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객 : 정 문
논갹넷 2025 12 13
알라신을 위한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양육 된 성기발랄한 청년은 마약을 먹고
가슴큰 미녀의 수발을 받으며 꿈 같은 여러 밤을 지샌다.
그리고 어느날 나타난 종교 지도자는 청년을 향해 너가 지하드(성전)을 위해 폭탄을 안고 죽으면 천국에 가서 신의
시중을 드는 천사가 너를 맞이하고 천사와 함께 사는 것처럼 세뇌를 하며
지난밤 너의 수발을 들었던 똑 같은 72명의 가슴 큰 미녀의 수발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유혹 한다.
폭탄을 안은 청년은 72명의 가슴 큰 미인이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뇌관을 누른다.
전투기 기름 탱크에는 절반의 연료만 채워졌다,
작전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신(현인신, 現人神) 천황이 내려준 정종 한잔을 들이키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전투기 조종간을 당겨
술기운에 의지하여 바다에 떠있는 항공모함으로 돌진한다.
수십센티의 철판으로 장갑된 갑판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고 죽어가는 어리석은 인간은 현인신을 위해 죽음으로서
신으로 환생하게 하는 저승의 출구를 찾는 관념의 바다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태평양 전쟁 말기 극단의 광기로 미쳐 있는 제국주의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광기에 미친 인간이 어디까지 또라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밥먹고 똥싸는 한 명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천황을 신으로 믿게 만든 군국주의 망령은 이토록 무서웠다.
그 어떤 논리와 이유를 앞세우더라도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 되는 자살폭탄테러범”과
“천황의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내리 꽃는 가미가제 특공대”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악이며 통제할 수 없는 광기의 향연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5절)”
세상의 선과 악의 판단 즉 창조주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창조물의 이름을 짓게 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지상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했고,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는 하늘의 권력까지 탐했다.
그것이 에덴 동산의 선악과 사건이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의 의지를 배제한 통치의 욕망이다.
그것은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일탈이 아니라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피조물의 배반이다.
권력의 본질은 무엇일까?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처분권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에 부수하는 파생권일 것 같다.
처분권 이전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 되는 지를 정하는 판단권이 우선할 것 같으며
그것이 권력의 본질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사람 셋만 모이면 옭고 그름을 따져 편이 갈리는 것 같다.
그 판단하는 권능이 권력의 본질이며 나머지는 권력이 아닌 권한이라는 권력의 종물(從物)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를 망론하고 옭고 그름을 따지려 하는 훈장질에 열심이다.
그러나 그 훈장질은 자기의(自己義)에 빠진 정신승리 자위질일 뿐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었다.
창조주가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선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함이었고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를 알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취한 것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력이 탐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갈 것을 허락했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땀흘리며 먹을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그토록 은혜로운 창조주는 어찌하여 선악과를 만들어 죄악에 빠지게 만들었냐고 따진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달라야 하며 구분 되어야 한다.
선악과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이다.
그 경계선을 넘은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며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죄악이다.
물리적으로 가정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되거나 넘어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되어 복종하라면 또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와 지위를 행사하겠다면
그것을 들어줄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는 그 경계가 선악과이다.
많은 시간을 기도를 한다.
그 기도를 새김질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다. 순종하는 마음과 주께 맡기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한다.
판단할 수 있는 권력은 인간이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다.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왕으로서 판단하는 권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사 백성을 재판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
모든 신의 본질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권능을 본질로 하고 있다
. 번뇌를 끊으라는 부처가 그러했고, 알라가 그러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이 되고 싶어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여 심판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춘 적이 없다,
그 욕망의 본질은 선악을 판단하는 권능에서 시작 된다.
그 욕망의 용광로에 성냥불을 그어 된 것이 “자살폭탄테러”이며 “가미가제 특공대”이다.
똥싸고 밥먹는 주제에 현실에 살아 있는 초월의 신(神)으로 군림한 것이 히로히토이다.
히로히토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며 선악을 판단하며 일본을 군국주의 망령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태평양 전쟁의 본질이다.
싸구려 술 한잔을 내림으로서 항공모함을 향해 돌진하는 제로센 폭격기 그것이 태평양 전쟁의 실체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통찰하며 꿰뚤어 본 유일한 인물이 국부 이승만이다.
