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은 피부 위의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행위다. 일본의 세계 챔피언 '이오카 카즈토'가 왼팔에 문신을 새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이걸 새기면 도망칠 수 없다”고 말했다. 복귀를 앞두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몸에 박아 넣은 것이다. 문제는 그 결심이 일본 사회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시각’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일본 권투위원회 JBC 규정에는 문신이 관객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출전을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파운데이션과 테이핑으로 문신을 가린 채 링에 올랐다. 형식은 지켰지만, 본질은 가려지지 않았다. 세계 챔피언도 문신을 숨겨야 하는 나라, 그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이 장면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권투 무대에서 문신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 영국, 유럽에서는 문신이 규제 대상이 아니다. 좌반신 전체에 문신을 새긴 우크라이나의 챔피언 '바실 로마첸코'는 어디서도 문제 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문신이 예술과 결합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패션의 일부다. 격투 스포츠에서 문신 없는 선수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시대다.

그런데 일본, 한국, 중국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만은 여전히 문신을 ‘반사회성’의 잔재로 본다. 특히 일본에서는 야쿠자의 이미지가 문신 전체를 오염시켰다. 그 결과 경찰·자위대·군대·공무원 채용에서 문신은 배제 사유가 되었고, 스포츠에서도 ‘건전성’이라는 이름으로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목욕탕에도 입욕이 금지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데 있다. 외국 선수는 문신을 드러낸 채 일본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다. 일본 선수만 안 된다. 세계 챔피언은 필요하지만, 일본인이 그 세계 기준을 몸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국내 전국체육대회 헤비급 준결승 링 위에서 이레즈미 문신을한 선수가 출전했다. 군청 소속, 즉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조직의 선수가 팔을 뒤덮은 이레즈미를 드러낸 채 경기에 나선거다. 이건 개인 체육관의 프로 시합도, 해외 무대도 아니다. 공공 기관의 이름을 달고, 학생과 시민이 함께 지켜보는 전국체전 무대였다. 그 장면을 보고 느낀 감정은 황당함과 당혹감이었다. 문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필자는 문신을 범죄나 폭력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세계 스포츠에서 문신은 각오이자 선택이고, 때로는 패션이다. 그러나 공공의 이름을 달았을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개인의 자유와 공공이 요구하는 절제는 같은 선에 놓일 수 없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소속이라면, 그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더 불편한 지점은 선수 개인이 아니라 관리 주체다. 소속 기관은 사전에 무엇을 점검했고, 경기단체는 어떤 기준으로 출전을 허용했는지 묻지 않을수 없다. 규정이 없어서인지, 있어도 적용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괜찮다”는 막연한 판단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서는 되니 국내에서도 된다는 논리는 가장 쉬운 변명이다. 해외 프로와 국내 공공 소속 아마추어는 출발선이 다르다.
이 문제의 본질은 문신 찬반이 아니다. 아직 사회적 합의가 끝나지 않은 상징을 공공 스포츠의 얼굴에 올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아마추어 복싱은 주먹의 속도와 기술, 체력과 정신력을 보러 오는 곳이지 피부 위의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문신이 논란이 될 때,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제도와 기준을 만든 쪽에 있다.

문신은 한 번 새기면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제도와 인식은 바꿀 수 있다. 문제는 늘 그 순서다. 사회가 변하기 전에 개인이 먼저 감당해야 하는 비용, 그리고 그 비용을 아무 설명 없이 개인에게 떠넘기는 구조. 이오카 카즈토의 문신 논란도, 전국체전 링 위의 이레즈미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대표하게 할 것인가. 이 논의를 회피하는 한, 논란은 반복되고 책임은 늘 엉뚱한 개인에게만 돌아갈 것이다.
!!?ᆢ군청소속 선수가 깡패야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