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31일 경주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뉴시스
중국은 일본의 단순한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판정승’을 통해 전방위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군사 개입’ 시사 발언 이후 중국 외교 라인은 자국을 방문한 프랑스·독일 외무장관에게 지지를 요청했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잇달아 서한을 보냈다.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일본을 ‘단죄’하여 향후 대만 문제에서 일본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미·일 안보 협력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갈등 국면에서 일본을 겨냥한 초강력 경제 제재 대신 문서와 규범을 전면에 내세웠다. 먼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을 근거로 일본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에 담긴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했다. 나아가 일본의 대만 포기를 규정한 포츠담 선언(1945년)을 끌어와 ‘대만 귀속’ 문제가 이미 정리됐다고 해석했다. 마지막으로 유엔 헌장을 근거로 다카이치의 발언을 ‘무력 위협’으로 규정하며 국제법 위반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중국 외교부가 오래된 문서들을 줄줄이 소환한 이유는 일본이 건드린 대만 문제를 ‘전후(戰後) 국제질서’를 흔드는 문제로 격상하기 위해서다. 이 구도가 성립되면 일본은 단순히 중국을 자극한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흔드는 ‘위험 국가’가 된다.
중국이 ‘패전국 일본의 재무장’이란 프레임을 내세우며 공세를 강화하면, 미·일 동맹의 안보 협력은 방어적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대만 유사시 일본이 미국을 군사 지원하는 데 따르는 부담도 커진다. 대만 안보가 치명타를 입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만일 다카이치가 중국 요구대로 발언을 철회하거나 사과할 경우엔 중국이 강력한 외교 카드를 손에 넣게 된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정당성 확보가 중요한 만큼, 중국의 대(對)일본 경제 보복 수위는 오히려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2010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 당시엔 일본을 굴복시키려고 희토류 수출 제한이란 카드를 성급하게 꺼내 들었고, ‘자원 무기화’란 국제사회 비판에 직면하며 체면만 잃었다. 중국이 일본과의 갈등으로 얻는 부수적인 이득도 있다. 코로나 봉쇄 해제 이후 ‘일본 관광 열풍’으로 발생한 국부(國富) 유출을 막고, 내수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중국이 구상하는 큰 그림 속에 한국이 포함되는 불편한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중·일 갈등은 더 이상 양국 분쟁이 아니라, 중국이 새로운 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시도로 진화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이 한국을 ‘판정석’에 앉히려는 압박이 더 커질 것이다. 타국과의 갈등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며 ‘규범’을 세우려는 중국의 새로운 외교 자세가 한중 관계에 미칠 영향도 미리 인지하고 대비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