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22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나스렉 엑스포센터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중 갈등에 이어 중·일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세계 주요국이 한국의 ‘입장’을 묻거나 한국의 행보를 의식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경제·문화적 성장으로 외교적 ‘체급’이 커진 한국 정부를 ‘캐스팅 보트’나 ‘참고 사례’로 여기며 주목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22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한-독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한국의 대중국 인식이 궁금하다. 독일은 현재 대중 전략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수 성향인 기독민주당(CDU) 소속인 메르츠 총리는 지난 5월 취임 이후 독일 기업이 과도하게 중국에 의존할 경우 공급망과 기술 보안 측면에서 취약할 수 있다며 ‘탈중국’ 움직임을 시도해 왔다. 이 대통령은 즉답을 피한 채 “독일이 먼저 간 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독일의 경험으로 배울 게 많이 있다”고 답했다. 미·중에 이어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이 한국에 대중국 전략을 묻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군사 개입 논쟁으로 격렬한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과 일본은 한국과 안정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17일 관영매체 기자로부터 독도 관련 질문을 받고 “일본의 최근 여러 가지 악성 언행은 주변국들의 경계심과 불만, 그리고 항의를 불러일으켰다”라며 사실상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을 내놨다. 중국은 그간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지역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중국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면서도 독도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해온 것과 대비되는 행보다.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 협력해 추진하는 핵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에 대해서도 과격한 대응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한·일 공조 강화 기조를 이어가는 모양새다. 지난달 말 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7일 일본 국회에서 이 대통령과의 첫 회담에 대해 “현 국제 정세 속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리더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 의원 시절 비판했던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한·일 갈등 요인을 피해가고 있다.
과거 시각으로 보면 주요국이 외교 현안과 관련해 한국의 입장을 직접 묻는 것은 다소 낯선 일이다. 한국은 주로 한반도 문제에 외교력을 집중해 왔고, 그 외 사안에서는 국제정치의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 세계 곳곳에서 갈등이 분출하는 가운데, 주요 10개국(G10) 수준의 체급을 갖춘 한국의 선택이 점점 더 무게를 얻게 됐다. 특히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다양한 다자·양자 외교 무대를 통해 외교 존재감이 커진 점도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국에 쏠리는 배경으로 꼽힌다.
앞으로는 동북아 문제뿐 아니라 더 다양한 외교 이슈에서 국제사회가 한국의 입장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가 특정 진영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재명 정부는 보다 중립적인 외교를 지향하고 있어, 한국의 ‘지지’를 받은 당사국은 상당한 정치적·외교적 힘을 얻게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은 “아펙 같은 국제회의를 한국이 리더십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미국이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자율성을 갖고 사안을 해결했기 때문에 한국 외교력이 커졌고 국제적 주목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선택에 실리는 무게만큼 책임도 커졌다. 어느 한쪽을 선택할 경우 반대 측의 강한 반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중·일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도 균형 있게 관리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중·일 갈등이 파국 직전까지 치닫는 상황에서 양국이 한국에 선택을 압박할 경우 외교적 난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으로서는 복잡한 외교적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국면에 놓인 셈이다.




