억 원으로, 이는 당시 국가적 대형 사업이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를 10만 호로 단순 계산하면, 아파트 한 채당 건설비는 약 22만 원에 불과하다.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그 수치는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1960년대 말 기준으로 흑백 텔레비전 한 대가 약 10만 원, 소형 승용차인 도요타 코로나가 약 100만 원 정도였던 시기였다. 즉, 아파트 한 채의 건설비가 텔레비전 두 대 값 정도에 불과했고, 자동차 가격의 5분의 1 수준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한 단가는 구조 안전, 자재 품질, 시공 관리 측면에서 심각한 제약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결과적으로 급속한 공급 확대를 우선시한 정책이 안전 관리의 취약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와우아파트 붕괴라는 비극적 사고를 발생시켰다.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날림공사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장 싸게, 가장 빨리’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군대식 속도전 공사를 강행했다. 





일부 건설회사 사장들은 아파트는 적어도 50~60년은 사용할 수 있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현옥 시장은 시민아파트는 15년 정도 사용한 뒤 철거하고 재건축하면 된다며, 그래야 건설업계도 지속적으로 먹고살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2천 호 시민아파트 사업 가운데 하나가 마포구 와우산 기슭에 건설된 와우아파트였다. 이곳에는 총 24개 동, 1,200가구, 약 5천여 명이 입주할 예정이었으며, 1969년 6월에 착공해 불과 6개월 뒤인 12월 완공을 목표로 했다.

군대식 속도전으로 공사가 밀어붙여지면서, 높은 산 중턱에 지으면서도 제대로 된 부지 측량조차 하지 않은 채 공사가 진행되었다. 시간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파트와 같은 대형 건축물에 필수적인 지반 공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그저 “빨리, 빨리”만을 외쳤다.

건설사 선정 과정에도 문제가 많았다. 참여 업체 가운데 우량 기업은 4곳에 불과했고, 나머지 30여 개 업체는 영세업체로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13~16동 건설을 맡은 대룡건설은 공사를 무면허 업자에게 되팔면서 정부로부터 받은 공사비 중 일부(500만 원)를 챙겼다. 정부에서 4,400만 원을 공사비로 지급받았으나 이를 3,900만 원에 재하도급하면서 공사비가 더욱 줄어들었다.

그 결과, 철근 70개가 들어가야 할 기둥에 고작 5개만 사용되었고, 시멘트 비용을 아끼려다 보니 콘크리트는 자갈이 섞인 모래 반죽 수준이었다. 산 정상까지 상수도를 끌어올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불순물이 섞인 하수도 물로 콘크리트를 반죽해 사용하였다. 구조물은 1㎡당 280kg의 하중만 견디도록 설계·시공되었지만, 실제 입주민(중산층)들은 피아노와 장롱 같은 무거운 가구, 연탄 수백 장 등을 들여놓아 실제 하중은 1㎡당 약 900kg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의 독촉으로 와우아파트는 결국 6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1969년 12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준공식에 참석해 이를 기념했다.





당초 서민용으로 지어졌으나 브로커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급등하면서 정작 서민들은 입주하지 못했고, 실제 입주민은 대부분 중산층이었다. 겨울철에는 지반이 얼어 있어 건물이 버틸 수 있었지만, 이듬해 봄 땅이 녹으면서 부실한 기초공사의 문제가 드러났다. 건물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점차 기울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상황이 악화되자 마포구청장은 14동 주민을 15동으로 긴급 대피시켰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15동이 갑자기 붕괴했다. 이 사고로 15동 내부에 있던 32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무너진 건물이 아래 판잣집을 덮치면서 추가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





붕괴 사고 발생 1주일 후 전면 철거가 이루어졌는데, 콘크리트의 질이 얼마나 나빴는지 철거 작업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오염된 하수를 사용해 콘크리트를 반죽했기 때문에, 이른바 ‘공구리’에서는 썩은 악취가 진동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다른 아파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산아파트의 경우 배전 공사와 수도 공사, 외벽 시멘트 공사가 모두 부실해 도저히 거주할 수 없다며 주민들이 서울시에 집단으로 시정 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20여 가구는 방 안으로 분뇨가 스며들어 수세식 화장실을 아예 폐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금화지구 아파트에서는 연탄가스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로 인해 시민아파트에 대한 인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판잣집에서 살지언정 시민아파트에서는 살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군사작전식 개발과 속도 위주의 정책이 초래한 비극으로, 개발독재의 어두운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세상에서 가장 싼값에, 가장 빠른 속도로 건설되었다고 선전된 경부고속도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 마치 자신이 그린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지만, 실제 공사 과정에서는 부실 시공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겨울철에는 지반이 얼어붙기 때문에 부실을 막기 위해 도로 포장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기를 단축하려는 욕심, 군대식 충성 경쟁과 똥군기 속에서 한겨울에도 공사가 강행되었다. 얼어 있는 땅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여 지면을 녹인 뒤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동원되면서, 결과적으로 시공 품질에 문제가 생겼다.




그만큼 독재자들은 개인의 권력독점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돈이 없다면서 추경예산을 한 푼도 보태지 않고 고속도로 사업을 진행했지만, 경부고속도로 사업비의 거의 2배의 돈을 대선자금으로 모아 다가올 선거를 대비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이후 만성적인 도로부실로 인해 툭하면 갈라지고 푹 꺼져버렸다. 결국 개통 1년 만에 공사비의 10%가 부실공사로 인한 보수비로 들어갔고,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보수비 누적액은 건설비의 4배라는 1600억 원을 발생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는’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건물처럼 서 있는 구조물이었다면, 와우아파트처럼 금새 무너졌을 것이다. 

경제개발 초기에는 박정희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에 진입한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과연 옳은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