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와 일기들 필요한 부분 전체는 맨 뒤로 빼겠습니다. 내용이 꽤 많아서요.)
‘카이로 회담전인 1943년 7월 김구 선생님은 장개석을 만나, 신탁통치가 아닌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장개석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위해 노력했고, 영국의 방해가 심했지만,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독립은 명시되었다.’라는 대한민국의 건국신화 자체가 거짓말이지요.
1943년 3월 27일 루즈벨트는 영국의 외교부 장관에게, 미국 중국을 포함한 몇 개 국가가, 한국을 일정기간 신탁통치한다고 제안했다. Eden 영국 외교부 장관은 제안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Korea might be placed under an international trusteeship, with China, the United States and one or two other countries participating. As to the disposition of the Japanese mandated islands, the President remarked that they should be internationalized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peace. Mr. Eden indicated that he was favorably impressed with this proposal.
1943년 3월 29일 중화민국 외교부 장관인 송미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전후 미국, 영국, 중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하는 것을, 미영중이 합의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I again felt that the views of the Chinese, the British and the United States Governments were very much in accord. I said we were all in agreement that Korea must be set up as an independent country under a temporary international trusteeship
1943년 7월 26일 김구 선생님이 장개석을 만나, 신탁통치가 아닌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고, 장개석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약속했다고 하는데요. 중화민국이나 중국쪽 사료를 보면, 기존의 대한민국 건국 신화가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미국, 영국, 중국의 사료를 쭈욱 보면, 한국의 완전독립이라고 쓰인 문서도 있구요, 완전독립 + 신탁통치가 쓰인 문서도 있구요, 신탁통치만 쓰인 문서도 있거든요.
미국, 영국, 중국이 7월 26일 전까지는 신탁통치에 합의했지만, 7월 26일 김구 선생님이 장개석에게 “신탁통치가 아닌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오.”라고 한 뒤로는 세계정세가 극적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지요. 사실 하나 더 봐 보며요.
카이로 회담 직전인, 1943년 11월 19일 아이오와호에서 루즈벨트는 미군의 참모장들을 모아서 컨퍼런스를 하지요.
장개석 총통은 소련, 중국, 미국과 함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원합니다.
The President said...The Generalissimo desires a trusteeship over Korea, administered by Russia, China and the United States as trustees.
General Marshall said the Soviets want Kuzan [Pusan?] in that it is close to Japan.
마샬 제독은 소련은 일본에 가까운 부산항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Admiral King said the Soviets want a nice big port and communication to Dairen.
킹 제독은 소련은 크고 좋은 항구 하나와 항구와 대련의 통신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애시당초에, 김구 선생님이 장개석에게 신탁통치가 아닌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요청하고, 장개석은 김구 선생님 요청을 받아들여,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노력해서, 카이로 선언에,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이 명시된 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고, 그냥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팩트들을 따져보면 거짓말인)일 뿐이에요.
완전(full) 버전은 꽤 긴데요. 역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독해 주세요.
신탁통치 이야기가 나온 것은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부터 였다는게 우리나라에선 정설인데요. 사실은 카이로 회담전에 이미, 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신탁통치로 방향을 정했지요.
** 여기서부터 완전 버전
- 완전 버전에서 인용한 장개석 일기와 캐도건의 일기의 인용한 날짜 전체 내용은 맨 뒤에 넣습니다. (꽤 길어서요.)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 4개 국가 전부가, 신탁통치에 동의했지만, 알고보면 거짓말인 대한민국 건국신화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몇가지 장치가 필요하지요.
요약본만으로도 대한민국 건국 신화중 김구 선생님이, 장개석에게 신탁통치가 아닌 완전 독립을 요청해서, 카이로 선언에 대한민국의 완전 독립이 명시되었다는 내용 자체가, 거짓말임을 대부분 밝히긴 했는데요. 거짓말이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거짓말 장치도 설명해 볼게요.
1. 장개석 일기에 의하면, 장개석도 한국의 완전 독립에 동의했다.
- 김구 선생님의 요청에 장개석도 “신탁통치가 아닌 완전 독립을 위해 같이 힘을 모으자”
이야기 한 것처럼 나오는데요. 실제로 장개석은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독립운동 세력은 분열에서 통합으로 가야된다.” 정도의 내용이 나와요.