1185년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막부 권력이 탄생 되었으며 사무라이가 권력의 전면부로 부상하며
일본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어진 역사가 무력을 앞세워 막부의 칼로 천황을 위협하며 막부가 권력을 독점한 것이이 막부시대이다.
전장에서 장수는 임시 천막을 치고 전선을 지휘한다.
그 천막 지휘소를 막부(幕府)라 불렀다.
그 막부는 거대한 궁궐에 들어 앉았음에도 굳이 막부로 호칭한 것은 나는 언제든 칼을 차고 뛰쳐 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며
권력의 정당성은 칼찬 사무라이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권력의 정당성은 궁궐이 아니라 무력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쇼군이 궁궐에 거주하면서도 자신의 정권을 막부라 부른 것은, 이 권력이 본질적으로 무력에서 나왔음을 제도명으로
고정시키기 위함이었고, 그 결과 언제든 칼과 피에 의해 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와 긴장을 사회 전반에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칼찬 사무라이는 막부로 불려지는 것을 즐겼다.
다시말해 나는 칼로 천황의 권력을 빼앗은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수틀리면 언제든 칼을 들고 나서겠다는 경고였다.
전황에게는 24시간 365일 선전포고문을 띄우는 것이었다.
최소한 천년은 사무라이의 칼에 의해 지배 되는 세상 그것이 근세 직전까지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본의 역사이다.
사무라이는 칼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칼잽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닌자처럼 신출귀몰하고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바람을 가르며 철학을 사유하며 죽음을 초월한 고독한 검객이 아니다.
그 얼토당토 않는 사무라이 서사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저 주군이 내려주는 땅과 돈에 의해 존재하는 용병이었다.
그 용병에 선악의 판단은 필요치 않다. 얼마만큼의 재물이 주어지느냐가 권력이고 업적이었다.
그래서 쇼군에 복종하는 다이묘는 쇼군이 내려주는 재물의 양으로 즉 쌀 열가마니, 천가마니, 만가마니로 계급을 나누었고
가마니의 양은 동원할 수 있는 칼자루에 의해 정해졌다.
일본의 역사에서 사무라이는 단 한번도 천황을 위해 칼을 들고 충성한 적이 없다.
그래서 사무라이의 주인은 군주가 아닌 주군이다.
사무라이는 쇼균과 다이묘의 사냥개이다. 그것이 존재가치였다.
그런데 어느날 술한잔 걸치고 전투기를 타고 하늘로 솟구치는 사무라이 즉, 천황을 위해 항공모함으로 달려드는 충직한
부나방이 사무라이로 둔갑했다.
그 둔갑의 과정이 근대국가 일본의 건국이며 근대화의 과정이고 메이지 유신의 실체이다.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 그 딴 것은 없었다. 새빨갛게 날조 된 허구이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일어난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시작으로 100년간 사무라이의 칼과 칼이 만나 만든 역사가
사무라이의 전성기이다.
그 시대의 일부를 그린 소설 대망(大望)은 그 시대 사무라이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배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주군의 등 뒤에 칼을 꼽는 것은 사무라이의 본질이었다.
전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요한 사무라이의 물욕을 채워줄 수 없었다.
나누어줄 땅이 부족했다. 그 집요한 사무라이의 물욕을 채워줄 재물도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으로 중국으로 가면
너희가 누릴 영지가 넘처난다고 사무라이 물욕을 부추켰다. 그것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이었다.
배신과 뒤통수 치기로 얼룩진 피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배신의 DNA를 자르고 반란을 막기 위해
모든 영지의 사무라이 가족을 오사카에 모아 감시했다. 부인과 자식, 권력 승계자는 오사카에 붙들려 인질이 되어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몸에 밴 사무라이의 배신의 DNA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60여개의 지방정권 다이묘를 에도(동경)으로 불러들여 1년은
인질로 동경에서 살고 1년은 영지로 내려갸 다스리게 했다.
가족과 부인은 에도에서 인질로 사는 것 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에도시대의 번영을 이끈 참근교대(参勤交代 산킨코타이)이다.
