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내각은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반할 뿐 아니라 을미사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에 유리하게 처리했다는 의혹까지 얻게 되었고[22] 김홍집의 운명도 대략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 박았다고 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되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24]과 법부대신 장박[25]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체포 및 처단을 명령한다. 친러 정권은 즉각적으로 의병과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하였고 경복궁에 경관들을 배치하였는데 일본 군인들은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을 호위하였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몰매 맞고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뿌리쳤다.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이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혀[26] 정병하[27]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고종이 동원한 지방에서 올라온 보부상[28]들에게 몰매 맞은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에 끝내지 않고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 ~ 종로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29]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연좌제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김홍집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한 것이다.


요약:미개한 조선인개돼지들을 위해서 뼈를 갈아가며 개혁하려다가 을미사변으로 인해 오해받아서 멍석말이로 난도질당함....

참 안타까운 분이고 이러니 조선인들은 예나 지금이라 변함이 없다는걸 알겠더라

조선인들은 무조건 거르는게 맞다. 탈조나 탕핑이 정답인듯....

그와중에 피신시켜주려는 갓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