2. 장개석은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했지만, 영국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 카이로 회담 당시, 장개석의 일기에 의하면, 장개석은 처칠에 분개하지요.
장개석의 일기는 스탠포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에서 2023년 9월까지 보관된 다음에, 대만에 반환되는데요. 스탠포드 대학교에 보관될 때에는 한번에 1개월치의 일기만 열람이 가능하고, 촬영은 불가능했고, 연구소에서 제공되는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필사하는 것만 가능했었지요. 2024년부터 대만 국사관에서 전산화되는데로, 일반에 공개하였고, 현재는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지요.
- 카이로 회담 당시 장개석 일기의 원문 전체는 뒷부분에 넣겠습니다.
- 장개석의 일기는 정자체 한자에 초서체 한자를 섞어서 쓰는 형태인데요. 초서체 한자는 꽤 읽기가 어려운데요. 다행히, 구글 Gemini의 도움을 받으니 거의 대부분 해석이 가능합니다. AI가 살짝 뭔가를 빼먹으면, 한자를 하나하나 읽어서, 지적하면 그 부분도 해석해 주기는 하는데요. 이제 초서를 몰라도 역사자료를 누구나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 장개석 일기의 카이로 회담 부분에서, 영국과의 갈등이 나오긴 하지만, 버마 해안에 연합군이 상륙하는 문제를 조율하는 문제로, 처칠과 갈등을 겪은거에요. 정작 카이로 회담의 영국쪽 초안에는 24일에 아무런 이견 없이 동의해요. 회의 절차에서 중국 배려가 없는 것에 장개석이 화를 내긴 하지만, 영국과 중국은 한국을 신탁통치 한다는 것은 이미 다 합의했었어요.
3.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가, 뭔가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영국은 한국의 독립 자체에 반대했다. 라는 전제가 있어야 되는데요.
- 카이로 회담 당시 영국 외무부 차관이었던 캐도건은,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측은 대한민국의 독립자체를 반대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글이 돌고 있는데요. 그 분 글(맨아래 링크 글)에 의하면.
“그리고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에, 선언에 한국 독립 문제를 삽입하는 데 반대했던 알렉산더 캐도건(Sir Alexander Cadⓞgan) 경이 다수의 문제를 제기했다.”
장개석도 캐도건도 카이로 회담 기간에 일기를 남겼는데요. 두 일기를 비교하면 위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이 가능하지요. 장개석의 24일 일기에 의하면 23일에는 조선의 독립은 미국과 영국이 둘다 동의하지요. 따라서, 24일에 도착한 캐도건이 카이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다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두분 일기 보겠습니다.
캐도건의 일기에요.
캐도건과 이든 영국 외무부 장관은 23일 밤에 카이로로 출발해서, 24일 오전에 도착하지요.
장개석의 11월 24일 일기를 보면요.
[본문 판독 및 직역]
十一月二十四일(11월 24일) 수요일(星期三), 기후: 맑음(晴), 온도: 따뜻함(溫)
"昨(작-어제) 午後(오후) 루스벨트(羅, 라)와 會談(회담)하여 我(아) 中國(중국)의 態度(태도)를 詳述(상술)하였는데, 度量(도량)이 넓고 誠實(성실)하여 人本色(인본색)이라 할 만하다."
"日本(일본)이 侵略(침략)하여 占領(점령)한 中國(중국) 領土(영토), 卽(즉) 東北四省(동북사성)과 臺灣(대만)·澎湖群島(팽호군도)는 모두 中國(중국)에 返還(반환)하고, 朝鮮(조선)은 自由(자유)와 獨立(독립)을 시키기로 하였다."
"미국(美, 미)은 이에 대하여 全面(전면) 同意(동의)하였고, 영국(英, 영) 역시 나의 提案(제안)에 대하여 反對(반대)하지 못하고 贊成(찬성)하기에 이르렀다."
