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는가?
— 한정된 재화, 우선순위 이동, 그리고 기회의 소멸
Ⅰ. 서론
“돈만 있으면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자연스럽다.
소득이 늘어나면 선택지는 넓어지고, 일상의 불편은 줄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돈을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른 감각을 경험한다.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예전에는 가능했던 선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
문제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돈이 충분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기회’가 보장되는가라는 지점에 있다.
돈은 선택지를 늘려줄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을 실제로 실행할 차례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이 글은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그 생각이 어디까지 유효하며,
어디서부터 구조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한정된 재화와 기회의 구조
시장에서 변하지 않는 전제는 명확하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한정되어 있으며,
특히 ‘잘 산다’는 개념과 연결된 것일수록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 어렵다.
주거, 의료, 교육, 돌봄, 양질의 서비스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 숙련, 공간, 신뢰가 함께 투입된다.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공급이 확대되지 않는 이유다.
따라서 소득이 증가하면 모두의 접근성이 함께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구조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2. 돈이 많아졌을 때 먼저 일어나는 변화
소득이 증가하면 수요는 즉각 반응한다.
이때 많은 논의는 곧바로 가격 인상으로 사고를 건너뛰지만,
현실에서는 가격보다 앞서 더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공급이 제한된 상태에서 수요가 늘어나면,
선택의 기준은 가격이 아니라 사람으로 이동한다.
같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면 판매자는
불확실성이 낮고, 관계가 있으며,
향후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우선한다.
이 과정에서 돈은 여전히 필요조건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돈이 있어도 기회가 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3. 재정적 여유가 만든 소비의 정상화와 선점
(일상적 사례: 서비스 시장)
소비자 측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소득이 부족하던 시기에는 이용 빈도를 줄이고
가능한 한 버티는 소비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 소비의 기준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이때의 변화는 과소비가 아니라,
그동안 미뤄졌던 정상적인 이용 주기로의 복귀다.
미용실 사례를 보자.
형편이 빠듯할 때는 두 달에 한 번 방문하던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미용실에서 권하는 한 달 주기로 이동한다.
이는 사치가 아니라 관리와 만족을 회복하는 합리적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개인 단위에서는 정상적이지만,
다수에게 동시에 발생하면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약은 빠르게 밀리고,
미용실은 손님이 늘었다고 해서
즉시 디자이너를 늘리거나 공간을 확장할 수 없다.
숙련된 노동과 시간은 단기간에 증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은 분명하다.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먼저 사라진다.
4. 경쟁 기준 이동의 장기적 사례
(제도적 사례: 대학과 노동시장)
이와 동일한 구조는 교육과 노동시장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의 보편화다.
과거에는 대학 입학 자체가 강력한 선별 장치였고,
입학과 동시에 경쟁은 상당 부분 종료되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률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입학은 더 이상 차별화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 변화 이후 많은 청년들은 이렇게 질문했다.
“나는 능력이 충분한데, 왜 기업은 나를 선택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는 중요한 오해가 담겨 있다.
기업의 선택은 능력의 절대량을 평가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정된 기회를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보편화되자 경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 기준이 이동했다.
어학연수, 자격증, 대외활동으로 이동했고,
이마저 보편화되자
자기소개서의 비중은 낮아지고,
결국 경험과 이력, 즉 기회 접근의 흔적이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수시채용과 경력자 중심 채용이 확산되었다.
문제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증명할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는가였다.
이는 경쟁을 없애겠다는 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의 기준만 더 길고 복잡한 형태로 이동시킨 사례다.
5. 구조적 정리: 다른 경로, 같은 귀결
정리하면 두 가지 경로가 존재한다.
첫째, 경쟁의 기준이 돈에서 그 다음 우선순위로 이동하면서
돈이 있어도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다.
둘째, 재정적 여유가 만든 정상화된 소비가 누적되면서
다른 사람이 먼저 이용해 버려
기회 자체가 소진되는 경우다.
영역은 다르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돈은 구매 능력을 제공하지만,
구매하거나 이용할 기회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Ⅲ. 결론
돈은 분명 삶을 편하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돈이 충분해진 이후의 사회에서는
문제가 단순한 소비 능력에 머물지 않는다.
한정된 재화와 서비스,
늘릴 수 없는 시간과 숙련이 존재하는 한,
돈이 있어도 잘 살고 편리한 삶을 유지하게 하는 재화를
지속적으로 이용할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이 충분히 누적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격의 인상이 나타난다.
가격 인상은 문제의 출발점이 아니라,
이미 기회가 포화된 상태에서
공급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최적화 수단이다.
미용실의 입장에서 가격을 올리는 이유는
손님이 줄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만큼 이미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가격은 더 많은 사람에게 팔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누구에게 팔지 않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돈이 충분해진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잘 살기 위한 선택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가?
Ⅳ. 보조 논의: 기술에 대한 기대와 역사적 한계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이
이러한 제약을 대신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술이나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곧 다수의 자유로 이어진 적은 많지 않았다.
중세 사회에는 수많은 노예와 하인이 존재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여유와 자유를 누린 것은
극소수의 귀족 계층이었다.
노동의 자동화 여부가 아니라,
그 성과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가
자유의 범위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Ⅴ. 부록: 추가적으로 생각해볼 것
돈이 충분해진 이후에도 접근할 수 없는 재화와 서비스는 무엇이며,
그 접근권은 어떤 기준으로 배분되고 있는가?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나 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경쟁의 기준을 만들어낸 사례는 없는가?기술과 자동화로 절약된 시간과 여유는
실제로 누구에게 귀속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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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이 갖는 어리석음이 바로 돈만 더 있다면 하는 가정이다.
돈 더 있으면 머하나? 니들에겐 소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