사무라이의 세계는 그렇게 끊임없는 의심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사무라이 세계에서 배신과 반란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사무라이 문화가 가져다 준 특유의 권력 구조이며 이러한 구조는 필연적으로 상시적 위험이 상존하게 했다. 그래서 일본의 통치는 언제나 인질, 감시, 이동 통제를 핵심으로 설계되었다.
사무라이의 욕심은 직선적이다. 돈을 주면 움직이고 돈 떨어지면 등뒤에서 칼을 꼽는 어찌보면 개조선 개씹선비에 비해 담백한 면도 있다. 정신승리 자위질이 본질인 문치의 잔인함은 또 다르다.
한반도의 인본주의 또는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성리학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면 단연 이이와 이황이다.
율곡 이이는 정실 부인 곡산 노씨와의 사이에서 1명의 딸이 있었고, 첩 김씨를 두고 서자인 두 아들과 서녀인 두 딸을 두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돼지 발정기가 되면 씨돼지를 부리는 주인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접을 붙여 돼지를 임신시켜 번식시켰다.
당연 암돼지가 낳은 새끼는 암돼지의 주인의 몫이었다.
이황은 아들에게 돼지 교미 시키듯 노비를 교미시켜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집안 노비들을 양인과 혼인시켜 자식을 낳게 함으로써 돼지 종묘법과 같은 노비 종묘법을 이용하여 노비의 수를 늘리는
노비 번식법을 재테크 상품으로 개발하는 발군의 재산증식 실력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저런 지나가는 개 거시기에 들러 붙은 기생충만도 못한 주둥아리만 나불거리는 물건들이 부자유친과 선비의 안빈낙도를 가르쳤다.
칼이라는 실력행사도 힘에 의한 논리도 작동 되지 않는 주둥아리 정의로 뭉쳐진 개조선 개씹선비의 잔인함은 실력도
능력도 노력도 통하지 않는 견고하게 고착된 계급사회의 혹독함에 대중은 신음해야 했고
그 더럽디 더러운 개씹선비의 정신승리 자위질에 복종하며 살아야 했다.
칼질이라도 잘하면 출세의 길이 열리는 그래서 하급무사로서 쇼군까지 오른 토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탄생할 수 없는
어둠의 광기가 지배한 조선은 사무라이 배신의 문화에 비교 될 것이다.
최소한 개씹선비의 주둥아리질이 지배하는 경쟁이 원천적으로 차단 된 개조선 개씹선비 사회 보다는 사무라이 배신이
지배하는 그 사회가 나았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악을 결정하는 죄악은 같은 땅 한반도에서 지금도 끔찍하게 벌어지고 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나룻배를 만들어 두만강을 건너는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 되었고 주체사상이 되었다.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은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이 된다는 신정 군국주의를 넘어서 현존하는 인간의 악(惡)이
어디까지 저질러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사회적 영생”이다.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으로 다시 태어 난다는 그것보다 상위 호환 버전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개인은 수령을 중심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융합됨으로서 집단의 영원성으로 초월적 존재가 된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신으로의 환생과 같은 것이다.
유한한 새명을 가진 개인의 사회적 영생은 당과 수령에 절대 복종함으로서 조직 사상적으로 결속되고 현실에서
역사 내재적 구원을 통해 영원한 사회적 생명으로 재탄생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개인은 당과 수령의 영도 아래 하나의 사상의지로 뭉쳐 영원히 살아가는
사회적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이 사회적 영생이다.
즉 주체사상은 유한한 육신을 넘어선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광기가 북한을 어떠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지켜보고 있다.
일제의 신정 군국주의 사회가 이러했다. 그 문명의 돌연변이를 지켜보며 시대를 통찰한 국부 이승만의 혜안은
단군 이래 가장 뛰어난 지성의 불빛이며 죄악을 경계하는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정 군국주의를 해체한 맥아더는 가장 든든한 국부 이승만의 동지였으며 문명 수호의 일선에 섰던 전우였다.
그들의 전선은 공교롭게 신정 군국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이 함께 했다.