** 링크들요
링크에서 _ⓞ는 o로 변환해야 되요
1. 1943년 3월 27일 영국 외무부 장관과의 대화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_ⓞcuments/frus1943v03/d22
2. 1943년 3월 29일 미국과 송미령과의 대화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_ⓞcuments/frus1943China/d767
3. 아이오와호 루즈벨트의 참모장 컨퍼런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_ⓞcuments/frus1943CairoTehran/d238
4. 처칠의 한국 독립 반대는 날조가 아니라는 페북글
https://www.facebook.com/orumi65/posts/%EC%B5%9C%EA%B7%BC%EC%97%90-%EC%B9%B4%EC%9D%B4%EB%A1%9C-%ED%9A%8C%EB%8B%B4%EC%97%90%EC%84%9C-%EC%B2%98%EC%B9%A0%EC%9D%B4-%ED%95%9C%EA%B5%AD-%EB%8F%85%EB%A6%BD-%EC%9E%85%EC%9E%A5%EC%9D%84-%EB%B0%98%EB%8C%80%ED%96%88%EB%8B%A4%EB%8A%94-%EA%B2%83%EC%9D%80-%EB%82%A0%EC%A1%B0%EB%9D%BC%EB%8A%94-%EB%B8%94%EB%A1%9C%EA%B7%B8-%EA%B8%80%EC%9D%B4-%EC%9D%B8%EA%B8%B0%EB%A5%BC-%EC%96%BB%EA%B3%A0-%EC%9E%88%EB%8A%94-%EB%AA%A8%EC%96%91%EC%9D%B4%EB%8B%A4-%EC%9D%B4%EA%B2%83-%EC%B0%B8-%EA%B7%B8-%EB%B8%94%EB%A1%9C%EA%B7%B8-%EA%B8%80%EC%9D%80-%EC%B2%98%EC%B9%A0%EC%9D%98/3647155098752728/
5. 장개석 일기
https://ahonline.drnh.gov.tw/index.php?act=Archive/search/eyJxdWVyeSI6W3siZmllbGQiOiJzZXJpZXMiLCJ2YWx1ZSI6IuiUo%2BS4reato%2Be4vee1seaWh%2BeJqS*nvo7lnIvlj7LkuLnkvZvlpKflrbjog6HkvZvnoJTnqbbmiYDnp7vlm57ml6XoqJjlj4rmiYvku6TnrYkifV0sImRvbWNvbmYiOnsicXVlcnlfaGlzdG9yeV9jb250ZW50IjoiYmxvY2siLCJ6b25nX2xldmVsX2NvbnRlbnQiOiJibG9jayIsInBvc3RfcXVlcnlfY29udGVudCI6ImJsb2NrIiwiZmFjZXRzYnkiOiJ6b25nX25hbWUiLCJ6b25nX25hbWUiOiJibG9jayIsInllYXJudW0iOiJub25lIiwicGVyc29uIjoibm9uZSIsImxvY2F0aW9uIjoibm9uZSIsImxpc3Rtb2RlIjoiZGVmYXVsdCIsInNvcnRieSI6InN0b3JlX25vIiwicGFnZWluZyI6IjIwIn19/7181-7200
방법2
1. 검색 방법
홈페이지 접속: https://ahonline.drnh.gov.tw에 접속합니다.
검색어 입력: 메인 화면의 검색창에 '蔣中正日記'(장중정일기) 또는 **'蔣介石日記'**를 입력하고 조회(查詢) 버튼을 누릅니다.
카테고리 선택: 왼쪽 메뉴의 '全宗號(전종호)' 목록에서 '002 蔣中正總統' 항목을 선택하면 관련 기록물을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6. 카도건의 일기
https://archive.org/details/diariesofsiralex0000cad_ⓞ/page/n11/mode/2up?q=Korea
장개석 일기 해당기간 전체

7월 26일 일기 현대어 직역
[무솔리니 실각 소식]
요지: 치(恥, 치욕). 방송 소식에 따르면 무솔리니가 어제 사임하였다고 한다.
정권은 이탈리아 국왕에게 반환되었고, 국왕은 바돌리오를 군사 통수권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당연히 믿을 만하며, 유럽의 정세는 이탈리아 방면에서 급격히 변하는 추세가 될 것이다.
무솔리니의 20년 권세가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권세와 이익이라는 물질적인 것은 지혜와 도덕적 기초가 없으면 마치 '사상누각(沙中樓閣)'처럼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김구 등 조선 혁명가들과의 만남]
오전에는 황산을 경유하여 군사위원회 기념 주례회에 도착해 훈시하였다.
이후 조선 혁명당 영수 김구(金九) 등을 접견하였다.
그들에게 내부를 단결하여 우리 정부(중국)에 협조할 것을 권고하고 격려하였으며, 조선 독립(朝鮮獨立)에 대한 나의 주장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오찬 및 개인적 소회]
정오에는 여러 장령(邱椿, 岳軍 등)과 함께 식사하며 단독 담화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휴식을 취하며 독서를 하였다. 과거 도성장(陶成章)의 죄악은 죽어 마땅한 것이었으나, 그를 처단한 것은 혁명과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한다.
나 한 사람이 그 책임을 온전히 짊어질 것이니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

[상단 기록]
提요(提要): 子(자) / 雪(설) -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자)
[본문 판독 및 직역]
十一月二十二일(11월 22일) 월요일(星期一), 기후: 맑음(晴), 온도: 따뜻함(溫)
朝(아침): 처칠(丘吉爾, 구길아) 수상 측의 정치(政治), 경제(經濟) 등 제안(提案)을 심핵(審核, 검토)하고 아울러 아프리카(非洲) 지도를 연구(硏讀)하였다.
午(정오): 루스벨트(羅斯福, 나사복) 대통령과 처음으로 만났으며(初次見面), 약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루(羅)는 웃으며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와 내 아내(宋美齡, 송미령)는 평시와 같이 대답하였다. 루(羅)는 특히 "당신은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가?"라고 물었다.
아내(余妻, 송미령)가 대답하기를, "당신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느꼈으며, 당신이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友好)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니 루(羅)가 매우 기뻐하며 웃었다.
오후(下午): 아내와 함께 루(羅)의 거처를 방문하여 다시 회담하였다. 루(羅)는 전후(戰後) 일본(日本)의 처리 문제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유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茶會(다회, 차 모임): 루(羅) 대통령 및 처칠(丘吉爾, 구길아) 수상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회담의 분위기는 매우 융합(融合)되었고 성공적(成功)이었다.
晚(만, 저녁): 아내와 함께 루(羅)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였다. 영국(英國)과 미국(美國)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였으며, 프로그램(程序)과 예절이 매우 엄격하고도 성대하였다.
중국(中國)의 지위(地位)에 관하여 제안(提案)한 바가 많았으며, 루(羅)는 이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대부분 수용(接受)하였다. 특히 영(英), 미(美)와 함께 아국(我國)의 지위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문제에 대하여 큰 진전이 있었다.
오늘 하루의 활동은 매우 바빴으나(甚忙), 외교적으로 아국의 위상을 높이는 큰 기회가 되었다.
[맨 왼쪽 줄]
이번 회차의 회의(會議)는 영국(英國)과 미국(美國)의 배합(配合)이 긴밀하며, 그 일정(日程)과 방식(方式)은 모두 질서(秩序)가 있다. 다만 아국(我國)이 이에 대응함에 있어 더욱 신중(愼重)하고 자강(自强)해야 할 것이다.

1943년 11월 23일 (화요일)
절기: 소설(小雪) | 날씨: 맑음 | 민국 32년
[상단 경구: 수양록]
"말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되며(言語不可不謹), 거칠고 무례해서는 안 된다. 실수가 없도록 스스로를 단속하고 구속해야 한다."
[제요(提要): 주요 핵심]
오늘 아침 과업은 **당사(黨史)**와 **건국대강(建國大綱)**을 초록하는 것이었다. 제안된 사항이 비록 불합리하더라도 결코 비웃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특히 군관 파견 지휘 문제와 **중·미 연군(中美 聯軍)**에 관한 조항은 더욱 상세히 검토해야 한다.
[일과 상세 내용]
처칠(丘)과의 회의 및 태도: 처칠(丘)이 해군 문제 등에 대해 강경하게 의견을 내놓을 때, 설령 그것이 가볍거나 부당하게 느껴지더라도 조롱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회의 중 그가 고의로 방해하거나 상륙 회의 등에서 불손한 태도를 보일지라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오후 1시경 회의 종료 후 해군·육군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 신중함을 유지했다.
영국 측 초안(카도건 안) 검토: 카도건(賈德干, 가덕간) 등이 이미 묵인하거나 합의한 의사(영국 측이 미리 작성해온 선언문 초안 등)를 표시했으나, 나는 여전히 그 내용이 온당치 않다고 느꼈다. 이에 오후에는 제안된 초안 내용을 다시 연구하고 중요 지점들을 스스로 수정 및 보충하였다.