그들을 통해 문명 정상화의 코드를 읽어 내는 것 그것이 한반도의 미래를 갈음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가슴큰 미녀의 수발을 받으며 꿈 같은 여러 밤을 지샌다.
그리고 어느날 나타난 종교 지도자는 청년을 향해 너가 지하드(성전)을 위해 폭탄을 안고 죽으면 천국에 가서 신의
시중을 드는 천사가 너를 맞이하고 천사와 함께 사는 것처럼 세뇌를 하며
지난밤 너의 수발을 들었던 똑 같은 72명의 가슴 큰 미녀의 수발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유혹 한다.
폭탄을 안은 청년은 72명의 가슴 큰 미인이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뇌관을 누른다.
전투기 기름 탱크에는 절반의 연료만 채워졌다,
작전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신(현인신, 現人神) 천황이 내려준 정종 한잔을 들이키고 알딸딸한 정신으로 전투기 조종간을 당겨
술기운에 의지하여 바다에 떠있는 항공모함으로 돌진한다.
수십센티의 철판으로 장갑된 갑판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고 죽어가는 어리석은 인간은 현인신을 위해 죽음으로서
신으로 환생하게 하는 저승의 출구를 찾는 관념의 바다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태평양 전쟁 말기 극단의 광기로 미쳐 있는 제국주의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광기에 미친 인간이 어디까지 또라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밥먹고 똥싸는 한 명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천황을 신으로 믿게 만든 군국주의 망령은 이토록 무서웠다.
그 어떤 논리와 이유를 앞세우더라도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 되는 자살폭탄테러범”과
“천황의 이름으로 항공모함에 내리 꽃는 가미가제 특공대”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악이며 통제할 수 없는 광기의 향연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5절)”
세상의 선과 악의 판단 즉 창조주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창조물의 이름을 짓게 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지상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했고,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는 하늘의 권력까지 탐했다.
그것이 에덴 동산의 선악과 사건이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의 의지를 배제한 통치의 욕망이다.
그것은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일탈이 아니라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피조물의 배반이다.
권력의 본질은 무엇일까?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처분권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에 부수하는 파생권일 것 같다.
처분권 이전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 되는 지를 정하는 판단권이 우선할 것 같으며
그것이 권력의 본질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사람 셋만 모이면 옭고 그름을 따져 편이 갈리는 것 같다.
그 판단하는 권능이 권력의 본질이며 나머지는 권력이 아닌 권한이라는 권력의 종물(從物)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를 망론하고 옭고 그름을 따지려 하는 훈장질에 열심이다.
그러나 그 훈장질은 자기의(自己義)에 빠진 정신승리 자위질일 뿐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었다.
창조주가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선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함이었고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를 알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취한 것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력이 탐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갈 것을 허락했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땀흘리며 먹을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그토록 은혜로운 창조주는 어찌하여 선악과를 만들어 죄악에 빠지게 만들었냐고 따진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달라야 하며 구분 되어야 한다.
선악과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이다.
그 경계선을 넘은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며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죄악이다.
물리적으로 가정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되거나 넘어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되어 복종하라면 또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와 지위를 행사하겠다면
그것을 들어줄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는 그 경계가 선악과이다.
많은 시간을 기도를 한다.
그 기도를 새김질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다. 순종하는 마음과 주께 맡기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한다.
판단할 수 있는 권력은 인간이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다.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왕으로서 판단하는 권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사 백성을 재판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
모든 신의 본질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권능을 본질로 하고 있다
. 번뇌를 끊으라는 부처가 그러했고, 알라가 그러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이 되고 싶어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여 심판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춘 적이 없다,
그 욕망의 본질은 선악을 판단하는 권능에서 시작 된다.
그 욕망의 용광로에 성냥불을 그어 된 것이 “자살폭탄테러”이며 “가미가제 특공대”이다.
똥싸고 밥먹는 주제에 현실에 살아 있는 초월의 신(神)으로 군림한 것이 히로히토이다.
히로히토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며 선악을 판단하며 일본을 군국주의 망령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태평양 전쟁의 본질이다.
싸구려 술 한잔을 내림으로서 항공모함을 향해 돌진하는 제로센 폭격기 그것이 태평양 전쟁의 실체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통찰하며 꿰뚤어 본 유일한 인물이 국부 이승만이다.