프랑스 청년 접견 및 번역 교정: 오후에 프랑스 청년(法靑)을 접견하였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나는 그와 함께 영문 및 중·영 번역본을 대조하며 문구를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이 꽤 까다롭고 곤란한 지점이 많았으나 차례대로 정리해 나갔다.
저녁 및 밤 일정: 오후 7시부터 다시 업무와 접견이 시작되어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11시가 넘어서야 공적인 방문(公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심야의 회고: 깊은 밤 돌아와 최근 며칠간의 일들을 돌이켜보니 국가 간의 관계에서 **국가주의(國家主義)**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절감한다. 적국(일본)에 대항하여 우리나라의 입지를 세우는 정략(政略)이 이미 실행 단계에 도달했는데, 그 결과가 성공하여 억눌린 세계 인류에게 보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상단 기록]
提요(提요): 恥(치)
[본문 판독 및 직역]
十一月二十四일(11월 24일) 수요일(星期三), 기후: 맑음(晴), 온도: 따뜻함(溫)
"昨(작) 午後(오후) 루스벨트(羅, 라)와 會談(회담)하여 我(아) 中國(중국)의 態度(태도)를 詳述(상술)하였는데, 度量(도량)이 넓고 誠實(성실)하여 人本色(인본색)이라 할 만하다."
"日本(일본)이 侵略(침략)하여 占領(점령)한 中國(중국) 領土(영토), 卽(즉) 東北四省(동북사성)과 臺灣(대만)·澎湖群島(팽호군도)는 모두 中國(중국)에 返還(반환)하고, 朝鮮(조선)은 自由(자유)와 獨立(독립)을 시키기로 하였다."
"미국(美, 미)은 이에 대하여 全面(전면) 同意(동의)하였고, 영국(英, 영) 역시 나의 提案(제안)에 대하여 反對(반대)하지 못하고 贊成(찬성)하기에 이르렀다."
[마셜과의 군사 협의]
마셜(馬歇爾)과는 군사(軍事)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는 아국의 공군 원조와 보급 등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특히 면전(緬甸, 버마) 작전의 중요성에 대하여 깊이 논의하였다. 마셜은 아국 전장의 곤란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력을 약속하였다.
[오후 일정]
오후(下午): 회담장에서 루스벨트 부인(夫人)과 차를 나누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화합하고 즐거웠다(歡愉).
[저녁 및 영국 측 초안 검토]
晩(만, 저녁): 왕충후이가 공동 성명의 초안(草案)을 가져와 교부(交付)하였다.
여(余)는 그 초안을 세밀히 열람(閱)하였는데, 영국 측(처칠)이 아국의 제안에 대하여 불심동의(不甚同意, 심히 동의하지 않음)하거나 자구(字句)를 수정하여 그 의미를 약화시키려 한 흔적이 있었다.
비록 일부 자구의 수정은 있었으나, 조선의 독립 지위와 영토 수복의 핵심 내용이 성명서 중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認)하고 이에 동의하였다.
[평가]
이는 아국 외교의 실질적 성공이며 고금 미증유(未曾有)의 결과라 할 것이다. 영·미와 평등한 지위에서 대사(大事)를 결정지었음에 의의를 둔다.
[맨 왼쪽 줄]
성취한 바가 크다 해도(此外交付成功也), 만약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不自我努力) 이는 곧 일지공문(一紙空文, 한 장의 빈 종이)이 될 뿐이니, 마땅히 자강(自强)하고 자면(自勉)하여 그 끝을 맺어야(以慴其末) 한다.

[상단 기록]
提요(提요): 恥(치)
[본문 판독 및 직역]
十一月二十五일(11월 25일) 목요일(星期四), 기후: 맑음(晴), 온도: 따뜻함(溫)
昨晩(작만, 어젯밤): 루(羅,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처에서 만찬을 가졌다. 전후(戰後) 면전(緬甸, 버마) 작전 및 해군(海軍)의 각종 함선 투입 수치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해군 상륙 작전 논의와 영국의 태도]
면전(버마) 해군 상륙 작전 시기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으나, 처칠(丘)은 본래 내년 3월(三月) 사이에 실천하기로 한 약속을 견지하지 않고 지연시키려 하였다.
영국의 해군 참모들은 지도실(地圖室)에서 지도를 살피며 전후방의 해상 작전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거구(巨, 큰 함대)의 투입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처칠(丘)의 언행과 태도는 여전히 제국주의적(帝國主義) 속성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자국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작전을 미루려는 의도가 보였다.
[장제스의 비판과 통찰]
영국인은 전형적인 정치적 실리주의자들로, 아국(我國)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다. 정신적(精神) 혹은 도의적인 면에서 그들의 편협함과 자사(自私, 이기심)는 실로 통탄할 만하다.
처칠(丘)은 루(羅,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아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하며, 이는 일종의 비열한 수단(浮滑)이다.
[오후 일정]
下午(오후): 아침 일과를 마친 후, 이든(伊頓, 안소니 이든) 외무장관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였다. 그는 전후 유럽과 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반성과 다짐]
밤(夜): 해군 상륙 작전 시기가 다시 불투명해진 것에 대해 보충(補救)할 대책을 고심하였다. 지상의 원정군(遠征軍)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타국의 도움은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不自我努力).
[맨 왼쪽 줄]
대내외적인 선전 강요를 준비함에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자강(自强)하지 못하면 외교적 합의는 일지공문(一紙空文)에 불과할 뿐이다. 오직 자면(自勉)하여 실력을 길러야 한다.

[상단 기록]
提요(提요): 恥(치) / 雪(설)
[본문 판독 및 직역]
十一月二十六일(11월 26일) 금요일(星期五), 기후: 맑음(晴), 온도: 따뜻함(溫)
昨(작, 어제): 루스벨트(羅) 대통령과 회담을 마쳤다. 여(余)는 루(羅)에게 정치 방면의 요점(要點)을 수 차례 언급하였으며, 루(羅)는 이를 경청하고 대부분 동의하였다.
朝(아침):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하여 루(羅)에게 전달하였다. 특히 중·미(中美) 간의 정치위원회(政治委員會) 설치와 태국(泰國) 및 인도차이나(安南, 안남)의 독립 문제 등 전후 동북아 질서에 관한 아국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루(羅)는 아국의 의견을 중시하며 적극적인 공감을 표하였다.
午(정오): 루스벨트(羅) 대통령과 다시 만나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루(羅)는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우리는 이제 오랜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아내(余妻, 송미령) 또한 함께 배석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었으며, 루(羅)는 떠나는 우리에게 거듭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군사 및 전략 논의]
오후(下午): 마셜(馬歇爾) 장군 및 영·미(英美) 군사 지도자들과 면전(緬甸, 버마) 상륙 작전의 시기와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몽파돈(蒙巴頓, 마운트배튼)은 해군력의 투입 시기와 작전 범위를 두고 고심하였으나, 여(余)는 지상군과의 긴밀한 배합(配合)과 조속한 반격만이 승리의 관건임을 역설하였다.
[회담의 마무리와 소회]
晚(저녁): 카이로에서의 공식적인 회담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이번 회담을 통해 아국의 국제적 지위가 확립되었으며, 잃어버린 영토의 수복과 약소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이는 고금(古今) 미증유의 성과이다.
[영국의 태도에 대한 통찰]
영국(英國)은 중국이 강대국(强國)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사사건건 견제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이러한 영국의 태도는 실로 사람을 통분하게(痛心, 통심) 하나, 우리는 오직 실력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밤(夜): 일과를 마치고 침소에 들었으나 마음이 차분하지 못하다. 외교적 승리 뒤에 실질적인 군사 작전과 내정의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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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담의 성공은 오직 자강(自强)의 결과여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모든 합의는 일지공문(一紙空文, 한 장의 빈 종이)에 불과할 것이다. 오직 자면(自勉)하고 자책하며 앞날을 준비해야 한다.
카도건 일기 해당기간 전체


끝의 시작
1943년 11월
월요일, 11월 22일
레바논 문제가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었다—어제 오후에 내각 회의까지 열렸다. 카트루는 우리의 요구 중 4분의 3을 수용했고, 따라서 수요일 아침까지의 최후통첩은 유지될 수 없을 것 같다. 즉, 우리의 마지막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진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A로부터 메시지가 왔는데, 날씨 때문에 내일이나 모레 비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밤 출발! 오후 5시 30분 내각 회의—그리스와 레바논. 내각은 전자에 대해 A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했다. 후자에 대해서는 총리에게 보낼 전보 초안을 작성했다.
[카도건과 이든은 11월 23일 새벽에 리버레이터기를 타고 라인햄을 떠나 지브롤터를 경유해 다음 날 카이로에 도착했다.]