1185년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막부 권력이 탄생 되었으며 사무라이가 권력의 전면부로 부상하며
일본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어진 역사가 무력을 앞세워 막부의 칼로 천황을 위협하며 막부가 권력을 독점한 것이이 막부시대이다.
전장에서 장수는 임시 천막을 치고 전선을 지휘한다.
그 천막 지휘소를 막부(幕府)라 불렀다.
그 막부는 거대한 궁궐에 들어 앉았음에도 굳이 막부로 호칭한 것은 나는 언제든 칼을 차고 뛰쳐 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며
권력의 정당성은 칼찬 사무라이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권력의 정당성은 궁궐이 아니라 무력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쇼군이 궁궐에 거주하면서도 자신의 정권을 막부라 부른 것은, 이 권력이 본질적으로 무력에서 나왔음을 제도명으로
고정시키기 위함이었고, 그 결과 언제든 칼과 피에 의해 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잠재적 공포와 긴장을 사회 전반에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칼찬 사무라이는 막부로 불려지는 것을 즐겼다.
다시말해 나는 칼로 천황의 권력을 빼앗은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수틀리면 언제든 칼을 들고 나서겠다는 경고였다.
전황에게는 24시간 365일 선전포고문을 띄우는 것이었다.
최소한 천년은 사무라이의 칼에 의해 지배 되는 세상 그것이 근세 직전까지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본의 역사이다.
사무라이는 칼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칼잽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닌자처럼 신출귀몰하고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바람을 가르며 철학을 사유하며 죽음을 초월한 고독한 검객이 아니다.
그 얼토당토 않는 사무라이 서사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저 주군이 내려주는 땅과 돈에 의해 존재하는 용병이었다.
그 용병에 선악의 판단은 필요치 않다. 얼마만큼의 재물이 주어지느냐가 권력이고 업적이었다.
그래서 쇼군에 복종하는 다이묘는 쇼군이 내려주는 재물의 양으로 즉 쌀 열가마니, 천가마니, 만가마니로 계급을 나누었고
가마니의 양은 동원할 수 있는 칼자루에 의해 정해졌다.
일본의 역사에서 사무라이는 단 한번도 천황을 위해 칼을 들고 충성한 적이 없다.
그래서 사무라이의 주인은 군주가 아닌 주군이다.
사무라이는 쇼균과 다이묘의 사냥개이다. 그것이 존재가치였다.
그런데 어느날 술한잔 걸치고 전투기를 타고 하늘로 솟구치는 사무라이 즉, 천황을 위해 항공모함으로 달려드는 충직한
부나방이 사무라이로 둔갑했다.
그 둔갑의 과정이 근대국가 일본의 건국이며 근대화의 과정이고 메이지 유신의 실체이다.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 그 딴 것은 없었다. 새빨갛게 날조 된 허구이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일어난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시작으로 100년간 사무라이의 칼과 칼이 만나 만든 역사가
사무라이의 전성기이다.
그 시대의 일부를 그린 소설 대망(大望)은 그 시대 사무라이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배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주군의 등 뒤에 칼을 꼽는 것은 사무라이의 본질이었다.
전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요한 사무라이의 물욕을 채워줄 수 없었다.
나누어줄 땅이 부족했다. 그 집요한 사무라이의 물욕을 채워줄 재물도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으로 중국으로 가면
너희가 누릴 영지가 넘처난다고 사무라이 물욕을 부추켰다. 그것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이었다.
배신과 뒤통수 치기로 얼룩진 피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배신의 DNA를 자르고 반란을 막기 위해
모든 영지의 사무라이 가족을 오사카에 모아 감시했다. 부인과 자식, 권력 승계자는 오사카에 붙들려 인질이 되어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몸에 밴 사무라이의 배신의 DNA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60여개의 지방정권 다이묘를 에도(동경)으로 불러들여 1년은
인질로 동경에서 살고 1년은 영지로 내려갸 다스리게 했다.
가족과 부인은 에도에서 인질로 사는 것 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에도시대의 번영을 이끈 참근교대(参勤交代 산킨코타이)이다.
사무라이의 세계는 그렇게 끊임없는 의심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사무라이 세계에서 배신과 반란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사무라이 문화가 가져다 준 특유의 권력 구조이며 이러한 구조는 필연적으로 상시적 위험이 상존하게 했다. 그래서 일본의 통치는 언제나 인질, 감시, 이동 통제를 핵심으로 설계되었다.
사무라이의 욕심은 직선적이다. 돈을 주면 움직이고 돈 떨어지면 등뒤에서 칼을 꼽는 어찌보면 개조선 개씹선비에 비해 담백한 면도 있다. 정신승리 자위질이 본질인 문치의 잔인함은 또 다르다.
한반도의 인본주의 또는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성리학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면 단연 이이와 이황이다.
율곡 이이는 정실 부인 곡산 노씨와의 사이에서 1명의 딸이 있었고, 첩 김씨를 두고 서자인 두 아들과 서녀인 두 딸을 두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돼지 발정기가 되면 씨돼지를 부리는 주인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접을 붙여 돼지를 임신시켜 번식시켰다.
당연 암돼지가 낳은 새끼는 암돼지의 주인의 몫이었다.
이황은 아들에게 돼지 교미 시키듯 노비를 교미시켜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집안 노비들을 양인과 혼인시켜 자식을 낳게 함으로써 돼지 종묘법과 같은 노비 종묘법을 이용하여 노비의 수를 늘리는
노비 번식법을 재테크 상품으로 개발하는 발군의 재산증식 실력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저런 지나가는 개 거시기에 들러 붙은 기생충만도 못한 주둥아리만 나불거리는 물건들이 부자유친과 선비의 안빈낙도를 가르쳤다.
칼이라는 실력행사도 힘에 의한 논리도 작동 되지 않는 주둥아리 정의로 뭉쳐진 개조선 개씹선비의 잔인함은 실력도
능력도 노력도 통하지 않는 견고하게 고착된 계급사회의 혹독함에 대중은 신음해야 했고
그 더럽디 더러운 개씹선비의 정신승리 자위질에 복종하며 살아야 했다.
칼질이라도 잘하면 출세의 길이 열리는 그래서 하급무사로서 쇼군까지 오른 토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탄생할 수 없는
어둠의 광기가 지배한 조선은 사무라이 배신의 문화에 비교 될 것이다.
최소한 개씹선비의 주둥아리질이 지배하는 경쟁이 원천적으로 차단 된 개조선 개씹선비 사회 보다는 사무라이 배신이
지배하는 그 사회가 나았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악을 결정하는 죄악은 같은 땅 한반도에서 지금도 끔찍하게 벌어지고 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나룻배를 만들어 두만강을 건너는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 되었고 주체사상이 되었다.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은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이 된다는 신정 군국주의를 넘어서 현존하는 인간의 악(惡)이
어디까지 저질러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사회적 영생”이다. 천황을 위해 죽으면 신으로 다시 태어 난다는 그것보다 상위 호환 버전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개인은 수령을 중심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융합됨으로서 집단의 영원성으로 초월적 존재가 된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신으로의 환생과 같은 것이다.
유한한 새명을 가진 개인의 사회적 영생은 당과 수령에 절대 복종함으로서 조직 사상적으로 결속되고 현실에서
역사 내재적 구원을 통해 영원한 사회적 생명으로 재탄생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개인은 당과 수령의 영도 아래 하나의 사상의지로 뭉쳐 영원히 살아가는
사회적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이 사회적 영생이다.
즉 주체사상은 유한한 육신을 넘어선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광기가 북한을 어떠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지켜보고 있다.
일제의 신정 군국주의 사회가 이러했다. 그 문명의 돌연변이를 지켜보며 시대를 통찰한 국부 이승만의 혜안은
단군 이래 가장 뛰어난 지성의 불빛이며 죄악을 경계하는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정 군국주의를 해체한 맥아더는 가장 든든한 국부 이승만의 동지였으며 문명 수호의 일선에 섰던 전우였다.
그들의 전선은 공교롭게 신정 군국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이 함께 했다.
그들을 통해 문명 정상화의 코드를 읽어 내는 것 그것이 한반도의 미래를 갈음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