목요일, 11월 25일
카이로
오전 10시 30분, A와 나는 총리에게 인사를 드리러 별장으로 향했다. 나는 계속해서 대통령 별장에 있는 해리 홉킨스를 만나러 갔다. 그는 전날 밤 왕충후이에게 전달했던 공동성명 초안을 내게 보여주었다. 문장은 형편없었지만 내용은 괜찮아 보였다. 정오에는 정원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많은 인파—영미 주요 인사들과 몇몇 중국인들. 장제스 부부를 만나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괜찮아 보였고, 매우 세련되게 차려입었다—흰색 재킷에 아름다운 루비 브로치, 옥과 진주 귀걸이. 장제스는 다소 작고 마른 모습이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나는 공동성명에서 심각한 결함과 누락을 발견했고, A에게 수정안을 넘겨 대통령과의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 가져가도록 했다.
[카도건은 이후 핼리팩스에게 미국인들이 공동성명 문제에서 ‘꽤 무례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후 대부분을 수정 사항을 논의하는 데 보내야 했고, 왕 박사의 “나는 원래 문장이 더 좋습니다”라는 말에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왕 박사님. 하지만 제 요점은 제가 그 문장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은 주로 군사 문제를 다뤘다. 회담 초반부터 장제스 총통이 참석했고, 중국 관련 사안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차지했다. 루스벨트는 벵골만을 통한 조기 작전이라는 무모한 약속을 장제스에게 했고, 처칠은 결국 이를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영국이 기대했던 미국과의 밀접한 회의는 크게 방해받았고, 미국 측과의 어려움은 공동성명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1월 25일 이든과의 점심 자리에서 처칠은 진전이 거의 없다고 고백했다. 루스벨트는 ‘매력적인 시골 신사’였다.
업무 방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총리는 따라서 기회를 포착하며 궁정 신하 같은 낯선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카이로에서의 이 며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느껴졌던 불안한 경향들을 드러냈다: 장제스의 중요성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우스꽝스러울 정도였고, 영국의 의도에 대한 의심은 커져갔으며,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다. 영국의 관점에서 보면 회담 시점은 거의 최악이었다. 극동에서의 입지는 거의 바닥이었고, 코스와 레로스는 막 함락되었으며, 이탈리아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총리는 많은 것을 너그럽게 견뎌야 했고, 대통령으로부터 다른 강대국들의 더 높은 도덕성에 대한 설명까지 들어야 했다.
“윈스턴, 당신은 400년간 축적된 탐욕의 본능을 피 속에 지니고 있어서, 어떤 나라가 땅을 얻을 수 있어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당신은 이에 적응해야 하오.”
러시아가 일본과의 중립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며 장제스와의 회담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몰로토프와 러시아 군사 대표를 카이로에 초청하려 했던 주장은 무산되었다.
금요일, 11월 26일
카이로
해리먼이 오전 11시 30분쯤 도착했다. 당연히 내가 공동성명에 넣은 수정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오후 3시 30분에 대통령 별장에 갔다 (공동성명 관련). 오후 4시 15분에 A가 합류했다. 그가 막 도착했을 때, 총리가 자신의 새롭고 수정된 버전을 보내왔고, 그것이 우리의 문제를 대체로 해결해 주었다. 우리는 그 버전을 받아들였다. 그 후 총리, 대통령, 장제스 부부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 잠시 담소를 나눴다. 나는 왕을 통해 장제스와 예의를 주고받았다. 장제스는 매우 우아하고 친절했다...
총리와 사라 처칠이 저녁 식사에 왔다. 소규모 모임—우리 포함 약 여덟 명. 총리는 저녁 8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테이블 전체에 이야기했고, 그 후 나와 A, 마일스 램슨과 함께 11시 30분부터 1시 35분까지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목이 쉰 것을 놀라워했다!
토요일, 11월 27일
테헤란
오후 1시(현지 시간 2시 30분)에 테헤란에 도착... A와 위넌트를 만났다. 총리는 완전히 목소리를 잃었고 (당연히), 세 정상의 저녁 식사는 취소되었으며, 모두 따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총리는 침대에 있음). 해리 홉킨스가 와서 이야기를 나눴다. 홀먼 부부 집에서 저녁 식사.* 아치 커는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A. 홀먼, 테헤란 주재 영국 공사관 참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